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정부는 울산을 공업특정지구로 지정하였다. 울산에 공업단지를 조성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공업단지 지정은 시 승격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일제 강점과 해방 이후의 혼란, 연이은 전쟁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은 컸고, ‘민생고’ 해결은 한국인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6・25전쟁 이후 논의되기 시작한 경제개발계획은 박정희 정부에 들어 본격화되었다. 정부가 경제발전을 이끌 산업을 우선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울산에 조선・자동차・석유화학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1962년 남구 매암동 납도마을에서 열린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에 학생들과 주민들이 참여하였다.
출처: 울산광역시 『울산사진연대기 Ⅰ』, 2020, 15쪽

중구 북정동 옛 울산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시승격 기념식에도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출처: 울산광역시 『울산사진연대기 Ⅰ』, 2020, 17쪽
공업단지로 개발되기 이전 농어촌이었던 울산에서 교육 기회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교 진학의 기회가 적었고, 학교마저 적었다. 일제강점기엔 울산공립농업학교가 울산에서 유일한 중등학교였다.
울산시 승격과 특정공업지구 지정에 따른 도시변화는 공단 조성으로 시작되었다. 공장이 들어설 땅이 조성되고 도로가 만들어졌으며 공업용수를 위한 댐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산업현장에서 일할 기술인력도 필요했다. 기술・기능인력양성을 위한 교육이 강조되면서 공업학교 지원정책이 추진되었다.
1937년 개교한 울산공립농업학교는 해방 이후인 1946년 울산농업중학교로, 1951년에는 제일중학교가 분리되어 나가고, 울산농업고등학교로 전환되었다. 1954년에 울산농림고등학교로 학교 이름이 바뀌었다가 1962년 다시 울산실업고등학교로 변경되었다.
이때 기계과, 전기과, 건축과 등 3개의 공업계 학과가 새로 설치되었다. 1969년 울산농공고등학교로 바뀌었고, 1970년 농과계열 학과가 폐지(1974년 2월 농과계 축산과 최종 졸업)되고 1972년 현재의 울산공업고등학교가 되었다.
도시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1970년대 전반기까지 울산의 공업교육은 울산공업고등학교가 담당하였다. 북구와 동구 지역에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등 대규모 기업이 빠르게 성장하는 가운데, 현대그룹은 사원 자녀의 교육과 기술인력 확보를 위해 학교 설립에 나섰고, 1978년 현대공업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내 삶의 주인공이 되다.
1978년 현대공업고등학교가 개교하기 전까지 울산공업고등학교는 울산지역의 유일한 공업계 고등학교였다. 사회에 진출하여 자립하거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경제에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중학생들에게 공업계 고등학교 진학은 전망이 있는 선택으로 여겨졌다.
언양중학교 나와가지고 할 일이 없으니까. 울산에 당시에 공업단지 생긴다고 어머니가 ‘실업고 나오면 먹고 산다’ 그래가지고 큰 맘 먹고, ‘거기 가면 설마 굶어죽겠나!’ 해서 나온 거죠. 언양에서 울산 내려올 때는 그 당시 제일 좋은 데 온다고 왔어요. 기계과가 제일 쎘죠. 그 당시에는 제일 좋은 학교 들어갔어요. 실고라고 해가지고 공과는 기계과・전기과・건축과 이렇게 3과가 있었어요. 농업 계통도 있고.
(신영태, 1949년 생, 2014.7.15.)
내 밑으로 동생이 서이(셋)가 있는데, 내가 대학을 가면은 동생들이 아무 것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 그때만 해도 대학 가는 게 돈이 들어가니까, 쉽지 않았으니까,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내한테 돈이 안 들어가니까, 내한테 들어갈 몫이 동생들한테 가는 거지.
(김재구, 1955년 생, 2013.5.30.)
