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국철강공업과 함께 걸어온 길
(주)부국철강공업 전무이사 김문환(1937년생) 1950년 12월, 서울 미아리에서 기찻길 따라 걷고 또 걸어 인천 배다리에 도착했다. 당시 김문환은 14세, 서울중학교 1학년이었다. 어머니와 두 동생을 책임지기에 너무도 어린 나이였지만 전쟁이 가져다준 '소년가장'의 짐을 기꺼이 지기로 했다. '부국철강공업'의 창업주인 장범진 대표가 운영하던 '인천고무공업사'에 소년공으로 입사해 군 제대 후 '인천강업합자회사'로 고무신 생산에서 철강회사로 회사는 업종을 바꾸었지만 김문환의 '한 우물' 인생은 바뀌지 않았다. '부국철강공업'으로 다시 한 번 사명이 바뀌어 공장장에서 전무이사로 진급하는 동안 김문환은 여전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며 회사와 가족을 위해 온 평생을 바쳤다. 전쟁이 가져다준 직업, 김문환 소년가장이 되다 1937년생입니다. 고향은 서울 성북구 미아리예요. 아버지가 목사님이셨거든요. 거기서 목회 활동하셨는데 일제 때는 철제들 다 공출하라고 종도 뺏어가고, 식기들도 다 가져가고 교회를 못 하게 됐었어요. 그 당시 제 위로 형님이 세 분이 있었고 밑으로 여동생하고 남동생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사변 전에 아버지가 목회 활동도 못 하시고 가정 형편이 어려우니까 둘째 형한테 너는 군대에 입대하라고 해서 그 당시에 태릉에 ‘육군사관학교’ 있을 때 기관 요원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큰형님은 ‘경성전기 주식회사’, 지금의 ‘한전’이죠 거기 근무하셨고. 그러고 제 바로 위 형이 그 당시에 배제 중학교 다녔었고. 나는 50년, 그때 당시에 국민학교 졸업하고 서울 중학교에 입학했죠. 아버지가 5.30 선거 때 조병옥 박사 선거운동을 하셨거든. 그래서 사변 나고 잠시 피난 갔다가 6월 28일에 집에 돌아가자마자 그 서류(선거 관련) 있던 거 또, 작은형 군복 입고 찍은 사진, 이런 것들을 전부 불태웠는데 인민군 내무서, 걔네들이 따발총 메고 아버지 함자를 부르면서 나오라고 가택 수색을 쭉 했는데 서랍 속에서 작은형 군복 입고 찍은 사진 한 장이 나왔고, 성경책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서 트집을 잡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또박또박 다 말씀하고 하셨지만 가서 조사할 거 있으니까, 가자고 그러더라구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가셔서 그만이에요. 큰형님은 이범석 장군이 ‘민족청년단’을 만들었을 때 일본 군대도 갔다 왔었거든요. 얘네들(북한군)이 들어오더니 큰형도 잡으러 다니는 거예요. 큰형 처갓집이 경기도 양주에 있었어요. 그래서 그곳으로 피난을 갔었죠. 작은형이 그 당시에 배제 중학교 4학년이었는데, 양주에 피난 가 있다가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는지 알아보느라고 아침 먹고 걸어서 집에 와 봤죠. 그 당시에 형 친구가 ‘경기상업’, ‘도상’이라고 그랬지. 도상 다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끌려가서 걔네(북한군)들 밑에서 일을 했었어요. 그 형 친구가 내가 알아봐 준다고. 그래서 며칠 쫓아다니다 “7월 14일날 총살당했다.” 그러시더라고(모두 작은 목소리로 탄식). 그러니까 어디서 돌아가셨는지도 몰라요. 북한군이 형을 잡으러 다니니까 할 수 없이 시골에 들어가서 그 당시에 조밭이 이렇게 (손을 어깨높이로 올리시며) 높았었으니까, 그 밑에 굴을 파고 큰형하고, 작은형하고 거기 숨어 있고. 