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새날을여는청소년쉼터 김선옥 대표 인터뷰
설립의 기록⑧
작성자 조진경 게시일 2024.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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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새날을여는청소년쉼터 김선옥 대표 인터뷰
 
인터뷰어 차선주
 
김선옥 대표님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빈민 운동에 뛰어들어 빈민 운동과 노인 사역에 매진하다 1998년 새날을 여는 청소녀 쉼터를 개소하여 가정폭력, 성폭력에 피해를 입은 청소녀들의 엄마 역할을 해오신 분입니다. 그들이 상처받은 사회와 다시 소통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늘푸른자립학교’ 및 ‘위기 청소녀 자립꿈터’ 또한 개소하는 등 자랑스러운 분입니다.


 
센터 김선옥 대표님, 안녕하세요? 십대여성인권센터의 역사를 ‘설립/도약/공세/전환’의 시기로 구분하여 10년의 여정을 보고 있는데요, 대표님이 계셨기에 십대여성인권센터가 설립될 수 있었습니다. “설립(2012~2014년)”의 단계에 중요한 이해관계자로서 대표님을 찾아 뵙고 인터뷰를 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성가족부 프로젝트 사업이었던 ‘새날을 여는 청소년쉼터’의 ‘사이버또래상담사업’을 비영리민간단체인 독립기구로 구성하여 전문성을 더 확보하고자 2011년 12월 총회를 거쳐 2012년 ‘사이버또래상담실’이란 이름으로 십대여성인권센터가 시작되었는데요, 그 때의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김선옥 새날을 여는 청소년쉼터(이하 ‘새날쉼터’)가 ‘서울위기청소년교육센터’를 위탁받아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성매매피해 청소년의 재유입 예방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5박6일 캠프)을 맡아 진행했었는데, 2009년 전국을 아우르는 중앙위기청소년교육센터를 운영하게 되었어요. 경찰이 단속해서 성매수자들은 처벌하고 청소년들은 교육 수강 명령을 내리게 되는데, 여성가족부를 통해서 그 청소년 명단이 들어오면 캠프를 진행하게 되는 거예요. 당시 1년에 10~18회 정도 했었는데, 캠프를 못하는 다른 지역의 센터들이 생기기도 했어요. 그 이유는 그런 아이들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경찰의 단속이 일시적이고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어요. 그 당시 20만 명의 가출청소년이 있고 그 중의 20-25%가 성매매에 노출되어 있다는데 그들을 발견할 수 없었어요. 그 때부터 경찰들에게 맡겨서만은 안될 것 같아 그들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새날쉼터와 늘푸른자립학교 아이들 중 탈성매매한 친구들을 교육시켜 사이버 상에서 상담을 해보라고 하니 아이들의 언어도 잘 이해하고 오히려 더 잘 접근할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다시함께센터 팀장이었고 새날쉼터에서 일 했었던 직원에게 그 일을 제안해서 2011년 3월부터 4명의 사이버또래상담원을 뽑아 실제 탈성매매를 했는지를 확인하고, 그리고 현재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인터넷 상에서 우리가 무엇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4월 한달동안 집중적으로 교육을 했죠. 직원 채용부터 교육까지 2개월 동안 준비를 하고 5월에 오픈을 했는데, 그 달에 100명의 성매매피해 청소녀와 십여명의 성매수자도 만났어요.

그리고, 때마침 6월에 여성가족부에서 주최한 토론회가 청소년 성매매에 관한 토론회였는데, 토론자로 나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우리가 움직이니까 경찰도 움직이기 시작했고, 성매수자를 처벌하고 재판을 해야 하니 검사들도 바쁘게 움직이게 된 것도요, 그 때 그 자리에 참여한 여성가족부 권익증진국 국장이 토론회가 끝나고 저를 보자고 하면서 담당자를 배석시키더니 예산을 배정하겠다고 했고, 2천만원을 받게 되었어요. 직원의 인건비는 후원금으로 충당했었고, 4명의 또래상담원의 인건비를 보탰죠.



센터 다음 해에도 그 지원이 이어지게 된 건가요?

