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단 직원들의 사랑방, 경북슈퍼
인천기계산업단지를 기록하다
작성자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5.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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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슈펴
김효순 (1947년생)
경기도 광주에서 10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가정을 지키고 지역의 근현대 산업사의 이선에서 함께 한 인천의 오랜 주민이다.
 
고향을 떠나 인천에 정착하기까지
인천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말씀 해주세요.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4살까지 살다가 부모님을 따라 인천으로 이사 왔다가, 결혼하면서 경상도로 가서 2년을 더 살다가 남편의 일자리를 찾아 다시 인천 제물포역 앞으로 이사 온 후, 1년여 정도 직장생활을 하고 작은 종잣돈으로 경북슈퍼를 열어 지금에 이르렀지.

어릴 때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어릴 때는 친구들이랑 딱지치기, 구슬치기하고. 남동생이 넷이라 거기에 맞춰서 놀다 보니 그렇더라. 남자가 되더라고. 그 뭐지 그 구슬치기는 내가 아주 대빵이었어. 
동생하고 나이 차이가 7, 8살 차이가 나니까 엄마, 아버지가 자식 살리겠다고 인천을 왔어. 누가 어디 가서 물으니까 어떤 분이 오더니 당신 자식을 살리려면 고향을 떠야 한다고 하더래. 그래서 우리 엄마 아버지가 보따리 싸가지고 인천에 왔어. 오 남매 갖다버리고 오 남매 살았지. 내 위로 셋인데 오빠 하나 살고 남동생 밑으로 둘 죽고 셋 살아있지.
10남매 중에 나 혼자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나 낳았을 때 금줄을 땅에 끌도록 했대. 나 명줄 길으라고. 그렇게 딸 낳았다고 좋아서 하나 더 낳으려 했는데 성공 못 했지. 근데 다 소용없어. 어려서 아버지 무릎 앞에서 크다시피 했는데 시집가서 잘 살아야지. 고생만 주루룩했는데…….

공단 가구공장 노동자들의 쉼터
경북슈퍼를 어떻게 열게 되셨나요?

처음엔 아저씨 번 것 갖고는 삼 남매를 못 기르겠더라고. 우리 막내딸 5살 때 떼어놓고서 애는 혼자 집에 있고, 오빠들은 학교 가고. 1년 정도 직장 생활을 해가지고 돈 백만 원을 내 손에 쥐었어. 45년 전에. 그러고 그거 가지고 집을 샀어. 근데 집을 사려니까 복덕방 위에 저 파출소 옆에 사는 분이 “아줌마 집을 사서 뭐하냐!” 하는 거야. 자식들은 고만고만한데 월세 살았거든. 그러니까 집을 사지 말고 이 가게가 나서 이거 장사할 때 와서 봤어. 사실은 그랬는데 와서 봤는데 그렇더라고. 그러니까 삼 남매를 떼어놓고 1년 직장생활을 했어. 하다가 100만 원 보니까 좀 사람이 그래. 뭐라 그럴까? 아무것도 없다가 있으니까 진짜 부자 된 기분이더라고. 그래 아저씨하고는 안 사는 한이 있어도 난 자식을 못 버린다 해가지고 그때부터 고생 시작한 거예요. 그 당시에는 경북 슈퍼로 했어요. 왜냐하면 아저씨 고향이라 그랬더니 여기 오니깐 텃세가 말도 못 해. 깡패들이…… 
그 당시에는 깡패가 좀 있었어. 건달! 건달! 동네마다 건달하는 사람들이 와서 행패 놓는데 진짜 깡패가 안 되면 내가 장사를 못 하겠더라고. 그래서 그때부터 팔짱을 걷어 채웠어. 내가 ‘난 여자가 아니야!’ 그때부터 마음을 먹은 거야. 내가 여자가 되면은 우리 새끼들 공부를 못 가리키겠더라고. 그래서 삼 남매 저것들 다 가리켰어요. 대학교까지. 근데 쟤(따님분을 가리키며)만 이제 조금 못 했어. 왜냐하면 자기가 “안 한다.” 해서 오죽하면 내가 그랬어. “너 나중에 엄마를 원망하면 넌 나 가만 안 놔둔다!” 근데 제일 효자야. 진짜야. 가리키는 놈은 효자가 아니야. 제일 안 가리킨 놈이 효자야. 자기가 원망 안 한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잘 살잖아. 우리 딸 잘 살아요. 신랑이 사업하고 사위도 내가 골랐어요. 엊그저께도 얘기했지만 내가 찜했어. 생활력 하나 보고 인물 안 봤어. 나! 인물 보는 건 아무 쓸모가 없어. 건달이 들끓어서 그랬더니 그렇게 잘해 지금. 나보다 한 6개월을 어떤 사람이 했어. 처음에 근데 가게에 물건이 20만 원도 안 돼. 그러니까 나야 인수하기 좋잖아요. 물건이 없으니까. 이 옆에 건물이 울산전자 기숙사였어. 그러다 보니까 기숙사에 사람들이 울산전자가 그때 망했잖아. 망하는 바람에 다 도망갔어. 먹고서! 이 아가씨들이 전부 먹고 도망을 간 거야.그러더니 돈을 어디서 받아 밤에 도주 다 했는데, 그 할머니는 집 팔아서 장사해가지고 망했어. 그러고 내가 들어온 거야. 그때 내가 운이 닿았나 봐. 그때부터 솔직히 얘기해서 한 달에 돈 백만 원 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건 우스웠어. 소주 여기서 하루에 7~8짝 팔았어. 막걸리 10짝은 우습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니까 잠을 하루에 2시간밖에 안 잤어. 손님들 물건 팔고 나면 거기 앉아서 빨래해야 돼. 손빨래! 그때만 해도 세탁기가 없었잖아. 그러니까 손이 다 망가졌어. 나 여기저기 수술도 다 했어. 양쪽에.

