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국철강공업의 만능해결사
인천기계산업단지를 기록하다`
작성자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5.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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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철강공업 경영총괄 이사

강병욱(1958년생) 

1985년 부국철강공업 무역부에 입사한 직후 인천공장으로 내려와 근무한 지 40년이 되어 간다. 현장과 영업 일선을 오가며 산업역군으로 종사한 강병욱 경영총괄 이사는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부국철강의 해결사로 지금도 열심히 뛰고 있다.

 


 

도서관 사서에서 제조업으로, 청년 강병욱의 선택

저는 원래 원광대학교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했었어요. 84년도에 딱 1년간 도서관 사서 일을 하다 ‘남자가 도서관에서 있어야 될 청춘은 아니다.’ 싶었습니다. ‘제조업 쪽에 일을 한번 해보고 싶다.’ 생각해서 지인의 소개로 85년도 3월 1일 입사해서, 86년도에 결혼하고 지금까지 부국철강공업에 재직하고 있습니다.제 인생은 군대 가서 바뀌었죠. 1년 동안 함상(艦上) 생활, 배를 타다가 한 2년을 대방동 해군 본부에서 장군 당번을 하게 됐어요. 그 장군님이 백석기 제독이신데 인천고등학교 출신이고 협성대학교 총장을 하신 이후,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하시고 전역을 하셨어요.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시고, 한국출판협회 회장, 세계출판협회 부회장도 하셨어요. 그분이 36년생이신데 돌아가신 (부국철강공업) 장영상 회장님하고 인천고등학교 54회 졸업 동문이에요. 제가 장군님을 2년 동안 모시고 있다가 대학 마지막 학기를 졸업하고, 원광대학에 공채로 들어갔는데 대학도서관 세미나로 부산을 가게 됐었죠. 그 장군님이 부산 해역사(해역사령부, 海域司令部) 사령관으로 가 있어서 그날 저녁에 사령관 관사에서 같이 저녁 식사하고 그러다가 “거기 근무하는 게 어떠냐, 환경이 어떠냐?” 그러셔서 “저는 사실은 장남이고 외아들이고. 그래서 전라도 쪽에서 사서로 근무하는 게 정상 직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말씀드렸더니 거기서 바로 우리 장영상 사장님한테 전화를 하셨어요. 제 자랑 같지만 우리 사령관님이 “내가 이 친구를 자네한테 소개시켜 주면 내가 도움을 주는 거지 자네한테 인사 청탁하는 거 아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고(웃음). 이 분(장영상 사장님)이 해군 본부에 계실 때 몇 번 오셨어요. 그래서 제가 정문에 가서 비표(祕標) 달아 드리고 사무실에 모시고 그래서 안면이 있었죠. 
부국철강에 와서도, 한 1년 10개월 만에 유례없이 대리 진급을 빨리하게 됐었고. 그분도 또 삼성 장군, 쓰리스타까지 하셨어요. 그래서 그 돌아가신 장영상 사장님이 저한테 먼저 “야 그 백 제독 별 세 개 달았더라.” 이렇게 말씀하셔서. 굉장히 즐거웠죠. 사실은 지금까지 저의 멘토죠. 삼성 장군이 돼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아주 모범이 되는. 

이사님, 연세는 어떻게 되세요?

저는 58년 개띠입니다. 지금 우리 나이로는 66세고 호적상으로는 60년생으로 2년이나 늦게 돼 있는데. 원래 나이는 58년, 77학번. 저는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라 우리 안동고등학교 선배들이 육군사관학교를 한 10명, 12명 이렇게 들어갔었어요. 제가 박정희 대통령 아들 박지만하고도 동갑이고, 그때는 육사가 굉장히 좋은 학교인 때였죠. 그런데 호적이 2년 늦게 돼서 고등학교 졸업하던 때가 16세밖에 안 돼요. 육사는 18세가 돼야 하는데 못 갔죠. 그래서 재수하면서 종로 2가에서 학원 다니면서 술, 담배 배우고 육군사관학교 떨어졌죠. 그런 바람에 결국은 일반 대학을 2년 늦게 들어갔어요. 옛날에는 도서관 학과인데 요즘은 문헌정보학과가 되겠죠. 도서관학과는 실력이 없으니까 갔죠.(다들 웃음) 요즘도 누구 만나면은 나 60년생 아니라고, “나 58년 생인데.” 고등학교 졸업 명부, 졸업 연도 77년도 하고 사진을 찍어서 갖고 다니면서 보여주죠.(웃음)  

