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맏며느리 정은숙 성악가(1) (2023년 10월호)

“늦봄의 며느리라 참 좋았다” 

  
예술을 사랑한 남편, 순탄했던 결혼식, 그리고 누구보다 자상한 시부모님… 하지만 신혼 5개월의 정은숙에게 잔잔한 일상을 삼켜버리는 사건이 터져버립니다. 바로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시아버지, 시어머니, 작은아버지에 이어 남편까지 줄줄이 잡혀가자 남겨진 새댁은 그날부터 ‘생전 가보지 못한’ 험한 곳을 마다않고 다녀야했습니다. 성악을 전공한 정통 오페라가수가 거리에서 ‘데모송’을 불러야했고, 시아버지의 속옷을 싸들고 현장에 ‘잠입’하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물었습니다. “그동안 힘들지 않았냐”고, “늦봄의 며느리라 힘들지 않았냐”고.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좋았어요. 오히려 참 좋았어요.” 늦봄의 며느리란 숙명을 짊어지고 험난한 세월을 견뎌온 그녀는 무엇이 그렇게 좋았을까요? <편집장>
 
 ◇통일의 집 앞마당에서 시부모인 늦봄과 봄길의 사진을 뒤로하고 포즈를 취한 맏며느리 정은숙.
 
 

“늦봄이 워낙 컸잖아요.” 

시아버지 문익환 목사를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10월 월간문익환이 만난 인물은 바로 문익환 목사의 맏며느리 정은숙이다. 그녀는 성악가이자 문화예술기관단체장 출신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문익환 목사의 맏며느리이자 문익환의 집과 작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 살았던 과거에 주목하고 싶었다. 예술인의 정체성을 가진 한 여성이 민주화운동 가문의 맏며느리로 살았던 경험을 직접 듣고자 인터뷰를 요청했다. 늦더위가 여전했던 지난 9월 7일 목요일 오후, “이젠 옛일은 다 잊어버렸다”며 걱정하는 그녀를 위해 기억을 떠올릴 만한 기록 몇 가지를 아카이브에서 찾아 통일의 집에서 만났다. “옛날 것이 너무 많네요. 이것도 참 옛날 건데... 나한테 없는 것도 있고, 이렇게 젊을 때 사진도 있네.”라며 반가워한다. 그렇게 통일의 집 ‘기도방’에 숨죽여 앉은 속에서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글. 아키비스트 지노>. 
 
 

 결혼 

오페라밖에 몰랐던 젊은 성악가

▶남편 문호근과 어떻게 사귀게 되셨나요
1970년에 처음 봤고 계속 만나기는 했지만… 단지 같은 작업을 하다 보니 만나게 된 관계였죠. 남편은 그때 김자경 오페라단에서 〈아이다〉 조연출이었는데 그때는 아직 학생이었어요. 첫인상이 굉장히 수수하고 학생 같았어요. 나이는 같았지만 그때 저는 벌써 대학원을 졸업했었고 그 사람은 학생이었죠. 당시 오현명 선생님이 오페라 연출이셨는데 그 사람을 좋아하셔서, 남편은 늘 오현명 선생님을 따라다녔어요. 1975년 6월쯤에 오페라 〈토스카〉를 하면서 다시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조연출이었는데 제가 역할이 처음이라 연기가 별로 시원찮다 싶은지 따로 불러 이것저것 가르쳐주려고 했어요. 더 일찍 오라길래 당시 저도 학교에 나가던 때라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30분 전에 가서 따로 좀 배우고 그랬죠. 그때 저는 오페라에 정말 독이 올랐기 때문에 이걸 잘해야 된다는 생각만 했고, 그 사람을 남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너무 자연스럽게 결혼하게 된 거 같아요. 스물 아홉이었는데 제가 우리 동기들 중 제일 나이가 많은 신부였어요. 그때 당시로는 참 늦게 한 편이었죠. 

 

결혼식 다음날도 바로 오페라 연습

▶시부모님을 처음 뵌 게 언제죠
여름쯤에 집에 놀러 갔었는데 그때는 성경 번역하실 때였으니깐 어머님, 아버님 다 여행가시고 안 계셔서 못 뵈었죠. 시부모님을 직접 뵌 건 결혼식을 하기 2~3주 전이었던 것 같아요. 처음 뵈었어도 두 분 다 어렵지 않았고 저에게 참 잘해주셨어요. 아마 ‘우리집 사람이다’ 이런 마음을 그때 가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도 별로 어렵게 대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모든 게 빠르고 또 굉장히 순탄하게 진행이 됐어요. 1975년 10월 4일에 결혼을 했는데 2주 전에 결혼식 날짜를 정했어요. 그렇게 빨리 정한 것은 그날이 아니면 우리가 결혼을 못할 것 같았거든요. 오페라를 하면 반은 음악 연습을 하고 나머지 반은 액팅 들어가니까 사이에 좀 쉬었죠. 그래서 2~3일 쉬는 중에 결혼식을 하고 다음 날에 바로 연습장에 나갔어요.
 
