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맏며느리 정은숙 성악가(2) (2023년 10월호)

[(1)에서 이어짐]

“늦봄家 며느리라 힘들다는 생각 한 번도 안 해”

목사님을 특별한 분으로 의식하지 않아…“이렇게 사는게 정상이다”라며 생활
 
 
◇ 통일의 집 마당에서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정은숙 씨 
 
 

 가족 

한 달에 한 번, 온가족이 모이는 날

▶가족 분위기는 어땠는지
아버님 살아계실 때는 한 달에 한 번씩은 만났어요. 자식이든 손자손녀들이건 생일이 있으니까요. 며느리들은 서로 허물없이 친구처럼 지냈어요. 둘째 며느리도 저처럼 성악가인데 참 음식을 잘하고 빨리해서 언제나 제일 좋은 걸 해왔어요. 하지만 생일이어도 정치 이야기를 많이 했지요. 며느리 셋이 앉아서 “우리는 아이들 생일도 정치판이다. 참 재미없다.” 하면서 웃기도 했어요. 서로 참 잘 지냈어요.

▶할머님과의 추억도 있나요
저는 저녁에 할 일 없으면 올라와서 할머니, 어머니, 저 이렇게 셋이서 TV를 봤는데 우리는 뉴스를 잘 봤어요. 어머니가 안 계시면 할머니가 다 하셨는데 할머니가 이북식 반찬 같은 것도 해주셨어요. 한번은 집에서 피를 잔뜩 넣고 만드는 순대도 해주셨던 게 생각나고 함경도식 돼지고기 등 음식을 다 너무나 잘하셨어요.

그리고 할머니는 언제든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제가 바빴잖아요. 그런데 할머니가 계속 말씀하시면 나가야 하는데도 일어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는 일어나야 하는데… 하곤 했었죠. 우리들한테 참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근데 저는 그걸 계속 잘 들어드리지 못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나온 할머니의 회고록을 보면 여기도 저기도 제가 할머니께 들었던 얘기들이더라고요(문익환의 장녀 문영금과 문동환의 장녀 문영미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들의 기록과 이야기를 엮어 문재린 김신묵 회고록인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을 펴냈다.) 
 
◇  문 씨 3대 며느리 정은숙, 김신묵, 박용길. 박용길은 편지(1979. 3. 1)에서 남편들이 집을 떠나 있는 상황을 빗대어 셋을 '삼대 생과부'라 일컫기도 했다.
 
  

할머니 김신묵의 사랑 듬뿍 받아

▶할머님과 각별한듯 한데
할머니가 제일 예뻐해 주셨어요. 바우가 한 살 반 때 제가 애를 놔두고 외국으로 유학을 가야 했는데 어머니가 너무 바쁘셔서 할머니께 아이를 맡겼었어요. 할머니가 늘 안아주고 보살펴주셨지요. 한 살 반 짜리였던 바우는 제가 떠나자마자 할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더라구요. 
우리는 1년만 있다가 올 줄 알고 나갔는데 나가서 보니 그럴 수가 없었어요. 남편과 저는 이탈리아, 영국 등에 떨어져서 살았는데 밤에 한국에 공중전화로 전화를 하면 저는 주로 할머니와 바우 얘기를 했죠. 그때를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감옥에서 나오는 날도 공연장 찾은 늦봄

▶박용길 장로님과는 어떻게 지냈나
 어머님은 제 자료들을 잘 모아 주시고 정말 제 연주에 한 번도 안 빠지고 오셨고 아버님도 감옥에서 나오시는 날 밤에 공연장으로 바로 오시기도 하고 그랬어요. 저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라고 잔소리하고 그런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시어머니인지 어머니인지 모르고 그냥 우리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살면서 조금도 나쁜 말을 들은 적도 없었고 음식도 우리가 먹던 거 그대로 드려도 다 좋다고 그대로 받으시던 분이에요. 이웃해서 살 때 혼자 계시면 식사는 주로 우리 집에 와서 하셨어요. 서툴게 한 반찬을 드려도 다 좋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시어머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정은숙 독창회에서 박용길 장로와 함께 