나는 먹을 것도 아무것도 없고 그러니까 산에 가서 도토리 같은 거 따다가 갈아서 그걸 개떡같이 만들어서 그게 쓰거든요, 물에 우려서 거기다 사카린 조금 쳐가지고서 개떡 만들어서 그거 먹고 지냈어요. 그러다가, ‘9.28수복’ 했는데 거기는 북쪽이니까는 그(당시 전무님이 계시던 경기도 양주) 길로 성북구 미아리에서 일하던 빨갱이들이 도망을 가는 거야, 북으로. 그걸 보고 “아 이제 됐구나!” 그래서 10월 중순에 집으로 왔어요. 작은형은 난 아버지 원수 갚겠다고 군대를 지원했어요. ‘방위군’이라고 큰형도 영장이 나왔으니까 그 당시 인천 배다리 쪽에 고모님이 살고 계셔서 나하고 어머니하고 동생 둘하고 ‘니쿠사쿠(배낭)’라고 거기다가 옷가지 집어넣고 형이 기찻길로 따라가라고 그래서 12월인데 아침 7시에 그 기찻길만 따라서 계속 걸어서 저녁 어둑어둑해서 배다리에 도착했죠. 그래서 인천을 오게 된 거예요.14살이었죠. 서울중학교 입학하고 한 두세 달 댕기고 못 댕긴 거죠. 그렇게 인천에 와서 인천 사람이 된 거예요. 내가 동생 둘하고, 어머니하고 책임을 진 거죠. 이건 여담인데 그 당시에 내가 미아리에 있는 숭인국민학교 9회 졸업생인데 내가 전교 1등으로 졸업하고 학생 대표로 답사도 하고 서울 중학을 우리 학교에서 7명이 시험 보러 가서 내가 당당히 거기 입학했죠.그랬는데, 사변 이후에 형들은 군대 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고, 어머니가 건강이 좋지 않아 직업 전선에 나설 수 있는 형편도 못 되고. 동생이 국민학교 4학년, 2학년 그랬었거든요. 걔네들을 내가 책임을 져야 되니까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난 공부를 하지 못했죠. 1·4후퇴 했다가 수복하고 ‘이연 고무’라고, 지금 인천제철소 그 옆으로 쭉 돌아가면 거기에 일본 사람들이 하던 고무공장이 있었어요. 그 내막이야 모르지만 일본 사람들이 만든 큰 회사예요. ‘인천강업’이 그 당시에 ‘이연고무 제2공장’이었어요. 한쪽 옆에 고무공장을 시작한 거예요. 그러다가 규모를 늘려가지고 인천 제2공장을 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장범진씨가 ‘인천고무공업사’라고 고무공장을 시작한 거죠. 전무님께서는 그 고무 공장일 때 입사를 하신 거예요? 그렇죠, 그때부터 있었던 거죠. 고무공장 할 당시는 전기가 모자라 큰 공장만 전기가 나가고(전기를 공급하고) 작은 회사들은 전기가 남아돌면 주고, 그렇지 않으면 밤에만 조금 주고 그랬었어요. 그래서 대기하고 있다가 전기가 들어오면 기계 좀 돌리고 전기가 끊기면 또 그만이고. 그렇게 열악한 환경이었네요. 그런 생활을 했어. (웃으시며) 그 당시에는 고무공장에서 검정 고무신을 만들었는데 이북으로 많이 갔어요. 강화 교동으로 해서 고무신을 가져가서, 걔네들은 한약재 같은 것들 가지고 오고 물물교환을 했어요. 그러다가 고무공장이 경기가 없어지고 나는 군대 가게 되고, 제대하고 왔더니 철강회사가 된 거예요. 거기(인천강업 합자회사) 갔더니 “오고 싶으면 오라고.” 그래서 거기 다시 들어간 거죠. 여기 인천에 오셔서 정착해 사신 데가 어디세요? 처음 인천에 오자마자 며칠 있다가 섬으로 피난을 갔어요. 삼목도라고 거기서 있다가 수복하게 되니까는 인천으로 다시 올라왔죠. 인천에 와서는 송림동, 송림초등학교 뒤에 살면서 인천 고무공장에 어떻게 들어가게 돼 가지고. 그런데 장태진(장범진의 제) 사장님이 날 더러 학생증 가져오라고 그러더라고. 그때 서울중학교 학생증이 있었어. 그래서 나는 ‘야간 학교라도 보내주나.’ 그런 생각을 했었던 거죠. 그때 ‘항도중학교’라고 야간 중학교가 있었어. 그런데 여건이, 전기가 없어서 낮에 일을 못 하게 되면 밤에 일을 해야 된단 말이에요. 