 
◇ 통일의 집 기도방에서 기억을 되짚으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정은숙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결혼하자마자 시댁에 들어와

▶결혼하고는 어디서 살았나
1975년 10월에 결혼해서 이 집으로 바로 그냥 들어왔어요. 저 방에서 살았죠(기도방 맞은 편에 있는 ‘아들방’을 가리켰다). 몇 달을 살다가 제가 1~2월쯤엔가 학교에 아침 9시에 출근을 해야 되는 바람에 새 학기에 맞춰서 학교 앞으로 이사를 나갔어요. 3년쯤 뒤에 아기를 갖게 되면서 이 앞집을 사서 다시 들어온 거예요. 그때부터는 바로 앞집에서 계속 살았죠. 할머니(문익환의 모친 김신묵 여사)가 캐나다에 왔다갔다 하셨지만 할머니까지 다 함께 4대가 살았죠. 앞집이지만 완전히 한 세대처럼 같이 살았어요.
 
 

대문열고 살아…도둑 들기도

▶가깝게 살아서 어려웠던 점은
그때는 결혼하면 으레 시집으로 들어가는 걸로 생각해서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어요. 양쪽 집이 다 대문을 열어놓고 살았지요. 그러다가 한번은 도둑을 크게 맞기도 했어요. 밤 11시가 다 됐는데 소리가 나서 “아버님이세요? 어머님이세요?”이랬는데 알고보니 도둑이 들어온 거예요. 

 

당시 늦봄은 보통 아버지의 모습

▶문 목사님은 어땠나요 
아버님은 목사님이시고 그래서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고 아침도 같이 하고 그랬죠. 가족들한테는 보통 아버지의 모습이었어요. 워낙 밖에선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사셨지만 집 안에 들어오면 우리한테는 그냥 평범한 아버지같이 그렇게 지냈죠. 사실 시부모님이니깐 어려운 거지만 우리에게 할 일을 못 한다 하신다던지 그런 일 없이 다들 좋게 대해주셨어요.
 
 

결혼 5개월 만에 가족들 잡혀가

▶3.1민주구국선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깜짝 놀라지 않았는지
별로 놀라지는 않았어요. 저는 아버님이 성경 번역을 하고 계셨지만 진보 편이라고 생각했었어요. “3.1 사건”으로 시부모님과 작은아버님(문동환 박사), 남편 등 식구들이 다 잡혀가고 저하고 시동생들만 남았었지요. 남편은 가면서 제 쉐타를 하나 가져갔었던 게 생각나요. 그때가 우리가 결혼한 지 5개월 정도밖에 안 됐을 때니까… 그 전날, 남편이 잠을 자러 방에 들어오지 않고 아버지하고 타이핑하고 일을 했는데 그저 예전처럼 심부름하는줄 알았지요. 서로 너무 바쁘기도 했고 아버님이 뭘 하셨는지 그땐 몰랐죠. 그 일이 있고 나서야 알았어요. 다들 잡혀가고 일주일 동안 저는 낮에는 일해야 하니 주로 밤에 이종옥 사모님(이해동 목사 부인)을 내내 따라 다녔어요. ‘언제 나올지는 모르는 거지만 식구들을 한꺼번에 그렇게 몽땅 잡아넣지는 않을거다’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요. 어머니하고 남편은 일주일밖에 안 있었어요.
  
  

 운동가의 며느리 

통제된 학교에 당당히 들어가

▶특별히 기억에 남으시는 일은
저는 저만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는 그런 데를 들어갔었어요. 먹을 거 입을 거를 차 트렁크에 싣고 가서 심부름을 한 거죠. 경희대학교로 기억하는데 8월 15일에 사람들이 다 모였을 때 대학이 교문을 폐쇄해서 차를 안 들여보냈거든요(정은숙이 기억하는 8월 15일은 1985년으로 추측된다. 당시 경희대는 8월 13일 긴급 교무회의를 열고 학원안정법 반대시위에 참가하려는 타교생과 운동권 학생의 출입을 막기 위해 13일부터 15일까지 교문을 통제했다. 동아일보 1985. 8. 13 참고). 그때 저는 누구 교수 만나러 왔다 그러고 들어갔었어요. 사실 트렁크를 보자고 그럴 줄 알았거든요. 학교 전체가 그런 분위기니깐. 근데 그냥 쑥 자연스럽게 들어갔어요. 오페라 연습을 하러 가면 옷도 잘 입어야 했고.. 저는 학교 갈 때 입는 옷을 입었잖아요. 그때 아버님은 학교에서 며칠을 샜을 거예요. 8월 15일이면 오죽 더워요. 그러니깐 갈아입을 옷을 한 보따리 가지고 가서 아버님 헌 옷은 가져오고 새 옷을 꺼내놓고 그랬죠. 음식 같은 것도 제가 여기저기 사서 떡 같이 밥이 될만한 것을 싸가지고 들어갔어요. 그때의 일을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이니까 별로 어려움 없이 다 했던 거 같아요. 

