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과 ‘이 사람’]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가엾은 어머니, 이 땅의 성모여”
◇박종만 열사 빈소에서 유가족을 위로하는 이소선 여사
1984년 11월 이소선 여사는 분신으로 숨진 택시 노동자 박종만 열사의 빈소에서 유가족을 위로하고 오열했다. 늦봄과 어머니 김신묵 여사도 회사 측의 시신 탈취에 대비하며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밤이 되자 회사 측에서 보낸 구사대가 빈소를 차지하려고 노동자와 재야인사를 밀치며 들어왔고 경찰은 농성자들을 해산시키려고 했다.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소선 여사는 유족들을 설득하여 회사에 민주노조를 세우도록 요구하게 하고 민주 세력 주도하에 장례식을 치를 수 있게 했다(민종덕 2016).
◇박종만 열사 빈소에서 오열하는 이소선 여사(왼쪽)와 찬송을 부르는 문익환 목사 모친 김신묵 권사(오른쪽)
아들 전태일 뜻 이어 피복노조 설립
14년 전 아들 전태일이 분신 사망하자 이소선 여사(이하 어머니)는 아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갖 방해와 회유를 물리치고 청계피복노조를 설립했다. 이후로도 계속되는 당국의 집요한 노조 파괴 공작을 감내했고, 노동자들의 시위 현장에 동참하면서 경찰에 구타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노조는 1981년 신군부로부터 해산을 명령받았고 어머니는 10개월간 두 번째로 옥살이했다. 1984년 4월에야 겨우 노조를 복구한 어머니는 고문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던 중 11월, 태일이에 이어 또다시 박 열사의 분신 사망을 맞닥뜨렸다. 어머니는 14년 전 아들의 죽음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슬픔과 분노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챙겼다. 이런 어머니를 보며 늦봄은 시 <이소선 여사>를 썼다.
이 땅의 노동자 위해 한평생 헌신
늦봄은 어머니에게서 불을 뿜는 아우성을 들었고 목에 불이 일어 타들어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기 목이 타들어 가는 건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목마름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아들의 분신 이후 오로지 핍박당하는 이 땅의 노동자들을 보살피는 일에만 자신의 혼까지 통째로 다 바친 당신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아들딸의 타는 목에 물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못한 어머니는 자기 목을 축일 새가 어디 있었겠는가? 늦봄은 어머니의 목이 언제까지 타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늦봄은 시의 첫머리에서, 어머니는 분신한 아들 태일이의 타는 목에도 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았다면서 정말 너무 하셨다고 어머니를 탓했다. 그러나 늦봄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살림』에 기고한 글에 나타나 있다.
1천만 노동자의 어머니, 그는 “물 좀” “물 좀” 하는 아들의 목에 물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으셨다는 것 아닙니까? 70년대 깜깜한 천지를 가르는 불길이었던 전태일의 목은 타고 있었던 겁니다.
“아……목이 마르다.”
십자가상의 예수의 외침이었던 거죠. 어쩌면 그보다도 더 처절한 생명의 외침이었는지도 모르죠. 이소선 여사는 아들을 살리고 싶은 심정으로 그렇게 매정했던 겁니다(문익환 1999).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목마르다고 말하면서 고통을 당한 것은, 그가 사람들을 대신해서 목마름의 고통을 당하시므로 그를 믿는 자는 목마름의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 즉 사람들을 목마름에서 해방하기 위함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한다(권해생 2021). 전태일이 분신했을 당시 "전태일이야말로 예수였다"고 규정했던 늦봄은 시를 통해 다시 한번 전태일을 예수에 비유함과 동시에 아들에게 물 한 방울 주지 않은 매정함은 아들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타는 목마름까지 해방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의지임을 말하려 한 것 아닐까 싶다.
이 땅의 성모, 이 땅의 최고의 지성
늦봄은 옥중편지에서,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은 그 속에 자연의식과 생명의식을 씨알로 갖고 있을 것이라며, 가장 신선한 생명의 아름다움은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이 땅의 성모’는 이소선 어머니라고 말했다.
