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참 좋았지
인천기계산업단지를 기록하다
작성자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5.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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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지오웰 식당 근로자
백용순 (1952년생)
10살부터 잔심부름을 하며 맺은 대금과의 인연,  결혼 후 다시 대금의 가족이 되어 직원들의 급식을 책임지는 엄마 같은 알뜰한 솜씨로 인정을 받았다. 산업화 시기 힘들고 지친 여성의 치열한 삶을 기억하게 한다. 
 
대금지오웰에 입사하기까지
어릴 때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고향은 경상도인데 3살 때 서울로 왔어요. 근데 나도 잘 기억이 안 나. 엄마한테 들은 소리지. 서울로 와서 살다가 또 인천에 6~7살에 와서 계속 있었어. 그러다 퇴직하고 영종도로 왔지.
내가 한 10살인가 11살인가 하여튼 그렇게 먹었을 때 거기(대금)를 간 거야. 하여튼 어렸어. 어려서 대금에 아들만 넷인데 나를 시영 딸 삼아 데려간 거야.
왜냐면 거기에 사모님의 외숙모라는 사람이 거기 식수발을 하고 계셨어요. 할머니 혼자 다 못하니까 외숙모가 계신 거야. 내가 시영 딸로 간다고 그러지만, 시영 딸로 가면 공부를 해야 되는데 공부는 못하고 대금에서 세월을 다 보냈어. 

결혼 후 사시는 건 어땠나요?


섬에서 농사짓는데 흉년이 자꾸 드니까 한 해 농사를 못 짓는 거야. 못 지으면은 이제 많이 짓는 사람 같으면 그전에 지어 놓은 사람이 농사가 많으니까 이제 먹을 수가 있는데, 우리 같은 입장에는 많지가 않아요. 이제 이 아저씨(남편)가 외아들이고 누가 없어 형제가. 그러다 보니까 너무 힘든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년 농사지으려면 올해 못 지었으니까 먹을 것도 그렇고(없고). 내가 거기(대금과 섬)를 왔다 갔다 하다가 마침 대금에 경비 설 사람이 없는 거야. 그래서 내가 우리가 와서 있겠다 그랬지. 그때 4~5개월 된 딸이 있었어. 놀면은 봄에 약 사고 뭐 이런 것도 다 힘들고 양식도 어렵고 1년 먹으려면. 
그때는 시어머니가 계셨어. 그래서 우리 시어머니께 애들을 맡겨놓고 우리 둘이 나갔어요. 거기로 (대금) 돈 벌러 나갔지. 그때는 핸드폰이 어디가 있고 전화가 어디 있어. 애들 떼어놓고 가서 얼마나 저녁마다 둘이 붙들고 울었나 몰라. 먼 곳 전화라도 있으면 목소리라도 듣는데, 그때는 하루에 배가 한 번밖에 안 왔어요. 그냥 너무 슬픈 거야. 그래서 저녁마다 둘이 붙들고 울었어. 우리는 그런 세월을 거기서 살은 거야. 거기서 살면서 이제 애들이 좀 크고, 그래서 거기서(대금) 1년 한 몇 개월만 있다가 내가 농사를 못 지어 억울해서 다시 좀 잘 지어보려고 나왔어요. 영종도로 들어와서 농사짓고 11월 정도 또 오겠다고. 우리가 영종도로 들어올 때 그렇게 아줌마들이 울었어. 거기 회사에 있는 아줌마들이 정들어가지고. 지금도 그 아줌마 있어. 내가 다니지. 1년에 한두 번씩은. 그래서 그때 내가 울면서 다시 올해는 농사를 잘 지어가지고 온다고 그랬지만, 거기서 있어 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오붓한 거야. 우리가 집에서 있었으면 힘든데 돈 벌어 갖고 가니까 이걸로다 농사도 짓고. 농사를 잘 지었어. 그래갖고 또 간다고 그랬거든. 그때는 또 누가 잠깐 있었나 봐. 내가 대금에 간다 그러니깐 거기서(대금) 사모님이 하는 말이 이래. ‘얘 너 지금 이번에 와서는 아주 있으려면 오고 그렇게 또 있다가 또 갈 것 같으면 오지도 마라’ 이러는 거야. 오지도 마라 그러는데 내가 생각해보니까 농사짓는 것보다 나은 거야. 일을 하니까. 일을!
농사는 뭐 잠깐 하고 겨울에는 안 하잖아. 그러니까 그걸 비교를 했지. 근데 비교를 하면서 그래도 이게 더 낫다.(대금에서 일하는 것이) 애들이 커지니까 학교를 가야 하는데. 여기는(영종도) 중학교밖에 없어요. 고등학교가 없어. 그래서 내가 그때 그런 거야. 그러면 우리 둘이 나가고…… 나가서 그냥 거기서 살고 애들도 방 얻어서 나오고 그러면 또 두 집 살림해야 되잖아. 그러면 너무 힘드니까 차라리 내가 거기 있으면 애들을 데리고 있을 수가 있잖아. 
그때 당시에 대금에서 나한테 맡기는 일은 아무나 못 맡기는 게 뭐냐면 나는 여기서 농사를 지어다 먹었잖아. 쌀을. 근데 내가 나가게 되면 우리 친정아버지가 그때는 젊었어요. 이 아래(지금 거주하고 있는 집 아래) 사셨는데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시면 우리 두 집이 먹을 수가 있잖아. 아버지가 농사를 짓고, 나는 나가서 버니까. 그래서 내가 그냥 나가서 우리 친정 보고 농사지으라 그러고 거기에 그냥 계속 있은 거야. 

