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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복입니다. 1948년 인천 경동 173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께서 슬하에 4남 2녀를 두셨는데 그중, 저는 셋째 아들입니다. 우리 형제는 모두 송림학교를 졸업했고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를 나왔어요. 큰형님만 제물포고등학교가 없었을 때니 인천고등학교 졸업하셨죠. 또, 4형제가 다 연세대학교 졸업입니다.
큰형님은 연세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가업승계의 의지가 있으셨기 때문에 대학 졸업 후 아버님과 일선에서 같이 있으셨고 저는 82년 정도에 인천공장으로 오면서 경영에 참여하게 되었죠.
교수가 되기 위해 대학원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다 첫 입사는 연합철강이라는 회사였습니다. 그 회사에서 2년 근무하며 현장경험을 쌓고 대우실업서 2년 근무했죠. 그 당시에는 부국철강 공업이 규모도 커지고 생산이 활발했으니, 큰형님께서 제안을 하셨죠. 그래서 82년도에 인천공장에 내려와 경영일선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저는 인천공장에서 생산라인, 현장 살림을 총괄했고, 큰형님이신 장영상 사장님께서 수입·수출에 전념하셨고, 둘째 형님인 장영훈 사장님은 미국 지사장으로 나가셨다가 서울 쪽 영업파트를 맡아 관리하셨습니다.
저는 공대 출신인 반면 큰형님은 상대를 졸업하셨고 경영이 적성에 맞는 성격이시라 굉장히 열심히 했죠. 인천 지역사회 활동도 많이 하시고, 제조업 분야 사장답게 술도 잘 드시고, 사교성도 많으셨어요. 저는 강단에 서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성격이 외향적이지는 않았지만 형님과 서로 보완하며 호흡이 잘 맞았죠.
‘이연고무 제2공장’으로 분할받으신 후 ‘인천고무공업사’를 설립하셔서 지금 동인천 경찰서 자리, 송림동에서 생산을 시작하신 거예요. 제가 어렸을 적 일이어서 선친께서 ‘철강’으로 방향을 돌리신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후 ‘인천강업’으로 업종을 변경하셨는데 그 당시는 블루오션에 해당하는 사업이었죠. 그래서 상당한 재산을 모으셨고 또, ‘수출 보국(輸出保國)’을 외쳤던 제3공화국 시절 충북 음성에 수출용 양송이 공장을 차렸어요. 그 당시는 대만이 기술로 가장 앞선 나라였어서 대만에서 직접 기술 도입해 생산시설을 갖췄는데 박정희 대통령도 회사 설립 커팅식할 때 왔었을 정도로 시작은 잘 됐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도중에 중단하신 것 같습니다.
아버님 업적 중 하나는 인천 경동에 인천 최초로 백화점을 설립하신 겁니다. 그 당시 경동이 서울 명동처럼 인천의 중심지였어요. ‘항도백화점 1954년 인천 경동에 건립된 인천 최초의 백화점.
’이라고 우리 집이 173번지였는데 집 바로 옆에 지으셨죠. 그 당시 인천에서는 아마 그런 건물이 없었을 거예요. 길가에 3층 건물을 올리셨는데 그 일대가 일제시대에 지은 상업은행 정도 건물만 있었고 주변이 다 판잣집이었기 때문에 아주 명물이었죠. 1950년대 이런 건물은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어떻게 백화점 지을 생각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시대를 앞서가신 듯합니다. 물론 ‘인천에서 백화점 사업이 전망이 있을까?’ 그런 검토는 부족하셨는지 한 1~2년 운영하시다 백화점이 흥하진 못하셨어요. 그래서 양복점으로 또 당구장으로도 바뀌었는데 제가 판단해도 인천이 서울 위성도시라, 경제적으로 괜찮은 사람은 쇼핑을 위해 서울 롯데백화점, 신세계백화점으로 가죠. 1970년, 80년까지도 그랬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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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경동 사거리에 2층 건물로 ‘뉴욕백화점’이라는 백화점을 또 설립하셨는데 거기도 성장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죠.
