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의에서는 감정 업무, 물가 조사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인천기계산단뿐만 아니라 인천의 산업사를 통찰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저는 고향이 충청도예요. 충청도에서 아무 연고가 없는 인천에 오게 된 것은 형님이 부평에 살고 있었는데 그때 향동기업 주식회사를 창업하는 단계였습니다. 군대 제대하자마자 그 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 인천에 왔죠. 그 회사 명칭은 향동기업 주식회사로 하는 일은 sp라고 해서 세크리터리 폴리스 경비 용역업체. 경비 용역을 따내는 과정에서 기존 업체와 경합이 붙었어요. 입찰에서 우리가 탈락해가지고 형은 바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나는 그때 특채로 인천상공회의소에 들어갔죠. 거기서 하는 일이 조사 업무였어요. 감정 업무, 물가 조사 업무라든지 이런 업무를 했습니다. 그게 69년도 3월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마 1년 채 안 돼서 무슨 일 때문에 내가 사표를 내니까 그때 권혁환 사무국장이신 이 어른이 인천 초대 시의회 의장을 지내신 분이었어요. 아주 고명하신 분인데 이분이 좀 더 있어 보면 좋은 일 있을 거라고 국장님의 만류로 그냥 눌러앉아서 계속 근무를 했습니다.
당시 인천은 경인공업지대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 ‘공장도 많고 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중소기업들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어요. 70년대만 해도 인천은 도시 개발 같은 것이 되어 있지 않아서 주택이 있는 데다가 중소 규모의 업체들이 많이 산재해 있었어요. 주민 생활에 굉장히 불편을 가져왔던 건 사실이죠. 소음, 미세먼지, 공해 등 여러 가지 분쟁이 많이 나고 했었죠. 그래서 상공회의소가 나서가지고 집단화해야 한다는 제의는 했지만, 우리가 도시계획이라든지 이런 거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으니까 행정관서에 집단화시키자 즉 집적화하자고 건의했었습니다.
행정관서에서 건의 사항을 그대로 쉽게 수용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우리는 계속 민원을 넣고 했던 거죠. 68년도쯤에는 인천상공회의소 사무국장 김재길 씨가 기계공단을 설립하는 데 주춧돌을 놓은 셈이죠. 인가가 난 것이 76년도인가 78년도인가 아마 이렇게 될 거예요.
인천기계공단 같은 경우는 정부에서 하는 어떤 법적 공단이 아니고 민간인들이 추진하는지 보니 많은 어려움이 있었죠. 진척도라든지 추진이 상당히 루즈해지고 했던 부문이 없지 않았었죠. 공단 초대 이사장을 상공의소 사무국장을 지낸 김재길 씨가 맡아서 하다가 그다음에 장만순 씨, 인천기계제작소 사장인 이분이 경영수완이 뛰어나고 인품이나 품성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 없는 아주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인천기제작소가 그때 당시에 아주 칭송을 많이 받는 모범적인 업체였어요. 그분이 오랫동안 이사장을 한 거예요. 일본에도 일부 수출도 하던 업체였는데 이상하게 끝까지 가질 못하고 그 업체도 70년대 후반인가 80년대 초반인가 그 회사 자체가 해체가 돼요.
그때는 공단 조성면에서는 안정기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죠. 기계공단에 입주하고 있는 업체들이 중소 규모이면서 법적으로 사단법인으로 인가가 났었어요. 그때 각급 기관에 협조를 많이 받지를 못해 어려움은 상존하고 있었죠. 그 반면에 국가공단이라고 할 수 있는 수출 산업단지 부평에 있는 4단지, 가좌동에 있는 5단지 6단지 여기는 본부가 구로동에 있었어요. 여기는 아주 잘 돌아갔죠. 기계산단 경우는 우리 인천에 있으면서 순수한 민간 사설공단처럼 돼 있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어려움이 있었죠.
그때 당시 60~70년대 그때는 유승원 의원이 지역 개발을 위해 일을 많이 했죠. 경인종합개발위원회가 설치되어 유의원이 위원장, 상공회의소 회장이 부위원장을 맡아 많은 일을 했습니다. 유승원 의원이 시장도 하고 인천 발전을 위해 기여를 많이 했죠. 그 족적을 보면 인천에 공단 유치라든지 여러 가지를 그분의 힘이 작용을 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교육을 한다든지, 어떤 정보제공을 한다든지, 노사관계가 있으면 행정관서하고 매치를 해가지고 해결을 해준다든지 그런 거였지. 그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못 됐어요.