슈퍼 근처의 모습은 어땠나요?

동서가구, 우아미가구, 한미 이건 산단에 다 있었지. 우아미가구도 있었지. 동서가구 있었지. 한미 있었지. 
그러니까 이 동네가 돈이 끓었어. 그 당시에 장사 잘 됐어. 진짜 하루에 10짝! 막걸리 10짝! 팔았다면 거짓말이야. 딴 사람이 그러면 거짓말이라 그래. 음료수 한 짝씩 나의 창고에다 빌려서 놓고 물이 차 가지고 어느 한 해에는 물이 차 가지고 음료수 다 닦아서 팔았어. 병이니까 과자 같은 경우는 딴 데 창고에서 물을 먹었지. 과자 같은 건 그때 없지. 그런 데는 안 놔뒀고, 익은 방에 저 위에 선화! 내가 제일 1호야. 이 동네에서 그 위에 선화수퍼 위에 장단상이라는 데가 있었어. 근데 그 가게가 제일 1호야. 지금은 없어. 다 돌아가셨어. 그러니까 내가 1호가 됐어. 2호에서 1호가 된 거야. 

염전과 연탄공장, 개 건너 쑥대밭 추억
옛날에는 근처에 염전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여기 장사할 때도 있었어요. 여기 장사할 적에…… 왜냐하면 내가 이…… 선인재단 그걸 넘어오면 여기가 갯벌이니까, 그게 애들이 여기 와서 노는 거야. 우리 아들 그때 매 맞고 막 그랬어. 아들 하나인데 잃어버리면 어떡해. 그리고 여기서 바로 옆에 보면 원목 쌓는 데가 있었어. 거기서 깔려 죽은 사람도 있어. 깔려 죽어가지고, 그때부터 단도리하는 거야. 아들 하나니까. 딸도 딸이지만 아들 하나니까. 아들 하나 잃어버리면 큰일 나잖아. 내 제일 선물인데, 그때만 해도 그랬어. 지금은 아닌데 그때만 해도 그래. 근데 아들은…… 아들은 든든해. 확실히 아무리 저기 해도 딸이 좋아.다 거짓말이야. 속으로는 안 그래 난 딸이 좋다고 해도 저 딸을 내가 잊어버릴 뻔했어요. 여기서 살 때 이거 장사하기 전에 할아버지 따라서 직장 따라서 부천에 좀 살았어. 한 1년 넘게 살았을 거야. 살았는데 이사를 잘못 갔는지 탈이 난 거야. 저놈이. 그래갖고 한 달에 그때 70만 원씩…… 그때 돈 70만 원이면 4살 때 70만 원이…… 51년 전이야. 그러다 보니깐 딸이 아파 죽는데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 자식을 살려야 된다는 거야. 맨날 업고 다녔어. 부천 시장 있는데, 지금 여기 있는데 거기 병원을 하루에 두 번씩 다니다 보니까 한 달 되니깐 거덜납디다. 10원도 없이 나 인천에 왔어. 손바닥에 10원 있어야 살지. 친정 오빠나 언니 저기…… 엄마가 없었으면 나 이렇게 살지도 못했을 거야. 친정 엄마가 많이 돌봐줬어요. 그렇게 살았어. 지금 동서가구 맞은편에 그거 보면 몇 년 전만 해도 그 산동네 있었어요. 
