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에서 최고로 세계를 누비다
인천기계산업단지를 기록하다
작성자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5.01.22
  • 0

영일산업기계 대표
박태석 (1966년생)
창업주인 부친의 뒤를 이어 2대째 고무대야 금형을 제작 납품하고 있다.
해외 시장을 타깃으로 수출을 하고 있으며 제조업의 침체 대안으로 무역업을 준비하고 있다.
 

전국 최초 고무대야 금형을 시작하다

처음 공장은 영일철공소로 송림동(인천 동구 송림2동 56번지 3통 1번)에 있었어요. 2층짜리 건물이었는데, 1층에서 공장을 하고 2층은 살림집이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이렇게 큰 공장들이 많이 없었어요. 지금이야 5공단이라든지 산업단지가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다 조그마한 소기업들이 일하는 상황이었거든요.
원래 저희 할아버지께서 황해도에서 내려와 대전에 계시다가 인천으로 오셔서 다시 황해도로 넘어가려고 하셨는데 길이 막히니까 인천에 정착하게 되셨거든요. 그때 당시에 너무 어려우니까 아버지가 다른 회사에 다니다 나와서 조그맣게 공장을 시작했어요. 할아버지가 말씀이 큰 형이 잘 되면 동생들도 잘 된다 하셨거든요. 아버님, 작은아버님 두 분 이렇게 형제분들끼리 일을 시작한 거죠.

공장 설립일을 기억하시나요?

그건 제가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하는데 70년 전후 될 거예요. 그때는 경운기 부속들 가공해서 납품하는 것도 있었고 고무대야 기계 압출기는 그때도 하셨고요. 고무대야 금형은 아버님이 원조세요.
고무대야에 대한 모든 기계 금형 압출기는 세계에서 제가 넘버 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자부심이죠. 아프리카에 100% 제가 수출하고 있고요. 남미도 거의 제가 수출하고 있습니다. 저희 기계를 보고 로컬에서 만드는 친구들이 있기는 한데 시행착오를 겪고 있어요.

어렸을 때 공장 운영하는 아버님과의 추억이 있는지요? 그 당시 아버지와 에피소드나 회사 관련해서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몇 가지가 있는데 예전에 인천에서는 원재료를 사기가 힘들었어요. 그러면 아버지 따라서 지하철 타고 서울에 가서 물건을 사가지고 내려오고 했어요. 돈이 많이 없다 보니까 박스로 사는 게 아니고 몇 가닥씩 조금씩 샀어요. 그때 제가 초등학교 4~5학년이었는데 샘플을 가지고 자전거 타고 숭의동에 가서 사다 드리기도 했어요.
지금도 기억 나는 게 공장 앞에 전라도 광주나 전주, 군산 이런 데서 오셔가지고 일 좀 해달라고 기다리고 계셨었어요. 그때도 고무대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여인숙이나 여관에서 주무시면서 내 일 먼저 해달라고 며칠씩 기다리셨어요.

빨간 고무대야를 만들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계기는 아버지가 아시겠죠. 아버지가 처음에 하셨으니까. 근데 고무대야는 예전에 우리가 재활용을 많이 안 했잖아요. 요즘에는 재활용 비닐, 나일론이 많이 나오니까 폐비닐을 세척해서 압출기에 넣어 녹이면 밀가루떡처럼 나와요. 그거를 다시 로라에다 밀어서 팽팽하게 펼쳐 다시 프레스에 이제 금형이 올라가 있거든요. 그럼 거기다가 그걸 씌운 다음에 프레스를 작동한 후 제품이 나와요. 저희는 금형과 기계만 만들어요.
근데 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 제가 생산 공장을 했었어요. 현지 나이지리아에서 잠깐 하다가 레바논 애들한테 다 매각하고 나왔어요. 그다음부터는 그냥 제가 기계 판매하는 것만 해요.

영일산업기계 고무다라이
기계를 최초로 만들어 성공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때 일화 좀 들려주세요.

