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를 밝힐 돌들

박문숙에게

 

그 팔팔하던 문숙이 파절굼이 된 걸 보니, 얼마나 애처로운지 모르겠더구나. 돌아갈 때는 멀미를 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네가 그렇게 피아노를 잘 친다는데, 할아버지는 아직 네 피아노 치는 걸 들어보지 못했으니, 속상해서 이거 어디 억울해서 되겠니?

오랜만에 할아버지 보니 어땠니? 빡빡 깎았던 머리도 이젠 꽤 자라서 괜찮지? 어때 건강해 보이지? 할머님이 몸이 좋아지셔서 할아버님한테 가서 함께 계시다니 정말 다행이구나. 개학도 다가오는데, 나머지 방학 동안 잘 뛰놀다가 건강한 몸으로 새 학기 맞이하길 바란다. 운동회에선 한 번 본때를 보이고. 이 할아버지는 국민학교 때 대운동회에서 일등을 꼭 한 번 해보았는데, 그게 무슨 경주냐 하면, 산수 경주였거든. 산수 경주 어떻게 하는 거냐고? 뛰어가다가 놓여있는 종이에 있는 산수 문제를 빨리 풀어서 결승점에 들어가는 경기였다. 중학교 때도 꼭 한 번 작문 경주에서 일등을 해 보았거든. 그 경주도 달려가다가 종이에 적혀 있는 작문 제목으로 글을 지어서 뛰는 거였지. 한 마디로 할아버지는 뜀박질은 엉망이었다는 말이지. 너의 엄마도 이 할아버지를 닮아서 운동은 꼴찌를 면하면 잘한 편인데, 넌 아빠를 닮았나 보구나. 그렇게 뜀박질을 잘하니? 거기다가 공부도 잘하니! 모든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고, 서로 위하고 돕고 사랑하면서 산다는 게 무엇보다도 값진 일이라는 거 넌 너무나 잘 알지? 할아버지 나 그런 거 다 알고 있어요. 그래 알고 있고말고. 우리 착한 문숙이. 이제 그만 붓을 놓는다. 

안동에서. 할아버지.

 

 

(강)경대 아버지

내가 경대 때문에 다시 수감되어 고생이나 한다고 생각하고 마음 괴로워하신다는 말을 듣고,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시나 싶어 안타까운 심정 금할 길 없습니다. 저는 꼭 죄인이 된 심정으로 꽃 같은 젊은이들의 장례식을 치러 주고 있었습니다. 그 어린것들이, 그 꽃 같은 인생을 민족의 제단에 팍팍 아낌없이 바치는데, 일흔 넘도록 살아 있다는 게 그냥 부끄러울 뿐이었거든요.

경대 아버지도 옥살이해 보시니까 할 만하지요? 이거 뭐 고생이랄 것도 없습니다. 감옥에만 들어오면, 그동안 바빠서 못 읽던 책도 읽고, 못 쓰던 시도 쓰고, 바삐 바삐 먹느라고 밥맛도 모르던 걸 여기서는 쫓기는 일 없겠다, 느긋이 잘 씹어 먹으면 밥맛 구수하겠다, 정말 고생이랄 것 없습니다. 오래오래 벼르면서도 시간이 없어서 못 쓰던 『건강과 인생』이라는 책 저술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시집을 읽다가 경대 아버지에게 읽어 드리고 싶은 시를 만났습니다. 이시영이라는 중견 시인의 「헌시(獻詩)」라는 시입니다. 한번 들어 보세요.

강 건너 강 건너로 갈까 

재 너머 재 너머로 갈까

토끼풀 필 때마다 보고 싶었다

뜸부기 무논에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 

개울가 소나기 퍼붓는 산비탈에

이 애비, 너 짊어진 지게 받쳐 놓고 

민주야, 오늘은 삽을 들어

네 이름을 먹구름 속에 흙바람 속에 고이 묻는다만 

새봄이 오면 너는 파릇파릇 살아서 오라

무덤가 진달래꽃 흐드러지면 

쩌렁쩌렁 산천을 울리며 오라

쫓기는 아비들의 타는 가슴으로 오라 

청계에서 구로에서 다리 밑에서 

억눌려 소리치는 그 모든 깃발로 오라

칼 빛이 부딪치면, 함성의 그 날이 오면…….

 

이시영 시인, 경대 아버지를 위해서 이 시를 쓴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종철의 아버지도 이 시를 읽으면 어쩌면 이 가슴을 이리도 절절히 읊어 주었을까 하고 공감하실 테지요. 경대를, 종철이를 구름 속에 흙바람 속에 고이 묻고는 새봄이 오면 파릇파릇 봄의 희망으로, 역사의 새 생명으로 살아오라는 심정, 너무 절절하지 않습니까? 칼 빛 부딪치는 날, 함성이 터질 그 날은 오고 있습니다. 경대, 종철이, 귀정이 어울려 소리치는 깃발로 올 날이 분명 오고 있습니다.

요새 저는 바둑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바둑에서 버리는 돌(사석)이라는 게 있지요. 난 요새 경대랑 생각하면서 사석이 되는 게 돌을 버리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석이란 실상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 다른 돌들에 비해서 더 빛나고 값진 돌이라는 것 말입니다. 경대랑은 그냥 사석이 아닙니다. 그냥 버려진 돌이 아닙니다. 90년대 초를 밝히는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돌들이었지요.

경대 아버지도 바둑 좀 하세요. 바둑 하시면 언젠가 한 번 만나서 해보십시다. 바둑알 하나하나에 손바닥 온기를 실어서 판에 올려놓으면, 이게 그냥 돌이 아니거든요. 하나하나 그 자리에서 뚜렷한 몫을, 저 아니면 아무도 못 해내는 몫을 담당하거든요.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지면이 다 됐습니다. 우리도 젊은이들처럼 씩씩합시다.

늦봄

1991. 8. 7. 

 

 면회오면서 멀미를 한 손녀를 격려하고, 강경대 아버지에게 이시영의 헌시(獻詩)를 들려주며 경대가 결코 바둑에서 버린 돌이 아니라면서 격려하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