그 부분은 별로 없는 걸로 생각이 듭니다. 시에 요구를 한 부분은 있을 걸로 짐작이 되는데 정부에다 대고 우리가 무슨 수출공단처럼 승격을 시켜달라고 한다라든지 그런 것은 별로 생각이 안 납니다.
그때 기계 업종인데 철강 또는 금속 대부분 그런 업체들이 거기 많이 있었죠. 조금 규모를 갖춘 곳이라면 아까 얘기했듯이 인천기계제작소라든지 부국철강 이 정도, 그리고 다들 아주 규모가 좀 작아요.
부국철강 장영복 사장이 아주 점잖고 경영을 참 잘하는 기업인이었습니다. 내가 그만두고 나서 한 20여 년째 못 만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주택지에 있던 조그마한 공장들이 집단화 돼있는 공단에 입주를 하기 위해서는 이주비라든지, 시설 이전 비용 등 무엇보다 중소기업들이 자금 사정이 어려워가지고 힘들었을 겁니다. 상공회의소가 주도해가지고 69년 12월 8일 인천은행이 오픈을 했는데, 이 지방은행이 중소기업 자금을 대출을 해주고 지원을 했죠.
그러다가 인천은행이 관할 구역을 인천만으로 국한시키니까 너무 협소하잖아요. 영업 권역을 좀 넓혀야 할 필요가 있어가지고 72년도에 경기은행으로 개칭을 합니다. 그래서 인천, 서울, 강원도까지 영업 구역을 넓혔죠. 그러나 1998년 퇴출은행으로 지정되어 폐업을 하고 한미은행에서 인수했죠. 광주에 가면 광주은행이 있고, 또 경상남도 가면은 경남은행이 있고, 경기은행 같은 경우는 영업 환경이 좋은 곳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도 처리가 돼가지고 없어졌거든요. 그게 아쉬운 부분이에요.
무엇보다도 지방은행 같은 경우는 그 지역과 같이 성장하고 자라는 겁니다. 그 지역에서 도외시하고 지방에서 아껴주지 않고 사랑해 주지 않으면 지방은행이 존속할 수가 없죠. 어렵게 지방은행을 설립을 해놨는데 결국은 안타깝게 부도가 났어요.
업계는 큰 타격을 입게 됐죠. 특히 중소기업들은 경기은행을 많이 이용을 했는데 그게 문이 닫히니까 도산하는 업체들도 있었고 중소기업들이 많은 영향을 받았죠.
정부에서는 우리나라가 수출 주도형 경제이기 때문에 수출 관련 부문은 상공부 자체에서 추진했지만 민간산단은 자체적으로 해결을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자신감이 있어서가 아니고 통합대상이 아니니까. 기계 산단 여기는 명칭이 처음에는 기계산단이 아니에요. 기계공합조합였죠. 아까도 내가 얘기를 했지만은 장만순 씨의 공이 아주 커요.
비철공단이 잠시 존립을 했다가 없어졌어요. 왜 그러냐 하면 상공부에서 수출 주도형 경제를 운영을 하다 보니까 수출해야만 우리가 먹고 살던 시대잖아요. 그때 당시에 수출공단 본부는 구로동에 있었습니다.
기계산단은 민간공단이다 보니 정부에서 지원을 못 받아 어려움이 많았었죠. 기계공단에 입주하고 있는 사장님들이 무슨 혜택도 받지 못하면서도 꿋꿋하게 지구력을 가지고 지금까지 운영을 하는 걸 보면 대단한 분들예요.
맞아요. 지금도 인천기계공단 하면은 관심이 적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소홀히 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죠. 인천시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지원이 요구됩니다.
재정을 확보하는 데는 법인세 등 세수가 많이 들어와야 되잖아요. 인천에는 유수한 대기업군들이 많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서 월미도 부근을 보면 대성목재라든지 선퍼니처, 선창산업, 대한제당, 동일방직, 대한제분 등 기업이 쭉 있었고 또 대우자동차라든지 대우중공업이라든지 큰 규모 업체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큰 규모 업체에서 인천시 재정을 확보하는 데 기여를 많이 하고 중소기업은 고용 및 세수 부담은 미미했을 것으로 생각이 좀 드네요.