1970년대 골프연습장도 인천 최초로 도입하셨을 겁니다. 지금은 다 기계화가 되었지만 그 당시는 여직원이 골프공을 하나씩 놔주면 치고 그럴 때였어요.
양송이 수출도, 백화점도 난항을 겪으셨고 철강회사도 한동안 어려웠었죠. 그러던 차에 이 기계산단에 입주하셔서 ‘부국철강공업’을 설립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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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화하신 분이셨어요. 사업이 어려울 때도 있고 하니까 그런 얘기를 듣긴 했어도 집에서는 회사 일을 잘 얘기하진 않으셨어요. 밖에서는 배포가 크셨지만 저희가 하는 요구에는 항상 “해줄게, 해줄게.” 하시며. 물론 나중에는 그냥 넘어가셨지만.
또 주변에 사람이 많으셨어요. 경동 집이 당시 꽤 평수가 넓은 집이었지만 아버님께서 어려운 사람을 못 보셔서 친인척들을 포함해 우리 집에 기거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어요. 그 당시 어머님이 한 끼 식사를 20명분 이상 준비하셨던 걸로 기억해요.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누가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면 다 들어주셨고, 지방에서 지인들이 올라오면 방 하나씩 잡고 기거하는 경우도 많았죠. 한옥이었기 때문에 방이 많았는데 한 방에 한 집씩 묶고 있는 경우도 많았고, 여자들만 있는 방도 있고 그랬었죠. 그렇게 인맥 관리를 잘하셨어요. ‘인천고무공업사’ 하실 때 도움받은 분이 있어요. 그 자제가 제물포 고등학교 나오고 고려대 갔나 그랬는데 그분 학자금을 아버님께서 다 대주셨죠. 그분은 금융회사 간부인가 대표이사도 하셨을 정도로 잘 되셨고요. 그 당시에 우리도 자랄 때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으니까. 사업가로서나 아버지로서 존경받을 만한 분이셨죠.
‘부국철강공업’으로 기계산업단지에 입주하시고서는 일선에 나서지 않으셨어요. 80년대 들어서는 장남인 장영상 사장님이 경영권을 승계하셨죠. 당시에 집이 서울 서교동이었는데 큰형님 결혼하고 분가하셨을 때도 저는 아버님하고 같이 살았거든요. 그 당시는 회사 차가 자동차 한 대인데, 제가 타고 먼저 출근하고 그러면 아버님은 점심 드시고 전철로 인천에 내려오셔서 친구들 만나고 하시다가 퇴근할 때 회사 오셔서 같이 서울로 올라가고. 그렇게 10년을 모시고 동행했어요. 항상 검소하셨고 사치는 별로 안 하셨죠. 보통 경영을 아들한테 맡기면 참견도 하시고 하실 텐데 아버님은 회사일 파악은 다 하고 계셔도 일절 “이래라저래라.” 얘기를 안 하셨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당시 이 일대를 떠올려 보면 인천교도 없었거든요. 인천중학교 시절 별칭이 ‘개건너 대통령’이신 선생님이 계셨어요. (미소를 지으시며) 인천교 넘어서 가좌동 쪽을 ‘개건너’라고 했거든요. 심재갑 선생님이신데 그분이 ‘농민학교’ 같은 사회봉사 활동을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들은 중학교 때 전교생이 돌아가면서 선생님 산에 가서 송충이 잡고, 요즘은 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겠지만(웃음), 그 당시에는 기꺼이들 가서 송충이도 잡고 그랬는데 그럴 때나 여기 염전 터에 왔던 거 같아요. 개건너 좁은 바다, 갯골 간척지 같은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개건너’로 넘어갈 때 조그만 뗏목 같은 배를 타고 건너곤 했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인천기계제작소’ 장만순 씨 주도로 이 공단이 조성되었을 거예요. 일대에 기계공단을 조성하면서 기계, 철강과 관련된 업종을 모아서 입주하게 된 거죠. 초창기에는 주물, 철강 같은 제조업체가 꽤 많았어요.