▶힘들지 않으셨는지
현장에 잠입할 때는 힘들었겠지만 지금 생각하니 힘든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 복장이 자유롭지가 않아서 제 차에 무대의상이나 출근복 등 옷들을 구비해놓고 그때그때 맞춰 옷을 갈아입고 갔어요. 몇 년 동안을 그랬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이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한 적 없고 힘들었다는 생각도 지금은 없어요. 그때 나는 (약속한 대로) 그 시간 내에 간다는 게 중요했어요.

▶그 밖에 또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다행히 제가 연주 있는 날은 별로 그런 일이 없었지만 가끔 밤늦게 새벽 1시에 아버님이 어디 가신다 그러면 제가 차를 몰고 모셔다드리러 나갈 때도 있고 그랬죠.


늦봄을 특별한 분으로 크게 의식하지 않아

▶평범한 집안의 며느리였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 적 없나
저는 문익환 목사님이 특별하신 분이라는 점을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저로서는 ‘학교(근무하던 대학)에서는 나를 택해서 굉장히 힘들거다’ 그런 생각은 했을지 모르지만 스스로는 ‘이렇게 사는 게 정상이지 무슨 뭐 다른 생활이 있을까’ 그런 생각은 했어요. 저는 제가 해야 되는 거라면 힘들어도 해내야 된다고 늘 생각했어요.

▶그래도 쉬운 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언젠가… 제 친구들이 그런 적이 있어요. “야 너희 집안이 그런 데 넌 정말로 좋으냐? 모르는 사람들이 막 들어와서 울고불고 하는 데도 너는 그게 좋으냐”라고요. 한참 우리가 시끄러울 때니깐 그런 질문을 할 만도 했죠. 저는, “당연히 그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집안이 이렇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대답해주었어요. 저는 사실 제 생활도 그렇거든요. 일을 할 때도 제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걸 해야 하니깐. 우리 집안은 한 가족이라고 늘 생각했어요. 자기 식구끼리의 시간이 없어서 한두 번 아쉬웠던 적도 있었을까요? 사실 그런 걸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아요. 
 
 
◇ 정은숙이 출연했던 공연 프로그램들 1972년부터 2000년대까지 일부만이 남아있다 
 

오페라 가수가 민중가요를 부를 땐…

▶오페라를 하면서 무대에서 민중가요를 부르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처음에 불렀던 노래가 뭐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첫 무대를 서게 되었을 때 들었던 생각만큼은 또렷하죠. 전날 밤인가 ‘내일 내가 이 노래를 불러야 되는데 어떡하지. 그 노래를 불러도 될까?’ 그랬어요. 하지만 거기 모인 사람은 다 그 노래밖에 모르니까요. 

▶사랑받았던 노래는
그때는 “비목”, “직녀에게” 같은 노래들을 자주 불렀지요. “시편 23편”도 교인을 막론하고 다들 좋아하는 곡이라 제가 정말 많이 불렀던 것 같아요. 저는 특히 사랑받는 민중가요들을 좀 예술적으로 갖춰서 부르는 것에 비중을 뒀던 것 같아요. 제가 제일 좋아했던 노래는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김진경 시, 윤민석 작곡)” 인데 저는 민중가요를 가곡에 맞게 불렀어요. 

▶어떤 곳에서 불렀나요
불러주시는 곳이 정말 많았어요. 민주화와 관련된 많은 행사 때나 또 교회에서도 많이 불렀지요. 모든 순간이 다 보람됐던 거 같아요. 지방도 많이 다녔는데 내비게이션도 없을 때니까 운전도 더 어려웠고 옷도 챙겨야 해서 좀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노래도 어지간히 했어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제가 이 집안의 며느리여서 이기도 하지만 저도 원래 그런 성향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전 마산이 고향이거든요. 마산은 본래 야당 도시였잖아요. 부마사태도 있었고. 그때의 마음이 아직도 있는 것 같아요. 

김대중 정부 때 광화문에서 남편이 연출했던 행사가 있었는데 오현명 선생님도 “한강”이라는 노래를 부르셨지요. 저도 그때 한복을 입고 나가서 오현명 선생님과 이중창을 했었어요. 그게 기억이 남아요(이 행사는 2000년 광복 55돌과 6·15남북공동선언을 기념하는 행사 중의 하나로 열렸던 “통일맞이대동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예술의전당 예술감독이었던 문호근이 광화문 특설무대 행사의 총기획연출을 맡았었다).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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