소금 염전 그 창고! 연탄공장이 주안역이지. 거기…… 여기 팔이 데인 거, 그거 사연도 있어 연탄을 그전에는 이렇게 연탄이 없잖아. 그러면 이제 숙소 들어간다고 아줌마들 따라가. 그러면 이제 그 연탄 덩어리 있잖아. 연탄 만들기 전에 가는 거 있잖아. 덩어리를…… 바위같이 생겼으니까. 그걸 주워다가 불을 피우면 밥도 해 먹고 별거 다 해요. 그러다 그걸 담을 소쿠리 속에다 몇 개씩 훔쳐갖고, 그거 이제 날로 이렇게 만들어가지고, 깡통에다가 그래서 풍구질 해가지고 친구들은 저기서 노는데 나는 놀아야 될 거 아니야. 얼마나 속상해. 15살도 안 됐는데 뭘 알아. 그러니까 엄마가 옷을 해준 걸 입고서 풍구질 하다가 불이 붙은 걸 모른 거야. 그래갖고 여기 나 지금 물을 보면 흉터 있잖아. 그거 생각하면…… 난 그래서 이 팔 여름이 되면 지금 이제 나이 먹었으니까 훌떡 벗지만, 그때는 못 벗었어. 이게 트라우마야. 남들은 다 깨끗한데 나는 왜 이렇게 흉터가 있나? 그러니까 엄마가 이거를 얼른 찢었어야 되는데, 비빈 거야. 비비다 보니까 훌떡 벗겨졌어. 그 살이…… 익어가지고 옷하고 같이…… 그래서 흉터가 졌어. 연탄공장이 여기서 나 장사할 때까지도 있었어. 
지금 용화사 있죠? 용화사 거기까지 다 주안이었어. 염전이었어요. 지금 용화사 가면은 한번 가보세요. 이쪽으로 보면 그 조그마한 암자 있을 거예요. 거기에 제일 최초의 딸이 용화사 다니거든. 이렇게 보면은 내가 먼저도 얘기했지만, 그 암자가 있어. 조그마한 거. 그게 최초에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엄청 컸지. 그거가 조그마해도 빨빨거리고 돌아다녔나 봐. 내가 남자하고 놀았으니 뭐 오죽하겠어. 그 인천 고가 돌다리를 딛으려면 큰엄마가 안고 건넜어. 바위 이만한 거 있으면 물이 나가야 건너. 그것도 물 있으면 못 건너. 그러니까 물 없어질 때 지금 가좌동 쪽으로 다가 쑥이 엄청 많았어요. 그 당시에는 거의 쑥 같은 거 뭐 개떡 이런 거 쪄 먹지 그렇게 풍족하지 않았잖아요. 그러면 이제 큰엄마 친구분들하고 엄마하고 따라서 건너가서…… 개 건너가서 그 쑥 해오고 그랬어. 그거는 쑥이 이런 키 큰 쑥이 아니야. 바닥에 이렇게 딱 붙어있는, 참쑥이라고 그래. 그걸 가지고 그거 해왔어. 그러다가 갔다가 동네 사람도 나눠주고 그러니까 집에 지금도 그렇지마는 잠시를 안 있어. 지금도 이렇게 해도 내가 가만히 안 있어. 이렇게 앉아 있으면 답답해서 못 있어. 어떤 때 내가 한숨을 쉬면 그래. 엄마가 “왜 한숨을 쉬어?” 어디가 다 속이 답답하다. 그러니까 그만하라고 그래. 지금 매일 노래해. 나만 보면 엄마가 그만하세요. 여기서 전철까지가 염전이었죠. 쭉~아주

경북슈퍼 김효순 사장님 인터뷰
1990년대 공단의 쇠락과 경북슈퍼의 운명
슈퍼 주변에 공장들이 들어왔는데 다른 유흥거리나 식당은 따로 없었나요?