고속도로가 먼저 건설되고 그 옆에 이 염전을 매립해 인천 시내에서 제조업하는 기업을 입주시킨 거죠. 그 당시 지방공단으로 인천에서는 처음일 거예요. 수도권에 국가산단으로 구로가 제일 먼저 조성됐고 그때 부평산단이 있었고, 주안 5·6 공단이 생기고. 그 당시 우리도 송림동에서 이주했고 배다리 쪽에서 사업하던 사람들도 이리로 많이 왔고, 제침(制針) 공장 등 인천에서 유명했던 제조공장들이 다 여기로 건너왔죠.
큰형이신 장영상 사장님은 군대 전역하고 오셔서 전무로 근무하시다가 80년대에 사장으로 취임하셨어요. 84년도에서 86년 사이 회사 성장이 최고에 다다를 때였고, 제가 막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던 82년도는 회사가 확장하던 시기였어요. 바로 옆에 같은 업종인 영창철강을 인수해 덩치도 키우고 근영철강이라는 자회사로 다시 설립해 제가 임원을 맡아 운영했죠.
그 당시 철강 대기업이 많았지만, 미국 수출은 저희가 먼저 시작했었을 거예요. 동국제강, 인천제철 같은 규모가 큰 업체들도 우리만큼 수출을 하진 못했어요. 그 업체들은 대형 제품들을 생산했지만 우리는 소형 압연 품목을 생산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저희 제품을 선호했습니다. 부국철강이 중소기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출량이 많으니 그 당시 무역협회에서는 굉장히 큰 회사인 줄 알았었죠. ‘부국철강’이라는 이름도 한몫하지 않았나 생각하죠.
그러던 찰나에 인연이 되려니 주변 지인들의 조언으로 미국 진출을 하게 됐죠. 그 당시 벨기에에 경쟁 회사가 있었는데 인건비가 일단 우리 한국이 유리했어서 미국 시장 소형 형강 쪽은 저희가 다 잡고 그래서 꽤 많은 양을 수출했어요. 수출탑이 100만 불, 500만 불, 이런 식으로 늘어났는데, 1,000만 불 직전인 990만 불을 수출해서 천만 불 수출탑은 수상을 못 했어요.
우리 아버님께서 “제조업은 제조업으로 먹고살아야지 다른 데 한눈팔지 말자.”라고 강조하셨기 때문에 생산라인에 계속 투자하고 은행 저축만 힘쓰고 했었어요. 그 당시에는 주력 수출품이 가발 아니면 섬유였는데 철강 제품을 수출한다고 하니 수출·입 은행에서 수출 장려한다는 명목으로 자금도 많이 빌려주고 그랬어요.
부국철강은 재료를 국내에서 조달하지 않고 모두 수입을 했어요. 왜냐하면 인천제철, 동국제강 같은 데서 재료를 생산해 팔았는데, 우리가 소형 압연 공장이기는 하지만 경쟁업체니까 재료를 안 주는 바람에 전량 수입해서 제조공정에 투입했죠. 처음에는 미국에서 고철을, 압연제라고 재활용할 수 있는 재료를 100% 수입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달러로 결제를 해야 했고 수출·입 은행에서도 지원을 많이 해 줬어요. 더 저렴한 이자로 유산스(usance)를 더 연장해 주고 그랬죠. 그 당시에는 정부 지원 ‘수출드라이브 정책’으로 수입하는 은행에서 그냥 보증서를 발급해 주던 때였습니다. 지금은 내 담보가 얼마 있는가를 따지지만 수출에서 그런 건 예외 규정으로 두었던 거죠. 당시 우리가 3개월이면 회전이 됐는데 그냥 환어음 기간을 6개월, 1년 늘려도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는 단자회사가 있었어요. 지금의 저축은행보다 규모가 조금 큰 정도였는데 이율이 꽤나 높았어요. 유산스를 연장해 주니 미국에서 수입할 때 은행에서 한 2~3%로 저리로 대출받아 바로 상환하지 않고 단자회사에다 넣으면 이자가 훨씬 높았어요. 오히려 대출 이자보다 예금 이자가 더 높았던.