입사 초기 부국철강공업과 기계산업단지의 모습

장영상 사장님은 87년도에 돌아가셨어요. 지금은 동생이신 장영훈 사장님이 대표이사를 맡고 계시죠. 창업주는 아버님이신 장범진 회장님이시고요.
부국철강의 전신이 ‘인천강업합자회사’라고, 52년도부터인가 저기 옛날 동부경찰서 자리, 지금은 거기 주상복합 지었는데, 송림동 청과시장이라고 1,200평 정도 되는 땅이 있었어요. 거기서 이 회사의 전신인 못 공장부터 시작해서 69년도에 기계산단에 공간 조성이 되면서 72년도에 여기 6천 평을 매입해서 시작했죠. 공장은 이렇게 그때 모습이나 지금 모습이나 똑같습니다. 그 모습이 땅도 똑같고, 건물도 지금 이 모습이고. 단지 달라진 거는 요 앞에 복리후생관 건물을 제가 와서 86년도에 지었어요. 

이사님 재직 당시 85년 즈음에는 기계산단에 몇 개 정도 회사가 있었나요? 규모가 좀 있지 않았나요?

인원은 지금보다 몇 배가 많았죠. 지금은 3천 명 된다는데 옛날에는 엄청 많았죠. 예비군 대대가 있었고 그랬었으니까. 그때 경동산업, 서울제강 인원이 굉장히 많았어요. 85년도에 버스 타고 인천교에서 나가면은 경동 키친아트에서 아줌마들하고 인천교 여기가 복작복작했었어요. 그리고 인천교 다리 밑이 85년도에는 밀물 썰물에 물이 저 십정동까지 들락날락했어요. 갯골이었어요. 망둥이 낚시하고 그랬죠. 이 인천교 겨울바람이 유명했습니다. 엄청 추웠어요. 그러다가 여기도 다 개간을 한 거죠. 인천의료원 삼거리에서 경동 키친아트 가는데 그게 다리였어요. 다리 교각이 있었고 그 밑에가 갯골이었죠. ‘개건너’ 라고 그랬어요. 거기서 서울제강까지 올라가는 갯골 그거였었죠. 

청년 강병욱의 눈에 비친 이 기계산단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여기요? 대단했죠. 제물포에서 내려서 경비실에 와서 우리 부사장님 이름을, 그때는 부장이었으니까 “장영복 부장님 만나러 왔습니까?” 경비실에서 안내해 주더라고요. 
붉은 쇠들이 막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고 기계 소리 나고 현장에 사람들 막 깔려 있으니까. “야! (감탄하는 표정으로)” 처음 봤잖아요. 현대제철, 포항제철 이런 것도 본 적이 없고, 도서관에만 있다가 와서 보니까 어마어마하더라고, 사무실에서도 시끄러워. 기계 돌아가는 소리, 인터폰 하는 소리, 현장에 출고차 들락날락하지. 여기 앞에 계근대가 있거든요. 계근대서 여직원이 계속 세금 계산 수작업으로 하고 있고, 여직원들이 5명 앉아서 월급 계산하고 영양사 있고. 우리 2층이 다 식당이었거든. “야, 일할 만하구나.” 그랬어요.

입사 당시에는 어떤 부서로 오시게 되었나요?

마포에 영업부하고 무역부가 있었어요. 저는 원래 영어 원서 번역하고 그랬으니까 무역 영업 쪽으로 갈려고 서울사무소에 올라가서 사장님을 만났는데 일단은 “영업 무역을 하려면 인천공장을 가서 공장을 좀 알아야 된다. 현장에서 1개월 정도만 공장의 루틴을 좀 보고 와라.” 그러셔서 인천공장에 내려왔는데 지금 부사장님한테 잡혔어요. (모두 웃음) 
“얘는 여기 데리고 있을 테니까 서울에 한 명을 더 써라.” 그래서 인천에 그냥 이렇게. 안 그랬으면 서울의 영업 무역했으면 지금은 우리 회사 영업 출신들이 나가서 다 철강들 대리점도 하고 돈 많이 벌었지. 자기 사업도 하고. (웃음)  

기계산단에 입주할 때 생산라인은 해외에 의존하지 않고 전부 독자적으로 개발하신 건가요?