그때는 아까 제가 얘기했던 대로 손님들이 와서 며칠씩 기다려서 내 거 먼저 해달라며 긴 줄을 서서 기계를 가지고 가셨어요. 그때는 종업원이 꽤 많았죠. 그때는 인건비도 싸서 종업원이 10명이 넘었던 것 같아요. 저 어렸을 때는 진짜 밤새워 일하셨어요. 지금은 저까지 7명이 있죠.
작년 11월에 제가 너무 힘들어서 동생을 좀 불렀어요. 동생이 도면이랑 외주 가공하는 거를 담당하고 현장 일을 좀 도와주고 있어요. 우리 아들은 아직 기술을 좀 배워야 하니까 현장에서 일하고 있고, 작은아버지 또 일하는 직원은 워낙 베테랑인 기술자로 현장에 계속 계시죠. 우리 딸내미는 사무실에서 서류 업무를 하고, 남은 한 친구는 20살에 와서 지금 55살이 됐으니깐, 35년을 있었네요. 작은아버지한테 선반을 배워서 그 친구가 베테랑이 됐어요. 작은아버지는 거의 50년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82세까지 나오셨다가 제가 운전을 반강제적으로 못 하게 했어요. 그러니깐 이제 공장에 안 나오시죠. 가끔 우리 아들 불러서 공장에 한 번 가자 그러면 이제 모시러 가요.

무게가 나가는 기계들이라 직원들이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데요. 외주를 얼마만큼 주고 계시나요?


외주를 예전에는 한 10% 정도 줬거든요. 근데 지금은 한 40% 이상 주고 있어요. 가까운 데는 남동공단 또 시화공단 검단 또 먼 곳은 대전, 세종에 오더를 주고, 거기서 제작해서 올라오면 저희가 조립하죠. 그분들도 이런 업종에 계시던 분들이거든요. 고무대야에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들인데 그분들은 저랑 좀 다르게 국내에서만 일하다 보니 일이 거의 없어요.
저는 해외 시장을 IMF 지나면서 앞으로 이 시장은 안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서 계속 해외 시장을 공략했어요. 그래서 저희는 좀 일찍 해외에 눈을 떴어요.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해외 일을 해 온 거고 그 사람들은 국내 일만 하다 보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일이 없어요. 그래서 저희 일을 갖다가 많이 하시죠. 첫 번째는 일이 많아지니까 서로 같이 일해서 먹고사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고무대야 계통에 베테랑이시니까 그분들한테 맡기면 일이 더 잘되지 않을까 싶어서 멀지만 맡긴 거죠.

수출을 시작하다

1998년도에 코트디브아르 회사에서 어떻게 알고 저희를 찾아왔어요. 그전에도 수출은 했어요. 아버지가 멕시코에 중고 기계를 수출하셨거든요. 그걸 외국인들이 보고 한국에 가면 이런 기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에 우리 공장을 찾으려고 애를 많이 쓴 걸로 알고 있어요.
계열사를 하려는 나라는 많은데 저를 모르는 거예요. 한국의 미스터 박이라고 이름은 들어봤는데, 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거죠. 그러니까 수소문해서 메일이라든지 전화번호로 모르는 친구들한테서 새벽에 연락이 와요. 남미는 15시간 차이가 나고, 서아프리카는 9시간이 차이가 나요. 사실 저는 해주기 싫어요. 내가 너무 부담스러워. 내가 캐파는 작은데 더 많은 거를 할 수가 없잖아요. 내 능력 한도 내에서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웬만하면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정도를 지키고 있어요.

영일산업기계 내 과테말라로 수출하는 제품
아버님이 멕시코로 처음 수출한 건 몇 년도인가요?

80년대 초반. 그때 내수 시장이 더 좋았는데, 멕시코에 사는 교민들이 한국에서 고무대야를 사용하던 분들이 많이 계실 거 아니에요. 근데 거기 살다 보니깐 내가 생산해서 판매하면 돈이 되겠다고 해서 한국에서 중고 기계를 가지고 나가서 돈을 벌고, 또 새 기계를 가지고 가고, 그러나 금형도 다시 만들게 된 거예요.
멕시코 시티 고도가 한 2천 정도 돼요. 우리가 가면 고산병이 올 수도 있어요. 지대가 워낙 높다 보니까 배관이라든지 시설이 잘 안 돼 있어요. 그러다 보니 물을 보관하기 위해 빗물도 받고, 물을 보관하는 용으로 대용량의 물건들을 많이 필요로 한 거죠.
근데 아프리카는 지대가 낮으니까 조그마한 대야를 많이 가지고 가요. 아비장은 강가에서 빨래만 해주는 직업이 있어요. 이제 물 나르는 용도로도 쓰이고 시장에서 과일 담는 통이라든지 곡식 담아서 먹는 통으로 쓰여요. 아프리카는 사실 인구 조사가 제대로 안 돼요. 전체 통계가 안 되다 보니 수요는 무궁무진한 것 같아요. 그 물건이 다 어디로 팔리는지 저도 궁금해요.