그 당시 수출 쪽에서 그런 페이버(favour, 인정)를 받았고, 그렇게 단자회사에 넣어서 예금이 몇십억, 외형이 많이 성장했었는데 환어음은 쌓여 있는 상태로 IMF가 찾아왔으니 환율 1천 원짜리가 2천 원 되는 바람에 한 50억 피해를 봤어요. 신용장 갖고 수입을 하는데 수출하고 납품하고 나면 그 ‘신용장을 끈다’고 표현해요. 그런데 바로 끄지 않고 그걸 길게 봐주니 원래 (재료를) 사서, 물건 만들어서, 납품해서, 대금 받고 갚는 데까지 3개월 회전이면 3개월 신용장인데 정부에서 봐주는 게 있으니 6개월 이상, 은행에서는 “그냥 그 쓰고 있어라.” 그러니 상환하지 않고 갖고 있던 대출금이 몇백만 불까지 불어났어요. 그 금액을 IMF 때 몇 배로 갚아야 되니 타격이 아주 크게 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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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철강이 수출을 시작할 때 외환은행과 거래를 했었는데 경기은행이 설립되면서 경기은행 전무님과 큰형님, 장영상 사장님이 인천고등학교 선후배였던 거예요. 그 당시 경기은행에 국제영업부가 있었는데 국제영업부에서는 우리가 작은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인천에서는 이렇게 수출하는 회사가 많지 않았으니 큰 고객이었죠. 국제영업부 차장일 때부터 우리하고 쭉 거래했던 분이 경기은행장이 되셨으니 부국철강을 훤하게 아시잖아요. 서로 전화 통화하고 뵈러 왔다고 하면 행장실로 바로 들어갈 정도로. 그렇게 경기은행 국제영업부와 전적으로 거래하면서 경기은행의 도움도 받았지만, 은행이 합병되는 바람에 부국철강도 피해를 많이 봤습니다. 부실 은행으로 낙인찍히니 거래처는 신용이 같이 떨어지는 겁니다. 한미은행이 인수합병을 했는데 한미은행은 점령군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인수합병 접수하고, 본부장 와서 “경기은행 거래하는 기업들은 다 그냥 사기꾼들 아니냐.”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런 이미지 갖고 가다 보니 하루아침에 신용이 없어진 거죠. 경기은행하고 거래하는 회사는 다 신용이 없는 기업으로 대우받았으니 다시 신뢰를 다지고 기업이미지 회복하는 데 고초를 겪었습니다.
수출 주력 기업이다 보니 경기 은행을 인수한 은행에서 다시 신용장을 내줘야 되는데 재보증을 못 해주겠다 하여 지연, 학연, 인맥 다 이용해 서울 소재 은행에 줄을 대서 몇 달 만에 다시 정상화됐지만 이미지 개선이 힘들었어요. 제조업 분야에서는 20년 가까이 경기은행이 성장하는데, 행장을 비롯해 은행 관계자들 다 부국철강 덕 봤다고 할 정도로 기여를 했지만 “그 회사 자본 몇십억이 깨졌다.”고 소문나면 바로 기업의 운명이 바뀌니 신용 회복에 힘들었죠. “회사 잘 못 되면 안 된다.” 다시 사정사정하고 했지만, 막상 미국 수출이 끊어지면서 그로부터 외형이 줄었어요. 한국은 중소기업이 수출하면 지원을 많이 하지만 수출이 없어지니 혜택도 없어지는 겁니다. “이 기업 망하겠네, 잘못하다가 망하겠는데.” 그렇게 회자되면 은행에서 거래를 꺼려하니 여러 은행을 전전했죠. 그리고 2008년 리먼사태 때 또 한 번 위기가 왔죠.
