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10월 <봄길 박용길>

🈷️ 박용길의 붓글씨

[특별기고] 봄길에게 붓글씨는 기도이자 명상이었다

 
◇박용길이 온 정성을 모아 한 자 한 자 붓글씨를 써내려 가고 있다
 

늦봄, 아내의 붓글씨 격려… 직접 먹 갈아주기도


문득 박용길 장로가 살아계실 때 안방에 차려져 있던 작업실이 떠올랐다. 작업용 테이블이라는 건 따로 없었고, 나지막한 교자상 위에 레이스가 달린 테이블보를 덮은 것이 그의 작업대였다. 방바닥에는 늘 한지와 여러 가지 종잇조각이 널려 있었고 그 어지러운 중에 박용길은 돋보기를 쓰고 붓글씨에 열중하고 계셨다. 여러 굵기의 붓을 매달아놓은 붓걸이와 꽤나 크고 화려한 벼루가 있었다.
 
◇ 통일의 집에 전시되었던 박용길 장로의 붓걸이(2018 이전)


그가 붓글씨를 전문적으로 배웠는지 궁금했다. 박용길은 형제가 운영하는 동네 서예학원에 등록을 했는데, 갈 때마다 학원을 운영하는 형제가 심하게 다퉈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몇 번 다니다 말았다. 또한 형제는 한자를 좋아하는 반면 한글 서예를 하찮게 여겨 배우기가 힘들었다. 결국 어린 시절에 배웠던 것 말고는 거의 독학으로 붓글씨를 배운 셈이다. 문익환은 아내의 붓글씨를 썩 좋아하며 격려했다. 옆에 있을 때에는 직접 먹을 갈아주기도 했고, 옥중에서는 ‘예쁜 글씨를 쓰려고 하기보다는 힘 있는 필력을 기르라’고 조언하는 편지(옥중편지 1977.4.16)를 보내기도 했다.

 
◇ 힘 있는 글씨를 쓰라는 조언이 담긴 문익환 목사의 옥중편지(1979.11.16)
 
◇박용길장로가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인 문익환목사에게 보낸 엽서.
‘당신이 지으신 노래며 시를 붓글씨로 쓰고 있다보면 더욱 더 가까운 느낌이 든다’는 애틋한 내용이다. 
 

축의금 대신 붓글씨 표구해 선물


통일의 집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붓글씨에는 복본이 많다. 마음에 드는 글귀를 여러 번 쓰기도 했으며, 연습 삼아 썼던 것들도 버리지 않고 그냥 모아두었기 때문이다. 또한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긴 기간에 걸쳐 쓴 것들이 모아 두었기 때문에 글씨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그의 글씨는 부드럽고 여성스럽고 조화롭다. 초기에는 좀 더 굵고 힘이 넘쳤지만 정형화 되어 있던 글씨가 해가 갈수록 자유로워지며, 연세가 드시면서는 글씨가 가늘어지고 힘이 약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 박용길 장로의 붓글씨 후기 작품(1991, 73세). 문익환 목사의 시 <2041년쯤 해서>를 썼다. 


박용길에게는 붓글씨의 심미적인 면도 중요했지만, 실용적인 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년에 정기적인 수입이 없었던 박용길은 결혼식 축의금 내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직접 쓴 글씨를 선물하곤 했다. 붓글씨를 표구해 선물해 주어도 그 비용이 축의금을 내는 것보다 저렴했고 받는 사람들도 좋아했기에 부부의 새 출발을 축하하는 글을 많이 썼다. 늦봄의 시를 봄길의 글씨로 쓴 액자니 더 없이 훌륭한 선물이 되었다. 여러 시민 단체 소식지의 제호를 써주기도 하고, 현판 글씨 (문화방송노동조합 등), 민주화 열사 비석 글씨, 그리고 통일의 집 간판도 직접 썼다. 3.1 민주구국선언문과 북한에서 발표한 4.2 공동성명서의 전문을 써 병풍을 만들어 통일의 집에 전시해두기도 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할 때에 박용길은 읽기 좋게 큰 글씨로 정서해주기도 했다.
 
◇박용길 장로가 붓으로 작성한 김종수의 묘 글씨. 서광 구로공장에서 노조활동을 하다 분신자살한 김종수의 약력이 적혀 있고 그의 묘비문으로 사용되었다. 
 