해외 거래처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한 군데랑 인연을 맺으면 오랫동안 유지하시는 것 같아요.


멕시코 회사는 거래한 지 거의 30년 됐고요. 지금 거래하는 회사들은 기본적으로 15년, 20년은 된 것 같아요. 근데 이제 지금 새로운 업체들이 계속 들어와요. 작년에도 새로운 업체가 두 군데 들어와서 풀 세트로 수출했어요.

영일산업기계가 수출한 기계로 고무대야를 제작하는 아프리카 공장 현장
폐비닐을 재활용한다는 차원에서는 환경을 위함이기도 하지만 녹이는 과정에서 환경 오염물질이 나오지는 않나요?

예전에는 환경에 신경 안 쓰고 생산해서 국민이 편하게 쓸 수 있으면 좋다는 식이었죠. 근래에 들어와서 아프리카에서도 이제 집진기 시설을 설치해야 해요. 그래서 태우면서 안 좋은 물질은 집진기로 빨아들여 걸러서 내보내고 있죠.

그러면 지금은 국내 시장 비중이 얼마나 되나요?

지금은 국내 시장 비중이 없어요. 환경적으로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찾는 사람이 없어요. 수출할 때 음식물을 담지 말라고 써서 보내기도 해요. 음식물을 담지 말라고. 환경 이슈가 가장 크죠. 그리고 이쪽은 이제 시장이 쇠퇴하는 거죠. 우리의 한 70년대 되는 나라에 수출하면 그 친구들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는 걸 멕시코에서 많이 배웠죠.

해외 영업 노하우가 상당한데요. 그 과정에서 겪었을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죽을 뻔도 했죠. 현지에서 오토바이로 택시처럼 영업하는 친구들을 ‘오가다’라고 그러거든요. 나이지리아 공군 대령이 탄 차를 살짝 긁었어요. “나는 보상을 받고 싶은데 너 어떻게 해줄래?” “나는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라 이 비싼 차를 보상해 줄 수가 없다.” 이런 대화가 오가더니 그 자리에서 쏴서 죽였어요. 라고스 시내에 ‘오가다’가 수천 개가 있거든요. 폭동이 일어났어요. 은행이고 가게고, 돌이랑 나무로 막 다 부수고 그랬어요. 현지에서 알게 된 친구가 “미스터 박 회사에서 나오지 말아라.”라고 했어요. 폭동이 일어나서 집에 갈 수가 없다고 해서 밤늦게까지 기다리고 있었죠. 느지막한 시간에 집을 가면 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1시간 반을 돌아서 한 20m 정도 남아 있는데, 폭도들이 쫙 내려오는 거예요. 그때 역주행해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크락션을 누르며 걔네들이 내려왔어요. 겨우 들어오기는 했는데 뒤에 창문이 하나 깨졌더라고요.

정말 영화 같은 일이네요. 나이지리아가 총기 소지가 되는 나라인가요?


아니죠. 쿠데타는 말할 것도 없고 빵빵거리며 도망갔던 기억이 나네요.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드리면 모카커피가 왜 모카커피인 줄 알아요? 아라비아반도 끝에 예멘이라는 나라 옆에 모카라는 도시가 있어요. 예전에 에티오피아나 탄자니아에서 커피가 많이 생산됐어요. 이 커피가 모카항으로 와서 세계 각국으로 나갔거든요. 탄자니아 고산지대에서 나오는 커피는 영국 왕실에서 먹어요. 모카항에서 수출하는 커피라고 해서 모카커피가 된 거예요. 하여튼 아프리카의 자원은 무궁무진해요.