김선옥 2012년에는 7,500만원을 받았어요. 경찰이 1년 내내 단속했을 때 보다 더 많은 숫자를 한 기관이 발견하고 상담했다는 걸 꿈도 못 꾸었던 거예요. 성인 성매매의 경우 아웃리치를 하면 20명 이상을 하기 어려운 때였는데, 우리는 100명 이상을 매우 깊은 수준으로 상담했는데 그 당시 전국 27개 상담소도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거예요. 한달 만에 100명 이상, 건수가 점점 높아지니 저의 한계를 느꼈어요. 저는 주로 시설과 대안학교에서 교육을 하고 자립 지원을 돕는 역할을 했던 사람인데 상담소를 운영하는 것이 상담에만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특히 또래상담원들은 우리집(새날 쉼터)에서 길러진 애들이라 애들은 제가 엄마예요. 그런데 직장에서 직장상사로서의 역할은 또 다른 거더라구요. 그 때 누구에게 이 일을 맡겨야 할까 생각을 하다가 조진경 대표님을 생각했고 그런 이야기들을 했죠. 조진경 대표님만이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녀가 감사하게도 수락을 해서 운영위원회를 열었죠. 그런데 사실 이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그 위상이 앞으로 더 높아질 거기 때문인데, 제가 운영위원들에게 “우리 솔직해야 된다. 이거는 우리가 하기보다 조대표에게 맡기면 사업이 더 커질 거고, 훨씬 더 잘할 것이다.”라며 설득을 했고 운영위원들도 수긍을 해주었어요. 그래서 현재 국제 연대까지 하고 법 개정 등 많은 일들을 감당하며 해오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제 살림을 내줘야 하는데, 그 당시 우리가 사용하던 장소가 또래상담원이 살면서 상담실을 운영했던 곳이었어요. 본격적으로 새로운 곳에서 시작을 할 수 있도록 새날쉼터의 후원금을 탈탈 털어서 3700만원을 마련했어요. 그 때 당시 새날 쉼터 운영위원들,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어요. 새날쉼터를 만들 당시부터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시작했고 1년 후에 성남에서 새날쉼터를 만들었던 분들이기 때문에 또 하나의 기관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당연한 걸로 받아들이셨던 거죠. 그 화곡동 연립 방 20평 정도의 보증금과 기자재를 마련할 수 있었는데, 그때 또 하나의 아이디어가 생각났어요. 아이들이 집을 나와서 성매매를 하는 건 일자리가 돈을 벌 수 없는 구조이고, 거리에 나올 수 밖에 없었는데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일자리와 교육이었어요. 다시 학교를 가고 싶어도 제도권학교는 갈 수 없어 2009년 늘푸른자립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새날쉼터 15주년인 2013년 1월 15일 사이버또래상담실은 독립시키고 화곡동에 ‘새날이 오면’이라는 일자리센터를 오픈했죠. 주식회사 벽산의 후원의 약속이 있었고 2012년 11월부터 후원을 해주어 가능했죠. 성매매피해 청소년을 위한 통합적인 시스템을 새날쉼터 안에 구상하게 되어 ‘새날이 오면’과 ‘늘푸른자립학교’ 사업이 합쳐진 ‘늘푸른교육센터’가 현재 신림동에서 운영되고 있는 거죠.



센터 그 때 구상하셨던 십대여성인권센터의 역할이나 모습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김선옥 제가 했던 것 보다 더 확장되었고 이름을 ‘십대여성인권센터’로 바꾸면서부터 그 위상이 달라진 것 같아요. 우리는 ‘사이버또래상담실’만 구성을 했다면 조진경 대표님은 벌써 ‘십대여성인권센터’라는 이름을 걸면서 그 이름과 위상에 맞는 일들을 해오고 있죠. 피해아이들 발굴 뿐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법적 제재에 대한 활동도 매우 적극적으로 했어요. 완전 입체적이었죠. 사실, 저는 조대표님이 그럴 줄 알았어요. 2004년 성매매방지법은 성인 중심의 피해자 지원이었고 청소년성매매상담소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 완전한 모습으로 하게 되었고, 기대 이상으로 그 역할을 해주었죠.