하루 네 끼, 대금 직원의 식사를 책임지다.
대금 입사 초기 때는 어땠나요?

직원이 많았어. 한 70~80명 됐어. 그런데 아줌마들하고 또 기숙사 애들이 있었잖아. 기숙사 애들 밥을 해주지만 다른 직원들은 다 못 먹는 거야. 도시락들을 싸서 다녔대. 점심에 내가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나와서 12시에 점심을 먹으니까 11시면 나와요. 내가 거기서 솥 걸고 밥해 먹으니까 내가 해야지 딴 사람이 오면 또 안 되잖아. 그래서 내가 나와서 이제 식사를 준비했어. 라면을 끓여서 밥 못 먹는 사람들은 라면을 끓여서 주고, 점심에 라면 먹고 난 치우고 또 들어가서 현장에서 일하고 우리 둘이 다 현장에서 일을 했지. 일을 하고 일하는 대신 우리가 집을 지켜주고 그러니까 거기서 나를 경비로 쓰고 집을 제공해 준 거잖아. 그 주택 있는 거를 “너 네가 살면서 여길 지켜라.” 이래서 그 사택에서 우리가 살았지. 그때는 우리 애들을 안 데려갔을 때지. 둘이 처음이니까. 
그렇게 사는 동안 회사가 점점 번창하면서 커져가지고 사장님이 나한테 “밥 하는 사람을 써야 되겠다.” 그러더라고. 날 딸처럼 보았으니까 속을 다 알잖아. 나를 불러다 놓고 “식당에 사람을 써야 되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네가 한다면은 사람을 쓸 필요가 없고, 니가 싫다 하면 다른 사람을 쓰겠다.” 이래.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부엌에 다른 사람이 밥한다는 거는 나도 싫으니까 “내가 현장에서 일을 안 하고 밥을 하겠습니다.” 했지. 밥을 준비하면 한 달에 얼마 준다는지 금액까지 다 나오는 거야. 이제 15만 원을 준다 하더라고.

직원들의 식사 준비는 어땠나요?