29년생으로 고향이 함경도 흥남부두 그쪽인데 내려오셔서 그때 당시 공무과장이었던 분이 계세요. ‘인천강업’ 때부터 공작반원으로 들어와 공작반에서 기계를 연삭하고 했던 분인데, 그분이 초등학교만 나오셨는데도 코탄젠트 이런 걸 알아요. 그래서 도면을 그리면서 롤 회전 이런 거를 산출하더라고요. 이론적인 건 없는데, 그냥 뚝딱거려서 만들고 이런 부분들이 있었어요, 롤 공형만 만들면 쇠가 나오는 걸로. 이런 실력이 있던 분이라서 굉장히 독보적인 존재였죠. 그러니까 우리 장영상 사장님이 그분한테 많이 의존을 했죠. 그러니까 인천이 부둣가 쪽으로 배 수리하는 데가 많잖아요. 선박공으로 조그마한 거 연마하고 연삭하고 이런 정도로 하다가 그분은 생산설비 그쪽으로 공무부의 최고 책임자였고 밑에 차장, 과장들은 가열로라든가 환경, 방진, 집진시설 같은 거 이런 쪽을 맡아서 했어요. 기계 쪽에 제품 개발하고 이런 거는 그분이 다 하셨잖아.우리가 여기에서 생산라인 설비를 하면서 필요한 부분은 그때 인천제철이 외국에서 고철 배를 들여와요. 그러면 여기서 ‘쌀베지(샐비지,salvage)’라고 해서, 저기 지금 100주년 기념탑 옆에 옛날에 큰 사우나 하나 있었죠. 거기에서 경인방송 쪽으로 오다 보면 조그마한 다리 하나 있죠. 옆에 바닷물 들락날락하는  데. 거기에 쌀베지(salvage)라고 고선박 해체하는, 외부에서 폐선 갖고 들어오면 거기 바다에서 선박 해체를 해요.
그 선박을 해체해서 나오는 철판들을 재료로 잘라서 쓰는 데가 많았죠. 그 선박을 하나 사 오면은 쉽게 말씀드리면, 소 한 마리 잡으면 간이며 뭐 다 있잖아요. 선박을 해체하면 그 안에 모타, 심지어 냉장고 같은 부품들 있잖아요. 이 양반이 나가서, 고철 같은 거 사 오면 “우리 저기에 넣으면 되겠네요.” 이렇게 해서 만드신 분이에요. 대단했죠.

80년대 부국철강공업의 성장 
80년대 부국철강이 가장 왕성하게 생산 활동을 하던 때잖아요. 노동 시간도 그렇고 직원들 수당이나 이런 체계가 어떻게 됐었나요?

그때는 비근한 예로 현대제철보다 우리가 임금이 많았었어요. 그래서 우리 가열로 분들이 현대제철에서 여기 우리한테로 들어왔었어요. 그때 당시는 우리 장영상 사장님이 굉장히 공격적으로 경영을 하셨어요. 미국 다니시면서 원재료도 크게 갖고 오시고. 그러니까 인천에서는 장영상 사장님이 영진공사 이기상 사장님하고 인천에서는 몇 안 되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경영주였던 분이에요.  

84년도에 500만 불 수출탑 수상을 하잖아요. 그때도 장영상 사장님이 계셨던……

예, 그 시기에 가장 활발하게 돌아갔었죠. 3개 공장이 있었고. 부서가 5개 부서예요. 그러니까 3개 공장은 주간을 하고 2개 공장은 야간 공장을 돌렸어요. 생산량이 한 6만 톤에서 7만 톤. 그때가 직원들이 300명 정도 됐죠.

정부가 그때 당시에 이렇게 철강업 자체를 좀 많이 독려를 했었잖아요.

그랬었죠. 국가 기간 산업이었고 그랬으니까. 이 철강이 쉽게 말하면 유행을 안 타요. 100년 전에 철근이 지금도 똑같잖아요. 생긴 게 똑같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유행을 안 타니까 안정되기는 했는데 이 철강석 재료 가격이 몇 년 전에는 110만 원 하다가 지금은 90만 원, 85만 원 이래요, 철근 가격이. 