센터 새날쉼터에서 시작한 사이버또래상담원들과 사이버또래상담실이라는 이름으로 십대여성인권센터가 시작되었고, 2013년 인터넷에 올라온 십대 성매매 소녀의 글로 드러난 성고문사건을 계기로 십대 여성이 어떤 성적 착취를 당하고 있는지 좀 더 자세하게 인지하게 되면서 2004년 성매매방지법 제정을 근거로 설치된 성인 중심의 상담소 등 지원시스템과는 다르게 십대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특화된 지원체계에 대한 필요성을 더 절감하게 되며 이에 기관 명칭을 ‘십대여성인권센터’로 바꾸었습니다. 현재는 디지털 매개를 통한 성착취 피해를 비롯한 아동·청소년 성착취 피해에 긴급 개입, 직접지원, 회복, 자립까지 국내 유일의 통합적인 아동·청소년 피해 지원기관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고 말하는데요, 십대여성인권센터의 10년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김선옥 가장 큰 의미는 성착취피해를 당한 10대 아이들을 돕는 전담/특화상담소가 생겼다는 거죠. ‘아청법’ 개정을 정말 오랜 시간동안 애를 썼는데 남인순 의원 등과 함께 손잡고 이를 이루낸 것, 특히 그 법을 바꾸는 과정에서 사회적 인식이 많이 개선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또한 아동·청소년 성착취를 하는 이들에 대한 고소고발을 어찌 보면 매우 집요할 정도로 하고 있어 아마 재판에 임하는 검사나 법조인들의 태도도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싶어요. 예전에는 아이들을 죄인 취급하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따져 물어 아이들이 많이 힘들어했거든요. 또, 다시함께상담센터부터 법률지원단을 잘 운영했고 그 체계를 잘 이어받아 법률/의료/심리 지원단을 잘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센터 목회자로서 빈민운동에 뛰어들고, 탈성매매 십대여성들을 위한 ‘새날을 여는 청소년쉼터’를 1998년 설립하면서 가출여성 청소년들의 친정엄마라 불리시는 등 꽤 오랫동안 성매매 피해아동·청소년들을 위한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이 일을 시작하시게 된 건 어떤 계기가 있으셨던 건가요? 

김선옥 처음부터 성매매피해청소녀를 위해 일할려고 했던 건 아니고, 빈민운동을 하게 된 것이 아마 이렇게 활동하게 된 여정의 시작인 것 같아요. 저는 감리교신학대학을 다녔는데 1학년 때 고난주간 때 신학생들은 한 끼 금식하면서 매일 채플이 있었어요. 그 당시 미국인 교수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오늘의 저를 있게 했던 것 같아요. 그 분이 “오늘 만약에 예수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예수는 이런 건물에서 설교하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는 실제로 들판에서나 바다에서 하셨을텐데, 오늘날 서울에 계신다면 가장 가난한 곳 빈민의 지역 아니면 노동자들이 있던 자리일 것이다. 너희들이 진짜 예수의 제자라면 그렇게 어렵고 소외된 곳으로 가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당시 그 분이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었는데, 그 또한 예수라면 자켓을 갖추어 입고 설교를 하는게 아니라 허름한 옷을 입고 노동자들을 찾아다니고 가난한 동네에서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하지 않았겠느냐는 거예요. 저희 어머니도 가난한 교회 전도사라 그때 제가 학비를 지원받기 위해 합정동에 있는 중견교회에 있었는데, 그 미국인 교수님 설교를 듣고 부활절 칸타타 끝나고선 그 교회를 그만두고 빈민지역인 사당동 희망교회로 가게 되었어요. 16평도 안되는 교회에서 탁아소와 의료진료를 했고, 그 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교회가 봉천동으로 이전했고 남편과 결혼해서도 그 사역을 이어나갔어요. 그 당시 용돈이 필요하면 성매매를 하는 아이들이나 엄마들이 있기도 했고, 집을 나와 교회창문을 뚫고 들어와 교회 안에서 자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그때 성매매 문제에 대해 인지를 하게 된 거죠. 그 이후 마산에서도 활동을 했었는데, 목사 부인인 사모로서 일을 하다 제 자신이 해야 될 일이 있다는 사명감이 39살이 되면서 생겨났어요. 스무살 때의 그 결심을 다시 이어가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감리교 여성 지도자들이 쉼터를 열려고 준비했는데 정관 만드는 데 참여했다가 실무자로 일하게 되었어요. 2000년에 티켓다방 등 청소년 성매매문제가 심각했고, 서울시에서 쉼터에 사업비를 지원하겠다고 하면서, 2001년 3월부터 서울시 지원을 받게 되었어요. 그 지원을 받게 되면서 성매매문제를 더 이슈화했고 2004년 선도보호시설을 운영하게 되었고 그 이후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면서 완전히 청소년지원시설로 운영하게 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그들이 꼭 필요로 하는 것이 ‘교육’이라 생각해서 ‘늘푸른자립학교’를 하게 되었고, 2007년에 ‘서울위기청소년교육센터’를, 2009년 ‘중앙위기청소년교육센터’를 한 거죠. 그 교수님의 설교 한마디가 저를 이렇게 이끌어 온 거네요.