저녁에 일 시작하는데 내가 일 안 하고 학교 갈 수 있는 여건도 안 되고. 그러니까 학교 갈 생각을 포기했던 거죠. 고무공장에서는 전기가 들어와야 기계로 신발 만드는 감(재료)들을 전부 뽑아 놓으면 낮에 여공들이 앉아서 신발을 만들어요. 그러니까는 대기하고 있다 전기 들어오면 일해야 되고, 참 어려웠어요. 인천강업 초창기 모습과 인천기계산업단지로 이주하게 된 계기 내가 61년 2월에 34개월 근무하고 제대해서 그 이듬해 초에 아마 입사한 걸로 알아요. 아마 그때 인천강업(부국철강의 전신인 ‘인천강업합자회사’)도 새로 시작한 것 같아요. 인천강업합자 회사에 입사하셔서 주로 어떤 일을 하셨어요? 그때 당시 회사가 철제 굵은 것들을 6mm로 가늘게 늘려가지고서 못공장에다 납품하는 일을 했어요. 내가 뭐 기술이 있고 그런 게 아니니까는 철재들 그거 뽑으면은 계근(計斤) 해서 출고하고 그야말로 뒷일을 한 거죠. 재료 들어오는 거 받아 쌓고 그런 것들. 그 당시는 재료를 인천제철에서 비레트(billet)라고 그걸 갖다가 잘라서 뽑은 거거든요. 그런데 재료 구하기도 어려워지고 ‘동국제강’에서 철근을 자동화해서 막 나오기 시작하니까 조그만 회사들은 판로도 막히고 어려우니까 얼마 동안 또 쉬었어요. 경기가 좋지 않으니 그냥 일반 철근 같은 거 뽑는 거 가지고서는 안 되겠다. 그러니까 회사 윗분들이 공업용에다가 눈을 돌리는 거예요. ‘앵글, 찬넬’ 이런 공업용 제품을 뽑기 시작하니까 철근보다는 가격도 많이 받을 수 있는 거고. 그런데 그거를 하려니까는 장소는 좁고, 그 당시에 공단이 생긴다고 그러니까, 공단에 자리를 잡아가지고 거기(송림동 인천강업에) 있던 기계를 옮겨서 하나하나 뜯어서 갖다가 설치를 한 거죠. 인천강업이 이곳으로(기계산단으로) 옮기면서 ‘부국철강’으로 이름을 바꾼 거고. 미국 시장을 개척하게 된 계기와 그 당시 부족했던 재료를 수급했던 방식 그 당시에 재료가 없으니까는, 미국에서 고철을 갖다가 쓰기 시작했어요. 미국으로 다니면서 고철도 수소문해서 들여오고 그러면서 미국 시장에 눈을 뜨기 시작한 거죠. 72년도에 기계산단으로 이사 나와서 한 1, 2년 후부터죠. 그러니까 그 당시에 국내에서는 대형들만 나왔지 소형제품들을 만들지 못했었어요. 그런 걸 갖다가 우리가 개발해서 소형(제품)들을 만들어서 미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한 거죠. 그게 원재료가 없으니까 미국에서 고철을 수입해다가 쓰고, 고철 수입하는 것도 모자라고 하니까는 연안부두에서 폐선(廢船)들, 오래된 배들을 갖다가 철판을 이렇게 (양팔을 벌리시며) 크게 크게 자르는 거죠. 그래서 두꺼운 철판들은 조그만 압연 공장들이 갖다가 압연(壓延)재로 사용을 하는 거고, 얇은 거, 못 쓰는 부속들, 고철들은 인천제철로 전부 가져가고 그랬었죠. 그 선박들은 어느 나라에서 오는 배들이에요?외국 것도 있고 하여튼 고철들이야. 못 쓰는 배들이죠. 그걸 사다가 여기서 고철도 필요하고 압연재도 필요하고 하니까 그 작업을 시작한 거죠. 산소공들이 올라가서 배를 몇 토막을 내서 육지로 올리면 좀 두꺼운 건 빼가지고 압연 공장에다 팔고, 고철들은 인천제철로 가고. 그 고선박은 한꺼번에 돈을 모아서 사는 건가요? 아니면 쓸모 없어진 걸 그냥 가져오는 건가요? 선박은 누가 사 오는 건지 모르고 거기서 이건 압연재다 그렇게 만들어 놓고 파는 거죠. 그게 저렴도 하고, 비레트 같은 거는 미처 구입이 안 되고 공장이 1, 2, 3 공장이면 제일 작은 공장에서는 비레트 같은 것도 가늘게 뽑으면 좋은데 굵은 비레트는 거기서는 사용 못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거기에 또 맞는 재료가 필요해요. 그게 미처 안 되니까는 미국에서도 고철을 들여오기 시작하고 그 고철을 갖다 쌓아놓게 되니까 마당도 넓게 필요하고 그래서. 