부국철강공업의 주된 생산품들

가장 많이 생산하던 제품이 형강(形鋼) 제품인가요?

네, 그때도 형강입니다. 미국 수출을 많이 했어요. 그게 효자 상품이었는데, 지금 사장님(장영훈 사장님)이 미국 지사장 나가 계셨었고. 그때는 정말 잘 나갔었죠.

그 당시 기계산단 내에 동종 업계들도 경쟁이 심하고 이러지는 않으셨나 봐요.

왜냐하면 공장마다 쇠를 쉽게 못 만들어요. 그냥 밀가루 반죽하듯이 안 되고. 그러니까 ‘동방제강’이라고 여기는 레일만 만들었어요, 광산에 들어가는 레일. 서울제강 같은 데서는 앵글 같은 거, 이런 걸 만들고. 서로가 조금씩 달랐죠. 그래서 그렇게 경쟁은 안 됐어요. 우리는 이제 소량 다품종으로 만들었죠. 이 양반이(흥남 출신 공무부장님) 기술이 있으니까. 이따가 저기 샘플 한번 보시면 아시겠지만 굉장히 많아요, 다양해요. 쇠로 그렇게 한 번 만에 찍어내는 것도 아니고 주물도 아닌데. 이걸 가열로에서 1,150도로 쇠를 익혀가지고, 13번 패스를 왔다 갔다 해서 쇠가 나온다는 거는 대단한 그런 기술이죠.주요 생산품에 채널이 있죠, 일본식으로 발음으로 찬넬. 돌아가신 분도 잔넬, 잔넬 그러시고. 채널이 통로잖아요, 배수로 통로 이런 걸 찬넬이라고 그러는 거죠. 이게 6m짜리로 그냥 이 제품이 이렇게 이런 모양(손가락으로 ㄷ자 모양을 만드시며)으로 6m까지 나가는 거예요. 이런 제품은 디귿 자로 이렇게 생겨 있으면 이걸 보통 엎어놓고 많이 쓴대요. 이렇게 (종이로 ㄷ자 모양의 채널 모형을 만드시며) 이렇게 놓고 쓰는데 기계를 올려놓으면 이게 굉장히 힘을 많이 받아요. 그런 찬넬을 지금 평철 같은 걸로 이렇게 포밍으로 접어서 쓸 수도 있는데, 얘는 지금 가운데가 조금 더 두꺼워요, 채널이.(직접 ㄷ자 모양의 철근 제품을 가져오셔서) 이거를 채널이라고 그러거든요. 이게 50mm, 얘를 이렇게 (⨅모양으로) 세워서 이 위에다가 공작기계 같은 거 설치하면 힘을 되게 받아요. 저희들이 미국에 이 채널을 수출을 많이 했었고, 지금도 이 제품은 국내에서 철근 가격의 2배를 받아요. 이렇게 가운데를 두껍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이 큰 거는, 이거 배(두 배) 되는 거는 만들기는 쉬워요. 동국에서도 나와 있는데 동국에서 이렇게 얇은 거는 못 만들어요. 얇아서 이게 13 패스를 거치면 롤 파손이 와요. 쇠가 식어버리면서 감겨버리니까.

13 패스라는 게, 그러니까 13번 왔다 갔다 하면서 이게 만들어진다는 거죠?

이게 한꺼번에 나오는 게 아니고 빌렛(billet)이라는 큰 쇠를 1,150도에서 가열로 익혀서, 계속 13 패스를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면서 처음에는 사각으로 나왔다가, 한 패스 나오면서 85% 형상을 갖추고 이렇게 나왔다가 그다음 패스에서 약간 모양을 좀 더 갖춰서 나왔다가, 마지막에는 완전히 이런 제품이 나오게끔 이 롤 만드는 기술을 김 전무님이 갖고 계셨던 거예요. 이 쇠가 여기 들어가서 다음 패스, 2공장에 들어갔을 때는 이게 20%를 누른다든지. 압축을 너무 많이 줘 버리면 롤이 파손이 되잖아요, 공형에. 그래서 압축하는 방향이 다 다른 거예요. 그래서 완제품 나오기까지 이 통 빌레트가 들어가서 여러 가지 공형을 거쳐서 나오는 거죠.