센터 그 교수님의 설교 한마디로 대표님이 이 길로 들어선 것도 있었지만 대표님 마음 안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 있었을 것 같아요.

김선옥 맞아요. 제가 왜 그렇게 생각을 했나면, 설교하는, 말하는 목사는 너무 많은데 현장에서 직접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픔을 함께하는 목사와 목회자는 많지 않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는 그 역할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센터 여기 강원도 홍천에서는 어떻게 생활하고 계신가요?

김선옥 남편이 일찍 은퇴를 했고 ‘내안재(마음 편한 집)’라는 공간을 운영하고 있어요. 마음이 힘든 사람들이나 그들과 함께 하면서 번아웃되기 쉬운 활동가들에게 공간을 제공하고, 쉬면서 자신의 마음을 돌볼 수 있는 곳이예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하고, 춘천에 있는 청소년상담센터 등 주변 분들도 찾아오기도 해요. 코로나 시기에는 잠시 멈추었지만 올 1월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저는 여기서 이웃 주민들과 협동농장처럼 1500평 정도되는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거기서 나오는 먹거리를 제공해주기도 해요.


센터 십대여성인권센터가 앞으로도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10주년을 맞이한 십대여성인권센터에게 응원(당부)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선옥 현재 디지털 아동·청소년 성착취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요. 거시적인 활동을 주로 하다 보면 이전에 사이버또래상담원을 통해 자잘할 수 있지만 아이들을 발굴하고 마음을 어루만졌던 일들이 약해지는 것은 아닐까(물론 심리지원단이 있지만) 우려가 있기도 해요. 그리고 성매매피해 청소년들을 위한 지원체계가 있는데, 십대여성인권센터가 상담소 역할을 하며 발굴을 하고 발굴이 되면 위기청소년교육센터로 보내고 그 다음에 자립할 수 있는 기관에도 보내지고 학교도 가는 등 그 과정이 원활하게 돌아가야 하는데, 또래상담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통합적으로 원활하게 움직이지 못할까 우려가 되기도 해요. 법률을 개정하고 가해자에 대한 고소고발 등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지원체계를 움직이는 것도 십대여성인권센터의 귀중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 역할을 조금 더 잘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으면 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천천히 가기도 해야 되고, 그들의 이야기도 들어야 한다고 봐요. 선도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될 수 있는 방안이요.

특히 저는 예전 새날쉼터에서 목요일 오후에 퇴근을 해서 이곳 홍천에서 있을 때, 조금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여유가 있을 때 현 상황들에 대해 더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계속해서 꿈을 꿀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조진경 대표님도 여유를 가지고, 조급하게 달리지 말고 본인 몸도 돌보았으면 해요. 여기서 일을 하게 되면 가해자도 만나야 하고 안 좋은 에너지를 받을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항상 한 구석에는 자신을 돌보는 시간을 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대표님이 본인 자신과 직원들에게 그런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더 여유 있는 리더가 되었으면 해요.



센터 예, 조대표님께 대표님의 애정어린 말씀 꼭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긴 시간 귀한 말씀주셔서 감사합니다. 응원해주시는 만큼 더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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