인천강업에 있을 적에는 좁은 데서도 그냥 옴지락 꼼지락했었는데 고철을 사용을 하려니까는 장소가 넓어야 되겠고 그래서 넓게 잡아가지고 온 거죠. 그만큼 철강(철강산업)은 활발한데 재료들이 많이 부족해서. 그렇죠. 재료가 부족했죠. 인천제철에서 비레트(billet) 같은 걸 뽑아서 나오고 그랬었는데 그것도 어려워지니까는 중국으로 눈을 돌려서 많이 들여다 썼죠. 부국철강이 여기(기계산업단지)로 나와서 기계를 3대 놨어요. 큰 거, 조금 적은 거, 또 아주 적은 거. 그 압연기가 롤의 굵기에 따라서 크고 작기가 있는데 그 공장을 1공장, 2공장, 3공장, 그렇게 3개를 만들었어요. 배(폐선에서 분리한) 철판들 작은 것들은 작은 기계에서 하고, 인천제철이나 중국에서 수입해 들어온 비레트(billet), 굵은 것들은 큰 기계에서 해서 뽑기 시작했죠. 그 당시에 미국 경기가 참 좋았던 것 같아요. 국내 판매보다 미국 수출이 많기도 하고 그랬었어요. 그 당시 80년대는 종업원이 한 200명까지도 됐었으니까요. 미국 수출 대주느라고 주·야 작업도 하고 뭐 그랬었으니까. 그래서 한참 경기가 괜찮았었죠. 그러다가 미국 경기도 어려워지기 시작하고, 미국에 수출도 어려워지고. 제일(큰 원인)은 원재료 구입이 어려워지고 그러니까는. 기계산업 단지에 터전을 잡던 초창기의 모습 전무님은 처음에 단순 업무나 그런 일로 시작하셔서 부국철강에서 기술을 익히신 건가요? 별 기술이 없어요, 현장 관리만 오래 했었으니까는. 그런데 원재료를 가지고서 어떤 제품을 뽑으면 어떤 재료가 필요하고 이런 거를 맡아서 해서 생산과장, 생산부장 그렇게 올라간 거죠. 이곳으로(기계산업단지) 이사 나와서도 몇 년 있다가 과장되고 또 얼마 있다가 부장을 시켜준다고 그러는데 사실 그 당시에 나는 내가 부장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사양했는데, 해야 된다고 그래서 부장을 하다가, 또 공장장까지 시켜줘서 공장장을 하게 되고 했는데 나는 본래 기술은 없는 사람이고. 부국철강 입주하실 당시에 지금하고의 풍경은 많이 다르셨을 거잖아요. 주로 어떤 공장들이 입주했었나요? 우리가 이사 올 때 한 두세 공장인가 밖에 없었어요. 허허벌판에 두세 공장 들어섰고. 그 당시에 들어와 있는 게 압연공장들이에요. ‘안성신철’, ‘삼진신철’, ‘영창금속’, ‘동인신철’또 ‘부국철강’. 아마 한 5개 되는 모양이야. 압연공장들이 주로 있었고요. 그러면서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한 거죠. 우리가 아마 제일 첫 번인가…… 허허벌판일 때 들어왔으니까요. 그때 모습이 기억나시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한숨을 쉬시며) 아휴, 허허벌판인 데다가 제일 어려웠던 것이 여름 장마 때면 하수 시설이 안 되가지고서 공단 일대가 다 물바다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일 못하죠. 무릎까지 막 물이 차고 그랬었으니까는. 그래서 비 와서 물 차오기 시작하면은 기계들은 쇠니까는 물에 차도 별문제가 아닌데, 모터는 안 되니까. 그걸 쳄브로끄 체인을 조작하여 짐을 들어올리는 장치, 도르레의 일종. (체인블록)를 전부 달아가지고 이렇게(양 손바닥을 위로 향해 올리시며) 공중에다 매달아 올려놓고 있어요. 비 그치고 물 빠지면 또 내려놓고. 그러니까 장마철에 비 많이 오면은 한 2~3일 동안 작업 못 하는 거예요. 몇 년을 그렇게 고생했죠. 장마철에는 출퇴근하시기도 힘드셨을 것 같으세요. 아휴, 그 당시는 버스 타고 와서 물에 빠지면서 공장에 들어가는 거야. 일할 생각이 아니고 일단 모터 같은 거 올리고, 물에 차면 그걸 버리니까. (미소를 지으시며) 몇 년 고생했었죠. 그런 게 제일 그 당시에 (웃으시며). 지대가 낮은 데다가, 거기가 인천교가 바로 물이 빠지는 데 아니야. 그러니까는 물이 거기로 들어오면 그냥 지대가 낮으니까. 