2대째 가업을 잇다_대물림에 대한 생각

기업을 이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제가 군대에 있으면서 결정했어요. 제가 군대를 25살에 갔는데 27살인가 여덟에 제대했어요. 그때 작은아버지들이랑 아버지랑 우리를 고생해서 여기까지 키워주셨는데. 제 동생이 하나 있어요. 동생이 하든 내가 하든 누군가 물려받아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제가 물려받은 거죠.
제가 군대 갈 때 송림동하고 도화동을 같이하고 계셨어요. 송림동 공장이 좁은데 기계들이 자꾸 커지니까 도화동에서도 공장을 한 거죠. 1985년도부터 2014년까지 있었어요. 도화동 자리는 지금 창고로 사용하고 있어요. 저희 기계 완제품이 나오면 거기에 계속 쌓아놓는 거죠.

그러면 기계 쪽으로 전공하셨나요?


아니요. 전 화학 전공했어요. 저는 사실 ROTC 장교를 하려고 했는데 부모님이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군대 가서 고생한다고 옛날에는 그랬어요. 저는 장교로 조금 잘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아버지가 “그건 아니다.” 그리고 제가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어요. 고등학교 때는 미대를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아유 너 극장에 간판장이 하려고 그러는구나." 그래서 그것도 이제 안 하고 두 번 정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군대를 늦게 간 것도 사실은 공부를 좀 더 하려고 했는데, 그게 좀 잘 안되니깐 군대를 갔죠. 미술은 지금도 꿈이 있어요. 제가 지금 서예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림은 꼭 그려보고 싶어요. 나중에 여기서 은퇴하면 조그마한 집, 조용한 집 하나 시골에 가서 사든지 해서 거기서 그렇게 지내고 싶어요.

대표님도 가업을 잇고 계시는데요. 자녀분들에게 물려줘야겠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 아들이 여기 나와서 일을 한 지 3년이 됐어요. 그 친구도 군대를 갔다 오자마자 제대하고 밤에 찾아왔더라고요. "아빠 내가 이거 좀 하면 안 될까?" 비전을 본 거죠. 지금은 현장에서 일을 처음부터 배우게끔 해놨어요. 거래처 소개해 주느라 아프리카는 한 번 갔다 왔어요. 호주 가서 언어 공부 좀 하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죠.
할아버지도 사업을 하셨고, 아버지도 사업을 하셨고, 저도 사업을 하고 우리 아들도 사업을 하면 좋겠다. 그리고 제가 아프리카를 20년 넘게 다니면서 일궈놓은 네트워크를 제가 그만두면 사장 된다는 게 너무 억울한 거야. 그래서 우리 아들이 한다고 했을 때 너무 좋았어요.

그러면 아버지 때부터 사용하신 기계를 지금도 쓰고 계시는지요.


저기에 선반이 조그만 게 하나 있어요. 그게 73년도인가 74년도에 산 거로 알고 있거든요. 근데 그때 당시에 230만 원인가 260만 원 주고 샀대요. 그 당시에 송림동에 슬래브집 한 채 가격이랑 똑같다고 했어요. 다른 기계는 정리했는데 그 기계는 아직도 제가 보관하고 있어요. 지금도 아버지 생각하면서 사용하고 있어요. 만약에 여유가 돼서 공장을 좀 넓힌다고 하면 정문 옆에 아크릴판으로 해서 보관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창고로 쓰고 있는 도화동 건물도 사진을 다 찍어 놨어요. 현장에서 일하던 그 건물의 먼지 쌓인 녹슨 철문을 사진으로 찍어 놓은 게 있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우리 아들이 물려받을 때쯤 되면 기억하고 싶어서 쫙 진열하려고요.

쇠퇴하는 제조업의 현실 
인천기계산단을 선택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2014년 4월 30일에 왔으니 벌써 10년이 됐네요. 집이랑 제일 가깝잖아요. 송림동 그리고 할머니가 105세인데 도화동 오거리 쪽에서 혼자 사세요. 제일 주된 원인은 할머니 옆에 있고 싶어서 가까운 곳으로 선택했고, 작은아버지나 우리 직원들도 가좌동, 만수동에서 사니까 차량으로 30분, 40분이면 출퇴근할 수 있어서 여기가 제일 나을 것 같더라고요.
이사 올 때 밀링 하나 그리고 선반 세 대를 가져왔어요. 한 달 반 정도 이사한 것 같아요. 규모에 비해 오래 걸렸죠. 저쪽에서 일하면서 하나 옮기는 식으로 조금씩 옮겼어요.