그런 거는 없었어요. 별로…… 우리가 팔았어. 내가 팔다시피 했어. 왜냐하면 공장 사람들이니까. 두부 같은 거, 뭐 닭고기 같은 거 여기(슈퍼 한쪽을 가리키시며) 닭고기 튀기는 데야. 그걸로 계속했으면 돈 벌었을 텐데. 그러니까 사실은 내가 왜 그걸 알았냐면 술을 팔아야 되잖아. 딸자식들은 커가는데 그거를 계속하다 보니까 애들이 보고 크는 게 뭐가 있겠어. ‘아! 이건 아니다.’ 자식들이 성장해 가는데 엄마가 술장사를 한다. 그러면 나 이거 때려치우고 그거 했으면 떼돈 벌었어. 엊그저께도 저 아가씨한테 얘기를 했지만, 나 그때 술장사했으면 떼돈 벌었어요. 지금도 그 저기, 여기서 술장사하던 사람 있어. 가정집에서. 근데 그 양반들 다 돌아가셨지. 이제 그 사람들은 돈 많이 벌었는데 자식이 저게 안 되니까 다 소용없더라고. 돈 많이 벌어도 소용이 없어. 다 그냥 그렇게 무너집디다. 그게 다 돌아가시고 그랬어. 
80년대 내가 박정희 대통령 1년만 더 살았으면 나 떼돈 벌었다 그랬어! 나 진짜 그래요. 지금도 그 소리예요. 내가 장사하자마자 80년대에 돌아가 81년인가 그때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니까 몇 달이야. 79년도에 했으니까 얼마 안 했지. 그러다 보니까 그러고 나서 전두환 대통령이 됐잖아요. 그때까지도 잘 됐어. 김영삼까지도 좀 괜찮았어. 그 뒤부터 그게 안 되기 시작하더라고. 사람이 없잖아. 한미 나갔지. 우아미 가고. 또 별 볼 일 없지. 동서가구도 사람 자꾸 줄어지지. 한미도 자동으로 다 만들지. 그러니까 사람이…… 노동자가 주는 거지. 그러다 보니까 장사가 자꾸자꾸 줄고 또 큰 데 생기고…… 이마트 생겼잖아. 우리 집에서 제일 가까워. 오죽하면 세무서에서 왔었어. 세무서에서 와서 그전에 팔던 가락이 있잖아요. 부가가치세 이제 이런 거 막 내던 사람이 안 내잖아. 그러니까 의심스러우니까 온 거야. 와서 봐라! 이거야. 나 세무서 가서도 막 싸워요. 왜? 어떤 때는 화가 날 때가 있어.옛날에는 잘 나갔지만, 지금은 이렇지 않냐. 실적이! 그러면 세금을 조금 덜 먹여야 될 거 아니냐. 그래서 그 세무서 담당부에서 당신 부모한테 용돈 얼마나 줘. 내가 따졌어. 그러니까 말을 못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 노인네들이 이제 그때만 해도 내가 나이 먹었으니까. 노인네들이 십분의 일이라도 벌어서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린다는 것만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냐? 이거지. 지금도 그래. 우리 같은 사람이 일등 공신이야. 나무 절약해 줘. 전기 절약해 줘. 인맥도 소용없습니다. 똑똑해야 돼. 그러니까 배운 게 없으니까 좀 아쉬워. 그래서 내 자식들은 잘 가르쳐야 된다는 거를 아주 이를 악물었지. 

외상값은 받아야지
공장 직원들과는 어땠나요?