한국유리, 동양화학 등 많은 기업이 지방에 이전했을 뿐만 아니라 공장총량제로 기업 확장이 어려웠었지요. 수출 4단지 부평 지역 여기가 준공업지역이에요. 용도상으로 준공업지역은 공장도 지을 수도 있고 주택도 지을 수도 있고, 주택들 때문에 부평공단 4공단이 많이 축소됐습니다. 4공단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제가 시에다 건의를 한 적이 있어요. 공장을 운영하던 사업 주체들은 땅값이 많이 올랐잖아요. 그러다 보니 지방 어디로 크게 널찍하게 땅도 잡고 어떻게 보면 일거양득이지요. 여기 민원도 들어온다 해가지고서 그렇게 가는 업체들도 많이 있었고 대표적인 대우자동차도 이제 문을 닫을 겁니다. 옛날에 제조업들이 아까 얘기했듯이 우리나라의 100대 기업들이 인천에 여러 개 있었어요. 여담입니다만 한국유리 판유리에요. 처음에 정부에서는 영등포에다 짓는 걸로 계획을 했었어요. 그러는데 인천상공회의소에서 정부에 건의를 하기를 유리의 원료가 규사인데 규사는 인천 앞바다 가면 쌓이고 쌓였다. 영등포에 진다면 이걸 또 수송을 하는데 물류 비용이 얼마나 드냐? 이거 비합리적이고 하니까 인천에 짓자 해가지고 판유리를 유치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때는 대학을 나와도 취업할 곳이 없었어요. 일자리가 없어요. 한국유리에 가면 서울공대 출신자들이 많았어요. 인천은 딴 데에 비해 공업입지라든지 모든 게 참 좋았는데 수도권 정비사업법과 공장 재배치법 여기에 묶여가지고 인천이 개발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봤을 때 애국자들은 중소기업인이라고 생각을 해요. 사장이 영업사원이 돼야 되고, 어느 때는 공장 들어가서 자기가 제품을 만들어야 되고, 판로도 없어가지고 딴 데 부탁을 한다라든지 그런 입장들예요. 우리나라의 중소기업들이 하려고 하는 그 열정이라든지 기업 정신, 이것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투철한 분들이에요. 중소기업들이 아무리 규모가 작더라도 공장을 돌리자면은 한 5명 있다라든지 10명 있다라든지 하면은 그만큼 고용을 하는 거거든요. 고용 증대하는 거지요. 그걸 그리고 일정 부분 대기업에 비해가지고 많지는 않지만 국가 재정에도 기여를 하지요. 인천기계공단이 앞으로 좀 더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고 하려면 중앙정부에서 관심을 갖고 지원을 많이 해줘야 될 것 같아요. 중앙정부도 물론이지만은 지방정부인 우리 인천시에서도 그렇고.
그 부문은 잘 모르겠네요.
노동운동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할 얘기가 많은 사람인데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나라가 제대로 노동운동을 해본 경험이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법규 자체가 일본의 법을 갖다가 그냥 따온 거예요. 우리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우리가 입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옛날 일본의 노동 파업은 극심했어요. 노동운동도 무조건 달라고 하면 준다 하는 식으로 인식돼 있고, 노동운동의 근본은 노조원들의 복리후생 증진 또는 경영 합리화를 위해 제공하는 임무를 띠고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서 무조건 많이 달라, 뭐 해달라 하는 실정입니다. 선진국에 진입하고 있는 현시점의 노동운동도 이제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환영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할 때다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인천의 C산업이라고 있었습니다. 중소기업이지만 노사 협상을 하는 거예요. 노조에서 요구하기를 이번에 우리 임금을 1만 원만 올려주시오 하고 요청을 했어요. 그러니까 이 사장이 만 원이 뭐냐 하고서 1만 2천 원 올려주마 해가지고 임금 협상이 타결됐어요. 그렇게 했으면 고맙다고 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근데 이 사장은 기업을 증설하기 위해서 잉여자금을 2억인가 20억인가 얼마를 유보해 놓은 자금을 노조에서 더 지급해달라고 파업을 해가지고 아마 몇 개월 동안 문을 닫았어요. 노조에서는 기업 경영 성과에 따라 이 정도 받으면 되겠다 하고 그래야 되는데 미래를 보고서 유보를 해놓은 유보금까지 달라고 해가지고 결국은 그거 주고서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어요. 문을 닫으면 그 사람들은 갈 곳이 없잖아요. 앞으로 노사가 상생할 수 있는 노사관계가 정착됐으면 좋겠습니다.
상의(인천상공회의소) 입장에서는 근로자 측과 사용자 측의 중간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역할이 별로 없어요. 왜냐하면 노사간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죠.과거에는 저런 게 있었어요. YH사건이라든지, 동일방직 사건이라든지 특히 인권 유린 문제가 많이 있었잖아요.
