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8월 <옥중의 늦봄>

🈷️ 여섯 번째 수감되던 날(1991. 6. 6)

“와락 달려드는 사복들…난 담담하기만 했었다오”

 

사위와 손자 탁구 구경하며 망중한 즐기다가…

73세의 고령으로 여섯 번째 수감되던 날. 그날은 1991년 6월 6일 현충일 휴일이었다. 
집마당에서 사위와 외손자가 탁구 치는 걸 구경하며 그야말로 망중한(忙中閑)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장기표 씨의 전화였다. 즉시 집을 나섰으나 사복경찰에 바로 연행되어 또다시 영등포 교도소와 안동교도소에서 21개월간 옥고를 치르게 됐다.
 
“어쩌다 이런 때도 있었군!” 그야말로 망중한(忙中閑)이었군요. 성수, 문칠 부자가 탁구 치는 걸 구경하면서. “때르릉” 장기표 씨의 전화, 백병원으로 빨리 나오라고. 경찰과 학생들의 충돌로 불상사라도 생기면 큰일이라는. (김)귀정이 때문에 또 학생이 하나라도 죽는다면 큰일이라는 거였소. 자지러드는 몸 좀 뉘었다가 귀정의 어머니에게 부검을 받으라고 권해야 겠다며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서는 나의 다리는 왠지 좀 떨리더군요. 택시를 잡으려고 두리번거리는데, 와락 달려드는 사복들, 난 담담하기만 했었다오. (옥중편지 1991. 6. 6)
 
◇김기설 열사와 강경대 열사의 장례행렬 선봉에 서있는 문익환 목사와 한상렬 목사, 백기완 선생의 모습
 

재수감 우려에도 열사들의 장례위원장 맡아

당시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1991년 4월 29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학생 단체를 중심으로 반정부 항의 시위에서 10여 명의 시위 참가자가 분신 자살하는 등 이른바 “분신 정국”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분신 정국에서 문익환 목사는 목숨을 잃은 열사들의 장례 위원장을 맡았고 결국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구속되었다. 재수감의 우려에도 당시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부인 박용길 장로는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회상하였다.
 
“비명에 간 젊은이들의 시신 앞에서 기도하시랴 우시랴 파김치가 되셨어요. 장례 하나를 치르면 또 장례가 기다리고 있고… 몹시 힘겨워하시다가 감옥으로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1992. 12. 23 한겨레 신문)
 

6번째 징역… “두려움은 적게 기대는 크게” 

6번째 수감으로 가족과 지인들은 날벼락을 맞은 심정이었지만 당사자인 늦봄은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여섯 번째라 익숙해져서 마치 고향에 온 듯 올 데 왔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고난의 상황에서도 감옥을 수도원으로 여기며 또다시 신앙의 세계를 확장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굳건한 소신으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펼쳐진 역사의 현장에서 열정적으로 임하였다.
 
저는 또다시 두려움은 적게 가지고 기대는 크게 가지고 여섯 번째 징역살이를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은 무언가 생각할 수 없이 큰 걸 가지고 저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나갈 때는 또 커다란 선물을 안고 나갈 테니까 기대해 주세요. (옥중편지 1991. 6. 9)
 
지난 16년 동안 생일을 열한 번 감옥에서 보냈으니까, 그동안 바깥살이는 감옥 수도 생활 사이사이의 귀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수도 생활의 연속이라고 해야겠지요. (옥중편지 1992. 3. 7)
 

손녀에게 “할아버지는 외롭지 않아”

호연지기의 마음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은 외손녀에게 보낸 답장 편지에서도 읽혀진다. 할아버지가 또다시 감옥에 들어가서 슬프고 불쌍하다는 손녀에게 감옥에 오게 된 사연을,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할아버지는 외롭지 않고 행복하다고 전한다.
 
모두 모두 행복하게 사는 세상 만들려고 애쓰다가 감옥에 여섯 번이나 간 사람이 있다면서 사람들은 이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이 할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거든. 그런 사람이 어찌 한두 사람이겠니? 꽤 많은 거 아니겠니? 그러니 난 행복할밖에. 그리고 외롭지 않단다. 과분하게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중략)

난 지금 염치도 없이 행복을 말하고 있구나. “할아버지, 그렇게 행복한 거야?” 이 네 질문이 내 귀청을 때렸기 때문에 행복 이야기를 하게 된 거지. 난 이번 다시 감옥에 들어오기까지 한 마흔 날 동안 행복과는 거리가 먼 슬픈 나날을 보냈다는 거 너 잘 알지? 어쩌면 한 달 동안에 열한 사람이나 맞아 죽고 몸에 불질러 죽고 할 수 있니? 그 장례식을 치러 주느라고 난 정신이 없었다. 그 슬픈 아버지,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붙들어 주느라고 난 제정신이 아니었단다.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아까운 열한 목숨도, 그 가슴 미어지는 슬픔도 모두 모두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슬픔을 쓸어 내고, 모두 모두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애타는 희생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구나. 그러니 너도 동무들에게 들려줘야 해. “그 죽음들이 헛된 죽음이 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 다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힘을 모아 노력해야 한다”고. 알았지? 꼭꼭 부탁이다. 또 편지를 보내다오. 좋은 시, 좋은 그림도. (옥중편지 1991. 6. 14)
 
✉️ 외할아버지께,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건강하게 잘 계세요? 
전 할아버지께서 또 감옥에 들어 가셔서 무척이나 슬프답니다. 제가 시를 지었거든요. 들려 드릴게요.

<비 내리는 밤>
주룩 주룩 비가 내리는 밤엔/ 너무 너무 쓸쓸하지요/ 주룩 주룩 비가 내리는 밤엔/ 
감옥에 계신 할아버지가 생각 나지요./ 주룩 주룩 비가 내리는 밤엔/ 할아버지께서도 쓸쓸하시지요./
그렇지만 이슬비가 내리는 밤엔/ 나도 할아버지도 즐겁지요.

이것이 제가 지은 시예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친구들도 할아버지가 또 감옥에 들어가셨다고 안됐다고 합니다. 저의 학교 생활은 즐겁지만 할아버지의 감옥 살이는 외롭고 쓸쓸하시겠죠? 
저는 할아버지가 너무 너무 불쌍하답니다. 왜냐하면 조그마한 방에서 혼자 외토리로 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할아버지께서 여러사람과 놀고있는 것을 그림으로 그려보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그린 그림이예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안녕이계셔요.
1991년 6월 7일 외손녀 문숙 올림       


 
 ◇ 손녀 문숙이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1991. 6. 7) 
 
Picture 1
◇여섯번째로 수감되던 날 쓴 옥중편지 ‘제1신’(1991.6.6)



<글: 오남경>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여행과 사색을 위한 숲길 산책을 무척 좋아합니다.



[참고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박용길 (2019). 『사랑의 기록가 박용길』. 통일의 집
한겨레신문 (1992.12.23.)​ 「인터뷰/박용길씨〈문익환 목사 부인〉 매일 편지 써요, 그날 있은일, 자식얘기…」

월간 문익환_8월 <옥중의 늦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