그 당시에는 동서가구, 우아미가구, 나한테 안 거쳐 간 사람 없어요. 그러니까 어떤 때는 옛날 사람이 보고 싶을 때 있어요. 단골도 있었지. 근데 다 이제 딴 데로 갔잖아.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가게가 작아지면 손님들이 덜 와. 큰 데로 가지. 우선 현찰을 안 쓰고 카드로 쓰니까 옛날에는 외상을 줬잖아요.그러니까 외상으로다가 이거를 장부가 이만큼이었어. 그거 다 버렸어. 버리지 말고 그때 왜 버렸나 몰라. 월급날 도망가는 사람과 잡기를 하고 별짓 다 해봤어. 내 지금 생각하니까 있죠. 남한산성이야! 남한산성. 그 꼭대기를 갔는데, 넘어갔는데 돈을 그때 부식을 내가 대줬어요. 어느 회사를! 그런데 회사에서 직원이 죽었어. 그러니까 회사가 망했을 거 아니야. 그래서 갔는데 내가 그래도 그때만 해도 내 머리가 나쁘지 않았나 봐. 식당 아줌마를 짱 박아놨어. 의심스러워서. 그러니까 그냥 총알같이 연락이 오지. 분위기 이상하고, 돈도 내려왔는데 “니 거는 없는 것 같다!” 이래. 그때 100만 원이면 큰돈이야. 집 살 돈인데 그런데 날아간다니까 큰일 났잖아. 슬리퍼야 여름이니까. 되게 더울 때야. 슬리퍼 반은 신고 양말도 안 신고 그냥 뛰었어. 근데 이 아침 그때만 해도 이 주머니를 찾으면 괜찮은데, 이 바보 할매가 앞치마를 차고 장사를 하다가 앞치마를 패대기치고 간 거야. 그러니까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돈이 없는데, 이 사람을 이제 저기 사무실 직원을 잡았어. “내 돈 내놔라. 내 돈 안 내놓으면 아저씨 서울 못 가!” 그래가지고 이제 그 사람이니까 ‘그럼 저하고 서울로 갑시다’ 이러더라고. “그럼 갑시다!” 사장님한테 나는 받아야 되겠어.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받아야 돼. 이 돈 놓치면 나는…… 우리는 거지가 된다고, 막 그거 하면서 따라서 가니까 진짜 아닌 게 아니라 사장이 사정을 하는 거야. 어디 나가더니 아줌마 잠깐만 기다려 보래. 사장이 참 점잖았어요. 그러니까 어디 가서 30만 원을 구해왔더라고, 그럼 내가 몇 일날 아줌마 돈은 세상없어도 줄 테니까 걱정마시라고! 진짜 다 받았어요. 그래 갖고서는…… 그래도 대갈님이 돌아가야 돼! 처음 갔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 처음 타봤으니 인천에 엘리베이터 하나도 없을 때야. 엘리베이터 타러 올라갔는데 큰일 났어. 그 호랑이가 물어가도 정신을 차려야 되겠다고. 올라가서…… 올라가긴 했는데 다닥다닥 그렇게 사무실이 많습디다.그래가지고 어디 골짜기 구석으로 끌고 가는데 ‘이거 죽이나?’ 싶은 생각도 들더라고. 그래가지고서 그랬더니 돈 30만 원 구해다 주어서 그래 이제 요 돈은 여기다 넣고 이제 버스비만 이제 손에 쥔 거야. 쥐고서는 이제 안 되겠다, 호랑이가 물어가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버스를 무조건 탔어. 아저씨 무조건 서울역만 찾은 거야. 서울역은 자주 다녔거든요. 내가 경기도 광주에 우리 이종사촌 동생들이 살았어. 그래서 거기를 자주 다녔어. 13살까지. 그러다 보니까는 아이, 큰일 났다. 그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아줌마 이 차를 타세요!” 이래. 이거 서울역 갑니다. 서울역 내려가서 가만히 서 있으니까, 전철만 타면 되잖아. 그러면 인천 올 거 아니야 그래서 집 찾아왔어. 그러고도 살았어. 