기본 빌렛은 어느 나라에서 수입해 오셨어요?

90년도에는 러시아에서 많이 샀죠. 그다음에는 중국에서 샀죠.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배가 들어오니까. (들어오는) 시간도 좀 짧았었고 그래서 월 한 5천 톤씩 사서 썼었어요. 배가 인천항으로 들어와서 작업을 하면은 며칠씩 그냥 여기 들어오고, 그래서 중소기업 중에서는 굉장히 바빴었죠. 우리가 이 공단에서는 독보적이었었죠. 저 서울제강, 동방제강, 우리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었죠.

스테인리스도 생산하시잖아요. 스테인리스를 생산하려면 생산기술 라인이 또 따로 있어야 되는 거죠?

그게 또 이 양반 기술이었죠. 스테인리스는 일반 쇠 중에서 니켈 함유량이 많아요. 니켈은 찐득찐득한 성질이 있어요. 스테인리스는 이론적으로 모타 회전이 빠르면 안 된다고 그랬었고, 쉽게 말하면 가열로에서 열을 가해 쇠를 서서히 쪄야 돼요. 일반 쇠는 빨리 익혀갖고 빨리 끄집어내갖고 회전을 빨리 해야 얘가 안 식으니까 제품을 만들어낼 수가 있잖아요. 근데 스테인리스는 그게 아니고 서서히 쪄서 서서히 회전율이 낮은 모터로 해가지고 천천히 이렇게 뽑아내야 돼요. 근데 이 양반이 결국은 스테인리스를 했어요. 우리 2년 전에 문 닫을 때까지 스테인리스를 생산해서 판매를 하고, 지금 재고도 갖고 있죠. 
우리가 1972년부터 한 1990년까지는 일반강을 했었고, 90년부터 한 97년도, 2000년도까지는 플랫타이라고 건설 현장에 들어가는 평철을 생산을 했었어요. 2000년도에는 스테인리스를 생산하는 후처리 공장을 지으면서 스테인리스를 하는 그런 변화가 있어갖고 지금까지 버티고 왔었죠. 

인천기계산단이 당면한 문제와 구조고도화의 필요성

그래서 지금 뭐 잘 아시겠지만, 여기 기계공단은 원체 낙후가 돼가지고 “커피 한 잔 먹을 데가 없다.” 젊은 사람들이 안 온다는 거지. 그리고 법적으로 여기 식당이 지금 못 들어오게 돼 있어요. 공단 자체의 규약이 그렇게 돼 있어요. 그래서 지난번에 시장 만나갖고 얘기하고 이래서 전국 최초로 인천기계 산단을 재생 사업한다고 5년 안에 돈 준다고 그러고. 이렇게 경제신문 나오고 우선적으로 푸는 게 뭐냐 하면은 공원, 커피숍, 주차장. 그게 없으면 젊은 사람들이 일을 하러 안 온다 이거예요.그러니까 이게 이쪽 옆으로 보면은 아침 8시에 출근하는데 6시 반 이렇게 와서 차 세우려고. 남동공단도 아마 그럴 거예요. 바뀐 게 하나도 없습니다. 초기에는 여기가 오히려 주물이 있었어요. 지금 주물 못 들어와요, 여기 있는 업종은 어쩔 수 없이 놔뒀는데 나가고 난 뒤에는 다시 못 들어오지, 공해 때문에. 주물하고 도금공장도 나간 지 한 2~3년 됐어요. 초창기부터 있었지만 못 들어오죠. 새로운 업종 들어오려면은 조그마한 선반 놓고 이렇게 하는 업종이 들어오지.
 

그러면 이 넓은 부지를 나눠 써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요?