나는 이 땅의 성모는 이소선 여사라고 생각한다. (중략) 역사의식, 사회의식이 몸속에서 빛나오는 성스러운 생명의 아름다움은 이소선 여사 말고 다른 어디서도 못 찾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옥중편지 1991. 9. 9).
청계피복노조 위원장이었던 민종덕 씨가 어머니의 구술을 받아 쓴 책 ‘어머니의 길’을 감명 깊게 읽고 난 늦봄은, 어머니를 ‘이 땅의 최고의 지성’이라 불렀다.
이소선 어머니는 이 땅의 최고의 지성이라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거라는 생각마저 드는군요. 그 고도의 지성이 가장 낮은 민중의 말을 하면서 가장 민중적인 몸부림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거 예삿일일 수 없습니다(옥중편지 1991. 9. 13).
어머니는 어린 시절 멸시와 차별을 받으며 성장하였기에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고 태일이에게도 그런 정신을 심어주었다. 읽고 쓰는 것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나 맨 밑바닥의 삶을 경험하며 세상살이의 이치를 통찰했고, 어떤 노동자든 사랑하고 품으며 노동 정의와 평등을 실천하는 분이었다. 온몸으로 익히고 투쟁 현장에서 배운 어머니의 말과 행동은 늦봄의 언급대로 최고의 지성임이 틀림없었다.
한편, 어머니는 태일이의 분신 때 늦봄의 부인 박용길 여사를 처음 만났다. 두 어머니는 그때부터 평생을 민주화 열사와 그 가족들을 위한 일에 함께 앞장서서 헌신했고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현장 어디든 달려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노동자의 어머니로, 겨레의 어머니로 각각 불렸던 두 어머니는 2011년 9월 같은 달에 소천했다.
◇장준하 선생 묘소에서 열린 제 9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박용길 장로와 이소선여사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문익환 (1999). 「물 이야기」 『문익환 전집 6권』. 사계절출판사
정경아 (2020). 『봄길 박용길』. 삼인
민종덕 (2016).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평전』. 파주:돌베개
권해생 (2021). 「예수의 목마름(요 19:28)에 관한 연구」 『신약연구』62호.
이소선 여사
-박종만 열사 빈소에서
문익환
어머니
물 좀 물 좀 하는 아들의
타는 목에 물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으셨다구요
정말 너무하셨군요
하늘을 쳐다보아도
땅을 굽어보아도
바람이 불어도 눈이 와도
오직 타는 가슴일 뿐인 당신
이소선 여사
우리의 어머니
온몸으로 타는 이 조국 위에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알몸으로 뛰어나가고 싶으실 텐데
당신의 둘째 아들 종태의
타는 목에도
셋째 아들 종만의 타는 목에도
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못하셨군요
억울한 빈소에 메아리치는
당신의 아우성
확확 불을 뿜는데
당신의 목이 타는 건 통 모르시네요
넷째 다섯째 열째 스무째 아들
딸 아들 딸 수없는 아들딸들의
타는 목에 아직도 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못하여
당신의 목에서는 불이 이는데
청계천 구정물을 바가지로 퍼마셔도 꺼지지 않을 불이
그 불길에 서러운 낙엽들마저 불춤을 추는데
그 불길에 백두산 천지마저 부글부글 끓는데
이소선 여사여
가엾은 가엾은 우리의 어머니
영원히 죽을 수 없는
우리 모두모두의 어머니
입을 앙다물고 눈물을 참아 온
멍든 가슴들
상처투성이인 손가락들이
잘려 나간 손가락들이
아우성치며 모여 와
한 방울 한 방울
당신의 타는 목을 축여 드릴 그날까지
당신은 오직 타고 있으리
타고 있어야 하리 |
월간 문익환_10월 <봄길 박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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