10년의 밀도
10년의 의미
작성자 조진경 게시일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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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밀도
 
장민혜 십대여성인권센터 운영위원장


2013년 5월 따뜻한 봄비가 내리는 날 십대여성인권센터가 개소식을 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1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10년 활동보고서>를 만든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벌써 10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꿈만 같습니다.

기억하기로는 화곡동 반지하에서 일을 시작하던 조진경 대표님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앞으로 10년 동안 무슨 일을 해야할지 알고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이미 그 전에 오랫동안 성매매 피해여성들을 위해서 일해 왔던 경험이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키가 된 듯 했습니다. 성매매 현장에 유입되는 피해여성들의 나이가 점점 어려진다고 걱정하며 절망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조진경 대표님의 절망은 그저 절망으로만 끝나지 않음을 경험상 알고 있기에 여러번 절망한 후 뭔가 일을 저지르겠구나! 짐작했습니다.

2013년부터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며 수많은 사람들과 단체들을 만나 설득하고, 관련 업무를 하는 공무원들에게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그러다가 절망하고 불같이 화가 나서 울분을 터뜨리고, 다시 설득하고 설명하고…. 그렇게 수많은 절망과 좌절들을 거듭하며 확신을 단단하게 만들어 갔습니다. 성착취 범죄에 노출된 아동·청소년들을 피해자로 보지 않고 성매매 범죄에 가담한 범죄자로 취급하는 ‘대상 아동·청소년’ 개념을 ‘피해 아동·청소년’으로 바꾸어야 한다며 끈질기게 외쳤습니다. 그 지난한 과정에서도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확신은 더욱 또렷하고 명료해졌습니다. 그것은 십대여성인권센터 문 앞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피해 아동·청소년, 그리고 그들의 부모님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겠지요.

피해 아동·청소년들은 자신들이 겪은 성착취 경험이 자신들의 잘못 때문이라 여기며 선뜻 나서서 말하기도 어려워합니다. 자신들이 마치 불법 거래를 하다가 들킨 것처럼 잔뜩 위축되어 떨고 있었 습니다. 어른들이, 세상이 아이들의 잘못으로 낙인찍고 심판하려하기 때문에 자신의 피해사실을 먼저 말할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자신이 당한 일이 성착취 피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아이들에게 가해자를 신고하고 고소고발을 진행하며 법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사실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더 안보이는 곳으로 숨기도 합니다. ‘그냥 이번 생은 망한 걸로 할래요’, ‘난 그냥 부서질래요’ 하면서 센터의 도움을 밀쳐내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너희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 주저앉아 버리는 아이의 부모님에게도 아이를 탓하지 말라고 다독이며 함께 일으켜 세우고 피해 상황을 어떻게 인지해야 하는지 설명해야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계속 손을 내밀고 연락을 하면서 센터의 상담원들은 때로는 상처입고 지쳐가기도 했습니다. 한 명의 피해 아동·청소년을 지원하고 돕는 일에는 상담원들의 끈질긴 노력뿐만 아니라 법률, 의료, 심리지원 등 다각도에서 여러 사람들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 한 아이가 하나의 우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십대여성인권센터는 조각난 우주를 끌어안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고민하고 같이 아파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십대여성인권센터는 2013년 사이버또래상담실로부터 시작한 이래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 범죄가 우리사회의 관심 의제로 떠오르지도 못하던 상황에서 거리에서, 온라인 상에서 아동·청소년들이 성착취 피해 상황에 무방비로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알려왔습니다. 그러나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착취 범죄는 점점 더 참혹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김해 여고생 살해사건, 관악구 성착취 십대여성 살해사건, 지적장애아동 일명 하은이 성착취 사건, 온라인 그루밍을 통한 성범죄 등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성착취는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심지어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인식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지만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 온라인 상의 성착취 범죄는 시시각각 얼굴을 바꿔가며 피해 아동·청소년을 노리고 있습니다. 더 복잡하고 교묘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센터는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하여 보다 실질적인 지원체계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방면에서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법이 바뀌었 다고 세상의 인식이 하루 아침에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법이 개정 되었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법이 바뀌었으니 우리 사회의 인식을 개선해 나가야하고, 또한 관련한 수많은 제도도 바꾸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10년이 지난 지금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관심과 지지가 필요합니다.

사실 저를 비롯한 운영위원들은 조진경 대표님과 십대여성인권센터가 이루어내는 수많은 일들을 따라가기에도 숨이 찼습니다. 보고서는 날마다 두꺼워지고 회의는 점점 길어졌습니다. 그러니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숨차게 달렸을지 짐작이 됩니다. 그러나 그 숨찬 활동을 지켜보면서 저와 운영위원들은 가슴이 벅찼습니다. 십대여성인권센터에 이런 저런 경로로 연결되어 도움과 지원을 받은 아이들의 걱정과 두려움이 안도와 희망으로 바뀌는 모습이 가장 가슴 벅찬 일 이었습니다. 그냥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가고 친구와 싸우고 울고 웃는 평범한 날들을 되찾아 주는 일이 왜 그렇게 힘들어야 하는가 싶습니다.

그동안 십대여성인권센터와 함께 연대해 주신 많은 단체들과 활동가들, 뜻을 함께해 주신 정치인들, 언론인들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조금 덜 외로웠습니다. 그리고 우리 센터의 든든한 후원자님들, 운영위원회, 자문위원들, 법률지원단, 의료지원단, 심리지원단의 전문가분들, 무엇보다 우리 센터의 조진경 대표님과 권주리 국장님, 상담원 여러분들이 함께 동행하며 십대여성인권센터를 10년 동안 일구어왔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피해 아동·청소년의 평범한 하루를 위해 고군분투해왔습니다. 십대여성인권센터는 이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우리 센터는 하루를 한 달처럼 10년을 100년처럼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십대여성인권센터가 살아 온 10년의 밀도는 100년처럼 느껴집니다. 이제 겨우 10년 지났는데 너무 거창하네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십대여성인권센터와 계속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곡한 허세입니다.

10년의 활동보고서는 십대여성인권센터가 10년 동안 쓴 ‘자기소개서’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고통과 기쁨이 있습니다. 아마도 단어와 단어 사이,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10년을 함께 걸어 온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와 존경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제 10년을 찰나의 순간처럼 살아낸 십대여성인권센터의 다른 날들이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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