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57주년, 인천기계산업단지 역사를 돌아보다
인천기계산업단지를 기록하다
작성자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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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57주년, 인천기계산업단지 역사를 돌아보다

박인옥(다온정책연구원협동조합 연구위원)

1. ‘인천 산업화 유산의 현장’을 찾아가다.
 - 뜨거운 여름, 시민기록단이 누빈 현장

도시의 성장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은 도시가 직면한 문제와 미래 삶에 미치는 요인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시민의 의식 수준과 맥을 같이 한다. 학산문화원이 인천의 17개 산업단지 중 민간산업단지로 운영되고 있는 인천기계산업단지의 조성 역사와 현장을 시민기록단과 함께 찾았다. 인천기계산업단지는 부평과 주안 등 국가산업단지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1960년대 영등포기계공업단지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성된 민간산업단지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천의 자산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1883년 근대문화의 중심지 개항장, 1960년대에서 1980년대 동시다발적으로 조성된 산업단지, 그리고 경제자유구역이다. 한국산업단지관리공단이 2015년 부평산업단지 조성 50주년을, 2019년에는 주안산업단지 조성 50주년 기념을 성대하게 치렀고, 남동산업단지는 조성 4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문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인천기계산업단지는 올해 조성된 지 56년을 맞았다. 성대한 기념식 없이 조용하지만 학산문화원의 시민기록단 활동으로 역사와 현장을 기록하였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조성된 부평, 주안, 인천기계산업단지는 산업화 1세대가 이룬 자산이다. 이들 산업단지는 인천상공회의소와 경기도기계공업협동조합(현 경인기계공업협동조합), 지역유지, 농민과 노동자, 언론, 행정, 정치인 등 다양한 사회 세력들이 연대와 네트워크로 인천 성장의 기초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여타 산업단지와 차별화되어 한 시대를 대변한다.  

2. 부평제1수출공단을 조성하다.
- 상공계와 부평주민, 언론, 행정, 정치인 연대의 산물

1960년대 국가의 경제정책은 빈곤 극복, 자립경제 달성을 국가 최우선 과제로 하였다. 1963년 6월 당시 한국나일론(현 코오롱) 이원만 회장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재일교포 전용 수출공단 조성을 제안하였다. 박정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구로와 부평지구를 수출공단 예정지로 발표하자 인천의 상공계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인천상공회의소(1963. 7. 3.), 경기도중소기업협동조합(1963. 8. 8.), 인천상공회의소 부평지부(1963년 8월 29일, 10월 11일)가 건의서를 정부 각 부처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사)인천수출산업공단(1965)을 설립하고, 부평지구를 수출공단으로 지정받아 1966년 4월 8일 착공하게 된다. 

하지만 수출공단 착공 직전 윤갑노 인천시장과 유승원 국회의원, 재벌건설사 중심으로 설립된 (사)한국수출산업공단이 부평지구에서 서곶지구로 변경할 것을 결정하면서 공단 유치를 둘러싸고 부평지역 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하였다. 부지 변경 이유는 재원 부족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부평진흥회가 모금한 후원금 750만 원을 전달하면서 수출공단 부지는 다시 부평지구로 확정, 착공에 이르게 된다.

3. (사)인천수출산업공단
- 주안제2수출공단을 조성하다(1969년)
 주안 폐염전, 60만 평 주안공업지구로 탄생

  
1966년 부평수출공단 기공식 직후 경인지구종합개발추진위원회 유승원 국회의원과 윤갑노 인천시장이 (사)인천수출산업공단에 약 150만 평 주안 폐염전을 활용한 주안공단 조성을 제안했다. 그리고 60만 평 규모의 주안제2수출공단 기공식이 1967년 6월 개최되었다. 하지만 염전 소유주인 대한염업(주)은 ‘일괄매각’ 방식을, (사)인천수출산업공단은 ‘분할매각’ 방식을 주장하며 이견을 보였다. 양 기관은 최종 20만 평 부지를 평당 1천 원에 계약하고, 1969년 8월 두 번째 착공식을 하게 된다. 대한염업(주)의 주안염전 매각은 염수급 실패에 따른 재정적자를 국가의 재원 부담 없이 ‘선 분양 후 개발’ 방식으로 민간에 떠넘겨 경영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4. (사)인천수출산업공단

- 인천기계공업공단을 조성하다(1969년)

인천기계공단 조성 목적

1) 기계공업의 집단화 
2) 산업의 방위체제 구축 
3) 기계공업의 합리적 운영체계 확립
4) 각종 손실 방지 및 원가 절감 
6) 기계공업의 협업화, 계열화, 분업화, 전문화 
7) 기술 기능 향상과 상품의 고급화 
8) 수출 및 대체산업 장려
9) 고용증대 및 기능공 양성

10) 공해 방지로 국민 보건 향상 
11) 도시의 균형적 발전 도모

 

1968년 염전부지 분할매각 결정으로 인천상공회의소는 주안제2수출공단 조성 외에 기계업종을 특화하는 공업단지 조성을 계획하였다. 인천기계공단 조성을 위해 경인기계공업협동조합을 중심으로 기성회 설립(1968.12), (사)인천기계공업공단 창립총회(1969.2)를 개최하고 국가에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기계공업 동일업종의 연대와 네트워크로 정부 승인 및 지원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 결과 대통령의 업무협의 지시와 상공부 승인(1969. 4. 28.)을 받았다.

 

주안폐염전, 기계공단으로 질적 탈바꿈

3개의 기계공단과 비철금속공단이 들어서다

 

우선 제1기계단지는 인천에 입지해 있는 기계공업으로 제한하여 분양한 결과 52개 업체가 신청, 100% 유치목적을 달성하였다. 공장부지 위치는 추첨을 통해 결정하였다.
제1기계단지 부지 분양이 성공하자 (사)인천기계공단은 제2, 제3기계공단, 비철금속공단을 조성함으로써 주안 폐염전은 질적 전환을 맞게 된다.

