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설계에서 기계 영업까지
인천기계산업단지를 기록하다
작성자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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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기계(주)
이진우 (1954년생)
전라북도 군산에 태어났다. 매형의 소개로 해안기계에 입사하게 되어 인천으로 오게 되었다. 해안 기계의 기계설계부에서 근무하다 영업부로 발령을 받고 영업업무를 담당하였다. 이후 40대 초반 기계 설계 및 개발을 위해 이직을 하였다.
 
해안기계에 입사하다 

군산에서 태어나서 쭉 생활하고 있는데, 인천에 있는 매형의 권유로 해안기계 면접을 보고 입사했어요. 입사할 때는 기계설계부에서 기계설계 업무를 했고, 이 일에 만족해서 재미있게 회사 생활하며 인천에 자리를 잡았죠. 

해안기계의 설립 과정에 대하여 알고 있는지요?

제가 듣기로는 1975년 이영철 대표와 김정일 전무가 ㈜한독제지 동료로서 마음이 맞아 사업을 같이 해보자고 해서 당시 인천기계산단에 있는 해안정밀(연탄 만드는 기계 제조업체)을 인수해 시작하기로 했다고 해요. 그 과정에서 풍림산업 이필호 부사장과 만나 같이 논의 끝에 해안 기계를 인수하고, 이필호 부사장이 해안기계 대표이사로 취임했다고 알고 있어요. 이필호 대표이사는 국방과학연구소 선임 연구원이었는데 서울대 금속공학과 학부를 나온 분입니다. 

해안기계의 주 생산 품목에 대하여 말씀 해주세요. 

해안기계는 기계부와 주조부로 나눠져 있는데, 기계부는 제지기계 제작을 해서 전국의 제지 공장을 거래처로 기계 영업을 하여 납품했고, 주조부에서는 제철 업종에 주물을 가공하여 납품을 했어요. 제지업체로 전국에서 알아주는 업체로 성장을 했어요.

기계를 제작·납품 하면서 기억나는 일이 있나요?

해안기계는 큰 공사가 81년도인가 방글라데시의 시가네테페이퍼라는 회사 턴키(turn key) 베이스로 250만 불짜리 프로젝트를 수주하는데 성공을 했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수준으로서는 획기적이었습니다. 대우실업하고 일을 많이 했는데 방글라데시의 요즘 우리가 얘기하는 ‘마’ 있지 않습니까. 주트라는 삼 계통의 식물인데 그걸로 담배 종이를 만들었습니다. 쥬트 페이퍼(zoot paper)라고 성공을 했습니다. 지금은 250만 불 아무것도 아는지만은 그 당시로는 상당히 큰 공사였습니다. 
그때 한국에서 직원들이 파견 나가 5~6개월을 상주하며 설치 운전을 했는데 방글라데시의 형편이 안 좋고, 후진국이다 보니 콘크리트를 부을 때 사람 손으로 대야에 콘크리트를 받아 머리에 이고 붓는 식으로 공사를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중요 운전 요원들은 한국에서 차출해서 그분들이 가서 몇 년씩 근무를 했습니다. 
설치 시운전을 하는 인원들은 한국이 그립고 한국 음식이 생각나기에, 기계를 보낼 때 우드박스 패킹을 할 때 그 안에 라면, 소주, 고추장, 된장 같은 것을 기계 보낼 때 같이 보냅니다. 별도로 박스에 잘 포장해서 보냅니다. 거의 상하지 않는 거기 때문에 한 달 뒤에 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기계를 방글라데시에 보낼 때 어느 화물로 이용을 하시나요?