근데 다 가르쳐 놓으니까 자기가 잘난 줄 알아. 쟤가 엄마한테 잘해. 진짜 잘해야 돼. 엄마들이 이렇게 우리 선배들이 이렇게 해서 고생해서 자식 길렀는데, 지금은 엄마들한테 잘하는 사람 몇 사람 없어. 돈이 들어온다는 거에, 그거는 힘든 것도 모르고 살았어. 지금 하라면 못해. 그 당시에는 막 있잖아. 사람들이 참 좋았어. 의리가 있어. 얼굴만 대면 딱 그 도망가는 놈도 있어. 내일 도망갈 건데 이건산업에 가서 기다리니까 안 와. 안 나가. 이게 경비를 다 알잖아. 여기서 살았으니까. 그러니까 경비를 딱 하니까 그 사람 벌써 퇴근했대. 집으로 뛰었어. 저 계단 있는데. 집으로 뛰어가니까 보따리도 다 싸놨어. 내놔! 깜짝 놀래. 지금 이제 차 오면 나가려고 하는데, 그래서 받은 적도 있어. 그래 나는 뛰지는 않았어. 그런 거는 내가 눈치가 빨랐나 봐. 그러니까 그걸 그렇게 먼저 아줌마는 장부책도 잊어버렸어. 그래가지고 돈 뜨거운 줄 알아야 받아. 다 도망가고. 근데 내가 제물포 살은 덕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그렇게 해서 억척스럽게 살았어.처음에 오니까는 동네 아저씨들이 거기 소금 염전 있는 데서 났다는 사람. 그 사람이 패거리가 있어. 대여섯 명. 오면은 이제 이걸(손으로 돈 모양을 흉내내시며) 안 준다 이거지. 그래서 내가 “먹어! 실컷 먹어.” 그 대신에 와서 깽판만 넣으면. 그래서 나중에는 하다 하다 안 돼서 “야! 너하고 나하고 주민등록 나보다 6살 7살 더 먹었는데 주민등록 까! 너 인천에서 얼마나 살았어?” 내가 이제 객인 줄 알고 텃세를 한 거예요. “너, 주민등록 까! 너 여기서, 인천에서 얼마나 살았어?” 그랬더니 나 뭐 여기서 태어난 사람이래 “그래 나는 제물포서 나도 태어난 사람이야. 그러면 너 제물포 인간들한테 너 한번 혼나고 싶어?” 그때만 해도 제물포 깡패들이 한주먹 했거든. 쟤 갖다 없애. 그러면 그때는 없앴어. 그 당시엔 그랬어. 동생들 친구들이 갖다 쟤 짱박아. 그러면 바다에 갔다 던지는 수도 있었어. 그 당시에는. 그러니까는 법이 무서운 거지. 제물포하고 이 8번지하고 39번지하고 싸움이 붙으면 제물포가 이겼어. 그 정도로 셌어. 그러니까 제물포 기질이 있지. 그 기질이 몰라. 내가 있는지는 몰라도 내 동생을 그 이웃에 한 두 살 먹은 애를 때렸는데, 딱 그 집 가서 문 앞에 3일을 버티고 앉았던 사람이야. “니가 내 동생을 때려?” 그러고서는 그 집 문 앞에 계속 집에 3일 못 들어갔어. 잘못했다고 빌어서 그랬어. 근데 우리 이웃에 바로 이 집하고 이 집하고 있는데, 얘 이제 여기는 걔고, 여기 이제 우리 집은 가운데고, 요 옆에 집에 있는 애들 딸이 셋인데 색시는 저리 갔다야. 
근데 나는 남자 틈바구니 컸으니 내가 남자가 될 수밖에. 걔네 들은 여자들끼리 크니까 맨날 쟤네들 닮으라고 얌전한 게 어떻게 여자가 크도록 깡패냐고 맨날 그랬어. 우리 엄마가. 아 얌전한 개 부뚜막에 먼저 올라갑디다. 그렇게 그런 일도 있었어. 재밌었어. 그래도 지금 얘기하면. 그러면서 이제 조금 연탄불 갖다가 딱! 해가지고 땅 파가지고 뭐라 그러지? 빠지도록 겨울에. 연탄재 갖다 딱 덮어놔. 그럼 자기가 안 빠지고 배겨. 함정을 만들어 놓는 거지. 깊이 안 만들고 조금만, 큰일 나지. 깊이 파서 다치면. 그런 짓도 했고 그랬어. 진짜 재미있었어. 그때는…… 딱 그 시기라면 우리는 산더미같이 싸워.