점심에는 한 70명 했을걸? 야근하는 사람들 밤 12시에도 밥 주지. 야근까지 했어. 나는…… 그렇게 살았어. 그러니까 밥을 네 번 한 거야. 기숙사 애들은 아침도 먹어야 되잖아. 4명이 됐든 5명이 됐든 7명이 됐든 기숙사 직원들은 아침도 다 먹고 새벽같이 일어나. 내가 있어서 식사 준비를 해야 했지. 
차라리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게 나아. 일하는 게 난데 부엌에 들어와서 그 살림을 딴 사람이 한다는 게 싫은 거야. 내가 거기서 살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 거기(사택 부엌) 와서 개입하는 게 싫은 거지. 내가 그냥 해버리는 게 차라리 낫지. 그때는 밥을 바깥에다 솥 걸어놨잖아. 그렇게 밥 했어. 반찬은 우리 먹는 반찬이지 뭐. 특별히 따로 뭐 할 게 있나? 다 같이 먹는 반찬이지. 시장에서 장 봐다가 해주는 거지 뭐. 그리고 우거지 삶아서 말려놓고, 생선 구워주고. 돼지 김칫국을 많이 끓였어. 그때는 오뎅 넣고도 김칫국 끓이고, 돼지고기 넣고도 김칫국 끓이고, 두부 넣고 김칫국을 끓이고 그냥 그렇게 했어. 그렇게 해서 직원들 다 먹였지. 
김장도 뭐 한 300포기 했어. 절이는 거는 뭐 사람 한두 명이 누가 오든지 그렇게 해놓고, 씻고 같이 하고 그랬지. 가족들이 많이 도와줬던 걸로 기억나요. 나는 밥을 해야 되기 때문에 그걸 전부 혼자 내가 할 수가 없어. 배운 게 살림밖에 없어. 어려서부터 살림밖에 한 것이 없는 거야. 
그렇게 지나온 세월을 내가 뒤돌아보면 나 거기 나오고 나서도 사장님이 담 넘어서, 대문 담 넘어가지고 아무도 없을 때 시찰을 돌으셨다. 난 다 알고 있었어요. 언제는 깜짝 놀랄 정도였어. 그런 사람이 쉽지 않은데 그래도 어떻게 하고 있나 궁금한 거야. 
거기 있다가 내가 집을 사가지고 나왔거든. 나오고 출퇴근을 했어. 그랬을 적에는 애들 야근하고 그럴 때 한 번씩 오셨더랬단 말이야. 다 알고 있었어. 나는.근데 살림을 내가 생각해도 너무 야무지게 해가지고 빈틈이, 물 샐 틈이 없었어. 그래가지고 다른 사람 20만 원 줘도 못하는 일은 나는 18만 원 줘도 그 사람보다 더 잘했어. 살림을! 그러니까 당신이 와서 보고 다 놀랠 정도지. 나 회사 나오고 나서 엄청 후회했을 거야. 왜냐면…… 나는 그 돈을 가지고 한꺼번에 다 사요. 일주일 치를. 내가 일주일치 돈을 탔거든. 부식비를.

일할 때는 어떠셨어요?