1960년대부터 공업화가 되면서 우리 생각에는 ‘그냥 공고를 나와도 사회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없겠다’ 이런 생각도 있었고, 제가 또 어릴 때부터 만지고 하는 이런 부분에 취미가 있고, 적성에 맞았고 그래서 공고 기계과를 진학하게 되었습니다.(김상철, 1955년생, 2013.7.13. 구술)
먹고 살기 바쁘니까, 목표 의식이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아, 울산공고 기계과를 가서 돈을 벌어야겠다’ 이 생각밖에 없었어요. 대학은 생각도 전혀 못 했어요. 울산공고 기계과 갔을 때, 우리가 가보니까 제일중학교에서 중간치 하면 다 가는데, 호계나 농소나 언양이나 이런 데서 오는 애들은 보면은 전부 상위 5% 이런 애들만 왔다고. 그 당시에는 그랬어요.
(권창헌, 1954년 생, 2013.6.27.)
원호가족으로 홀어머니와 사는 소년은 공업계 학과가 개설되어 있는 실업계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먹고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학교 진학을 위해 울산 원도심 근처로 이사하였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에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해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 싶기도 했다. 한편 정부 지원 아래 진행되고 있는 공업화를 목격하며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해도 사회생활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학교 성적이 우수한 상당 수의 학생들이 공업계 고등학교의 진학을 선택하였다.
1978년 현대공업고등학교가 개교된 이후 학교를 졸업하면 현대계열의 회사에 취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가정형편과 동생들의 미래, 맏이로서의 의무감 등이 공업고등학교 진학 선택의 또 다른 이유였다.
초등학교 때도 동생들에 대한 부담 이런 것들이 많았었고, 어렸을 때부터 상당히 어른스러웠거든요. 담임 선생님은 울산고등학교 가라고 했는데, 장남이기도 하고 그래서 실업계 들어가서 공장에서 일해야된다고 했죠. 울산공고는 별로 생각을 안 해 봤었어요. 그때 현대공고가 계속해서 좋아진다고 했어요. 울산공고보다 현대공고 입학성적이 그때 더 좋았거든요.
(강봉진, 1966년, 2003.10.22.).
형과 사촌형이 공고를 나왔는데, 현대공고는 다 취직되더라고. 현대공고 제일 잘되는 게 기계과라 하대. 그래가 온 거지. 현대공고는 재수생들이 좀 있어요. 인문계 다니다가 오기도 하고, 나는 한 해 꿉었지만 두 해, 세 해 꿉은 아(애)들 많았어요. 공고는 다 취직 하려고 오는 거지. 직장 얻으려고. 전국 애들 다 오거든요. 다른 데서 엄청 오지. 전라도에서 많이 오지. 충청도에서도 오고.
(안현호, 1965년 생, 2019.6.28.)
현대공고에 보니까 자동차과가 있더라고, ‘아, 저기 가면 자동차 운전도 배우고 …’, 그때 되게 운전을 하고 싶었거든요. ‘자동차에 대한 여러 가지 기술도 배우겠다’. 그런 계기로 가게 됐습니다.
(김기수, 1967년 생, 2018.9.11.)
현대공업고등학교는 현대그룹이 기능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개설한 학교이다. 학교를 졸업하면 현대그룹 기업체에 입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고, 그런 기대감은 학교의 위상을 높였다. 울산공업고등학교가 담당하고 있던 기능인력 양성 역할을 현대공업고등학교가 나누어 가지게 된 것이다. 기계과의 경우 다양한 작업 과정에 투입될 수 있었기에 입학성적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조선과와 자동차과의 개설은 선박을 만드는 현대중공업과 자동차를 만드는 현대자동차에서 일할 기능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현대그룹에 취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다른 지역 출신도 지원해 왔고,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다 진로를 바꾸거나 진학에 실패하였다가 다시 지원하는 재수생들도 적지 않았다.

설립자 정주영은 '앞으로의 세계는 산업화에 의해 열릴 것이며, 우수한 기능인을 양성함은 선진공업입국의 초석이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주고, 동생들에게 교육 기회를 주기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취업하여 돈을 벌겠다는 학생들이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거주지와 상당히 먼 거리에서 등・하교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지역에서 와서 등하교가 어려운 경우에는 친척 집에 머물거나 자취를 했다.
