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배움과 연대가 있었던 ‘오늘’
- 박희규 십대여성인권센터 심리지원단 심리치료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2018년에 이화여대 대산갤러리에서 진행되었던 ‘Here I am, Here we are’ 전시를 통해 강한 인상을 남긴 십대여성인권센터는 어떻게든 다가가서 함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곳으로 내 마음속에 자리를 굳혔다. 조진경 대표님의 활동도 학교의 교목실 일로 계속 기웃거리며 들여다보게 되었다. 우리 사회가 코로나19의 진통을 겪고 있는 시간에 십대여성인권센터는 ‘아청법’(「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키기 위해 내 머리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옹호 활동을 했다고 한다. 전 국민의 생활 반경이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동안, 십대여성인권센터는 가상공간 속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성착취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의 최전선에서 갖은 비바람을 막아내고 있었다. 2022년 12월에 다시 이화여대 대산갤러리에 찾아온 전시 ‘오늘’은 이런 노력의 흔적을 담고 있다. 2018년이든, 2022년이든 전시에 표현된 아동과 청소년 성착취 트라우마에 대한 그들의 목소리와 경험은 언뜻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이번 전시에는 첫 번째 전시 이후 4년이 지난 지금의 온라인 공간에서 행해지는 그루밍 과정과 착취의 구도가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또한 십대여성인권센터의 여러 상담사 선생님들의 분석이 적극 반영되어 있어, 아이들의 전시를 보는데 더욱 도움이 되었다.
이 전시회는 광목천 조각들이 커튼처럼 드리워진 공간 속으로 헤매듯이 들어가 아동을 그루밍하고 있는 가해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는 경험으로 관람을 시작하게 된다. 그루밍의 목소리가 들리는 공간을 헤어 나오면 지금도 가상현실에서 숱하게 일어나는 여러 성착취 사례들이 적힌 포스터를 보게 된다. 이 공간을 지나면 피해자들이 미술치료를 받으면서 만들어 낸 작품들이 나온다. 작품에는 아픔이 눈물로, 피로, 봉해진 입으로, 땅에 디디고 설 수 있는 발의 부재로 혹은 어두운 색 등으로 표현된다. 그 가운데는 지지해준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점점 채워지는 자신의 내면으로 아픔이 변화하는 과정을 표현한 작품들도 만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나는 전시장 코너에 있던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거기에는 한 여학생 피해자가 미술치료를 받으면서 만든 작품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시되어 있었다. 여리고 공허한 내면세계를 점점 알차게 성장시키며 채워나간 여학생의 성숙한 여정이 고스란히 담긴 그 작품들은 나에게 유독 진한 감동을 남겼다. 성착취 경험 후, 무의식의 세계에서 자신을 압박하는 이미지로 떠오르던 남성의 성기 이미지는 치유의 여정 속에서 자신을 믿고 도와준 이들의 지지 속에서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우주선의 모습으로 바뀐다. 그 그림 앞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그다음에 전시된 같은 학생이 그린 그림은 아름다운 꽃과 흐르는 물과 나무 그리고 긍정적인 자기 이미지를 표현하는 구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상담의 과정을 적극적으로 소화하고, 자기 목소리를 찾아내는 과정을 그린 그림들은 전시가 끝난 지 한 달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도 머릿속에 고스란히 그려진다.
이번 학기에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모두 전시에 데려와 함께 관람을 하고, 여러 생각을 나눠볼 수 있었다. ‘기독교와 세계’라는 교양필수 과목을 수강하고 있는 외국인 학생들과 목회상담학 과목을 수강하고 있는 기독교학과 학생들 그리고 신학대학원의 학부와 석박사 과정 학생들과 ‘오늘’전을 둘러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전시를 본 학생들은 저마다 전시 주제에 대한 경험의 폭이 다양했다. ‘오늘’전으로 그동안 몰랐던 세상의 아픔을 알게 된 학생부터 이 아픔이 바로 옆에 있는 친구의 경험이기도 한 학생들까지. 성착취와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수업으로만 접했던 학생들에게 전시는 간접적으로나마 피해자들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의 장이 되었던 것 같다. 저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들은 달랐지만, 모든 작품들이 결국 함께 모여 뼈아픈 현실을 고발하고 고통스런 현실을 딛고 일어나라는 희망을 외치고 있었다. 전시를 보고 나와서 자발적으로 포스트잇에 십대여성인권센터에 오는 이들에게 보내는 응원 메시지를 적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나는 그들의 진정 어린 연대의 마음을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