새로 들어오는 공장들은 자기네들끼리 지대를 높여서 들어오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하수 시설이 되니까는 그때부터는 괜찮았죠. 부국철강의 전성기와 쇠퇴기, 그리고 퇴직을 결정하시게 된 동기와 회사를 위해 일하셨던 경험 경기 나빠지고, 겸사겸사 겹치고 하니까는 어려워지기 시작했죠. 경기는 나빠지고, 장영상 사장 그렇게 돌아가시고 회사는 어려워지고. 그래서 생각하다가 시설투자를 좀 해서 신(新)기계를 도입하거나 했으면 좋겠는데, 그거는 뭐 여의치 않은 것 같고. 그러다 보니까는 내가 그 직책을 맡기가 참 벅차더라고요. 내가 그동안에 데리고 있던 아이들도 다 숙련이 되기도 했으니까는 2002년도에 그만두겠다고 했죠. 그 당시에 내가 나이가 예순다섯 적이네. 회사는 어려운데 높은 자리에 앉아서 월급만 타고 앉았는 게 난 바늘방석에 앉은 거 같고 그래서 내가 그만두는 것이 맞다. 장영상 사장 죽고 나서 그때부터는 마음을 굳혔던 거여. 그런데 사장 죽고 동생들이 와서 저거(경영)를 하는데, 대외적으로 있는 거야 다 하겠지만 공장 일은 내가 했으니까 그 당시에 그만둘 수 없어서 그냥 붙어 있던 거죠. 그러다가 2002년도에 나이도 예순다섯 됐고 또, 내 개인 생각하면은 애들도 다 컸으니까는 생활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고, 그 당시는 퇴직금이라는 게 한 1억 받은 것 같아요. 그러셨겠네요. 40년을 근속하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부국철강에서 30년 된 거죠, 72년에서 2002년이니까 30년. 옛날에 인천강업은 뭐 그건 치지 않고 일로(기계산업단지로) 넘어와서 부국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니까. 그래서 부국철강은 30년 근무죠, 허허.(웃으시며) 한참 경기 좋을 적은 그래도 83년도인가, ‘상공부 장관상’도 받았죠. 93년에 ‘인천 남구 모범 근로자 상’ 탔고.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작업을 했었는데 생산량이 늘어나니 인원을 늘려가지고서 아침 8시부터 6시까지 주간반이 일하고,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야간반이 일했죠. 그러면은 나는 그 당시에 집이 주안역 바로 뒤에 살았어요. 밤에 자다가 말고도 회사에서 무슨 일 있다고 연락하면 뛰어나가고. 하여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라.” 하고 밤에 자다가도 나가고.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었죠. 그때만 해도 인천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이셨다고. 아, 그럼요. 그 당시에 경기가 참 괜찮았어요. 나는 내가 특별히 가진 기술은 없으니까는, ‘어떻게 하면은 로스(loss)를 줄이느냐.’ 그 생각만 하는 거야. ‘내가 할 일은 그거다.’ 그래야만 그만큼 이득이 생기는 거니까. 특히 배(船) 철판 같은 고철 가지고 작업하는 거는 참 어려워요. 비레트(billet)는 계산 딱 하면 얼마 자르면 몇 킬로가 나오고 얼마 늘어나고 다 계산하는데, 오래된 배들은 썩었잖아요. 뺑끼칠을 허니까 겉은 멀쩡한 것 같은데 썩었으니까 불에 들어가서 다 녹아버리고 겉껍데기 다 썩어버리면 중량이 확 달라지잖아요. 지금들은 정량으로 딱 6m면 6m, 7m면 7m 딱 나오죠. 그 당시는 철근 재료들이 생긴 대로 좀 길면 길고, 짧으면 짧고 그냥 재료 생긴 대로 그렇게 막 통용이 됐었어요. 그러다가 미국 수출하게 되니까 그게(통용이) 안 되는 거예요. 