제조업 부문에서의 기초 부문은 기계 부문이거든요. 모든 산업이 기계공업이 발달되지 않고서는 제조업 부문에서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내 생각입니다마는 아마 앞으로 행정관처라든지 상공회의소, 우리 인천 시민들도 기계산업 부문에 관심을 갖고 신경을 좀 많이 써야 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에요. 그전에 일본에 가서 소규모로 운영하고 있는 공장을 한 번 시찰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규모는 작지만은 오토메이션화 돼 있는 거야. 그러니까 보턴을 누르면 기계가 깎이고 그 순서에 의해 프로세스대로 생산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랬는데 우리나라는 얼마 전만 해도 손으로 수작업을 해서 사람이 없으면 안 될 정도로 시급히 현대화돼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에요.
아마 자동화 자금이라고 해가지고 어느 정도 지원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부문은 한두 가지 문제가 아니에요. 독일의 경우를 보면 중학교. 고등학교 정도 되면은 인문계통으로 대학을 보내야 될 건지 아니면 기술을 가르쳐야 될 건지 구분을 해요. 고등학교 과정부터는 완전히 구분을 합니다. 우리도 그런 시스템을 가져야 되죠. 우리나라도 기술사 제도가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박사하고 똑같이 대우를 해주고, 그래야 되는데 차별을 하니까 이공계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죠. 또 하나는 뭐냐 하면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대학을 보내잖아요? 그러니까 나 대학 나왔다 해가지고서 일을 안 하는 거지요. 소위 3D 기피 현상이라고 할까? 외국인 근로자들 몇십만 명이 일을 하고 이로 인해 일정 부문 국부 유출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요. 놀면 놀았지 일을 안 한다니까요. 중소기업 사장들하고 대기업 임원, 사장들과 간담회를 한 적이 있어요. 대학을 나와가지고 취업을 했다 치더라도 바로 현업에 종사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기계 다룰 줄을 몰라. 이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이제 그런 문제가 있더라고. 그래서 대학에서 한 2년 정도는 이론 수업을 하고 한 2년 정도 현장 실습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기도 했어요. 이론과 실제가 다르잖아요. 제안을 하니까 대기업 측에서 시큰둥해요. 반면에 중소기업 사장들은 환영하고.
그게 어떻게 보면은 우리 국부 유출이에요. 외국인들이 취업을 해가지고 월급을 받아가지고, 소비도 우리나라에서 하고 그래야 되는데 외국인들은 돈을 받아가지고 전부 본국으로 송금하거든요. 이런 것들을 빨리 정부에서도 간파하고서 노동시장에 우리 젊은이들이 많이 취업할 수 있도록 교육 제도도 빨리 고쳐야 될 것 같습니다.
대한상공회의소 산하에 산업인력관리공단이라고 각 분야별로 전문 인력을 양성을 하는 코스가 있어요. 인천에는 남동공단 내에 있고.우리나라는 박통 때 자본도 없고 기술도 없으니까 독일에서 돈도 빌리기도 하고 기술도 많이 도입했잖아요. 한독 실업학교도 우리나라에 지었고, 그리고 특히 제일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인천 구산동에 중앙직업훈련원을 설립하여 고급 기술인들을 양성토록 하였으며 전문기술 교사들을 배출했지요. 지금은 폴리텍대학이라고 불리고 있죠.
그렇습니다. 기술적으로 인정을 받으니까 거기 수료자들이 우리나라 역군들이죠.
이런 데는 안 올 겁니다. 여러 기능인들을 훈련 교육시키는 교사들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중소기업들도 옛날 그 사고를 이제 버려야 돼요. 과거에 중소기업 사장들 한 200여 명 교육을 시키면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재산이 10억이다 하면은 10억까지는 내 재산이다 주장할 수 있지만 10억이 넘으면 이건 내 것이 아니다라고. 나를 비롯해가지고 우리 회사에 종사하는 종업원들과 또 우리 제품을 써주는 소비자하고 우리 국민들이 같이 벌어준 돈이기 때문에 이 돈을 값어치 있게 쓰고 우리 사회를 위해 써줘야 된다고 교육을 한 적이 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우리가 만나요. 전 직장 동료들 모임인 ‘이월회’, 기업체 전 임원 출신인 ‘좋은 벗’ 모임 등 4~5개 모임이 있어요.
주로 어떤 말씀들을 나누시는지요?경조사라든지 이런 것도 알면은 같이 참여도 하고 무엇보다 건강문제에 대해 대화를 많이 하게 돼요. 80대가 되니까 이제 하던 것도 다 내려놓고 홀로서기 연습도 하면서 아름답게 늙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죠.매사가 허무하다고 할까요, 모든 일들을 후배들한테 넘겨주고 부담 없이 남은 여생 지낼 생각입니다.
시민기록일지
* 면담일시 : 2023년 8월 12일 10시
* 면담, 원고정리 : 표기자
* 면담지원 : 박인옥, 최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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