㈜대우와 일을 했기 때문에 ㈜대우가 선사를 선정해서 배편을 이용했으며 배편에 따라서 부산 아니면 인천에서 선적을 합니다. 부산까지는 화물차로 이동을 하는데 수인산업도로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고속도로망이 조성이 되기 전에는 인천에서 부산을 가려면 오산IC까지 가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가지고 갔기 때문에 사고도 많이 났었어요. 
저희 직원들이 현장에 가서 설치할 때 저는 기계 부품을 만들고, 납품을 할 때 기술부 직원이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한 번은 79년도 신입사원 시절에 평택 쪽 지금의 고덕지구 삼정펄프(주) 라는 데에 제가 한번 따라간 적 있어요. 그때는 8톤 차면 큰 차였지요. 요즘은 뭐 25톤도 있지만요. 그 차를 타고 저는 화주(貨主) 의 자격으로 평택을 가는데 만수동 고개부터 차가 올라가지 못해요. 고개만 나오면 힘드니까 기사가 반월IC 좀 지나 수원 좀 못가서 신일 선풍기 회사가 있는 정문 앞에다가 차를 대고 수원에 가서 정비공장 직원을 태우고 점검을 받아보니까 메탈이 눌어붙은 겁니다. 쉽게 말해서 베어링 메탈이 눌어붙어서 협착이 돼가지고 저 혼자 비 오는데 차에서 하룻밤을 잤어요. 화주니까 차에 실린 기계를 지켜야 되니까요. 차주는 그 다음날 와서 결론을 내기를 폐차하기로 했다는군요. 엔진을 가는 비용보다는 폐차가 낫겠다 해서 다른 차하고 레카차를 불러 짐을 옮겨 평택까지 갔습니다.

제작한 기계가 차선보다 클 때도 있을 텐데 그때는 운송을 어떻게?


주로 저희 단골 화물차 컨택을 해서 새벽에 차 없을 때 저희 차가 앞뒤로 캄보이해가지고 새벽에 갔습니다. 그 안에(차량과 차량 사이) 못 들어오게끔 그렇게 하고 갔습니다. 차가 별로 없는 새벽 한 4시 정도 움직이면 딱 좋습니다.

보통 기계의 무게가 얼마쯤 되나요?

저희는 현장에서 뛰는 법이 없습니다. 다 쇳덩어리라 뛰다 부딪히면 골절을 당합니다. 크레인이 10톤, 5톤으로 저희가 공장에서 들 수 있는 단위 무게가 한 15톤 정도 되니까 기계 전체로 하면 수백 톤 됩니다. 그런 것들이 다 조립이 되면 제조 공장 같은 경우는 기계가 처음부터 끝까지 라인이 100m가 넘습니다. 기계 부품이 조립이 되면 완성된 기계는 운반해 현장에서 조립하고, 설치 시운전을 합니다.

업무를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기계설계를 하다 보니 컴퓨터가 없는 시절이고 아날로그 시절이니까 다 손으로 도면을 그렸습니다. 당시는 연필로 설계도면을 그렸습니다. 제가 혹시 싶어서 그때 그 연필을 한번 가져와 봤습니다.

45년 전에 제가 도면 그릴 때 사용한 연필인데 뒤져보니까 몇 개 있더라고요. 그때는 컴퓨터도 없고 손으로 도면을 그렸고, 샤프 펜슬도 없었습니다. 연필을 깎아가지고 연필통에 넣고 다녔습니다. 

해안기계 이진우 도면을 그렸던 연필들


도면은 선으로 그려지고, 선의 굵기나 선의 형태에 따라서 도면을 그리다 보니까 4B는 찐한 거 4H는 연하고 단단한 것, 가는 것 할 때는 HB로 쓰죠. 지금은 도면은 안 그리지만 기계 쪽 일을 하니까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 갖고 있었습니다. 
도면은 트레싱 페이퍼(Tracing paper)라는 우윳빛 나는 종이에다 도면을 그려가지고 청사진을 떴습니다. 복사기가 없으니까 청사진 도면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하나의 필름에다가 도면을 그렸다고 보시면 돼요.

기계 설계를 하다가 영업부로 보직을 변경하게 된 계기는 있나요?

