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tArchive/editorImage/42/20250123111750576.png)
해안기계 창업 맴버로 영업과 기술 능력을 기반으로 기업 성장에 기여하였으며, 1996년 해안기계를 인수하여 세광기계로 창업, 운영하였다.
인천 만석동 화수부두 쪽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때 송현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했지만 송림동에 있는 서림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이유는 할아버지가 송림동에 살고 계셨는데 당시 할아버지께서 댁 근처 큰 기와집을 사주셔 송림동으로 이사를 하며 서림초등학교를 나왔습니다.
해안기계 입사는 1975년에 입사를 했습니다. 진주에 있는 제지 회사에 입사해서 공장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으나, 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앞으로는 월급쟁이는 안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가 원래 기계를 전공했으니까 조그만 철공소라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고향인 인천으로 왔어요.
진주에서 올라온 것을 어찌 알았는지 ㈜쌍용제지에서 같이 일했던 ㈜화성제지 사장인 이영철 대표가 연락되어 해안기계 설립에 동참을 해서 이사로 근무를 하게 되었지요.
㈜화성제지 이영철 대표와 제가 쌍용제지에서 같이 근무한 인연으로 연락을 하는 사이였는데, 내가 안양에 있는 제지 회사를 다닐 때 이영철 대표가 화성제지 회사를 창업해서 운영하고 있었고, 제가 제지 기계를 만들어 납품했던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이후 회사 확장을 할 때 저는 진주에 있는 제지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회사가 부도가 나서 회사 생활을 접고 개인 사업을 해야겠다고 하면서 인천으로 왔습니다.
그때 당시 화성제지 이영철 대표가 나에게 연락이 되어 같이 만나 얘기하면서 전에 만든 제지기계 1호기가 잘 되니 제지기계 2호기를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지기계 회사를 창업할 테니 저에게 발주를 주면 제가 만들어 주겠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공장을 찾으러 다니다가 ‘해안정밀’이라는 19공탄 연탄을 만드는 기계를 제작하는 공장이 매물로 나와 있었습니다. 당시 그 회사의 김정민 대표가 사망하여 부인이 운영을 하였는데 회사 사정이 나빠져 회사를 정리하려고 매물로 내놓아 1차 협상을 하였는데 자금이 없어 협상이 잘 안되었습니다.
이를 화성제지 이영철 대표에게 말을 했더니 이영철 대표가 도와줄 테니 해안정밀을 인수하자 해서 인수하게 되었고, 당시 대지가 1,456평인데 3천만 원에 거래를 협상했습니다.
이영철 대표가 친척 관계인 풍림산업 이필웅 부회장과 국방부 연구원인 이필호 연구원과 한번 만나자 하기에 그러자 했습니다. 그 후 대림산업 부회장, 화성제지 이영철 사장하고, 국방부 연구원인 이필호 씨 등 이렇게 셋이서 날 만나러 왔어요. 세 사람은 제게 동업을 제의를 하기에 돈이 없다 하니, 이필웅 부회장은 제게 “월급은 얼마 주면 되겠냐?” 해서 “30만 원은 받아야겠다.”고 했어요. 당시 30만 원은 일반 기술자 10명분의 월급입니다. 또 잠시 기다리라 해서 기다렸더니 “좋다. 그럼 화성제지 일은 완벽하게 끝내 달라.”고 해서 그러마하고 약속을 했어요.
![](/kaitArchive/editorImage/42/20250123113745790.png)
그러고 며칠 후, 해안기계를 이필호 국방부 연구원이 인수를 하여 대표이사로 취임을 하고, 제가 제의한 30만 원 월급받고 운전기사 달린 새 승용차(당시 75년 포니)에 이사 직함 주면서 해안기계에서 계속해서 일해 달라고 했어요. 아마 저의 기계 만드는 실력을 인정한 것인지, 또 제지공장 일한 인맥과 실력을 존중한 것인지 화성 제지 일이 끝났는데도 해안기계에서 영업을 하면서 함께 일해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알겠다.” 하여 기계부를 맡아 전국에 있는 제지 기계 영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입사 당시에 13명으로 영세했지만, 나중에는 100명이 넘어갔어요. 재미있는 일 중 하나는 초창기에 13명 봉급을 다 합쳐도 제 월급보다 적어서 세무 사찰이 나올 정도였지요.
