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문익환_<늦봄의 서재>

    이호철의 『南風北風(남풍북풍)』 (2025년 5월호)

    늦봄, “분단의 격정적인 면이 가혹하게 그려져 있다”          늦봄은 1986년 7월 11일, 4차 투옥 중 은숙, 호근, 봄길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중 봄길에게 보낸 편지에 이호철의 『南風北風』을 읽은 감상을 전한다. 분단이 가져다준 격정적인 면이 가혹하게 그려져 있다며 재미있게 읽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분단문제를 다룬 작품이 있는 줄로 아는데 읽어보고 싶어졌다고 한다. 이는 이호철의 다른 작품을 지칭하는 듯하다. 이호철은 6·25전쟁에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히는 등 직접 겪은 전쟁, 분단의 아픔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통일문학, 분단문학의 대표자로 꼽히고 있다. 이호철은 작품 활동 외에도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재야 민주화운동에 참가했다. 1973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시국 성명, 1974년 ‘문인 간첩단 사건’,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호철의 『南風北風』은 북에서 6·25 때 같은 학교에 다니다 군대에 입대해 남으로 내려온 두 사람의 다른 삶을 조명한다. 한 사람은 고지식하게 알뜰히 살아가다 사기당한다. 또 한 사람은 야바위 놀음 같은 무역중개업을 한다며 여기저기 빚에 둘러싸여 미국으로 도피한다. 두 사람의 질곡의 삶은 6·25 이후 남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는 실향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같은 책 수록된 선우휘 작품은 “퇴폐적 허무주의” 늦봄은 같은 책에 수록된 선우휘의 작품에 대해선 “퇴폐적인 허무주의로군요. 그의 민족을 보는 눈이 그랬으니…”라고 했다. 말줄임표에 늦봄의 생각이 다 들어있다고 본다. 이 책은 삼성당에서 발간한 『한국문학전집26』으로 이호철 『深淺圖(심천도)』/『南風北風』, 선우휘 『깃발 없는 기수』 외 3편이 수록됐다.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늦봄의 서재>

    198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과 한승원의 『해변의 길손』 (2025년 4월호)

    일제강점기부터 5·18까지 시대의 아픔 그려        ▲늦봄, 호근-성근 두 아들에게 무대에 올릴 것 제안하기도 늦봄은 1989년 7월 5일(통일염원 45년 7월 5일) 봄길에게 2통의 편지를 보낸다. 한 통은 강희남 목사님에 대한 존경을 담은 글이다. 또 한 통은 문학사상사가 주는 제1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1988년)을 읽은 소회를 전하고 있다. 상을 받은 작품이 예술의 영원한 주제인 남녀의 사랑을 다룬 작품은 하나도 없고, 거의 분단의 비애를 다룬 작품이라며 이제 비극의 바늘 끝에서 누리는 사랑의 의미를 찾아내는 작품이 창조되어야 할 시기가 되었다며 강종건과 이문희, 이철과 민향숙의 행복한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어 “호근이, 성근이도 이런 작품을 무대에 올려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며 우선 본상 수상작인 한승원의 『해변의 길손』을 제안한다.  한승원의 『해변의 길손』은 일제강점기, 6ㆍ25, 월남전, 5.18까지 이어지는 3대의 가족사를 아우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왜놈 앞잡이 노릇 하는 주인공 황두표를 비롯해 남로당으로 활동하다 행방불명된 똑똑한 동생이 등장한다. 그리고 돈을 벌러 가겠다며 떠난 월남전에서 죽음으로 돌아온 큰아들, 광주에서 이발소를 하다 5.18 때 총에 맞아 죽어 망월동에 묻힌 둘째 아들 등 시대의 아픔을 모조리 떠안은 채 가슴 치며 살아가는 슬픈 현실을 그려냈다.  『해변의 길손』은 늦봄이 말한 비극의 바늘 끝에서 누리는 사랑을 찾아내는 작품과는 괴리가 있지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두 아들에게 무대에 올릴 것을 제안할 정도였으니···. ※한승원은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부친이다.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나와 늦봄>

    박영옥 편집위원 (2025년 3월호)