그때는 방어진에서 시내 나오는데 교통이 워낙 나빠 가지고, 화암(꽃바위)지역에서 방어진 종점까지 걸어오는데 한 20분 정도 걸렸고, 또 버스를 타고 옥교동까지 오는데 보면 한 시간 더 넘게 걸렸고, 또 거기서 학교까지 걸어갈라고 하면 또 한 30분 걸렸고. 옛날에 신정동 쪽에 거기가 도시화되기 전에는 교통이 굉장히 불편했지요. 옥교동 동신약국 종점에서 내려가지고 울산교를 통해서 들판을 가로질러가지고 그렇게 학교까지 가는데, 도저히 통학이 안 되어가지고 자취를 했지요. 학교 옆에 자취를 거의 한 3년간 했지요.
(김상철, 1955년생, 2013.7.13. 구술)
예나 지금이나 등교시간은 항상 바빴다. 특히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어떻게 하든 지름길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교통이 발전하지 않은 시기라 대중교통을 이용하더라도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기차를 이용하여 통학하는 학생들은 통학시간을 줄이기 위해 모험을 감행했다.
철길이 있었는데 거기를 따라 다녔어요. 철길을 따라 쭉 걸어 다녔죠. 그래도 한 4~50분 걸린 거 같애요. 같이 댕긴 친구가 있었습니다. 지 한쪽, 내 한쪽, 레일 타고 쭉 가. 여객차 다니는 건 아니였고. 거의 보면 화물 중에서도 SK 다니는 유조차 다니니까, 오는 시간대는 정해져 있고, 거의 많이 안 다녔죠. 학교 근처에 달리역이 있었는데,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이에요. 기차 타고 통학하는 친구들은 열차가 역을 천천히 지나가면 뛰어내리잖아요. 달리는 방향으로 뛰면은 안 엎어져. 옛날에 중구 학성동에 거기가 울산역입니다. 울산역에서 내려 걸어오면 힘들잖아요. 부산・기장・일광 이런 데서 다닌 친구들은 열차가 달리역을 지날 때 약간 속도를 줄이면 뛰어 내렸뿌
(김종호, 1955년 생, 2013.4.25.)
현대공업고등학교는 동구가 아닌 지역에서 통학하기에 거리는 멀었다.
시험 기간에는 한두 달 자취하고 나머지는 통학했지요. 기장서 열차 타고. 울산역 내리가 학성공원 가서 시내버스 타고 남목까지 가면 벌써 수업이 시작됐어. 그럼 우리가 좀 늦게 들어간다고. 중간에 들어가면 안 되니까. 교련 선생이 딱 보고 ‘청소 좀 하고 들어가라.’ 이래가 얼차려 좀 받고. 그래서 자취 못 하면 새벽 4시 40분 차 타고 올라온다고. 울산 오면 5시 40분 한 시간이거든. 일찍 가는 거야. 7시 막차 타고 내려가고
(안현호, 1965년 생, 2019.6.28.)
아침에 6시 45분에 집에서 나옵니다. 남창 도로가 포장은 돼 있지만 2차선이었어요. 그때는 빨간 버스랐는데, 이게 빵구 나거나 차가 한 대 빠져뿌면 지각이라. 집에서 6시 45분에 나오면 8시 한 반 정도 돼가 도착이니까. 남창에서 버스 타고 공업탑 가가 바꿔 타죠. 자취 생각을 안 했습니다. 그때는 집으로 오는 게 시간이 많이 걸리고. 집에 오면 거의 아홉 시 됐는 거 같습니다.
(김보석, 1963년 생, 2023.9.15.)
등굣길이 너무 멀어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기도 했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새벽밥을 먹고 등교를 해야 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시간 안에 등교하기 어려웠고, 지각을 할 경우 벌을 서야 했다. 그런 까닭에 어둑한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시간이 더 결렸다. 가정경제에 도움이 되고, 사회에 나가 자립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인내하며 보내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마주한 교정
울산공업고등학교가 현대식 건물에 실습기자재를 갖추게 된 데에는 해외에서 들어온 차관의 영향이 컸다. 1970년대 울산공고를 입학한 이들에게 AID차관과 학교의 변모는 강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들어가니까 학교가 가건물이었어요. 옛날에 가건물 중간에 보면 벽돌로 쌓아가지고 대충 시멘트로 이래 발라놨는데, 중간에 나무 기둥이 있고, 천장에는 서까래니 이런 것들이 전부 나무예요. 비 오면 비가 새고 이랬어요. 그때 AID인지 당시에 차관으로 해가지고 현대식 건물을 지어서 2학년 때부터 들어갔었어요.