그전에는 특별히 영업부라는 게 필요 없었습니다. 김정일 이사님이 나중에 상무로 진급을 하셨고 그분이 설계, 생산을 다 총괄하셨는데 일을 혼자하기에 많아지다 보니까 영업부라는 부서가 필요해서 생겼지요. 기술영업이다 보니까 기계를 아는 사람이 영업을 해야 되기 때문에 설계실에서 차출이 된 거죠. 그중에서 좀 영업의 적성이 맞을 거라고 윗분들이 생각하셔서 아마 데려간 것 같은데 좀 처음에 갈등이 많았습니다. 
영업을 하다 보면 거래처를 가서 만나 업무 얘기를 해야 하고 외출을 하다 보니 비용 측면에서 사비가 많이 지출이 되고, 영수증 처리하는 것이 한계가 있어 많이 힘들었지요. 당시에는 카드도 없고 바빠서 택시를 타면 영수증이 없어서 사비로 처리해야 하기에 금전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영업을 했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좀 넓어졌다고 생각을 해, 그나마 이 나이 먹도록 활동할 수 있는 게 가능하다고 봅니다. 영업을 하게 되면 규칙적인 생활이 좀 어렵습니다. 자기 생활이 없고 경제적으로도 좀 어려운 점이 있고 또 기술적인 면에서 깊이 습득할 수 있는 그런 건 좀 떨어지는 대신에 좀 넓게 볼 수 있고, 또 많은 사람을 접할 수 있지요. 깊이보다는 넓게 공부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좀 넓어졌다고 봐야 되겠죠.

영업을 하면서 오더를 받고 개인 사업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해안기계 시절에는 그런 생각을 못 했습니다. 해안기계를 그만두게 된 이유가 그런 직업에서 오는 갈등 때문에 사실은 그만뒀습니다. 그 뒤로 봉신중기로 입사하면서 영업을 하고 기술적으로 좀 많이 알게 되면서부터는 독립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많이 먹었었지요. 그러다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독립을 했습니다. 

노조 활동은 어떠했나요? 

근무는 안 해서 직접 겪지는 안 했습니다만 들은 얘기로는 크게 노조 활동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유가 우리나라 노조가 8~90년도에 많이 생겼지 않습니까. 처음에 해안기계는 중소기업이고 인원이 많지도 않고 한 100명 남짓이 되니까 노조가 크게 활성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1989년 주조공장이 남동공단으로 이전하면서 분리되다 보니 노조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습니다. 
주조공장이 이사하고 분리가 되어 주조공장 인원이 더 많았습니다. 기계공장은 한 40명 정도, 주조공장은 한 70명 이상 80명? 공장이 나눠지다 보니까 노조가 크게 활성화가 안 됐습니다. 조금 하다가 아마 노조가 자연 소멸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회사 복지는 잘 되어 있나요? 

그때 당시에는 복지가 잘되어있지 않았지만 야구부가 있었습니다. 야구부를 활성화를 시킨 분이 도병희 관리과장이었고 공선택 씨, 서창수 씨 등 기계부 쪽이 주축이 돼 가지고 야구부를 만들어 주로 봉신중기하고 많이 했습니다. 도병희 과장이 봉신중기에서 주물을 부어오는데 주물을 잘 부어오기 위한 로비 차원에서 봉신하고 야구를 좀 많이 했습니다. 
야구 끝나고 한 잔씩 하면서 친목을 다졌지요. 그때 당시 저는 해안기계에서 봉신중기로 자리를 옮겼는데 저는 그때 봉신중기 영업부 과장이라 봉신중기하고 해안 기계 사이에서 업무 협조를 했지요.

기초산업 분야에서 가장 힘들어하시는 부분은 어떤 걸까요?

