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1월 <늦봄의 별세>

🈷️ 장례위원장 문익환, 젊은 열사들의 마지막 길 배웅

“꽃 같은 인생을 바치는데, 살아 있다는 게 부끄럽다”

 
 
◇석방 후 바로 찾아간 이한열 열사 빈소에 절하는 문익환 목사(1987. 7. 8.)
 
 

장례위원장 맡고 여섯 번째 감옥행

늦봄은 1991년 6월 6일 현충일 아침, 집을 나서면서 연행되어 여섯 번째 수감생활을 시작했다. 시위 도중 토끼몰이식 진압으로 사망한 김귀정 열사 장례위원장으로서, 김 열사의 빈소로 가려던 길이었다. 사망 사건을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지며 또 다른 대학생 희생자가 나올 수 있다고 우려하는 전화를 받고 나선 길이었다. 소위 ‘분신 정국’에서 그가 열사들의 장례위원장을 연속으로 맡아 활동하며 학생과 시민들의 투쟁 중심에 서게 되자 형집행정지가 취소되어 재수감된 것이었다. 수감 직후 편지에서 늦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난 이번 다시 감옥에 들어오기까지 한 마흔 날 동안 행복과는 거리가 먼 슬픈 나날을 보냈다는 거 너 잘 알지? 어쩌면 한 달 동안에 열한 사람이나 맞아 죽고 몸에 불질러 죽고 할 수 있니? 그 장례식을 치러 주느라고 난 정신이 없었다. 그 슬픈 아버지,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붙들어 주느라고 난 제정신이 아니었단다.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손녀 문숙에게 쓴 답장 옥중편지 1991. 6. 14.)

한 달 동안 무려 열 한 사람! 4월26일 명지대 강경대 군이 백골단의 구타로 숨진 이후 5월 말까지 학생과 노동자 열 한 명이 분신이나 경찰 진압으로 사망한 것이었다(이 중 분신 1명은 생존). 강경대 열사 장례위원장을 맡은 늦봄은 이어서 5월 3일 분신한 천세용 열사, 5월 8일 분신한 김기설 열사, 5월 25일 사망한 김귀정 열사의 장례위원장을 맡아 6월 초까지 한 달여 동안 쉴 틈 없는 날을 보냈다. 강경대 열사는 사망 22일 만에, 김귀정 열사는 사망 18일 만에 장례식을 치렀는데, 그동안 재야는 여러 차례 규탄대회는 물론 책임자 처벌과 백골단 해체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 등을 전개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늦봄의 편지글을 짐작할 만하다.
 
 

1980년대부터 장례와 추도 맡고 추모시도 지어

늦봄은 분신 정국 시기뿐 아니라 이미 1980년대에도 민주화운동 열사들의 장례나 추도식을 이끈 대표적 재야인사였다. 1984년 박종만 노동 열사의 추도위원회 고문, 1985년 송광영 학생 열사의 영결식 추도 예배, 1986년 박영진 노동 열사의 장례식 설교, 1988년 조성만 학생 열사의 장례식 참석 등으로 열사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늦봄은 또한 시를 통해서도 열사들을 추모했다. 1986년~1987년에 쓴 김세진, 이동수, 박종만, 박선영, 김성애 열사의 추모시에서, 열사의 뜻과 함께 부모의 피맺힌 외침과 다짐을 그들 대신 토해 냈다.
 
 

“죄인 된 심정, 일흔 넘어 살아 있는 게 부끄러워”

 늦봄은 열사들의 분신과 희생을 막지 못한 책임에 괴로워하고 자책하는 심정을 드러냈다. 1991년 강경대 아버지에게 쓴 편지, 1986년 5월 20일 서울대 강연 도중 이동수 군이 투신한 다음 날 수감된 후 집으로 보낸 편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저는 꼭 죄인 된 심정으로 꽃 같은 젊은이들의 장례식을 치러주고 있었습니다. 그 어린 것들이, 그 꽃 같은 인생을 민족의 제단에 팍팍 아낌없이 바치는데, 일흔 넘도록 살아 있다는 게 그냥 부끄러울 뿐이었거든요” (경대 아버지에게 보낸 옥중편지 1991. 8. 7)
 
 “왜 요새 젊은 학생들은 그렇게 제 몸에 불을 지르고 죽지? 너 서울대학에 가거든 다시는 자결하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일러주어라.” 서울대학에 강연 간다니까, 어머님이 제게 신신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중략) 신문에 보니까 제가 과격파 두목이 되어 있는 걸 알고, 그 이야기부터 하다 보니 어머님의 부탁 말씀을 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후회막급이라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어머니께 보낸 옥중편지 1986. 6. 13.)
   