(권창헌, 1954년 생, 2013.6.27.)
국가에서 AID차관을 받아가지고 학교를 전폭적으로 지원했지. 2학년 때 울산공고도 AID차관 받아가 건물 다 새로 짓고, 선반기계도 넣고. 다 놀랬지. 엄청 좋은 기계야. 국산기계가 없었거든. 전부 독일제 기계, 스위스제 선반기계 겉은 거 가져와서 실습하이 잘하지. 그래서 기능올림픽하면 세계에서 매번 우리 한국이 제패하는 기 바로 그런 기라. 그 기계가 최첨단 기계였어.
(김석택, 1955년 생, 2014.8.4.)
상대적으로 늦게 개교한 현대공업고등학교는 개교 당시부터 현대식 건물로 건립되었다. 농어촌 마을에서 성장한 입학생에게 학교 모습이 다른 세상으로 보였다.
현대공고는 별세상이었지요.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2~3층짜리 건물에 있다가 여기 오니까 5층짜리 건물인 거에요. 건물 규모 자체가 몇 배가 되니까, 그러고 차라든지 그런 거 보니까, ‘이런 게 있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김보석, 1963년 생, 2023.9.15.)
현대공업고등학교는 현대그룹의 대규모 공장이 밀집해 있는 동구지역에 위치한다. 다른 지역에서 온 학생들에게는 학교와 학교 주변의 풍경은 새로운 세계로 보였다. 학교 앞,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공장 규모와 공장 담장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크레인, 수없이 오가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물결, 경험해보지 못한 학교의 건물 규모 등에 ‘이런 세상이 있구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능올림픽'에 도전하다.
공업계 고등학교의 교육목표는 산업발전에 기여할 기능인력 양성에 있었기 때문에 교육은 직업훈련에 맞추어졌다. 그런 까닭에 1970년대 공업교육의 핵심 중 하나는 학교생활을 통해 연마한 기능을 검정하는 것이었다. 공업계 고등학생들은 2학년 때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야했다. 기능검정은 직업훈련의 효과를 검정하기 위한 것이었고, 검증된 기능을 뽐내는 자리가 기능경기대회었다.
학교에서 연마한 기능은 취업 후 산업현장에서 직접적으로 활용되지만, 기능향상을 위한 노력은 각종 기능경기대회로 평가와 보상을 받았다. 지역대회를 거친 전국대회 우승자는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국가대표로 뽑히면 ‘기능올림픽’으로 불린 국제기능경기대회(International Vocational Training Competition)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 각종 기능경기대회는 참여 학생 개인의 성취와 학교의 명성으로 이어졌고, 기능올림픽에서의 메달획득은 국가의 세계적인 위상, 국민의 자부심과 연결되었다.

195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의 청소년 노동자의 친선 기능경기로 시작된 국제기능경기대회에 한국은 1966년 회원국으로 가입한 뒤 다음해인 1967년부터 선수단을 파견하였다. 정부는 국제기능경기대회를 ‘기능올림픽’으로 부르며 참여를 적극 지원하였고, 1977년에는 처음으로 종합 1위를 차지하였다. 1978년에는 개최국이 되어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에서 제24회 국제기능경기대회를 개최하여 2연패를 달성하였다. 이때 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이 22개중 16개의 금메달을 땄다. 이후 한국은 ‘기능올림픽’ 우승을 싹쓸이 하다시피 했다. 울산공업고등학교와 현대공업고등학교 학생들도 경진대회라고 불린 기능경기대회 참여를 위해 기능을 갈고 닦았다.