일이 계속 있으니 멈출 수 없겠어요. 혹시 하루 근무 시간은 어떻게 되시나요?

우리 직원들은 9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해요. 저는 5시 이후에 일을 또 시작해요. 그래서 한 7시 반이나 8시에 퇴근해요. 저녁 6시면 아프리카는 아침 9시라 업무 통화를 하거나 메일로 응대를 해줘요. 저녁을 먹고 운동하고 다시 저녁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또 일을 해요. 왜냐하면 그때 시간은 또 멕시코가 아침 시간이에요. 수면 시간은 보통 3~4시간. 너무 힘들어요. 진짜 아닌 게 아니라 제가 잠을 못 자요.

지금 업무에 부담도 있어 확장하는 것을 꺼리시나 봐요.


그런 것도 있고 지금 앞으로 우리나라 제조업은 너무너무 힘들어질 것 같아요. 제조업이 고생은 제일 많이 하는데 사실 지금 남동공단이나 시화공단 다녀보면 일들이 다 없어요. 그러면 이제 우리나라 성장이 멈췄잖아요. 예전에 비해서 더 이상 먹거리가 없다는 거죠. 근데 이제 우리 아들이 할 때 엔지니어도 없고 그러면 우리 아들한테 짐만 지어주는 것밖에 안 되거든요. 그래서 이제 지금 제가 다른 방향으로 이 회사는 기본적으로 운영하되 이제 다른 거를 생각하고 있어요.

인천기계산단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처음 들어오셨을 때와 다른가 봅니다.


많이 틀리죠. 저 처음에 여기 왔을 때는 불 켜져 있는 데가 많았어요. 늦게까지 혼자 업무하고 전화 받고 8시 정도 퇴근하면 불 켜져 있는 공장들이 많았어요. 근데 지금은 캄캄해요. 그때는 토요일에도 일하는 데가 있었거든요. 지금은 토요일에 일하는 데가 거의 없어요. 그냥 캄캄해요. 그만큼 이제 제조업의 일이 많이 줄었다는 거죠. 금융위기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든 것 같아요.

코로나 영향은 없는지요?


저는 없었어요. 물론 저도 부품이 수급이 안 되는 건 있었어요. 그래서 부산으로 내려가서 수입되는 거 찾아서 사 오고 웬만하면 원자재를 미국산, 일본산, 유럽산만 쓰거든요. 그러다 보니 코로나 때 그런 문제가 좀 있었어요. 그리고 해외 출장을 1년에 한두 번씩 갔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못 갔어요. 근데 오히려 그때 주문이 더 많이 오는 거예요. 그쪽에서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대비를 하느라고 기계 주문을 더 많이 하는 거예요. 금형부터 필요한 물건을 대량 주문해서 3년 동안 저는 더 호황이었어요. 그래서 일을 많이 했어요. 

정직한 만큼 돈을 번다.
대표님의 경영 철학이 궁금합니다

경영 철학이라는 게 있나요?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게 경영 철학이죠. 저는 남들한테 거짓말하는 거는 싫어요. 정직하게 내가 받고 싶은 만큼의 돈을 받고 그에 상응하는 돈을 저는 받으면 돼요. 중국산 가지고 만들어서 국산이다. 이런 거는 싫어요. 그래서 지금 어떻게 하다 보니까 잡상인이 됐어요. 저한테 다 구해 달래요. 저는 기계를 수출해야 하는데 “호수 구해 달라, 무슨 드릴 구해달라.” 이렇게 돼버렸어요. 
저는 매일 체크해요. 오늘도 아침에 나와서도 두 번 확인했어요. 한 번 보고 또 나가서 일하다가 또 한 번 보고, 그 수량을 맨날 체크하고 거의 하루에 한두 번씩은 보는 것 같아요. 근데 저거를(수량 적은 메모) 계속 보면 그게 머릿속에 박혀요. 우리 아들한테도 “제가 적어놓은 거를 그냥 할 일 없으면 봐라. 그냥 쉬는 날도 나와서 보고 그냥 계속 봐라. 그냥 시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그냥 계속 봐라.”

인근 업체와의 관계는 어떠세요?