딱 몇 미터짜리, 중량 계산해서 실어 보내고 그래야 하는데 그걸 고철 가지고 맞추려니까 로스가 많이 났죠. 또 미국에 수출하던 그 물건이 국내에서는 그 당시에 별 사용을 안 했던 거예요. 국내에서는 만드는 회사가 우리 부국철강밖에 없었어요. 특화돼 있는 거였네요. 형강 제품인 거죠? 규격이 소형이에요, 아주 소형. 기계 부속 만드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그 당시에 한국에서는 그거 만드는 데가 없었었어요. 미국으로 고철 수입하러 다니고 그러면서 장태진 사장님 때부터 눈을 떠서 그걸 개발해서 만들기 시작한 거예요. 일하시면서 다치거나 아니면 사고나 이런 부분들은 없으셨나요? 작은 사고들은 많았죠. 그게 전부 어떤 기계로 하는 것이 아니고 기능공들이 집게 같은 거 가지고서 작업을 하는 거니까. 주로 화상들을 많이 당하고 쇠를 다루는 거기 때문에 떨어뜨리면 발등 다치고 그런 사고들이 많았었죠. 전무님은 괜찮으세요? 오래 하셨으니까 직업병이나 이런 건 없으세요? 그런 거는 없었고 내 훈장은 이거죠 (손은 보여주시며) 재료 절단하는 절단기에 손가락이 딱 잘렸어요. 그런데 병원에 갔더니 잘라야 된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 장태진 사장이 자르지 말라고 “어떻게 든지 붙여라.” 그래서 난 모르니까 아파서. 그랬는데 다 살아났어요, 괜찮아요. 부국철강에 대한 애정과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신 삶 회사 이름이 부국철강이잖아요. 대표님께서 부국철강으로 이름을 명명하신 이유가 있으실까요? 그 내력은 저는 잘 모르죠. ‘인천강업’은 합자회사라고 지었다가 여기 부국철강으로 넘어오면서 장태진 사장이 손 뗀 거예요. 그러고 장범진 씨가 사장이었다가 장자, 아들인 장영상 씨한테 넘긴 거죠. 장영상 씨는 인천에서 꽤 발이 넓었던 사람이에요. 나이가 나랑 동년배인데 현장 일에 대해서는 간섭을 안 했어요. 현장만큼은 내가 다 맡아서 하고 사장이야 외부로 다니면서 원재료 수입해 오는 거. 나는 오로지 그게 내 책임이라는 사명 가지고서 그야말로 열심히 일했죠. 믿고 맡길 수 있는 공장장님이셔서 다 맡기셨나 봐요. (웃음) 나는 공부를 못했으니까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회사가 잘 되나.’ 그것만 생각하고. ‘내 있는 내 노력해가지고서 할 수 있는 거는 내가 다 하겠다.’ 했던 거죠. 지금들은 뭐 우리 세대하고는 많이 다르죠. 일단 지금 세대들은 애사심이나 이런 건 딱히 없거든요. 그 당시들은 다들 그야말로 ‘여기 아니면 밥 못 먹는다.’ 그런 생각들을 다 했었으니까. 하여간 참 우리 집사람도 고생 많이 했어요. 인천강업, 그때 당시는 월급도 제대로 안 나오는 회사들이 많았어요. 쌀가게 가서 월급 나오면 준다고 그래서 쌀 한 되, 두 되 이렇게 사다가 팔아먹고. 그러고 월급 나오면 갖다 갚고 그랬어요.내가 아이가 둘인데 큰아이는 제물포고등학교 나와서 서강대학 들어가고. 둘째는 딸아이인데 인일여고에서 톱을 했죠. 연세대학 졸업하고 생화학과 나왔는데 다시 1년 재수해가지고서 서울의대를 들어갔어요. 그 당시에는 걔네들 둘 학비 대고, 우리 먹고 사는 게 빠듯했죠. 그러니까 ‘회사가 만약에 문을 닫으면 우리 큰일이다.’ 그 생각밖에 없었던 거니까. 그래도 요행수로 공부들을 해가지고서 인일여고 다닐 적엔 장학금 타가지고서 공부해서 학비도 별로 들지 않았죠. 그래서 걔네들이 졸업하고 나니까는 이제 한 짐 놨다. 그래서 ‘아. 내가 이제 그만두더라도, 퇴직금이라도 얼마 받으면 그거 가지고서 내 생은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만두겠다고 과감하게 했던 거죠. 부국철강을 퇴직하며 느끼는 감회 이사님 부국철강만 30년을 근속하신 거잖아요. 