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간 아내에게 진 빚

37년을 하루같이 살아온 당신에게

 

이달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63년 고개를 넘기는 달인 동시에 당신이 37년을 하루 같이 나의 마음의 안식처요 보이지 않는 기둥이 되어 준 결혼 37년을 맞이하는 달이군요.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가까운 것을 느끼고 있어요.

지난 6월 1일은 참으로 즐거웠소. 그 좋아하는 인절미를 많이 먹지 못해서 당신은 퍽 서운한가 보지만, 나는 그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한 시간 담소하는 즐거움이 너무 컸어요. 당신은 (정말 조금도 거짓말을 보태지 않고) 37 년 전보다 훨씬 더 충만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었소. 37년 동안 우리는 결코 늙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 나게 해주었소. 늙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해서 쑥쑥 자라고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정말 기뻤소. 이것이 모두 우리에게는 갚아도 갚아도 도저히 다 갚아 낼 수 없는 사랑의 빚이 아니겠소? 여기까지 썼는데, 구매 담당이 왔기에 딸기 한 근, 우유 하나, 치약 하나 주문하고 무인을 찍어 주었더니, 기막힌 시상이 떠오르는군요. 그동안 엄지손가락 지문이 다 없어지지 않나 걱정되도록 무인을 많이도 찍었는데, 요새는 그것이 모두 하찮은 나를 확인하는 무인이거든요. 그런 무인이 아니고, 민족이 통일되는 날, 당신의 눈에서 쏟아질 눈물로 이 손을 깨끗이 씻고 당신의 부드러운 가슴 한복판에 활활 불타오르는 무인을 꽉 찍고 가슴이 터져 죽고 싶다, 그런 심정을 읊어 보았소.  그런데 당신과 나와의 지난 37년은 몽땅 내가 당신에게 빚지는 생이었죠.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없었을 거라고 믿고 있소. 당신은 몹시도 신경이 가녀린 나를 부드럽게 감싸 주는 대지의 품이었다고나 할지?

지난번 접견 때도 말했지만, 파란 많은 민족의 63년 역사 속을 뚫고 걸어온 나의 생은 송두리째 사랑의 빚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구려. 나는 너무나 훌륭한 부모님에게서 몸과 마음을 받고 그 그늘에서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소. 너무나 좋은 스승들과 친구들, 형제들 사이에서 숨 쉬며 꿈을 키울 수 있었고. 게다가 당신 같은 짝을 만나 좋은 아들, 딸을 두고, 바우, 보라 같은 친손자, 문칠이 같은 외손까지 두고, 너무나 깨끗한 젊은이들과 가슴을 맞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예수에게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것도 배웠지요. 그리고 나의 마음을 깨끗하게, 튼튼하게, 아름답게 살찌워 주는 많은 사상가, 문인, 예술인들의 피땀 어린 업적들 또한 사랑의 빚이 아니겠소? 그러나 조금 있으면 배식이 될 콩밥 점심이 내 앞에 놓이기까지 애쓴 모든 사람의 손길을 거쳐서 오는 사랑의 빚을 나는 요즈음 더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그 갈퀴같이 굳어지고 터진 손길들 위에 나로서는 갚아 낼 길이 없는 사랑의 빚을 갚아 주십사고 목이 메어 기도하곤 하지요.