좋은 말씀이신데, 저희들이 업종 변경하는 게 결국은 물류창고를 지으려고 그랬거든요. 지금 허가는 났어요. 허가를 저쪽에서 좀 늦게 내주다가 보니까 우리가 원하는 허가가 아니에요. 여기 업종 제한을 이렇게 해놨는데 ‘구조고도화’라는 게 있어요. ‘구조고도화’는 그야말로 용도 변경을 해주는 거야. 쉽게 말하면은 일반 지역에서 산업 지역으로 변경을 해주는 거죠. 근데 이게 공단에는 이 구조고도화라는 게 있는데 이걸 해야만이, 우리가 예를 들어서 창고를 지을 수가 있어요. 이 창고를 짓는 우리 목적이 보관업을 하는 창고가 있고, 3PL(제3자물류)이라고 해서 우리가 쿠팡에 임대로 창고를 줄 수 있잖아요. 
근데 여기는 공단이기 때문에 우리가 창고 보관업을 하는 거는 괜찮은데, 쿠팡이 들어오는 거는 안 된다는 거지. 이걸 하려면은 구조고도화라는 트랙을 받아야 되는데, 이 구조고도화의 시행권자가 인천시에요. 그래서 작년에 우리가 시 산업정책과 가서 참 숱하게 싸우고 해갖고 받았는데 결국은 부적격으로 나왔어요. “왜냐, 하필 왜 기계공단에 제조업을 해야 되는 업체에서 이 쿠팡을 넣으려고 그러느냐? 서비스 업종에 3PL 넣으려고 그러느냐?” 이래 돼 가지고. 그래서 이걸 하게 되면 한 25%, 우리가 한 40억에서 50억 정도 개발 이익금을 낸다고 그랬어요. 근데 그것도 안 들어주더라고. 그래서 결국 허가 낸 게 창고 보관업으로 그냥 냈어요. 이거 팀장 하나, 사무관 하나가 안 된다고 그래갖고 결국은 못 한 거예요. 이거 2,400억 투자해서 창고 이거 짓는 걸로 그림 그리고 다 했었어요.지금 여기 8층 건물에 한 3만 3천 평 물류창고 지어갖고 교통영향 평가받고 다 했는데, 이 경인고속도로, 일반화도로가 되면서 2.5톤 이상 화물차 못 다닌다고 그래갖고 또 완전 개판 됐죠. 저 도로 어떻게 나시는 건 아시죠? 저게 지금 8차선 도로인데 4차선으로 만들고, 가운데 공원 만들어요. 그렇게 만들면서 이 공단은 생각도 안 하고 그냥 화물차 못 다니게 만들어갖고. 지금 정문이 저쪽(인천대로 방향)으로 나 있는 곳들은 화물차 못 다니면 어디로 들어가요, 못 다니지. 근데 10.45km 구간, 거기에 공단이 차지하는 건 불과 몇 프로 안 된다. 이거야. 그러니까 그 공단 구간은. 화물차는 봉수대로인가 현대제철 앞으로 다녀서 외곽으로 서울 다녀라 이거지. 이쪽은 완전히 시민의 쾌적한 숲 조성 이런 목적이기 때문에. “그러면은 공단을 바깥으로 빼라. 시에서 땅 사고.” 그거는 또 못하는 거지.그러니까 지금 이 기계산단이 사실은 전부 다 슬레이트 건물 다 썩었잖아요, 이거. 시에서 봤을 때도, 지도 펼쳐놓고 보면 남동공단, 국가산단들은 잘 돼 있는데 기계단지하고 일반 산단, 차라리 인천의료원 저쪽 옆으로는 일반 산단이니까 좀 괜찮아요. 샌드위치 판넬, 요 근래에 짓는 거라.이게 272억이 뭐냐 하면 주차장 짓는 거 그런 거지. 개인 사업장한테 돈 주는 게 아니에요. 구조고도화를 하면, 우리가 2,400억을 들여서 하면은 이익금 산출을 한단 말이에요. 창고 임대료가 얼마가 들어오면 얼마가 남을 것이다. 그럼 예를 들어서 매각을 하면은 2,500억이 된다. 그럼 100억이 남잖아요. 그러면 법적으로 25%, 25억을 개발 이익금으로 내야 돼요. 근데 그게 25% 내 갖고는 콧방귀도 안 뀌어요. “무슨 소리냐.” 25%면, 최하 40%~45%는 내라는 거지.

기계공단이 당면한 문제들과 앞으로의 방향

이사님 견해는 어떠세요? 저희 기계산단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된다고 생각하세요?