 
▶문익환 목사가 유독 편지를 많이 보내셨던데
아버님 편지에 제 이름이 많을 거예요. 아버님이 저한테 편지를 많이 쓰셨거든요. 전 사실 편지를 그때만 읽고 이후로는 잘 안 읽었어요. 지금 편지를 다시 읽으니까 그때 생각이 나네요. 아버님은 노래가 좀 더 감정이 풍부해야 된다고 하셨고 다른 사람들은 다 감정이 풍부하다고 그러는데도 아버님 보시기에는 좀 부족하다 그런 얘기도 많이 하시고 그랬어요.
 
▶편지 보내주시는 시아버지는 참 각별할 것 같아요
아버님은 정말 시아버지라기보다는 저에겐 그분에 대해 큰 믿음이 언제나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시아버지 얘기하면 가끔 가슴이 아프고 그래요. 마지막 돌아가시는 날(1994. 1. 18)도 제가 있었거든요. 어머니하고 저하고 둘이 있었는데 마지막에 화장실에 갔다 오시더니 “이제는 조금 낫다” 그러시더니 바로 돌아가셨어요. 심근경색이라고 하더라구요. 일찍 병원에 갔었다면 나을 수 있었을텐데… 제 남편도 똑같았어요. 얼굴이 새카매졌길래 병원에 가야되겠다 했었는데…. 저는 다음 날 독창을 하기로 되어 있어서 그 준비에 바빴고 아침에 일어나니 그렇게 되었죠(2001. 5. 17).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병으로 가셨다는 게 저는 정말 지금도 가슴이 아픈 거죠. 아버님도 그랬고 남편도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남편과 나 

◇통일의 집 앞마당에서 박용길과 함께한 정은숙-문호근 부부 
 

문호근만 한 예술감독은 없다

▶돌아가시던 날에 너무 놀랐을 것 같은데
그때는 말을 뭐라고 했는지도 모르겠고 제일 먼저 영금이(문익환 목사의 딸)에게 전화하고 그 다음에는 무조건 병원으로 달려갔고 병원에서 끝났다는 얘기를 듣고 문성근(문익환 목사의 막내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죠. 근데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막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죠. “죽었단 말이야”라고…. 쉰넷이었으니 너무 젊은 나이였어요. 

▶문호근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나
아버님이 너무나 큰 분이셔서 남편은 좀 작아진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남편 친구들이 “아버지가 문익환 목사여서 참 너는 안 좋겠다” 그 말을 많이 했어요. 이 사람은 자기가 뭐를 새로 만들어서 발표하려고 해도 아무래도 아버님도 계시고 그래서 어려웠죠. 제가 생각했을 때 예술감독으로서 문호근 선생만큼 일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에 이 사람은 예술감독을 하면서 또 앙드레 지드 작품 연극을 연출하면서 너무 골몰했죠.

▶문호근 선생님의 기록들은
저는 남편이 없으니 모든 게 소용없다고 생각해서 잘 신경쓰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남편의 활동(한국음악극연구소, 서울시립오페라단 기획위원, 한국민족예술총연합(민예총) 음악분과위원장, 예술의전당 공연예술감독 등)이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역사로 잘 남겨 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집 며느리는 그 집뿐, 인생의 길에 정답이란 게 있을까?

▶문익환 목사의 며느리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
우리 집은 불교였어요. 독실하진 않았지만. 근데 우리 엄마가 굉장히 자상했어요. 제가 장녀고 오빠만 있는데 제가 서울에서 좀 활약할 때 돌아가셨어요. 여기 와서 가족들이 이렇게 지내는 걸 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이런 가정에서만 자라면 힘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참 좋은 건 몇 달 안 됐잖아요. 그다음에는 전부 다 각자 괴로움이 있으면서도 우리는 모이기만 하면 그냥 웃고 떠들고 그냥 다 그렇게 지냈죠. 저는 그걸 그대로 인정했어요. 이런 가족에서 또 다른 힘이 커 나가는게 아닌가. 그래서 저는 오히려 좋았다고 생각해요.