퇴직하실 때 감회가 어떠셨어요? 아휴 뭐, 그 당시에 내가 그만둔다고 그러니까 전부들 이상하게 생각했죠. 그렇다고 내가 어디 갈 데가 있어서 가는 것도 아닌 거고. 난 단지 회사는 어렵고 하니까 내가 월급 많이 받으면서 버티기가 싫고. 내가 밑에 애들한테 다 전수했으니까 나 없어도 다 할 수 있으니까는 그래서 용단을 내린 거죠. 그 당시 65에 나왔지만 내가 건강은 남한테 지지 않았었으니까는. 그래서 남동공단 공장에 가서 또 몇 년 일도 했었고. 그러다가 서울로 올라와서는 빌딩 관리인으로 가서 또 몇 년, 아마 80 될 때까지 일했던 것 같아요. 기계산업단지에 대한 견해 주변 회사들도 흥하고 쇠퇴하고 이런 것도 다 보셨겠네요. 기계공단 입주할 당시 압연공장들이 7~8개가 있었는데 하나, 둘 없어지거나 딴 데로 가고. 나 그만둘 적에는 ‘동인신철’ 하나 남고 우리 부국철강 바로 뒤에 있던 ‘영창금속’은 부국철강이 인수해서 거기까지 넓힌 거고. 그리고 ‘안성신철’, ‘대진철강’ 거기 조그만 회사들은 전부 없어졌어요. 그 당시는 기계공단에 들어온 회사 중에서는 큰 회사가 없어요. 전부 그렇게 조그마한 회사들이고. 아마 규모로는 우리 부국철강이 대지도 그렇고 제일 그 당시에 활발하게 했었고. 지금은 ‘미주철강’인가, 그 당시 ‘동방제강’이라고 있었는데 거기도 사장은 다 바뀌고 다른 사람한테로 넘어갔으니까는 모르겠어요. 마찌꼬바(작은공장)라고 조그만 회사들이니까는 하다가 경기 없고, 시설 노후화된 거 가지고서는 도저히 코스트(가격) 맞출 수 없고 자연히 도태되고 손들고 그만두고 그렇게 되는 거죠. 중국에서 자기네가 생산하기 시작하니까 비레트를 잘 안 주는 거예요. 원재료 수출을 막는 거죠. 그래 그거 구입하기 어렵고, 인천제철이나 동국제강에서도 비레트를 뽑던 것들을 안 해주고. 그러니까는 중소업체들은 막대한 돈을 들여가지고서 그 시설을 만들 수가 없으니까 자연이 기계는 노후화 되고 재료는 모자라고.동국제강이나 인천제철은 고철을 직접 수입해서 용광로가 있으니까 녹여가지고서 비레트를 생산하고 철근도 생산하고. 우리는 그걸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니까 어려워진 거죠. 원자재가 수급이 되면은 대형 공장에서 못하는 소형 제품들을 만들어서 팔고 그랬었는데 재료가 안 되고 하니까는 조그만 공장들은 다들 문 닫는 거죠. 지금은 사실 이 기계산단이 많이 열악해지고 노후화돼 있잖아요. 이사님 보시기에는 여기에 어떤 지원이나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내가 그래서 96년, 97년 그때 장영상 사장 죽고 나서부터는 회사가 시설을 좀 대체해야 되고, 투자를 해서 기계를 좀 늘려야 되고. 그런 의견을 낸 적이 있었는데, 형편이 됐는지 안 됐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이루어지지 않고 기계는 노후화됐죠. 사람들도 자꾸 연령이 높아지니까는 힘들죠. 그 당시에 뭐 연령 제한이라는 게 말만 있었지 뭐 사실은 70대 된 사람도 할 줄 알면 (일을)하고. 사람들이 없어서 그런 어려움을 겪고 그러니까는 ‘이걸 자동화를 해야 된다.’ 그런 생각은 하고 했는데 자금이 융통이 안 돼서 그런지 하여튼 잘 이루어지지 않고. 또 투자를 한다고 해서 앞으로 경기가 어떻게 될지 그것도 미지수고 하니까는 과감하게 할 수도 없는 거고. 그러니까는 여러 가지로 내가 직책은 높아지고 책임감에 자꾸 어려워지더라고요. 회사는 어려워져서 인원이 300명 하다가 그냥 줄고 그래서 40명, 50명 그렇게 되고 하니까는, 딴 기술 분야들이야 나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자부심이라도 있겠지만 난 그렇지 않은 거니까는 그래서 ‘에이 내가 그만둬야겠다. 그러면 회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그만둔 거죠.