감옥에 갇힐 뻔한 에피소드가 있어요. 펄프 공장 공장장을 할 때, 진주에서 하숙을 하였는데 진주 남강 변에 회사가 있었어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데, 정부 정책으로 볏짚으로 펄프를 만든다는 대학교수들이 모여 연구를 하고 있었어요. 볏짚을 잘게 썰어 가성소다를 넣고 삶아서 펄프를 만든다는 연구인데, 볏짚 한 트럭에 나오는 펄프 양이 요만큼 아주 적게 나오는 거예요. 거기다 표백을 위해 강력한 독성이 있는 석회석에다 넣어 표백제를 만들어 내는데, 어찌나 표백제 독성이 강한지 가스가 새서 그 일대 두꺼비들이 온 마당에 나와서 다 죽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안되겠다 생각을 했는지 그 당시 중앙대 교수였던 사람이 부도를 내고 도망가는 바람에 제가 3개월간 붙잡혀 있기도 했어요.
방글라데시 사업에 관한 것입니다. 주식회사 대우에서 저를 찾아와 권련지(卷煙紙) 5톤짜리를 방글라데시와 수출협약을 했는데, 권련지 제조를 도와 달라는 거예요. 그때 당시 권련지는 한국 조폐공사와 남한제지에서 만들었는데 1급 종이가 안 나오는 것이 문제였어요. 국내에서는 아무리 해도 안 나오는 걸 어떻게 해야 할지가 막막했었지요.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자 이필호 사장이 해안기계를 부도를 내는 것이 어떠냐고 해서 저는 상관없다고 하면서도 대우에서 요청한 것 해 보자고 했어요. 그것은 1981년 방글라데시에 있는 담배 제조 공장 프로젝트로 턴키(turn key)로 250만 불짜리인데 당시에는 아주 큰 액수의 사업이었습니다.
1979년 대우와 계약을 했지요. 그때 돈으로 248만 불.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일을 한 것이죠. 그 후 권련지 생산 기계를 만들기 위해 조폐공사도 수없이 가보고, 남한제지도 여러 번 가보았어요. 일본의 권련지 생산 1위인 곳도 알아보니 200만 불 달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본 아사이 기계 회사 전 설계부장을 만나 일당 5만 엔을 주고 영입해서 했는데, 남한제지와 같아서인지 1급 제지가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캐나다 벤쿠버에 있는 스타트 엔지니어링 업계의 조언을 받으려고 제가 캐나다까지 찾아갔더니 20만 불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20만 불에 계약을 했어요. 캐나다 사람이 보낸 기계 설계 서류를 보니 기존과 다르게 새롭고 간단한 거예요. 그래서 하기로 했어요. 그랬더니 캐나다 회사에서 그 설계에 따라 샘플을 만들어 보겠다고 하는 거예요. 대단히 호의적인 회사였어요.
그래서 방글라데시로 연락하여 주트(JUTE)를 보내라고 해서 인천항에 재료인 주트(JUTE)가 들어왔었지요. 그런데 인천항이 발칵 뒤집힌 거예요. 대마초 수입이라고 해서 안된다 하기에 회사에서 기계 만드는데 실험용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사정을 이야기하고 어렵게 통관을 해서 들여온 주트(JUTE)를 캐나다 뱅쿠버로 다시 보내서 기계 설계 완성된 것을 받게 되었어요. 그 회사가 책임감 있게 샘플로 만든 종이를 보내주면서 표백되는 제지에 관한 모든 것을 표시해서 보내주었어요. 참으로 존경할 만한 회사라고 생각돼요. 나중에 방문해 보니 캐나다 엔지니어 회사임에도 조그마한 제지공장까지 가지고 있는 거예요. 책임감 있는 캐나다 회사 덕분에 일을 완성할 수 있었지요.
우리가 방글라데시에 가서 공장 기계를 설치했지만 시운전을 할 수 없어서 조폐공사 생산과정 하다 퇴직한 사람 4명을 스카웃해 시운전을 했어요. 방글라데시 사업으로 이때 환차 이익이 5억이 났고, 전체 이익이 10억이 났던 거예요. 그래서 빚을 다 갚고, 남동공단에 3천 평의 땅을 사게 되었어요. 그래서 해안기계 매출이 급속하게 올라가게 되었지요.
