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일주기에

봄길님 

 

서럽고 서럽고 또 서러운 일 년이었군요. 아프고 또 아픈 일 년이었군요. 당신은 소복을 입은 몸으로 다시 옥바라지 신세에 밀려들었고, 나는 어머니 무덤의 잔디를 쓰다듬듯 별 볼품없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철창 너머 어머니의 하늘을 쳐다보는 일 년을 별 탈 없이 살아왔구요.

가을도 아닌데, 한창 신록으로 물오른 오월인데, 동주의 핏빛 단풍잎 하나하나 뚝뚝 떨어져 나간 자리마다 봄은 마련되었겠지요. 이걸 믿지 못하고 하룬들 숨이 막혀 살 수 없는 한 해였군요. 이제 진정 계절로서도 가을이 와서 바람에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푸르른 하늘을 쳐다보는 가을이 와서 봉수교회 부활절 예배가 민족의 부활절 예배가 되려는 건지, 그것도 믿을 수 없다면 우리는 숨통 끊고 죽어야지요.

아버님의 상은 2년을 입었는데, 어머님의 상은 1년을 입고 벗는 것이 전통이기는 해도, 그 전통을 따르자니 죄라도 짓는 것 같다는 당신의 그 고운 마음에 비길 만한 꽃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군요. 아버지, 어머니 상을 3년 입었다고 생각하면 되죠. 어머니의 상을 일 년 입고 벗는 것을 아쉬워하는 마음은 어머니의 상을 입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어 눈물겹게 고맙군요.

지난 일 년을 회고하면서 나는 어머님이 잘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머니 살아 계셨다면 지난 5월의 아픔을 어떻게 견디셨을까요? 그 고귀한 희생 아랑곳없이 민족을 배신한 어두웠던, 아니 깜깜했던 역사, 어머니는 숨이 막혀 돌아가셨을 거군요. 내가 다시 갇혔다는 건 약과죠. 경대 아버지, 종철이 아버지 수감되는 걸 보셨다면 아마 가슴이 터졌을 거예요.

그러나 이제 우리의 역사도 드디어 우렁찬 기적을 울리며 길고 긴 굴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아요?

 

“아, 어머니, 이제 정말 다 됐어요. 기쁘시죠? 한 세기에 걸친 기다림, 민족 해방이 동터 오고 있지 않아요?” 큰소리로 알려 드려야지요. 

“전태일에서 시작해서 (김)귀정이에 이르는 수많은 젊은 열사들. 그 죽음 하나하나에 마련되었던 봄의 새싹이 이제 우리 가슴에서 움트기 시작하고 있어요, 어머니.”

 

어머니는 우리의 이 마음의 외침 다 듣고 계시지요. 조국의 흙이 되셔서, 그 흙의 마음이 되셔서.

난 오늘 새벽 나의 염불이 갑자기 바뀌는 걸 느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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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시여, 생명이시여, 모든 생명의 생명이시여, 다함 없는 모든 생명의 생명이시여…….” 이 염불이 이렇게 바뀌는 거였어요.

“생명이시여, 생명이시여, 모든 생명의 생명이시여, 어머니의 다함 없는 생명이시여, 힘이시여, 힘이시여, 모든 힘의 힘이시여, 어머니의 다함없는 힘이시여!

마음이시여, 마음이시여, 모든 마음의 마음이시여, 어머니의 다함 없는 마음이시여! 진실이시여, 진실이시여, 모든 진실의 진실이시여, 어머니의 다함 없는 진실이시여! 사랑이시여, 사랑이시여, 모든 사랑의 사랑이시여, 어머니의 다함 없는 사랑이시여! 아름다움이시여, 아름다움이시여, 모든 아름다움의 아름다움이시여, 어머니의 다함 없는 아름다움이시여!

슬픔이시여, 슬픔이시여, 모든 슬픔의 슬픔이시여, 어머니의 다함 없는 슬픔이시여! 기쁨이시여, 기쁨이시여, 모든 기쁨의 기쁨이시여, 모든 슬픔 집어삼키는 어머니의 다함 없는 기쁨이시여!”

 

나의 염불이 어머니의 마음에 메아리치지 않는다는 건 생각할 수 없군요. 이 염불이 그대로 어머니의 생명,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의 진실, 사랑, 아름다움, 슬픔, 기쁨의 메아리니까요. 이 메아리는 우주의 메아리, 하느님도 이 메아리 속에 살아 계시는 거구요.

어머니를 기리는 자리에 아버님은 와 계시겠죠. 어머니만 기린다고 아버님 화를 내지 않으시겠지요. 어머니를 기리는 건 아버지를 기리는 일도 되니까요. 아버지를 기리는 날, 어머니도 한자리에 섞여 앉으셔서 같이 기림을 받으실 테니까요.

모두 산소에 가서 큰절을 올리는 날, 난 여기서 아버님, 어머님 사진 앞에 큰절을 올리고 아버님, 어머님 무덤의 잔디를 만지듯 내 수염이나 만지지요. 

또다시 그리도 끔찍스러운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듣다니, 어머니 잘 가셨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몹시 피곤해 보이던데, 혼자 올라가면 잠도 푹 자고 쉴 수 있기를 바라오. 어머니가 그리워 오늘 교회에 모이는 분들 친동기처럼 따뜻한 가슴 마음으로나마 안아 보기로 하지요. 

오늘은 이만. 아픈 가슴으로.

당신의 늦봄

1991. 9. 18.

 어머니의 일주기를 맞이하여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