조 목사님은 지금 나의 생이 그 빚을 갚는 것이라고 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요. 이 겨레를 위한 나의 작은 고생은 이미 나에게 존경과 찬양으로 여러 갑절 되돌아왔으니까요. 빚만 더 진 셈이지요.  전주에서 얻은 시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기어이 여기서도 빚을 섬으로 지고 마는구나.’ 게다가 하느님은 나에게도 너무너무 큰 것을 계속해서 주시는군요. 오늘 아침에도 고린도 전서를 1장부터 11장까지 읽으면서 또 중요한 것을 깨달았어요. ‘너는 부름 받던 그때 그 상태로 있으라’고 권고한 바울의 말이 결코 소극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소. 요새는 ‘나의 신약성서’라는 책을 구상하고 있어요. 누가복음, 사도행전, 고린도서, 빌립보서로 이어지는. 정말 안(병무) 박사가 윤동주에 관한 책을 쓰라고 했었는데, 저번 날 동주의 ‘별똥 떨어질 때’라는 산문시를 읽다가 이제 나도 동주에 관해서 무언가 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소. 요가만 해도 그렇소. 약을 끊고 두 주일 만에 200-130에서 130-90으로 혈압이 완전 정상화되었을 뿐 아니라, 거의 한 달 동안 두통을 모르고 살게 되었구려. 그것뿐인 줄 아세요? 사흘 전에 요가를 하다가 갑자기 교도소가 고요해지는 것이 아니겠소? 그래서 가만히 살폈더니, 교도소는 달라진 것이 없었소. 달라진 것은 내 머리 뒤통수 속에서 40년 동안 나를 괴롭히던 소리가 멎은 것이었소.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요. 정말 하늘로 날 것 같은 기분이요. 이 일을 어떻게 하느님께 다 감사하겠소?   또 엄청난 빚을 하느님은 내게 지워주시는구려. 이런 걸 즐거운 비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소?  복음 – 기쁜 소식-이란 바로 이런 거죠. 그것이 우리의 생 구석구석에서 복음이 되어야 하는 거죠. 

방금 점심을 먹고 나와서 계속하는데, 먹은 밥이 살로 가서 건강, 행복, 목소리, 마음, 생각, 뜻, 보람 있는 삶이 되는 것이 모두 모두 복음이 아니겠소?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나의 빚, 내가 탕감받고 사는 사랑의 빚을 일만 달란트라고 하셨더군요. 거기 비해서 내가 용서해 주는 빚이란 기껏 일백 데나리온이라는 것이었소. 그것이 얼마만 한 차인가요? 현대 영어 번역(NEV) 성서는 한 달란트를 천 달러라고 번역했어요. 그때 로마의 화폐 가치를 오늘 미국의 돈으로 환산해서 번역한 거죠. 그런데 한 달란트가 몇 데나리온이냐면 육백 데나리온이오. 그러면 일백 데나리온은 대략 백오십 달러라고 보겠지요.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가 탕감받는 사랑의 빚은 천만 달러인데, 그것을 용서받고 살면서 백오십 달러 내게 빚진 사람을 용서 못 한대서야 너무 야박하고 각박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주기도문의 죄의 용서를 비는 대목이 이해되는군요. 내가 백오십 달러 용서해 주었으니 나의 천만 달러 빚을 용서해 달라고 빌 수 있겠어요? “용서받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줄 알아 티끌 같은 빚이라도 용서해 보았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겠어요? 땅 위에서 맺힌 매듭들을 용서로써 풀면서 살 때,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거죠.

오늘은 목요일, 하루 종일 용서를 빌면서 보내는 날, 우리 속의 모든 매듭을 풀고 몸과 마음이 하나로 어울리는 기쁨을 주십사고 비는 날이오. 이렇게 우리의 나날은 천만 달러 빚을 지면서 백오십 달러 빚을 벗겨 주면서 용서하는 즐거움, 서로 푸는 즐거움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다만 감사할 뿐이지요. 또 한 해 그런 기쁨을 뿌리면서 살아 봅시다. 정말 그날 뵈니까 아버님이 좀 부으신 것 같던데, 자세한 건강 진단을 받으셨으면.

성근이, 채원이 너무 말랐어. 나한테서 요가를 배워야 할 터인데. 은숙에게 써야 하겠기 때문에 오늘은 이만.

