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공동번역 성경이 출판되다

그리운 당신에게





이곳 들어서던 날



감방 쪽으로 돌아서는 길목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개나리 꽃봉오리들



활짝 피며 흩날릴 그 금싸라기들은



영영 볼 길이야 없겠지만…..





이렇게 속으로 읊조리고 있었는데, 당신과 성근이를 접견하러 나가다가 그 개나리가 활짝 핀 것을 보고 어찌나 기뻤던지 몰라요. 작년에는 창가에서 지저귀는 참새 소리에서 개나리가 피었으리라는 것을 알 뿐이었는데, 금년에는 그 뒤에도 개나리가 핀 것을 볼 기회가 많아서 77년 봄은 제대로 봄맞이를 한 셈이오. 접견하고 나오다가 건물 정면에 백목련이 활짝 핀 것도 보았고 옥매화가 피기 시작한 것도 보았소. 우리 집 마당의 옥매화도 피게 되었겠구나 싶어 괜히 반가웠소. 우리 집 옥매화는 감나무 그늘에서 양지바른 데로 옮겨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소.



어제 당신 편지, 영미, 이 선생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그리고 소포 속에서 나온 성경 책을 받아 들고는 얼마나 가슴이 울렁거렸는지 짐작이 가겠죠. 물론 선 신부님 생각이 간절했죠. 성서 출판에 관한 자세한 소식 보내 주구려. 출판 기념회 같은 건 없었는지? 반향 같은 것도. 내가 마지막 손질을 못 해서 유감인 동시에 성서 공회에 대해서는 미안 천만이군요. 전화로라도 내 뜻을 김 총무님에게 전해 주시오. 현주, 성우 수고 많았고 문장 면에서 좋아진 점이 많은 것 같아서 두 사람의 능력을 인정해 주어야 하겠소. 하지만 적지 않게 한계를 넘은 데가 보여서 재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느껴지오. 시편 23편 같은 것은 몽당 손이 되었더군. 이런 이야기는 현주에게나 하시오.



내가 잘 지낸다는 말을 믿는다고 머저리라고들 한다지만, 그것은 당신의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거요. 남편을 믿는 거고 하느님을 믿는 일이지요. 아이들은 내 신경이 의외로 강하다고들 결론을 내리는가 보지만, 또 내 신경이 예민한 것은 사실이구요. 그러나 그 예민한 신경을 떠받들고 나가는 다른 힘이 의외로 강했다는 것이 아마 더 정확한 판단일 것이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나를 믿으시오. 나는 건강하게, 즐겁게, 보람차게, 너무너무 뜻있게 살고 있다는 것을!



여기 교도관들도 60 먹은 사람의 몸이 그렇게 유연하고 건강하다는데 놀라고 있죠. 햇빛을 받으며 30분 동안 뛰는 나의 몸은 30대의 젊은 몸이라고들 한다오.



나의 일과는 일어나는 길로 1시간 30분 정도 요가와 뜀박질, 그 사이에 차례가 오면 세면소에 나가 세수를 하지요. 요가가 끝나면 간단한 조반(생계란 하나, 빵 등), 그리고 오전 내내 명상과 히브리어 성경 읽기, 그동안 30분 밖에 나가 운동도 하구요. 점심 먹은 다음 좀 쉬다가 할아버지, 할머니, 당신, 동지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런 다음 일반 독서, 저녁 먹고 독서하다가 한 30분 뜀박질하고는 자리를 깔고 앉아서 독서하면서 잠을 청한다오. 목요일이면 독탕으로 목욕하고, 금요일은 면도하는 날. 아직은 머리를 깎을 만큼 되지는 않았으니까 면도만 하지요. 세탁하는 날은 화요일이구요.



최근 중요한 소식을 전하면 주기도 강해 저술 집필 요청이라오. 그 일을 위해서 월요일 교무과장과 면담하기로 되어 있어요. 또 하나 지난 12일, 혼자 고요히 단식하며 명상하고, 다음 13 일 저녁, 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얼른 오지 않아 이 생각 저 생각,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가 꿈 같기도 하고 생시 같기도 한 가운데 충격적인 일을 보았고, 그 일을 생각하면서 나는 열심히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소. 눈을 뜨고 보니 그것은 분명 생시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꿈이라고 하기에는 내 머리는 생시처럼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니까. 상당히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작품을 말이오. 이렇게 되면 그것을 작품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정말 곤란한 이야기,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게오르규의 『25시』 같은 걸 다시 작품으로 분석하며 읽어 보고 싶어졌어요. 소설까지 손을 대는 것은 나의 분수를 넘는 일이라고 생각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의 영감처럼 온 것을 밀어 버릴 수 없는 것 같은 심정이오. 이래저래 오래 살아야겠다고 더욱 극성으로 요가를 한다오.



당신은 나의 이런 과잉 의욕에 자극을 받아 글을 쓰시오. 매일 서대문으로 왕복하며 소비하던 시간, 애인을 생각하며 글을 쓰란 말이오. 예쁜 글씨보다는 힘 있는 글씨를 쓰려고 필력(筆力)을 기르시오. 예쁘게 쓰는 재간은 그러는 동안 저절로 될 거요. 힘 있는 획에 대한 자료부터 장만해야 하오. 깨알같이 시시콜콜한 편지를 자주 보내 주시오. 다른 분들의 소식도 듣고 싶구요. 한빛 교회, 갈릴리 교회, 새벽의 집 등등. 은숙의 오페라가 곧 있겠군. 물론 캐나다 소식도. 이제 지면도 다 돼 가는 것 같아 내게 필요한 걸 적죠. 제일 필요한 건 당신. 꿈자리는 비어 있으니까 언제나 오시오. 옷가지는 반바지 운동복과 옷을 넣어 걸어 둘 주머니 하나, 그뿐이오. 모두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만세.





1977. 4. 16.






7년간 종사하였으나 수감으로 인해 마무리를 못한 성경 (신구교 공동 번역)이 출판되어 옥중에서 책을 받아 보았다.



주기도 강해 집필 요청을 받았다.



꿈에서 본 환상을 소재로 소설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