-제1기계단지는 9만9천 평으로 인천에 있는 기계공업체만 입주

(평당 3천2백 원, 현 기계공단)
-제2기계단지는 20만9천 평에 인천과 서울 소재 일반 공업체 입주

(평당 3천4백 원, 현 지방산단)
-제3기계공단은 19만8천 평에 지역과 업종 제한 없이 입주

(평당 4천50 원, 현 지방산단), 
-비철금속공단은 9만 7천 평에 비철금속업체만 입주

(평당 5천 원, 현 국가 6단지)

인천기계공단을 만든 사람들
경인기계공업협동조합이 주도 김재길, 장만순, 김성성 등 

 

(사)인천기계공 단은 김재길 초대 이사장(1969~1971) 이후 장만순(1971~1972), 이봉운(1972. 2.~ 6.), 장만순(1972~1977), 김성성(1977~1980), 안희점(1980~1989), 장주완(1989~1991), 이정열(1991~2001), 천홍(2001~2003), 이정열(2003~2004) 등이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인천기계공단 조성의 핵심 인물인 초대 이사장 김재길과 장만순은 염전부지 분할 협상, 부지분양 및 공장유치, 재원 확보 등 3개의 기계공단 조성을 주도한 인물이다. 김재길은 해방 전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삼중물산(주) 경성지점 인천출장소, 조선해운상사회사, 인천조선공업(주), 동해운수(주) 등 요직에 근무하였고, 해방 후 인천상공회의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였다. 장만순은 해방 전 조선제강소에 근무하다 인천기계제작소를 설립, 해방 후 기업을 계속 운영, 경인기계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5. 인천의 공업단지, (가)통합계약서로 강제 통합되다.
- 1971년 부평공단과 주안공단, 국가산단으로 강제통합

이들 역대 이사장은 경인기계공업협동조합 이사장으로 활동한 인물로 인천기계공업이 성장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고 역량을 키우는 데 힘을 쏟았다. 강인덕(국일정공 대표)이 2004년 이후 현재까지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다. 

 

부평제1수출공단 -> 제4국가산업단지
주안제2수출공단 ->제5국가산업단지
비철금속공단 -> 제6국가산업단지
제2기계단지 -> 제7국가산업단지 통합 무산, 인천지방산업단지
제3기계단지 -> 인천지방산업단지
제1기계단지 -> 인천기계산업단지

 
  
(사)인천수출산업공단이 조성한 부평제1수출공단과 주안제2수출공단은 (사)한국수출산업공단이 조성한 구로수출공단과 함께 산업화 1세대의 열망과 기대를 반영한 수도권의 핵심 공간이다. 그러나 1971년 위기를 맞게 된다. 국가가 1971년 11월 (사)인천수출산업공단을 (사)한국수출산업공단에 강제 통합함으로써 (사)인천수출산업공단은 설립 7년 만에 해체되기에 이른다. 

국가의 강제 통합방침에 지역사회가 거세게 반발하였다. 인천상공회의소 최정환 회장(동일방직 전무)이 대책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협의를 이어갔으나 군부정권의 정치권력과 힘의 동원을 막지 못했다. 부평제1수출공단은 제4국가수출공단으로(1971), 주안제2수출공단은 제5국가수출공단으로(1971), 비철금속공단은 제6국가수출공단으로(1974) 통합되기에 이른다. 국가가 제2기계단지를 제7국가수출공단으로 흡수하려 했지만 1976년 공단관리청이 해체되면서 중단되었다. 
(사)인천기계공단은 1978년 ‘인천기계공업단지관리공단’으로, 1997년 ‘인천기계산업단지관리공단’으로 개편되어 민간산업단지로 현재 운영 중이다. 현 인천기계산업단지는 초기 조성된 제1기계단지이다. 

6. 인천기계산업단지, 어떻게 바라볼까?
산업화 1세대의 산물 
‘고립된 섬’ 으로 전락
제조업보다 부동산 가치가 우선 
이제 3세대로

산업단지는 국가의 강한 리더쉽과 행정의 합리적 판단이 작용한 산업화 과정의 산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인천의 산업단지는 초기 상공계와 언론, 지역토착민, 농민과( 및) 노동자, 행정, 정치인들이 국가와 지역을 상대로 연대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해 조성한 산업화 1세대의 산물이다. 산업단지는 지역민의 기대가 막연하게 표출된 것이 아니라 희생을 감내하며 조성된 공간이다. 
산업단지는 전국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에게 일터를 제공하고, 주변에는 노동자 생활을 지원하는 다양한 시설들이 들어섰다. 산업단지는 일터와 주거, 소득과 소비가 동일 지역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며, 지역의 공동체와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는 토대다.
그러나 지금 인천기계산단을 비롯한 산업 공간은 각종 개발 사업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첫째, 아파트 단지에 포위되어 ‘고립된 섬’으로 방치되고 있다. 아파트 주민들의 민원 대상이 되어 생산 기능을 위협받고 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개발 정책의 결과다. 불가피한 상황이라 말하지 말자.
둘째, 탄소 감축을 위한 대응이나 실천 과제는 멈추어 있다. 입주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방관할 일이 아니다.
국가산업단지보다 취약한 구조를 갖는 민간산업단지로서(써) 인천기계산업단지는 산업화 1세대에서 2세대, 3세대로 이어지고 있지만, 지자체의 무관심으로 늙어가고 있다. 제조업은 모든 산업의 뿌리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로 내몰 것인지 상생의 길을 모색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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