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이런 슬픈 일기를 쓰지 않기를 - 김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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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진경 게시일 202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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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이런 슬픈 일기를 쓰지 않기를
김태훈 대학원생

내가 사용하는 언어교환 앱에서는 유독 여성 사용자들만이 겪는 문제가 있다. 외국어를 가르쳐준다는 핑계로 성적인 접촉을 요구받는 것이다. 자기소개에 데이트에 관심이 없다고 적어두고, 몇 차례 사양의 뜻을 전해도 추파를 던지는 메시지는 그치지 않는다. 결국 참다못한 여성 사용자가 그 불쾌한 요구를 비판하는 글이 공개적으로 게시되고, 그 후에 때로는 욕설 섞인 대화가 오간 후에야 그들은 사라진다. 처음 보는 사람의 속내를 의심하고, 그들의 요구를 질리도록 거절하는 수고는 남성인 나에게는 발생하지 않는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성별에 따른 취약성과 위험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 연령에서 기인한 취약성이 결합할 때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성인 여성조차 떨쳐내기 힘든 집요하고 노골적인 온라인 그루밍은 오래전부터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의 주요 범행 방식이었다. 이화여대에서 열린 전시,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의 초반부는 가해자들이 심리적, 사회적으로 취약한 미성년자를 어떻게 길들이는지를 다루고 있었다. 그들은 순수한 친분이 목적인 것처럼 접근한 후 피해자를 독립된 공간으로 유도한 뒤, 성 지식이 없는 피해자들에게 특정한 동작이나 옷차림을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몇몇 피해자들은 금전적인 대가를 받기도 하고 가해자에게 연애 
감정을 품기도 한다. ‘매매’라는 말이 함축하는 쌍방성, ‘애인’이라는 말이 풍기는 친밀함은 피해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이 관계를 선택하고 동의했다고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 관계가 반복적인 회유와 요구, 때로는 협박 가운데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진짜 연인 관계는 대중의 눈으로부터 은닉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흐려진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보다 중점에 놓인 것은 피해자들의 회복 과정이다. 전시 기획자는 ‘십대여성인권센터’에서 미술 치료를 받은 아이들의 작품을 통해 성폭력 피해가 ‘씻을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회복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만든 마음 상자, 가면, 인형들을 보면서 특히 마음이 뭉클했던 건 피해로부터의 회복 과정이 어른으로의 성숙 과정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느끼는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외부로 표현하는 것은 위축된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만 필요한 배움은 아니다. 가정에서 소외되고 학업에 시달리는 모든 아이들, 나아가 어린 시절의 고민들을 청산하지 못한 어른들에게서도 자신을 이해하고 제시하는 일은 어렵다. 우리 사회 전체가 겪는 이 심리적 위축이 성범죄에 대한 구조적인 취약성으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안타까웠다.  

 

그러나 피해에 앞서 가해가 예방되어야 한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소위 ‘아청법’ 개정을 통해 성매매에 연루된 아동·청소년을 자발성 여부에 따라 분류하는 사고방식이 부정되고, 이들의 피해자성이 우선적으로 인정된다. 이로써 성매매 가담자로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피해 사실을 알리지 못한 미성년자들의 구제 가능성이 이전보다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우려스럽게도 아청법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은 이중적이다. 많은 이들이 어린아이를 향한 추악한 성욕을 특별히 엄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편, 성매매를 ‘저지른’ 미성년자 또한 어느 정도 응보를 겪어야 한다고 믿는다. 성매매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도덕적인 우월감은 가해자와의 거리두기뿐만이 아니라 피해자와의 거리두기로도 도모된다. 그 거리가 때로는 너무 멀어서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분간되지 않고, 그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기는커녕 죄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는 기분에 몰입하여 가해와 피해의 사실조차 재해석하고자 든다.  

법 감정의 차원에서도 성별과 연령 각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아청법에서 합류한다. 일련의 무고 사건들로 인해 불거진 성폭력 범죄에서의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공격이, 마찬가지로 흉악한 청소년 범죄를 계기로 제기된 소년법에 대한 비판과 결합한다. 그 결과 아청법은 ‘돈을 벌려고 자발적으로 원조교제를 했으면서 불쌍한 척하는 발랑 까진 청소년’을 옹호하는 법으로 이해되며, 이런 인식이 개정된 법의 정신을 가장 잘 숙지해야 하는 일선 수사기관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에게 향해야 하는 비판은 생략되기 일쑤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소아성애는 허용될 수 없
다’, ‘당연히 n번방 같은 범죄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개정된 아청법이 바로 그런 용납할 수 없는 욕망과 산업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려는 시도라는 데엔 주목하지 않는다. 

자원 여부를 떠나 소년병을 전쟁터로 내몰지 말자고, 임금 지불 여부를 떠나 아동 노동은 근절되어야 한다고 판단해 온 인류의 성찰에 비추어, 청소년의 성을 매매할 수 있다는 발상을 사회에서 배제하자는 주장으로 아청법을 이해할 순 없을까? 벌어진 사건을 사후 판단하는 판사의 관점이 아니라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그것을 막으려는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이 법의 효력을 평가할 순 없을까? 자신이 겪은 일이 그저 없었던 일이 되면 좋겠다고 적은 한 작품 앞에서, 더 많은 사람이 이 법의 시급한 필요에 공감하게 되길 간절히 바랐다.

전시의 마지막 순서에는 자신의 성착취 정황을 기록한 피해자의 일기가 있었다. 그 옆에는 시간이 흘러 자신의 일기를 본 피해자의 소회가 나란히 있었다. 그 누구도 이런 슬픈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되고, 그 누구도 자신의 청소년기를 이런 방식으로 돌아보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어디에 있어야 할까. 이번 전시에서 그 고민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한 덕분에 고민의 출발점을 훨씬 앞에 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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