시운전을 위해 파견된 4명이 오랫동안 있으려니 한국 음식이 생각이 날 것 같아 제가 아이디어를 내서 기계를 우드박스 포장을 할 때 소주와 통조림 종류 등 부패되지 않을 음식들을 같이 넣어 포장을 하여 먹을 수 있게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 직원 4명이 먹으려고 보내온 것을 방글라데시 현지 직원과 운전기사, 청소부, 일반 직원들을 포함하니 10명 정도가 되어, 4명이 먹을 것을 10명이 나눠 먹으니 배가 고프다 하지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썼어요. 방글라데시에 일본 사람이 하는 호텔이 하나 있었어요.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못 들어가고 외국인은 들어갈 수 있는 호텔이지요. 그곳에 우리는 외국인이라 들어갈 수 있었지요. 그곳은 대사관 직원 불러 파티도 하던 곳이었지요. 그곳에서 우리 직원들이 술을 먹었지요. 한국 음식을 먹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일본 음식이라 우리 입맛에 맞아 자주 들러 식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무사히 시운전을 하고 한국에 온 일이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로 회사는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되었지요.
![](/kaitArchive/editorImage/42/20250123113812495.png)
이필호 사장은 서울대 금속과 나와 주물에 관심이 많아서 공장 안에 기계부와 주조부, 사업부를 늘려갔지요. 그러면서 키스톤 밸브의 업체에서 의뢰한 밸브디스크를 브론즈로 주조하라고 했지요. 100% 동으로 주조하면 100개 중 2개만 합격하고 나머지는 불량이 계속 나왔어요. 죽을 지경이었지요. 불량이 산더미처럼 쌓여갔어요. 그러다 용탕에 성공해서 재미가 붙었어요. 덕분에 재고를 전부 처리하고 사업을 확장하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저도 전무로 진급하여 회사에서 입지가 높아졌어요.
이필호 사장은 방글라데시 프로젝트 성공으로 이익도 생기고, 캐나다 프로젝트도 성공하여 이윤이 남게 되자, 주조부를 다른 곳으로 이전 하려던 차에 남동공단에 3,000평 부지를 매입하여 주조부 공장을 만들어 운영하고, 저는 도화동 기계부에 남아 운영하였습니다. 이필호 사장이 남동공단으로 가고, 저는 이곳 도화동에서 기계 공장에 혼자 있게 되었어요. 그러던 중 도화동 공장을 나보고 인수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도화동 공장을 제가 인수하여 해안기계에서 ㈜세광기계로 상호를 변경하여 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해안기계를 인수한 이유 중에 하나가 ‘중앙제지’라고 있어요. 중앙제지에서도 저보고 인수하라고 하는 거예요. 안양에 있던 중앙제지가 군산에 공장을 하나 새로 건설하는데, 중앙제지 대표가 말레이시아에 우리 기계를 수출하자고 해서 수출하기로 합의를 했는데, 이필호 사장이 저보고 해안기계를 인수하라고 하였지요.
말레이시아에 수출하는 그 기계가 1,400만 불짜리예요. 그래서 중앙제지의 기계를 다 뜯어다가 우리 공장에다 갖다 놨어요. 공장이 꽉 찼죠. 해안기계를 33억에 인수하게 되었지요. 경기은행에서 30억 대출을 받았고 모자라는 3억은 동서의 도움으로 충당하여 겨우겨우 인수를 했어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중앙제지의 말레이시아의 그것이 MOU만 체결한 채 L/C를 받은 게 아니었어요. 하필이면 중앙제지의 돈줄인 이석길 부사장이 암으로 죽고, 그다음에 아들도 암으로 죽었어요. 덕분에 내 운명은 완전히 바뀐 거예요. 아들도 죽는 바람에 내 운명이 바뀐 거죠. 어떡하겠어요. 중앙제지를 인수하고 열심히 일을 했어요.
![](/kaitArchive/editorImage/42/20250123113853187.png)
한국제지가 중국으로 수출하는 기계를 하겠다 해서 우리하고 10억에 계약을 했고, 영풍제지하고도 또 계약을 했고, 그래서 회사 형편이 점점 괜찮아졌어요. 그때 세광기계는 잘 나갔어요. 제지회사들에게 기계 납품으로요.