제가 낯을 좀 가려요. 친해지면 터놓고 말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근데 처음 사귀기가 힘들어요. 근데 이제 요 앞에 있는 공장에서 저희 아버지 계실 때 찾아오셨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이렇게 만나 뵙다가 자기네 못 쓰는 사출기 금형이 있다고 해서 제가 외국에다가 팔아드렸어요. 그랬더니 되게 좋아하시더라고요. 지금도 가끔가다 한 번씩 오세요.

새로운 아이템으로 후세대에 물려줘야 

사실 미래가 없어요. 지금 얘기하는 MZ세대라고 하죠. 일을 안 하려고 해요. 기름을 만진다, 손톱 사이에 기름때가 낀다. 험한 일 전혀 배우려고 하질 않아요. 그러면 외국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야 하는데 그것도 큰 회사만 해당이 되고 작은 회사는 해당이 안 돼요. 저도 사실은 세네갈 감비아 쪽에 데리고 올 친구들이 한두 명 정도 있어요. 힘도 좋고 일 잘하는 친구들을 데리고 오고 싶은데 개인적으로는 데리고 올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 거에 대해서 포기를 한 상태예요. 기계 업종은 50대 초중반이면 끝날 것 같아요. 그 밑으로는 사람이 없어요. 30~40대가 메꿔줘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제조업은 무너질 수밖에 없어요. 원자재도 많이 올랐고 인건비 비중이 너무 커요. 그나마 저 같은 경우에는 제가 영업을 해서 괜찮지만 일반적인 회사들은 마진이 없어요.

지금 당장 영일산업기계만 보더라도 직원분들이 나이가 많으신데요. 어떤 대책을 세우고 계시는지요?


저는 인력은 더 구할 수도 없고요. 구할 생각도 없고 그냥 다 외주로 할 수 있게끔 하려고 해요. 방법은 그거밖에 없어요. 외주해서 받아다가 마무리만 해서 수출 나가는 거로 하고 무역업을 생각하고 있어요. 외국 시장은 진짜 커요. 금도 웬만한 아이템 가지고 남미나 아프리카 가면 먹고 살게 무궁무진하거든요.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직도 30년, 50년은 있어요. 제조업은 답이 없어요.
저 나름대로 남미 시장이나 아프리카 시장을 알고 있으니까 대처할 수는 있지만 다른 분들은 전혀 그런 시장에 대해서 모르잖아요. 가 본 적도 없고 산단에서만 납품하셨으니까요.
저도 이제 아버지한테 아이템을 받아서 일했으니까 우리 아들한테는 새로운 아이템을 해서 넘겨줘야지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들보다는 내가 경험이 더 많잖아요. 더 많은 걸 봤고 내가 본 것 중에서 좋은 아이템을 넘겨주면 우리 아들은 그걸 보고 한 스텝만 더 올라갈 수 있는 그런 바탕은 만들어줘야 하지 않나 싶어요.

세상은 넓다, 부딪혀보라.
혹시 아드님이 일하면서 어렵다거나 힘들다는 얘기 하나요? 

많이 하죠. 많이 하죠. 우리 아들도 힘들다고 느끼는데. 그나마 어느 정도 비전이라도 있죠. MZ세대 그 친구들은 진짜 오기 싫을 거예요. 마음 한구석에는 우리 아들이 이거 안 했으면 어떨까 막 그런 생각도 했었어요. 제대하고 와서 “아빠 내가 한번 해볼게.” 말하면서 이 신발을 사서 왔어요. 열심히 한번 해보겠다고. 저도 사실은 55세에 은퇴하려고 했는데, 아들이 그러는 바람에 가르치느라 계속하고 있어요. 아들이 물려받는다고 안 했으면 접고 무역업만 하려고 했어요. 앞으로 3년에서 5년 정도는 더 하고 아들한테 물려주고 시골로 내려갈 생각이에요.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난 진짜 젊은 친구들한테 “아프리카가 됐든, 유럽이 됐든, 동유럽이 됐든, 선진국이 됐든 한번 가서 부딪혀보고 내 먹거리를 찾을 수 있으면 한번 찾아봐라.” 넓은 데 가서 한번 찾아보면 세상이 보인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요.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도전하기를!

 

 시민기록일지

* 면담일시 : 2023년 10월 7일 14시

* 면담, 원고정리 : 조연희

* 면담지원 : 허은영, 양지원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