실업계니까 공부보다는 기술연마를 중심으로 했는데, 저는 실습시간에 가공물 만드는데 소질이 있었던 거 같아요. 실습 시험을 치면 점수를 잘 받았던 편이고, 그래서 주로 만드는 쪽으로 해서 연구생도 좀 해봤고. 실습시간에 한두 명씩 선발을 해가지고, 실험 조교지요. 실습 선생님 보좌합니다. 기능이 우수하면 경진대회, 요즘 말하면 기능대회지요. 학교 대표로 나가서 입상을 하게 되면 그런 쪽으로 키우게 되는 그런 과정도 있고. 저는 나가도 순위에 못 들어가고. 목형 부문을 했어요. 쇳물을 녹여서 컵을 만드는데, 컵 모양으로 나무를 만들지 않습니까? 구 역전 앞에 거기 보면 목형 전문 가게가 있었어요. 그 집에 가서 기술을 배우기도 했죠. 목형 도면 그리는 방법이라든가, 연마하는 방법이라든가.
(김상철, 1955년생, 2013.7.13. 구술)
학교 연구생으로 측량실기경연대회도 나갔었고. 그러니까 각 과별로 기능올림픽처럼 비슷한 대회들이 많아요. 측량대회 나가서 상도 몇 개 받아왔고. 학교생활은 그런대로 모범생이었어요. 또 봉사 모임 간부를 했으니까. 학교에 가면은 대우받을 수 있고, 그리고 선생님들도 대회 선수다 보니까 그만큼 대우를 해주거든요.
(이재승, 1967년 생, 2022.10.11.)
‘기능올림픽’ 수상자들은 국민적 환대를 받았다. 귀국 길에 공항에서의 환영 행사, 시가지 퍼레이드, 청와대 방문, 언론인터뷰 등의 성대한 귀국 환영식이 열렸고, 두둑한 상금이 뒤따랐다. 그런 까닭에 기능인력을 양성하는 기관들은 ‘기능올림픽’에서 수상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참여 학생들은 지방기능경기대회와 전국기능경기대회 우승을 통해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기능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기 위해 방학과 휴일을 반납하고 훈련에 매진하였다. 대회 우승은 자신의 영광을 너머 학교와 나라의 자랑으로 느껴졌다. 울산의 공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참여기회가 열려 있었다.

학교를 졸업 후 산업현장에서의 노동 경험과 노력을 통해 높은 기능과 기술에 도달한 이들이 있다. 국가품질명장이 그들이다. 이들은 산업현장에서 오랜시간 동안 기능을 연마하였고, 그러한 오랜 노력의 열매 중 하나가 국가품질명장이다. 남구 왕생이길과 울산박물관에서 그들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그들 속에 울산공업고등학교와 현대공업고등학교에서 기능을 익히기 시작했던 명장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미리 경험하는 노동생활, 실습
1973년 「산업교육진흥법」이 개정되어 공업 관련 학과 학생들의 2~6개월간의 실습시간이 의무화되었다. 현장실습은 학교와 산업체의 협동 교육이 체계화되어 있어야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학교와 산업체가 자매 결연을 맺고, 자매 결연을 맺는 회사에 학생들이 현장실습을 나갈 수 있을 때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울산에는 공업계 고등학생들이 현장실습을 가고 싶은 공장이 많았다.
2학기가 되면 실습을 나가는데 태광산업 실습 나갈 때 만해도 취업하기가 힘들었어, 기계과가 다양하게 쓰이는 데는 많지요. 모든 공정에 기계가 안 들어가는 데가 없잖아요. 그때는 실습 나가는 것도 시험을 쳤어요. 울산공고・대구공고・경주공고・경남공고・마산공고 등 7개 학교가 태광산업 실습생으로 시험을 치러 갔어요. 국어・영어・수학・전공과목을 쳤다고. 학교 운동장에서 체력검사 하고. 실습 나가면 거의 입사나 마찬가지니까, 내 같은 경우에는 학교에서 배운 게 적용이 많이 됐어요. 기계 수리하고 조립하는 쪽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학교에서 배운 게 접목이 되더라구요.(김재구, 1955년 생, 2013.5.30.).