  
◇ 강경대 열사 장례식장에서 앉아있는 문익환 목사와 백기완 선생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열사들의 부모를 위로하고 살아갈 기운을 북돋우는 것도 늦봄의 일이었다. 교도소로 늦봄을 찾아온 열사들의 어머니를 껴안고 아픈 가슴을 나누었고, 실의에 빠진 채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부모에게 편지를 보내 용기를 불어넣어 주려 애를 썼다

 
성만이가 보고 싶으시면, 눈을 감고 기도하세요.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합장하고 눈을 감고만 있어도 성만의 기도 소리가 들릴 겁니다. 성만이가 무엇을 빌고 있는지는 환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송광영, 조성만 어머니의 교도소 방문 후, 조성만 부모에게 보낸 옥중편지 1990. 8. 12.)

경대 어머니, 경대 어머니 가슴만 찢어지는 게 아닙니다. (전)태일의 어머니는 찢어진 가슴을 안고 20년이나 노동자들을 제 아들 태일이 같이 사랑하며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가 되어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찢어진 가슴으로 피를 토하며 살아가는 어머니들이 경대 어머니 곁에 얼마나 많습니까? (강경대 어머니에게 보낸 옥중편지 1991. 7. 11.)
 
  ◇조성만 열사 장례식에서 하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문익환 목사와 정계 인사들
 
 
열사들의 연속된 죽음이 비난받을지라도, 선거 등 정치적 기대가 허물어져 열사들의 죽음이 헛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늦봄은 절대 좌절하지 않았다. 스스로 새로운 희망을 품고자 마음을 가다듬었고 열사들의 부모들에게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자고 다독였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싸움은 아홉 번을 져도, 열 번째 마지막 한 번을 이기는 쪽이 이기는 겁니다. 장준하의 돌베개를 읽어 보십시오.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도 (중략)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하여 제게도 용기를 주십시오. 용기를 … (강경대 부모에게 보낸 옥중 편지 1991. 7. 1.)

장준하는 독재자보다 먼저 죽었지만 결국 역사의 승자는 장준하였음을 되새긴 늦봄은, 민족의 두 횃불 장준하와 전태일이 앞서간 자랑스러운 행렬에 열사들이 당당히 서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열사들의 죽음 멈추려 방북 결심

 열사들의 죽음은 늦봄 자신에게 큰 채찍이 되었다. 1986년 김세진, 이재호에 이어 이동수 군이 불덩어리가 되어 떨어지는 걸 본 다음부터 줄곧,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자나 깨나 그걸 생각한 그는, 1988년 6월 10일 연세대 집회가 끝나고 남북 학생 예비회담이 열리는 판문점으로 가려는 학생들의 비장한 모습이 곤봉과 최루탄으로 좌절되는 걸 보면서, 죽음의 행렬을 막는 길이 여기에 있다며 방북을 결심했다(옥중편지. 1989. 6월~7월). 분단 상황을 핑계로 민주주의를 짓밟는 독재정권 아래에서, 통일 운동으로 민주화를 견인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통일이 민주이며 민주가 통일이라는 그의 굳은 신념을 실행에 옮기는 일이었다.

 늦봄은 전태일과 장준하와 젊은 열사들로부터 새로운 길을 얻었다. 그들은 늦봄을 일으켜 세우고 이끄는 힘이기도 했다. 1991년 분신 정국으로 여섯 번째 수감되었다가 1993년 3월 석방된 늦봄은 ‘민족민주열사범국민추모사업회’ 위원장을 맡았고, 추모사업회는 6월 10일~13일을 ‘6월항쟁 기념 및 민족민주열사 추모 기간’으로 선포하고 각종 기념-추모 행사를 열었다. 다음 해 1월 늦봄은 타계했고, 이후 매년 여러 형식의 추모행사들이 이어지고 있다.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 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월간 문익환_1월 <늦봄의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