큰형인 사장님께서 89년도에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큰형님은 사업가셨지만 저는 관리형 경영인이다 보니 회사를 이어받아 끌고 가야 되는데 제조업 경영에 테크닉도 없었고 좀 벅찼습니다. 일을 벌이기보다는 수성(守成)에 집중하는,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성격인 데다가 선친께서 물려주신 회사인데 ‘야 이거 지켜야지.’ 하는 체면이라는 것도 꽤 부담이 됐어요.
예전부터 kg 단위, g 단위 거래 중, g 단위로 거래하는 사업이 제일 좋은 거 아시죠? 금 거래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웃음). 제조업 분야도 반도체는 비행기로도 수출하지만, 철강은 배로 한참 실어 단가가 낮아요. 한편 생각해 보면 철강은 무던한 업종이죠. 50년 전 철근 지금도 쓸 정도로 변화가 없는 분야입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철강보다는 스테인리스 가격이 한 5배 높고 우리 설비가 요행히 스테인리스 생산이 가능하니 후처리 설비만 추가하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으로 연구소를 설립해 스테인리스 생산에 몰두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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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수출 위주 국가이다 보니 수입용보다 수출용 컨테이너가 훨씬 많았어요. 우리가 인도로 수출하는 데 드는 물류비용이 1,000불인데 인도에서 오는 비용은 1~200불밖에 안 드는 거죠. 갔다가 오는 건 거의 비용을 안 받은 셈이죠. 계산해 보면 우리 제품 만들어서 부산에 가는 트럭킹차지(trucking charge)가 인도에서 오는 운송비용보다 비쌉니다. 우리는 50만 원, 인도에서 오는 건 30만 원이에요. 그 당시 인도는 우리나라 70년대처럼 수출하면 부가세 환급, 보조금 지급 등 지원이 많이 됐죠. 경쟁이 안 됐습니다.
내수용 스테인리스는 주로 조선소에 납품했어요. 스테인리스의 특성이 녹이 생기지 않는다는 거잖아요? 메인터넌스(maintenence, 유지, 정비, 보존) 비용이 저렴하니 단가가 비싸도 스테인리스를 쓰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조선소에다가 “중국제품 쓰면 녹납니다. 중국제는 짝퉁이에요.” 해도 지금 당장은 녹이 안 나니 “어차피 팔고 나서 배 떠난다.” 그 마인드예요. 이렇게 중국제품에 밀려 국내 시장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회사는 더 어려워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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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중대재해 특별법‘이 생겼어요. 우리 업종이 항상 위험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생산설비를 자동화하려면 몇천억 자본이 들어야 해요. 중소기업이 경영이 어려운 이유가 이런 겁니다. ‘안전사고 발생하면 대표가 처벌받는다고 하니 감방 들어가는 걸 감수하고 생산라인을 가동하고 싶지는 않다.’
또 외국 근로자들 7~8명을 고용했었는데 코로나 때 본국으로 가버리고 인력난에 힘들었어요. 결국 생산라인을 멈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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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업을 정리하고 물류업 쪽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제조업에서 물건을 생산하면 물류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공무원이 허가를 내주지 않는 겁니다. ‘지방 공단법’에 물류업을 할 수 없게 돼 있으니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국가산단에는 물류업체가 있어요. 거기는 예외로 검토할 수 있는 법이 있으니 가능해요. 저는 인천 사람이라 인천의 이익을 위해 방향을 잡았었는데 공무원은 공공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구조고도화를 통하면 물류업을 할 수 있다기에 시청에 허가를 요청했더니 가만히 (팔짱을 끼시며) 이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두 트랙을 생각했어요. 일단 우리 지방공단은 시청에서 관리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시청에서 허가가 안 났죠.