기계 산단은 우선적으로 일반공업 지역을 준공업 지역으로, 업종 자율화가 되어야 해요. 준공업 지역이라는 거는 쉽게 말해서, 경공업처럼 가벼운, 제조가 아닌 업종도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주물공단이던 서부산단이 준공업 지역으로 바뀌었어요. 서부산단이 주물공단일 때 청라 사람들이 굉장히 불편한 걸 많이 느껴갖고 서부산단 자체에서 청라로 다니면서 설문조사를 하고 연판장을 돌렸어요. (그 결과) 청라 주민들이 전부 반대했어요. “그 봐라, 우리 공단 여기에서 못하겠다.” 그래서 이 주물공단을 준공업 지구로 바꾸면서 땅값이 3배가 올라간 거예요. 주물공단은 나가는 걸로 하면서 거기에 지금 LG 있죠? 공항 가다 보면 경서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은 LG 큰 거 하나 있잖아요, 좀 지나면 KB금융 있고. 거기가 주물공단 자리였는데 지금 완전히 바뀌어 갖고.10년 전에 시청에서 우리한테 지식산업센터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은 “은행도 하나 놓고, 주유소도 놓고, 땅은 넓으니까 된다.” 라는 거야. “야 지산(지식산업단지) 지어갖고 그럼 우리 철강을 해야 되는데, 철강을 어디서 하냐?” 그래갖고 얘기가 깨졌었어요.

재직하시며 느끼신 감회와 희로애락의 경험들
부국철강의 역사를 같이 하셨는데 남다른 감회가 있으시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85년도부터 봤었죠. 물론 기쁜 일이라면 직원들 300명이 부서별로 가족 야유회 가는 거 다 따라다니면서 부부 동반으로 봄가을 두 번씩 관광버스 해갖고 버스에서 놀고, 그때 반장 부인, 직원 부인들이 음식 다 만들어가고 그랬어요. 그때는 또 저희들이 집들이가 많았었어요. 아파트 사가지고 들어가면 뻐꾸기시계 3만 5,000원짜리, 시간 되면 나오는. (모두 공감의 웃음) 그런 그 인간관계들 그런게 재미가 있었고. 송도 안에 유원지 빌려서 송창식 가수 불러다 놓고. (부사장님을 가리키시며) 저분하고 송창식이 중학교 동창이세요.

저희들이 5월 말 법인이었는데 그해에는 물건이 하도 많이 나가고 발주가 많아 결산을 두 번 했어요. 5월 말, 12월 말로 해갖고. 그러고 난 뒤 12월 말 법인으로 바뀌었죠. 그게 20년이 채 안 됐을 거예요. 그런 보람이라면 그런 거. 부산 영업하러 다니면서 “이거 진짜 몇억 남는 오더다. 이거는 괜찮다.” 돌아와서도 큰소리칠 수 있는 그런 영업을 하면 그런 뿌듯했던 기억도 있어요.아픔이라면은 우리 현장에서 사망 사고도 생겼고. 가족들 와서 술병 깨서 나한테도 덤벼들고. 결국 내 입에서 합의금 얘기가 나가야 되니까 그게 좀 가슴 아팠죠. 그때는 말씀드렸지만 5개 부서가 주간, 2개 부서 야간에 있어서 숙직을 했었어요. 숙직하다가 숙직실에서 갑자기 죽은 내 동료도 있고. 그 친구가 나랑 동갑내기인데 같은 해에 결혼을 하고, 같은 가좌동에서 살고, 같은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고, 저녁 먹으면은 걔들 부부랑 우리 부부 걔들 집에 하루 갔다가 내 집에 하루 갔다가. 그때는 신혼 때 가좌동에 단독주택에 이렇게 돌아가면 문 하나 있고 부엌 있고 그게 다였잖아요. 화장실은 바깥에 있었고. 주인집은 (화장실이) 안에 있고 단독주택들이 이렇게 돼 있었잖아. 그 친구도 거기 그런 데 살고, 나도 결혼했던 첫해에 거기서 살았는데. 숙직하다가 1월 3일날 시무식 하러 왔는데, 1월 2일날 야간에 그만…… 참 많이 울었죠. 기독병원에서 부검도 하고…… 그리고 산재 사고 나서 참 가슴 아픈 적도 많았고.

 

시민기록일지

* 면담일시 : 2023년 8월 31일 15시

* 면담, 원고정리 : 허은영

* 면담지원 : 표기자, 양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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