그런데 이게 IMF가 오면서, 경기 은행이 탈이 난 거예요. 경기 은행에 내 잔고가 2억이나 있었는데, 제가 찾으러 가니까 경찰이 못 들어간다고 하는 거예요. 미국에 있는 조그마한 회사에 경기은행을 다 넘기기로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경기은행이 미국의 한미은행으로 넘어갔어요. 넘어가니까 전부 스톱(stop) 되었잖아요. 은행 잔고도 못 찾지요. 융자도 더 안 되지요. 그러다 보니까 자금줄이 모자라서 부도가 난 거죠. 세광기계가 2010년에 부도가 난 거예요. 한 달 이자가 4천만 원이 넘으니까요. 할 수 없이 부도가 났지요.
장만순 사장의 회사인 인천기계제작소가 인천역 가는 중간에 있었어요. 저는 이필호 사장과 함께 그분 공장도 가보고, 집도 가보고 그랬어요.
장만순 사장은 인천기계공업단지의 부지확보를 위해 주안염전을 인수해 공장(단지)을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장만순 사장이 인천 도심권에 산재한 중소기업형 기계 공장을 집단화하여 조성한 설립자지요. 장만순 사장이 기계공단을 조성한 사람이에요. 염전의 5~6천 평과 인천역 앞에 있는 인천기계산단과 합쳐 인천기계관리공단을 설립했어요(고 김정일의 기억에 오류가 있음. 인천기계관리공단은 장만순이 인천역 앞에 있는 자신의 공장 인천기계제작소와 합쳐 설립한 것이 아니라 인천기계공단 조성 및 운영을 위해 기계공단에 입주한 기업들이 이사회를 구성해 설립한 사단법인체임).
저 끝이 인천기계제작소 장만순 회장이 염전을 인수해서 기계공단을 만든 겁니다. 그 옆에 청보산업, 중간에 금성기계, 고속도로 쪽에 부국철강이 있었지요. 그리고 대한제쇄, 우일정밀, 화일프레스, 동인제철 등등이 있었어요. 당시 대림산업 이필웅 사장이 저보고 거기(기계공단) 있으니까 공장 나면 인수하라 했지요. 공장 전체가 5만 7천 평. 꽤 많이 인수해서 남 좋은 일만 시켰지요. 인수해서 다 팔았어요. 인수는 우리가 했는데 모두 다 팔았지요.
공단 안에 의료보험공단이 있는데, 당시 저는 의료보험공단 창립 멤버로 감사 일을 했어요. 의료보험공단의 창립자이면서도 행세는 제대로 못 했어요. 저는 평생 기계 제작하는 일만 잘했었어요.
사실 공단에서는 해안기계 전무까지 역임한 저를 함부로 대하진 않았어요. 꽤 파워가 있었거든요. 공단의 공장을 여러 군데를 인수를 했어요. 그랬더니 일부 사람들이 이 공단에 있는 공장 다 인수할 거냐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다 인수한다고 했어요. 뭘 믿고 그랬냐 하면 대림산업의 이필웅 사장님 믿고 대담하게 행동했지요. 대림산업 대지주가 5만 7천 평을 인수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거든요. 그때 당시 평당 2만 원밖에 안 되었어요. 계약금 줄 때 주머니에서 돈이 술술 나왔거든요.
인천기계공단에 현재도 옛날 업체들이 있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는 2세, 3세가 운영을 하고 있어요. 또는 아쉽게도 인건비가 싼 다른 나라로 옮겨 가서 기업을 하기도 해요. 제가 그때 당시 도로변에 있는 쪽 공장을 다 인수하려고 들렀어요. 그래서 그 가운데 6천 평을 인수를 했고, 인수를 해서 다른 사람 좋은 일만 했어요. 그중 화성제지 사장이 기계산단에 대림 오토바이 공장을 하기도 했어요.
해안기계가 제지공장 분야에 큰일을 참 많이 했어요. 해안기계가 제작한 기계 덕분에 제지 회사들이 잘 되었거든요. 그 한 예로 영풍제지는 해안기계에서 납품한 기계 덕분에 골판지와 제지업계의 1위 업체가 되기도 했지요.
![](/kaitArchive/editorImage/42/20250123113919015.png)
시민기록일지
* 면담일시 : 2023년 8월 7일 14시
* 면담, 원고정리 : 김용경
* 면담지원 : 박인옥, 양지원
![](/images/arc_02/img/icon_list.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