두 번째 트랙은 국가산단에 의뢰해 구조고도화를 밟는 방법인데 규모가 전국적이니 1년에 4번 구조고도화를 모집하는 기간이 있어요. 거기에 응모를 했죠. 구조고도화를 통해 회사가 이익을 창출하면 일정 정도 공단에 기부를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100억의 이익을 벌어들이면 20억을 기부금으로 책정하는 거죠. 우리는 당연히 지불할 의사가 있습니다. 그럼 20억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는 공단이나 시에서 주관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플랜까지 제출하라는 거죠. 본인들이 해야 될 업무인데 우리 보고 그 아이디어를 내서 갖고 오라기에 아무튼 맨파워가 없으니 컨설팅을 맡겼습니다만, 그것 때문에 불합격 통보 받았어요.
시청의 구조고도화 팀이 꾸려진 지 10여 년 지난 조직인데, ‘국가산단 구조고도화 팀’과 ‘지방공단 구조고도화팀’ 이렇게 두 개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구조고도화를 처음 신청한 거예요. ‘지방공단 구조고도화팀’은 10년간 아무 일도 안 한 셈이죠. 회사라면 당연히 사표를 써야 되는 상황인데 공무원이니 그냥 있어요. 그래서 “여보 당신네 이름이 구조고도화팀인데 왜 구조고도화 하겠다고 왔는데 안 해주느냐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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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이 주제로 하는 경제토론회가 있었어요. 상공회의소에서 “참석하라.”기에 갔어요. 저한테 발언권을 제일 먼저 주기에 그래서 “경인고속도로를 일반화하면서 화물차 출입 금지다. 공단을 만들어 놓고 공단에 화물차를 못 다니게 하면 공단 죽이는 거지 뭐냐. 대책을 세워라.” 건의를 했습니다. 관계자들이 상의해서 연락을 한다고 하더니 한 달인가 지나서 ‘불가!’라고.
일반화 도로는 대찬성입니다. 남·북으로 단절이 됐으니. 그런데 “기계산단이 산업 용도가 폐지돼서 산업도로의 용도가 변경되는 것도 아닌데 인천항까지 어떻게 가라고 그러느냐?” 그랬더니 “인천항은 저리로 돌아가면 된다.”는 거예요. 공청회를 했다고 하는데 공청회는 들어본 적도 없어요. 고속도로 주변 아파트 주민들 불렀겠죠. 그 주민들은 화물차 안 다녀도 자기 생계에 뭐가 지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생계에 영향이 받는 사람들을 공청회에 초대해서 설득을 했어야죠. 공무원은 “공청회 했는데 무슨 소리냐.”는 거예요. 자기 필요한 사람만 불러서 공청회 했다고 하면 설득력이 없는 거죠.
외국에서는 보통 2차선만 필요한 도로도 교통량이 늘어날 때를 대비해 4차선 정도로 만들어 놓죠. 그런데 교통량이 줄어든 것도 아닌데 멀쩡한 도로를 없애고 중앙에 공원을 조성한다고 하면 이건 정책이 잘못된 겁니다.
기계산단 내에 물류업을 막아버리면 산단이 노후화를 벗어나기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어 줘야지 변화는 일어날 수 있는 겁니다. 전문 인력이 많이 필요한 제조업에 1년간 비슷한 수의 근로자가 입사했다 퇴사합니다. 젊은 친구들이 근무할 환경이 아니니 입사했다가 못 버티고 퇴사하는 거죠. 첨단 업종이 들어오려면은 그 주변 여건이 일단 갖춰져야 하는데 주차장도, 식당도, 카페도 없으니 젊은 사람들이 여기 올 리가 없죠. 지금 아마 이 기계산단 안의 모든 현실이 그럴 거예요. 대부분 환갑 넘은 사람들이지 젊은 사람들이 이 공간에는 없죠.
지금까지 한 말이 소감이긴 합니다만(웃음) 부국철강이 1980년대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이던 시절 900만 불 수출탑을 세워 국가산업에 기여했다는 것. 그것만은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시민기록일지
* 면담일시 : 2023년 11월 8일 14시, 12월 7일 14시
* 면담, 원고정리 : 허은영
* 면담지원 : 양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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