15만 원 준다고 그러는데도 얼마나 착한지 내가, 그때 나는 그랬거든. 너무 흉년 들어서 힘드니까 나가서 ‘정부미 한 가마 값이라도 매달 받으면 애들 사주겠다.’ 이런 생각으로 내가 나간 거야. 그랬기 때문에 거기서 15만 원 주신다고 그랬는데 내가 그랬어. “그렇게 많이 주세요.” 내가 내 입으로 그런 걸…… 내 월급 15만 원 주신다고 그러더라고. 아버님이 “15만 원 줄 테니 자네 생각엔 어떤가?” 그러고 내 의견을 물어. 근데 내가 “좀 더 주세요.” 이래도 되는데 “그렇게 많이 주세요?” 내가 또 이랬다. 바보 같은 게. 그래가지고 내게  맡긴 거야. 
맡겼는데 이제 우리 식구도 있는데 쌀을 거기서 그냥 그 많은 수가 다 먹으면 그냥 맨날 쌀 사다 판나지. 뭐 솔직히 말해서 그런데도 내가 미안하더라고. 쌀이 너무 빨리 없어지니까. 근데 나는 가을이면 우리 아버지가 농사지어서 백 가마씩 보내요. 우리는 일반미 먹었어요. 일반미! 밥이 맛있다고. 정부미 안 먹지. 우리는(백용순 가족) 따로 해 먹은걸. 그러니까 더 나를 믿은 거야. 그 집에서 자기네 쌀도 안 먹지? 쌀 우리 식구가 다 파먹어 봐라. 그걸 뭐로 당하나. 근데 쌀도 자기네 농사지어다 놓고 방에 다 재워놓고서 좋은 쌀로 밥 먹으니까 나를 믿을 수밖에 없지. 다른 사람은 갖다 놓으면 그 밥 먹고 뭐 다 그러지. 안 먹겠어? 그랬는데 다 자기네 집안이니까. 그냥 그런 것도 다 묻어 넘어간 거지. 뭐 진짜 원래 처녀 때서부터 데려다가 날 시영 딸로 했으니까. 

뭘 하면 야무지게 다 당신 마음에 드는 거야? 당신 마음에 들고.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게 하니까. 내가 시장 갔다 오면 100원 200원 잔돈 남은 것도 다 갖다줘. 이거 남았다고. 그러니까 날 믿을 수밖에 없는 거야. 어디가 빈틈이 없는걸. 그러니깐 아주 딸처럼 진짜 나를 너무너무 믿고 잘해줬지. 우리 신랑은 그냥 막 연탄불 피고 나무 자르고 시골에서 뭐 한 게 있어? 기술자가 아니니까. 그렇게 하고 나는 이제 밥해주고 그냥 그렇게 하고 있다가 세월이 갔다. 

신흥동에 있을 때부터 내가 있었어. 거기에 있다가 송림동으로 또 간 거야. 그러고서 기계공단으로 이전 해온 게 71년이니까, 세 번 옮긴 거야. 그게 실제 들어온 거는 69년에 들어온 거고, 71년 새벽부터 좌우지간 먹고 치우고 먹고 치우고 밤에는 안 하면 괜찮은데, 밤 11시에 밥해서 12시에 줄래 봐요. 졸았어요! 졸았어. 내가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면 눈물 나. 나 돌아가기 싫다 그래. 지금 오죽하면 젊어져도 돌아가기 싫다. 눈물 나. 그래도 아주 그냥 모든 걸…… 너무 야무지게 하니까. 

장 보는 건 어떻게 하셨나요?