이런 인터뷰를 정말 10년 만에 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하다 보니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 제 이야기만을 가지고 하는 것도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운동을 하던 어머니들은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 집 며느리는 그 집뿐인 거죠. 항상 거기서 같이 일하고 언제든지 전화를 받고 그랬는데 가만히 생각하면 어머니가 원체 잘 하셨지만 저도 참 그런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제가 국립오페라단 일을 끝냈을 때 정말 일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어요. 하지만 스스로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죠. 조금 더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늘 있었어요. 이렇게 얘기하면 주위에선 일을 많이 했으니 이젠 그냥 좀 놀라고 하지요. 근데 저는 놀 일이 없는 거예요. 저는 아직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다 안 한 것 같아요.
 
 
※ 정은숙은-
1946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1968년 동아 콩쿠르에 입상하였고 「김자경 오페라단」의 〈아이다〉로 데뷔했다. 수많은 오페라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했으며 국내외 오케스트라들과 협연했다. 1975년 10월에 문익환의 맏아들 문호근과 결혼하면서 4대가 함께 사는 집의 일원이 되었다. 세종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오랫동안 일했으며 여성 최초로 국립오페라단 단장(2002~2008)을 역임했고 성남문화재단 4대 대표이사(2014~2017) 등 문화예술기관 단체장으로 일하면서 한국 오페라의 국제화, 대중화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 문익환⋅박용길의 편지 속에서 찾아본 맏며느리 정은숙

늦봄문익환아카이브에 있는 늦봄⋅봄길의 편지 컬렉션에는 정은숙이 자주 등장한다. 문익환이 쓴 옥중편지 중 맏며느리 ‘은숙’이 수신자로 되어 있는 것만 19통이고 “은숙”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약 177건의 편지가 검색된다. 다 부부가 주고 받은 편지라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에 관한 내용이 단골 소재기도 하지만 집안의 일상 속 모습 말고도 그녀의 일에 관한 관심과 조언, 또 그녀가 어디에서 무슨 공연을 했고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처럼 공연 활동의 근황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은숙에게
…..은숙의 코롤라튜라 발성을 듣고 싶구나. 한국식, 이탈리아식, 영국식 발성이 정은숙식 발성으로 빛을 볼 날이 오래지 않으리라 믿어 기대를 건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기대한다는 것이 마음에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되지… 그저 노래를 사랑하고 제 성대에서 울려 나가는 노래를 즐기는 열린 마음만으로! .. 조바심은 모든 일에 있어서 금물 중의 금물이지. 은숙의 예술에서 기쁨을 찾아야 할 슬픈 사람들이 많아. 그런데 제가 즐기지 않는 음악이 남을 기쁘게 할 수는 없거든. 은숙의 은숙이다움은 그 느긋한 데 있는 것이 아닐까?(문익환, 1981. 2. 13)
 
은숙에게
…. ‘극적 진실’을 노래하도록 지도하는 이에게 한 번 레슨받고 노래를 못 부르게 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정말 기뻤다. 1. 네가 이번에 그 경지를 뚫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대바윗등에 갔다 오는 격이기 때문 (좀 심한 말일까? 용서) 2. 한 번 레슨에 목이 막힐 정도 은숙이는 비상한 예술적인 감수성의 소유자라는 것이 아니겠어? 만세! ……

당신에게
은숙에게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윤동주의 시집, 또 문병란 시선, 이종욱 시선 (창비)를 보내 주시오. 나의 시집도 심심하면 읽게 보내주시오(문익환, 1981. 6. 11).
 
 

◇박용길은 정은숙, 안치환이 축가를 맡은 출판기념회 행사지 한켠에 문익환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감옥으로 보냈다(1990. 8. 9)


<글: 아키비스트 지노>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와 함께 걷고 있는 아키비스트. 늦봄과 봄길의 기록을 아끼고 그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

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