실습을 나가서, 부서에서 고향 사람을 만냈지. 그러면서 그분한테 일을 더 열심히 배웠지. 실습 나가면서 노트 하나 구입해가지고 첫 장에 탁 썼어요. 실습기간동안 죽은 듯이 열심히 일만 하자, 작업복에 기름이 묻어 반짝반짝하고 빗물이 안 스며들 정도로 열심히 했어요. 대부분은 그냥 실습만 하고 가라는 분위기니까, 내가 생각이 없었으며는 가르쳐 주지도 안 했죠. 회사 입장에서도 잉여인력이 들어와가지고 밥 축내고 전기 쓰지, 물 쓰지. 제 스스로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종열, 1955년 생, 2013.4.18. 구술)
옛날에 실습생으로 들어가면 6개월 동안 교육을 받고 다시 내보내요. 처음에 실습 나가서 깜짝 놀랐어요. 7월 1일 날 딱 거기 갔는데 경남공고하고 우리하고 딱 갔는데, 그때는 동양나이론하고 경남공고가 자매결연이 되어 있어가지고 거기 인원이 한 20명, 우리(울산공고)는 몇 명 안 갔어요. 그때 돈을 한 만 오천원 줘요. 엄청나게 큰돈이었지. 그때 깜짝 놀랐어. 실습하러 온 애들 방세가 1,500~2,000원 했으니까. 굉장히 큰돈이었어요. “야,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그 당시에 버스비가 5원 이렇게 하는 시절이니까. 3개월째부터는 오천원으로 딱 떨어져버렸어요. 너무 많다 싶었겠지.
(권창헌, 1954년 생, 2013.6.27.)
현장실습을 나간 학생들은 현장의 선배 작업자들의 일을 옆에서 도우며 기능을 익혔다. 현장실습에 임하는 실습생의 태도는 다양했다. 현장실습은 학교에서 배운 기능을 적용해 보는 시험의 장이었고, 선배 노동자들로부터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직원들에 견주어 적은 금액이었지만 처음으로 실습비라는 명목의 임금을 받아보기도 하였다. 또한 현장실습이 취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실습 현장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실습 현장의 노동조건은 천차만별이었고, 실습 기간을 못 채우고 학교로 돌아오기도 하고, 아예 실습을 나가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산업화와 함께한 인생
한국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른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나라이다. 산업화의 성공은 국가의 지원과 기업의 혁신적인 경영 못지 않게 현장에서 청춘을 보낸 노동자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현장에서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어린나무가 큰 나무가 되듯이 회사와 함께 커온 삶이었고, 울산이 산업도시로 성장하는데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이바지하는 인생이었다.
또한 ‘산업역군’으로 울산의 기업들이 설립되는 시작점부터 함께 하며 기업을 성장시키고, 울산을 너머 국가의 성장 과정을 함께 해온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가지는 삶이었다.
<참고문헌> 문헌자료 울산광역시 교육청, 『울산교육사』 김동환, 「중화학공업화와 공업고등학교 교육정책의 변화」 『교육사회학연구』 제3권 1호, 1993. 김태호, 「“갈채와 망각, 그 뒤란의 산업전사”들 – 국제기능경기대회와 1970~80년대 기능인력」 『역사문제연구』 제36호, 2016. 안재영, 「산업화에 따른 직업계고등학교의 변천 과정 탐색」 『대한공업교육학회지』 제48권 제2호, 2023. 정진성, 「1960년대 한국 정부의 기술인력 양성정책- 기능공 양성을 중심으로」 『경제사학』 제40권 제3호(통권 제62호), 2016. 지민우, 「중화학공업화 초기 숙련공의 생애사 연구- ‘금오공고 졸업생’을 중심으로」 ,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3. 홍성주, 「초기공업화 과정에서 한국의 기술인력 양성전략 선택」 『한국기술혁신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2011권 6호, 2011. 구술자료 울산박물관, 『울산박물관 산업화세대 6070, 우리 아버지들의 이야기』, 2013(권창헌, 김재구). 『울산근로자생활상 조사연구 1~2』 , 2014~2015(신영태, 김석택). 울산노동역사관 1987, 『현대자동차 구술생애사연구』, 2017~2018(김기수, 안현호). 울산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울산지역사연구-노동』, 2002~2005(강봉진). 울산발전연구원 부설 울산학연구센터, 『산업화시대를 살아온 울산 근로자들의 생애사』, 2013(김상철, 김정준, 김종호, 이종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