더 이상 외상은 없다
지금은 오는 사람이 없나요?

가끔 와요. 그럼 나 음료수 하나 얼른 줘. 아주 너무 반가워서 그거 다 몇 년 전에는 이 사람들이 이제 모임을 했나 봐. 이분들이 이제 돌아가실 때가 됐어. 그러니까 전부 다…… 근데 저쪽에 가서 막 쭉 서 있어. 내가 저녁때 아저씨가 가게를 보니까. 내가 오후에는 좀 운동을 한 번 했고 그렇게 했어. 그러다 보니까 아니 남의 집이 좋지도 않은 집을 어떤 놈들이 쫙 쳐다보고 있는 거야. 아주 좋지도 않은 집을 누가 저렇게 쳐다보고 있나? 그랬더니 세상에 우아미가구에서 그 전부 직장 생활하던 사람들이 내 옆치기도 잘했어. 여기다가 소주를 넣어주면 감추기 잘해. 동석하고 그랬고 재밌었어. 그때는 이걸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의리가 있거든. 진짜 그런 시절이 왔으면 좋겠어. 근데 지금은 못 믿어요. 외상 줄 수가 없어. 여기 저쪽 건너가면은 기숙사에 있었잖아요. 이건산업도 그리고 가게가 몇 개 안 됐어. 지금은 뭐 24시도 생기고 뭐도 생기고 했지마는, 그때만 해도 내가 저쪽이 장단점이 하나다. 그러니까 뭐 여기 오지 않으면 살 데가 없거든. 식당이 있나, 뭐 있나. 저 담 있는 데가 다 우리 집 통로야. 여기서부터 저 사람 지나가는 데까지가 하수도야. 지금 우리 집 문 앞에서 저 택배 있는 데까지가 하수도야. 지금 이 밑에 하수도야.다리 놓고! 다리 놓고 건너가서 거기 가서 신문지 한 장 들고 가면 앉아서 드시는 거야. 앉아서 그냥 땅바닥에 두 다리 쭉 뻗고 앉아서 이 근로자들은 이렇게 땅바닥에 앉아서 그냥 지금 그 당시에 박스가 어딨어! 근로자들은 그냥 신문지 하나만 깔고 앉으면 그냥 거기서 술 한잔하고, 두부 그냥 두부 한 판 두 판씩 사놓으면 간장 양념 얼큰하게 해가지고 착착 썰어서 쫙! 뿌려주면 그냥 배고플 때 최고지. 퇴근 후나 야간 주간이 있으니까 퇴근한 사람들은 아침에 먹고 저기하고 이제 저녁에 오시는 분은 이제 늦게까지 이래. 그럼 그 사람들 보내놓고 문 닫고 쉬었었지. 저기서 빨래를 하는 거야. 손빨래 다 해서…… 3명 빨래, 세 명분이야. 할아버지 할머니 그것도 안 바라. 둘이 다 빨면 한 보따리야. 그래갖고 빨래 갖다 놓고 그랬어. 
하루에 막걸리 8짝씩 10짝씩 팔 정도 되면 두부를 얼마나 팔았겠어? 두부뿐이야. 노가리! 그러니까는 다 걸어놓고서, 그냥 후라이팬 여기다가 돼지고기도 볶아주고 닭 그거 있죠? 닭갈비! 닭갈비 재워가지고서 딱 놔뒀다가 한 판 구워봐. 얼마나 맛있다고 나 닭갈비 잘 재. 그럼 이거 파는 거는 이거 까자는 구색이야. 지금도 과자는 구색이야. 몇 가지 안 되잖아.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해서 돈 버는 거예요. 그냥 버는 게 어딨어. 여기서 생선도 팔았지. 야채도 팔았지. 과일도 팔았지. 별거 다 팔았어. 그러다 여기서 닭을 하루에 40마리씩 튀기는데, 너무 힘들어서 못 하겠더라고. 다 옛날 통닭! 지금 옛날 통닭 나오죠? 그런 거 이게 통째로 이렇게 있었죠. 

물건을 사고 받는 건 어떻게 하셨어요?


거의 상사에서 받았죠. 그때는 근데 이제 지금은 조그마하니까 주류만 이제 상사에서 받고 이런 거는 이제 우리 사위가 도매를 해. 그래서 사위가 이제 갖다 줘. 거기서 영업 재료 넣으면 되니까 한 군데서 다 가져와 버리지. 배달 안 해주는…… 이제는 일이 조그마한 데는 자동으로 죽게 돼 있어요.

옛 모습과 현재와 미래
가게 내부의 모습이 신기한데 설명 부탁드려요.