사랑

은숙에게

 

너희가 보낸 생일 카드와 함께 소식을 듣고 기뻤다. ‘극적 진실’을 노래하도록 지도하는 이에게 한 번 레슨받고 노래를 못 부르게 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정말 기뻤다. 1. 네가 이번에 그 경지를 뚫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개바윗등에 갔다 오는 격이기 때문 (좀 심한 말일까? 용서) 2. 한 번 레슨에 목이 막힐 정도 은숙이는 비상한 예술적인 감수성의 소유자라는 것이 아니겠어? 만세!  이제 은숙이는 ‘내가 노래를 부른다’는 생각을 깨끗이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예술의 신 뮤즈가 은숙의 속에서 은숙의 목청으로 노래 부르게 되어야 한다. 예수가 “내가 하느님 안에, 하느님이 내 안에”라는 말씀을 하셨지. 그런데 은숙의 하느님은 뮤즈인 거야. 기도하라고. 예술이 진정 예술이 되려면 그런 종교적인 경지에 깊이 들어가야 해.

예수님의 하느님은 ‘사랑’이었어. 나는 지금 그 사랑의 하느님을 ‘슬픔’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그런데 사랑은 아름다운 거지. 철학자들의 하느님은 ‘참’이고 플라톤의 하느님은 ‘선’이었지만, 예술가의 하느님은 ‘아름다움’ 곧 뮤즈인 거지. 사랑도, 참도, 선도 아름다운 거야.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이요, 참이요, 선이요, 아름다움인 거야.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이요 참이요 선이기 때문에 아름다우신 거야. 멋진 분이시라는 말이지. 사랑과 참과 선과 아름다움의 근원이요 창조자이신 거지. 그 하느님이 은숙의 속에서 은숙의 목청으로 노래를 부르시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야. 이제 정말 그 기막히고 그윽하고 깊은 하느님의 품에 어린애처럼 푹 안기라고. 그 하느님이 온몸에 넘치시도록 기도하라고.

이것을 종교에서는 죽었다가 다시 나는 거라고 한다. 예술가도 반드시 그런 경지를 지나야 하는 게 아닐까? 호근이는 ‘극적인 진실’이라고 했더군. ‘극적인 진실’이 무얼까? 나는 그걸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의 기원과 본질이 슬픔이 아닐까? 그래서 드라마의 본령은 ‘비극’인 거겠지. 희극도 따지고 보면 그 속엔 몸을 가누기 힘든 슬픔이 있는 것이 아닐까? 드라마 작가들은 왜 비극을 쓰는 것일까?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그 무지무지한 고독과 절망 속을 절망하지 않고 몸부림치며 헤엄쳐 나가는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슬픔으로 표현되는 사랑에서 사람은 위안을, 용기를, 희망을, 기쁨을 찾는 것이 아니겠어? 나는 하느님을 슬픔으로 경험하면서 비로소 그의 사랑을 가슴 뭉클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지금 은숙이는 그걸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은숙이 예술의 출발점이 된다고 나는 굳게 믿어요.

그 슬픔이 예술로 표현될 때, 그것은 서정이 되는 거 아니겠어? 나는 그 대표적인 예를 한국에서는 한용운, 윤동주에게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두 분의 시를 읽으면서 슬픔의 서정을 키우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은숙이는 너무 성량이 커서 어지간한 서정으로는 제어하기 힘들 거라고 믿어. 그렇기 때문에 음악 수련과 함께 시를 많이많이 읽어야 할 거라고 믿어. 나는 믿어. 은숙이에게 그 목소리를 주신 하느님이 은숙의 속에 들어가셔서 훌륭한 노래를 불러서 인간의 슬픔을 쓰다듬어 주시고 기쁨을 주실 거라고. 이제 어린애로서 새로 시작해요. 나는 그동안 요가를 해왔는데 혈압은 200-130까지 올라갔었어. 그래서 원점으로 돌아가서 가장 기본적인 데서부터 다시 차분히 시작했더니 두 주일 만에 고혈압뿐만 아니라 40년 고생하던 머릿속 소리도 이겨 낼 수 있었어. 바로 그거야. 은숙의 목소리에서 하느님의 노래가 울려 퍼질 날을 기다리면서…….

 

당신에게

은숙에게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윤동주의 시집, 또 문병란 시선, 이종욱 시선 (창비)를 보내 주시오. 나의 시집도 심심하면 읽게 보내주시오. 

 

결혼 37주년을 맞아 아내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성악가인 며느리에게 예술의 경지에 이르러면 종교의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