말하는 사람은 없었어. 나한테는 “뭐 잘못 한다! 맛이 없다! 짜다!” 뭐 이런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 진짜 그렇게 오래 있어도 그런 소리는 하나도 안 듣고 진짜 인정받았어. 지금까지도 대금에서 나와서 식당할 때 사람들이 나 보고 싶다고. 나는 급식표도 없고 그냥 내가 알아서 해줬어요. 알아서 그냥. 
그 대신 전날 먹은 건 안 해! 일주일 치를 딱 짜 가지고, 내가 어저께 먹은 거 오늘 먹은 거는 매일 안 하지. 이렇게 일주일을 돌려 계속. 그렇기 때문에 반찬을 매일 장을 보면 그 돈 가지고 사흘이나 먹으면 다 끝나. 없는데 이제 그걸 가지고는 연안부두서부터 더듬는 거야. 예를 들어서 동태 한 짝, 고등어 한 짝 오징어 한 짝, 이런 식으로 그걸 가지고 이제 일주를 돌리는 거야. 생선을 그렇게 하고, 뭐 야채도 일주일 치 다 봐와. 그렇게 봐 다가 냉장고에다 다 놓으면 일주일을 먹는 거야. 아무 하자가 없어요.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보니까 그 돈을 가지고 다 짜서 냉장고가 꽉꽉 차는 거야. 계란도 다섯 판씩 막 이렇게 해서 다 하고 갖다 놓으면 부자 같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사장님이 와서 열어보면 꽉꽉 차 있으니까 진짜 든든하잖아. 근데 내가 회사 나온 후 맨날 직원들이 반찬이 모자란다고 난리가 난대. 밥 먹으면서 내 생각이 아른하지, 식당 아줌마는 맨날 딸따리에다 끌고 오는데, 반찬이 맨날 모자른다고 난리인 거래. 직원들이. 그래서 내가 그래 “야 이 세상에서 나처럼 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렇게 짝으로다가 해야 돈이 적어도 할 수가 있지. 그렇게 매일 보는 장은 감질나서 못 먹어. 오죽하면 내가 그렇게 잘하니까 그 돈이 많이 남는 줄 알고 자기네들이 하겠다면서 한 번은 뺏었어. 뺏은 게 아니고 내가 “안 한다.” 그랬지. 왜 안 한다고 그랬냐?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차를 내줘야 된다고 그랬거든요. 차를 가지고 가면 하지만 내가 그걸 어떻게 봐 오냐. 직원들도 바쁘다고 못 해준대. 그래서 내가 안 한다고 그랬어. “당신들이 해라.” 그러니까 자기네들이 큰돈 남는 줄 알고 했어요. 하더니 나중에 두 손을 싹싹 빌더라고. “아유~ 형수님 아유~ 이젠 차 가자! 그러면 아무 소리 안 하고 따라갈 테니까 형수님이 해줘.” 아주 살살 빌어서 내가 할 수 없이 또 해드렸어. 
그래서 아주 그렇게 사연이 많았다고. 나는 진짜 사람들이 다 생각지 못하게 잘해줬다고. 내가 해줬을 때가 제일 좋았다 그러고. 지금도 만나면 그때가 제일 좋았다고 아줌마들도 다 얘기해. 누가 만지지 못하게 해도 나보고 막 주물러야 더 맛있다 그래. 다른 사람은 만지지도 못하게 하고 그랬어. 아줌마들이 그냥 맛있게 잘 먹었다 그러고. 똑같이 먹고 복날 이런 날은 삼계탕 같은 거 특별히 해주고, 보름밥 해주고. 참 그 시절이 좋았다.

쉬는 날은 어떻게 보내셨어요?

농촌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고, 따로 집을 구하기는 여력이 안 되고 하니까 회사들마다 1인당 방 하나씩 있는 게 아니라 큰 방에 같이 거주했어. 옛날에 그렇게 했어. 아침에 기숙사에 있는 얘들이 나가면 밥 먹고 나가. 그리고 나가서 점심은 안 먹고 자기들이 돌아다니다가 저녁때 들어오든지 그건 몰라. 일요일 날 딱 하루 쉬어도 어디 가지도 못했어. 거기 경비 지키느라고. 기숙사 직원들 책임지고 있으려면 누가 그렇게 해줄 사람도 없어. 

퇴사 후의 삶, 영종도로 들어오다
대금 퇴사하시고서는 어떤 일 하셨어요?