이거 앵글은 30년. 옛날에는 나무로 만든 앵글이 있었어. 근데 다 삭아가지고 한번 갈은 거야. 이게…… 요 앵글. 바닥이 다 흥글흥글해. 이 연탄을 때서 그런지 어쩐지 몰라도 다 녹아버립디다. 그래서 한 번 갈았어. 할아버지 있을 때. 평상이나 이런 건 그냥 그대로. 책상은 한 40년 됐고. 이거 지금 건드리면 송장 쳐. 못 건드려. 건드리면 무너져. 그래서 고정시켜 놓은 거예요. 요런 철제도 많이 버렸어. 지금도 이제 안에 있는 것도 거의 버리고 이제 내 옷하고 장롱만 버리면 돼. 이사 갈 때 이제 그렇게 할까 싶어서. 이사는 저기 아들 옆으로 가려고. 딸이 와서 보는데, 힘들어하니까 미안해서. 그리고 또 뭐 나 먹고 살 건 있으니까. 
내가 엄청 바보짓을 했어. 그때 그냥 땅을 사놨으면 부자가 됐을 텐데 그걸 못했어. 그 당시에 땅을…… 땅! 땅! 땅! 이렇게 사놨으면 진짜 떼부자 됐을 텐데, 왜 그걸 거기에는 안 깨었었는지 모르겠어. 여기 체육관 있는 데 있잖아? 거기는 그냥 몇 푼 안주면 샀어. 그게 뭐 땅값 몇 푼 가지도 않아. 여기 이 동네 처음에 와서도 장화 없으면 못 산다고 하는 동네야. 이 동네…… 여기서 송림고개 있지 거기도 그랬는데 뭐. 거기 저 넘어가려고 그러면, 인천교 가려고 그러면 장화 없이 못 살았어. 우리 4살 때 인천교서 살았잖아. 우리 막내딸 4살 때. 일로 와서 여기서도 이제 5살 때 여기서 살다가, 마을금고 맞은편에 거기서 살다가, 내가 떼어놓고 도저히 이래갖고 못 살겄습디다. 난 아저씨 보고 그랬어. 나는 너하고 안 살아도 좋으니까 애들만 두고 가라 그랬어. 나중에는 애들까지 다 줄라 그랬어. 생활력이 있어야지. 그래서…… 그래서 억척을 떨은 거야.

경북슈퍼 매장 사진
혹시 특별하게 바라시는 것이나 소원이 있으실까요?

그냥 뭐 바라는 거야 뭐…… 이제는 나 하나 몸뚱어리 살면 얼마나 살겠어. 이제 나이가 80이 다 돼 가는데 그러니까 이제 졸업도 해야 될 것 같아. 애들이 또 엄마 밤에 무섭다고 밤이 걱정인 거야. 낮에는 다 동네 사람들이니까 할매들하고 얘기하고 이러다 보면 하루해가 가는 줄을 모르는데, 근데 또 그게 있어요. 우리 동네가 너무 낙후가 돼서 노인네들이 갈 데가 없어. 노인정에 그것도 텃세. 그러니까 노인정에도 안 가는 사람들은 안 가려고 그래. 그러다 보니까 갈 데가 없어. 나는 아직 다리가 안 아프니까 내가 이제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뭐 복지관에라도 다니고 싶고, 봉사라도 하고 싶고 이런데, 우리 딸은 그러는 거야. “엄마 요즘 좋잖아. 복지관에 가서 봉사도 좀 하시고 고생 많이 했으니까 그러고 사세요.” 맨날 그 소리야. 노래해. 
아주 우리 딸들. 지들 고생시켜서…… 지들이 고생을 한 것보다 엄마가 이제 많이 고생을 했으니까 그만 하시고, 노후에 편안하게 놀러도 다니고 그러라고. 근데 짝꿍이 없어. 친구가 있어야 되는데, 내가 이 장사를 하면요 경계선을 둬요. 사람이 그러다 보니까 친구가 없게 되더라고. 옛날 친구를 찾았는데 사는 수준이 틀려서 그런지 뭐 때문에 그런지 자동으로 멀어집디다. 걔네들 사는 게 또 그래서 그런지, 내가 발이 묶여 있어서 그런 건지 그렇게 달갑게 안 하대. 내가 찾았어. 제물포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데 친구들이 없겠소? 다 뿔뿔이 살고 그랬는데 그냥 뿔뿔이 그냥 흩어지더라고. 그런 게 좀 아쉬워. 조금 이래도 친구들하고 다정다감하게 이렇게 살고 싶은데 그런 게…… 그런 시절이 올까요? 안 올 것 같아.그러니까 친구 있으면 소중히 여겨요. 슈퍼 잘 정리하고 그냥 좋은 데 살고 싶어요. 이렇게 뭐라 그럴까? 봉사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 내 취미도 갖고 싶고, 나 노래는…… 노래 잘하지는 못하는데, 나 노래하고 이런 데 다녔었어요. 할아버지 있을 때도. 

시민기록일지

* 면담일시 : 2023년 11월 7일 15시 50분

* 면담, 원고정리 : 이혜숙

* 면담지원 : 정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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