첫째는 인력입니다. 요즘은 일이 있어도 인원이 없어서 일을 못 합니다. 인원이 없다 보니까 인건비가 올라가지 않습니까. 인력이 없다 보니 외국인을 고용할 수밖에 없어요. 한국 사람이 없으니까 외국인 안 쓸 수가 없잖아요. 
제 생각은 고령자도 일을 할 수 있게끔 하면 좋을 듯합니다. 안전 관리 철저히 해야 되겠지만 그런저런 문제 때문에 고령자 기피하거든요.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게끔 혜택을 좀 줘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요즘 60대들 아직 젊어요. 
젊은 친구들이 기초산업 쪽에는 잘 안 가려는 것도 굉장히 문제라고 생각을 해요. 교육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공업고등학교 활성화가 안 돼 있지 않습니까? 요즘 애들 다 대학 가지 않습니까? 전문대 가고 대학 가고 고학력만 있다 보니까 생산 현장에서 일할 애들이 없어요. 선배들이 독일 얘기를 많이 하는데 직업 교육이 굳이 4년제 대학을 나오지 않고 생산 현장에 가서 일을 해도 사회적으로 크게 차별 대우가 없으면 애들이 갈 거 아닙니까. 노동 여건이 좋아졌는데, 없어요. 
우리 기계 쪽에서는 범용기계가 있고 NC(numerical control)가 있습니다. CNC(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는 NC 컴퓨터 수치 범용기계라는 것은 옛날 아날로그 기계들, 선반, 밀링 그런 기계들로 요즘 배우는 사람이 없어요. 전부 다 애들이 NC나 CNC로 해가지고 컴퓨터로 제어하는 기계만 해요. 사실 NC나 CNC를 개발한 이유는 물론 난이도 있는 것도 있지만 숙련공이 필요 없는 기계거든요. 컴퓨터로 작동하기 때문에 단순 노동자만 있으면 되는데 범용은 숙련이 필요합니다. 그걸 배우는 사람이 없다 보니까 범용하는 사람들 보면 대다수가 60대예요. 그렇듯이 기계도 그런데 주물은 더합니다.
어떻게 보면 범용기계라는 것이 수공업으로 해야 된다는 것이죠. NC나 CNC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보면 자동시스템화 돼 있어서 NC는 대량 생산에 맞는 거고, 범용기계는 소량 다품종에 맞는 기계인데 산업기계는 특성상 소량 다품종이 많습니다. 자동차 부품은 대량 생산이지만 일반 산업계는 다 소량 다품종이 많아요.그리고 젊은 층도 대기업들 보면 현장들이 대부분 자동화가 다 돼 있어서 어떻게 보면 상당히 편한 조건으로다가 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대기업에 가면 근무시간도 적고 보수도 많고 대우가 월등한데 중소기업은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국가가)중소기업을 많이 지원을 해줘야 됩니다.        

노후화된 인천기계산단과 주안산업공단 활성화에 대한 방안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요.

개인적인 바람이 주안산단 쪽으로 지나다니다 보면 공장 헐고 요즘 뭐 아파트형 공장으로 바뀌고 하는 게 좀 안타깝습니다. 기초산업이 좀 꾸준히 유지가 돼야 되는데 요즘 IT 때문에 AI로 자꾸 바뀌다 보니까 그게 좀 아쉽습니다. 사실은 기초산업, 기초과학이 없이는 모든 걸 할 수가 없거든요. 주물공장도 지금 중국으로 베트남으로 많이들 빠져나갔습니다. 근데 그런 게(주물업종) 없어지면 앞으로 문제가 크게 됩니다. 그래서 정책적으로 기계산단은 좀 더 활성화를 할 수 있도록 세제 혜택을 좀 많이 주면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어요. 
주안산단이 위치가 좋아요. 대중교통으로 다닐 수 있기 때문에 지금 남동공단 같은 경우는 대중교통이 사실 불편하거든요. 주안산단은 교통이 좋으니까 사람 쓰기가 좋아요. 정부나 지자체 차원에서 기초산업 이름에 맞도록 꼭 좀 활성화되도록 지원하면 좋겠어요.

 

시민기록일지

* 면담일시 : 2023년 9월 13일 14시

* 면담, 원고정리 : 김용경

* 면담지원 : 허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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