남편의 뜻 전파하고자 늦봄의 시 주로 써


붓글씨의 내용으로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문익환 목사의 시의 일부나 전부를 옮겨 적은 것이다. 남편의 시를 사랑하는 팬이기도 했으며, 감옥에 있는 남편의 뜻을 세상에 전파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을 것이다. 박용길이 유난히 즐겨 쓴 구절은 <덤>이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진달래 꽃송이처럼 열린가슴에
그분의 노래가 봄비처럼 내린다”
 
◇문익환 목사의 시 <덤>의 마지막 연을 박용길 장로가 쓴 붓글씨
 

늦봄과 봄길이 각각 쓴 시 <묘향산>


문익환 목사가 감옥에서 작사한 찬송가 가사도 여러 편 썼다.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 일본에 계신 정경모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 연습본도 있다. 부탁 받아 성경구절을 써준 것도 있다. 아쉽게도 자신의 시를 붓글씨로 남긴 것은 많지 않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작품은 목사님이 돌아가신 이듬해 1995년 박용길 장로가 북한을 방문해 묘향산에서 느낀 감상을 시조로 쓴 것이다. 아마도 목사님이 돌아가셨기에 자신의 글을 쓸 용기를 냈던 게 아닐까 싶다. 문익환 목사도 1989년 방북했을 때 방문하고 시를 남긴 묘향산이었기에 더욱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두 사람의 글을 나란히 놓고 읽어보는 재미도 있다. 문익환의 시는 박용길의 글씨를 통해 더 넓게 확장되었으며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가까이 사랑받을 수 있었다.
 
◇박용길 장로가 붓글씨로 쓴 문익환의 시 <묘향산>(위)과 박용길의 자작시 <묘향산>  
 

고난과 외로움 달랜 봄길만의 방편


박용길의 붓글씨 가운데 나의 최애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통일의 집 거실에 걸려있는 간디의 글과 통일의 집 문패다. “신랑이 신부 방에 들어가듯 감옥으로 가게 하라. 두려움은 작게 기대는 크게 지니고서” 박용길은 이 글귀를 써 통일의 집 거실에 늘 붙여두었다. 여섯 번이나 감옥에 간 남편을 말리기는 커녕 다시 가라고 부채질하는 부인이 세상에 또 있을까? 지금도 이 글씨와 그 앞에 서 있는 두 분의 사진은 통일의 집 벽면에 걸려있다.
 
◇ 박용길이 쓴 간디 명언과 붓글씨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늦봄, 봄길 부부 사진이 액자에 함께 전시되어 있다.


통일의 집 문패에는 문재린, 김신묵, 문익환, 박용길이라고 쓰여 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남편과 본인의 이름을 평등하게 써 붙인 이 문패가 이 집안의 젠더 감수성과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박용길 장로가 직접 쓴 통일의 집 문패
 

문구마다 통일염원과 신실한 신앙심


지난해 사진 촬영과 목록 작성을 위해 둘둘 말아 두었던 수 백 장의 붓글씨를 펼쳐보았다. 남편의 10년 넘는 옥살이를 감내하고, 혼자가 되신 후 긴긴 세월 동안 통일의 집을 혼자 지키며 어떤 마음으로 붓글씨를 썼을 지가 손끝을 통해 잔잔하게 전해졌다. 그는 또 일기 쓰듯 시시콜콜 하루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예쁜 꽃 그림을 오려 붙여 남편에게 보낼 편지를 매일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담대하고 독립적인 여성, 박용길이었지만 어찌 외롭지 않았을까? 붓글씨를 쓰고 편지를 꾸미는 루틴은 기도이자 명상, 외로움을 다스리는 자신만의 방편이 아니었을까? 그가 선택한 문구 들에는 간절한 통일염원과 신실한 신앙심이 느껴진다. 모진 세월을 헤쳐 나가며 늘 웃음을 잃지 않았던 박용길의 힘의 원천을 그의 글씨들을 통해 어렴풋이 만나볼 수 있었다. 


<글: 문영미>
통일의 집 이사, 봄길의 조카


월간 문익환_10월 <봄길 박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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