내가 2002년도에 그만뒀지만, 내 몸은 거기서 나왔지만, 생각은 항상 ‘어떻게 그대로 잘 꾸려나가는 건지.’ 그게 좀 궁금해서 전화로 “야, 회사 형편이 좀 나아졌냐, 어떠냐?” 계속 묻고 그러는데도 당시 우리 미국 하나 보고 생산했는데 미국에서 양이 줄어드니까 그것만 바라고 있을 수도 없는 거고. 또 원재료 문제가 제일 어려우니까는. 퇴직 후에도 이어지는 부국철강에 대한 애정과 창립자에 대한 추억 이사님 이 공장을 전체적으로 관리하시면서 “이런 부분만큼 정말로 좀 잘했다, 자부심이 있다.” 이런 부분이 있으실까요? 아휴, 뭐 별로 특별한 건 없고. 그 당시에 조그마한 압연공장들이 여럿 있었으니까는. 그중에서 우리가 특별하게 공업용 찬넬(channel), 앵글(angle) 이런 걸 만들고 그러니까는 다른 공장 경영진 분들이 “너희는 어떻게 관리를 해가지고서 저런 거 하나?” 해가지고서 구경도 오고 그랬었던 기억은 있죠. (웃음) 오비 모임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거든요. 모이시는 분들이 주로 창립 멤버신가요? 몇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 사람들도 다 나이 먹어서 벌써 갈 사람들 가고 이제 몇 사람 남았는데 건강이 안 좋으니 모임도 없어졌죠. 코로나 이전까지는 한 달에 한 번씩 인천을 내려왔어요. 부국철강 앞에 계근실이 있어요. 거기 모여서들 같이 얘기 나누고 그랬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모임 못 오고 하니까 그때부터 자연히 없어진 거죠. 그래도 내려오면 나는 꼭 회사 궁금해서 “부국철강 지금 어떤가?” “사람 다 내보내고, 뭐 어려워서 못 돌린다.” 어쩐다 그런 소리 들으면 참…… (눈가에 눈물이 맺히심) 장범진 씨, 장태진 씨, 장영상 씨, 지금 장영훈이, 장영복이 다 사람들이 참 좋은 사람들이에요. 특히 장범진 그 양반은 현장에 나오시면 이런저런 말씀 안 하세요. 공장이 넓으니까, 둘러보시면서 고철 여기저기 땅바닥에 떨어진 거 있으면 직접 주어다 고철장에 갖다 놓으시고 그렇게 묵묵히……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으니 마음이 참 그렇더라고. 인터뷰를 마무리하시며 소감 정말 뜻깊게 사셨고 전무님 덕에 훌륭한 분들을 많이 배출하셨잖아요, 형제분도 그렇고 자제분들도 그렇고. 정말 사변을 겪으신 전(前) 세대들에게 존경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내 삶을 놓으시고 주변을 위해 희생을 하셨는데 인터뷰 마무리하면서 소감 한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 뭐 특별한 얘기는 없고 하여간 내가 30년을 근무한 회사가 잘 됐으면 좋겠는데. 내가 30년을 근무하고 정성을 들여서 했던 회사가 더욱 번창하지를 못하고 그냥 문을 닫는구나. 그런 아쉬움이 있죠. 기계는 전부 노후화돼서, 사람을 줄이고 힘도 좀 덜 들이고 하려면 자동화를 해야 하는 건데 그건 돈이 자꾸 들어가야 되는 거니까는 그런 어려움이 있었죠.개인적으로는 아이들 다 자리 잡고 우리야 집사람하고 둘이서 100만 원이면 100만 원 가지고서 맞춰서 살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살고 있죠. 큰 병이 없어가지고서 그게 감사한 거죠. 시민기록일지 * 면담일시 : 2023년 9월 27일 15시 * 면담, 원고정리 : 허은영 * 면담지원 : 김용경, 양지원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5.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