나와서 식당 차렸어. 나는 가좌동에 ‘낙지마당’ 식당을 차렸는데 대금에서 왔다 갔어요. 그때부터 나와 가지고는 절대로 남의 밑에서 일을 안 했어. ‘낙지 마당’도 한 2년 했나. 3년 했나? 하여튼 직원 한 사람 쓰면서 거기서 같이 했지. 그러다가 그 건물 볼링장이 없어지면 내가 손해를 볼 것 같은 거야. 그냥 후다닥 넘기고 간석동으로 왔어. 
간석동에 와서 주물럭 가게를 차렸는데 거기서도 금방은 잘 됐는데, 전기가 누전돼서 자꾸 나가더라고. 이게(전력) 약한가 봐. 가정집 밑에다 차리니까 불(전기)이 자꾸 나가서 그냥 손님이 다 끊어지더라고. 처음에는 그냥 막 새카맣게 앉아서 사람들이 보고 대박 났다고 난리 났더랬거든. 근데 불(전기)이 나가니까 여름에 더워 죽겠는데, 누가 고기 먹어? 불 나가니까 에어컨이 꺼져서 그냥 다 빠져나가는 걸. 그래서 그냥 그 자리 다시 넘긴다고 호프집을 차렸지. 그랬더니 그게 뭐 되냐?! 그때 또 IMF가 왔어. 그래가지고 아주 속 썩어가지고 손해는 많이 안 보고 넘겼는데 그때 그러고 나서 안 했어요. 
엄마가 많이 아프고 그래서 들락날락하면서 농사를 지었나? 그러면서 이제 엄마 돌아가시는 바람에 우리가 그냥 들어앉은 거지. 그러다 시어머니도 다시 아프시고, 시어머니도 90이 다 돼서 모셨으니까. 내가 인천 가서 그래도 오래 사셨지. 내가 집도 짓고 했으니까. 우리 시어머닌 그래도 나 때문에 나오셔서 호강하다 돌아가셨어. 
내가 인천 만수동에다 3층 집을 지었거든. 3층 집에서 살다 돌아가셨으면 호강 했지 뭐! 여기서(영종도) 안 돌아가시고 3층 집에서 돌아가셨으니까. 돌아가시고 더 있다가도 그냥 왔다 갔다 하고 내가 농사지으러 다녔어요. 그러다가 이제는 힘들어서 못하니까 우리 먹을 곡식만 조금씩 해서 먹고, 애들도 돈 들어갈 데도 없잖아. 그러니까 신경 안 쓰고 지금이 제일 좋을 때 같아. 
돌아가려면 안 돌아간다니까. 내가 오죽하면 이제는 내 마음이야. 여태까지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어. 한 10년 전부터 너무 힘든 거야. 내가 다 쓰러져 가는 집 고치고 내가 들어와 엄마 살게 해드리니 편안한 거지. 내가 이제 와서 고칠래 봐? 죄짓는 것 같은 거야. 내가 거기 3층 지으면서 엄마한테 죄짓는 것 같더라고. 
엄마 나이 88세에 돌아가셨어. 88세에 돌아가셨는데 뒤돌아보니깐 입식에서 한 번도 못 살고 재래식 부엌에서 사신 거야. 그래가지고 내가 한이 될 것 같더라고. 내가 여기 땅(영종도) 팔리면 엄마 다 이렇게 고쳐주고 산다 그랬는데, 엄마는 나를 안 기다려줘요. 그래서 벌써 이거 고친 지가 8~9년 됐나? 거의 10년이 다 돼가네. 이거 고친 지가. 그래도 고쳐갖고 엄마가 좀 살다 돌아가셨으니까 나는 엄마한테 이제 아무 후회도 없어. 우리 엄마가 저기 싱크대 서서 음식할 때 이거(싱크대)를 고쳐드렸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요양사가 오면서 한 게 내가 한이 되는 거야. 
지금은 그냥 별장(영종도 집)으로 쓰는 거지. 나 인천이 있고 이제 애들이 왔다 갔다 하고, 뭐 아들들이 또 누구하고 온다면 친목계도 여기서 하고 그런 식으로 그냥 쓰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이제 여기가 또 옛날처럼 그렇게 배 타고 다니고 그러면은 살기 싫어. 지금이 좋아.

 시민기록일지
* 면담일시 : 2023년 10월 11일 11시
* 면담, 원고정리 : 이혜숙
* 면담지원 : 조연희, 박인옥, 양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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