    “늦봄과 동주, 두 분이 나의 시간 안으로 들어왔다”  박영옥 『월간 문익환』 편집위원      ◇윤동주 80주기를 맞아 찾아간 도쿄에서 고 정경모 선생의 장남 정강헌 씨를 만나 함께 사진을 찍었다.      늦봄과의 인연을 맺어준 윤동주 문익환 목사님(늦봄)에 대한 기억은 TV 속에서, 신문에서, 잡지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모습으로만 알았던 것 같다. 목사님이 가까이 다가온 건 8년 전 윤동주를 찾아 떠난 용정 여행에서부터 시작이다. 학교 도서관을 퇴직 후 2017년 ‘동북3성 조선족학교 도서관 운영 교육연수’ 진행팀에 합류하면서 가본 ‘연변’. 그곳은 멀리 있는 곳이 아니었다. 우리 언어를 쓰는 한민족임을 피부로 느꼈다.  그곳에서 윤동주 생가를 찾아 명동촌을 가고, 윤동주와 관련된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늦봄을 알게 되었다. 늦봄이 쓴 윤동주에 관한 글을 찾아 읽고, 윤동주가 늦봄에게 어느 만큼의 크기로 존재하는 사람인지 알면서 부럽기도 했다.  그리고 22년 7월부터 문익환 목사님 아카이브 수장고에서 시집 내용을 교정하는 봉사를 시작했다. 사계절에서 1999년에 발간한 『문익환 전집』 중 시집은 늦봄이 사용하는 방언이나 당시 맞춤법으로 쓴 글을 현재의 맞춤법으로 표기했다. 이를 원본 시집과 비교하며 원래대로 바꾸는 일이었다.    늦봄에 시에 녹아있는 동주의 시어 그런데 늦봄의 시에는 윤동주의 시어들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기할 정도였다. 평생을 그리워하며, 시로 녹여내고, 시로 이야기 나누는 것 같았다. 늦봄이 70세 때 지은 「동주야」는 70세가 된 늦봄이 20대의 동주와 대화한다. 동주에게 보내는 편지인 셈이지만 나에게는 대화로 읽힌다. 늦봄은 “윤동주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나의 넋이 맑아짐을 경험한다.”라고 했다. 충분히 공감한다.  지금은 늦봄이 소장한 책들을 정리하고 있다. 교도소에서 반입을 허락한 책이라는 표시인 ‘열독허가증’이 붙은 책들은 그 시대 어느 시점에 얼어붙은 채 무심한 세월을 견디고 있다. 내가 아는 책이 나오거나, 읽고 싶었는데 절판된 책들을 보면 반갑다. 공유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제는 공간을 옮겨 다니며 만난 두 분이 나의 시간 안으로 함께 들어와 나이 먹음에 어질러진 나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    ◇강북구 수유동 한신대 신학대학원 2층 수장고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박영옥 편집위원. 늦봄이 소장한 책들을 정리하는 봉사를 하고 있다.     ※박영옥 위원은 대학교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다 퇴직 후 2022년 7월부터 늦봄아카이브 수장고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2023년 10월부터는 『월간 문익환』 제작에 참여하여 🔗‘늦봄의 서재’ 를 연재하는 등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늦봄의 서재>

    고정희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2024년 4월호)

    “고정희의 시를 읽는다는 건 이 시대를 사는 정보특권”           늦봄은 고정희 시인과 관련된 내용의 편지를 아내 봄길과 맏아들 호근에게 여러 번 보낸다.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지 1년이 되는 1992년 6월 9일, 아들 호근에게 보낸 편지에서 늦봄은 고정희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고정희의 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의 구절을 되뇌이며, “우리들의 슬픔과 서러움을 여백의 아름다움으로 감싸줄 모양”이라고 전한다. 그러면서 ”창비시선(『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창비)으로 묶어 나왔나 본데, 꼭 사서 들여 보내달라”고 한다. 이어 “고정희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특권”이라며 ”너도, 은숙이도 읽어라”고 당부한다. 1992년 6월 24일에 보낸 호근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시 제목이 번역 투의 겉멋이 담겨 있다는 호근의 지적에 대해, “공감하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의 허술함과 미숙함은 오히려 미덕이 될지도 모른다”고 슬며시 옹호한다. 이외에 1986년 9월 1일 봄길에게 보낸 편지에는 “고정희는 마음의 빗장을 내리고 서로 닫힌 문을 여는 데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걸 기가 막히게 읊조리고 있다”고 전하고, 1982년 2월 10일 봄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고정희의 두 번째 시집 『실낙원 기행』을 읽고 “한국 어느 시인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근원적 슬픔이 스며있다”며 첫 시집도 읽고 싶다고 전한다.  고정희(1948~1991.6.9. 해남)는 1975년~79년까지 한신대를 다녔으며, 1학년인 1975년 을 통해 등단한 후 10권의 시집을 냈다.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 등 우리나라 초기 여성운동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여성, 민족, 민중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10권이나 시집을 낸 천생 시인이다. 고정희는 한신대를 다니며 수유리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여러 번 떠나려 했지만 결국 수유리를 떠나지 못하는 내력을 ‘다시 수유리에서’, ‘수유리의 바람’ 시로 써내고 있다. 이외에도 시의 곳곳에서 수유리와 한신대를 만날 수 있다. 수유리란 장소와 공기와 정서적으로 긴밀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정희는 안타깝게도 1991년 6월 9일 지리산 등반 중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참고 자료] 문익환 옥중편지 1982. 2. 10(두엄더미 속의 삶), 1986. 9. 1(사랑한다는 생각없이 사랑하는 길) 1992. 6. 4(예술도 사람의 일, 허술한 데가 있어야 미덕) 1992. 6. 9(고정희의 시를 읽는다는 건 이 시대를 사는 정보특권)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늦봄의 서재>

    현기영 『아스팔트』와 『바람 타는 섬』

    늦봄 “4.3 다룬 소설 읽고 걷잡을 수 없는 눈물”     늦봄은 수감 중에 현기영이 지은 2권의 책을 읽고, 그 감상을 아우 문동환과 아내 봄길에게 보낸다. 1986년 9월 15일 네 번째 수감 중 아우에게는 중-단편집 『아스팔트』에 실린 단편 와  에 대해, 1990년 2월 4일 다섯 번째 수감 중 봄길에게는 장편 『바람 타는 섬』에 대한 것이다.     산사람과 토벌대 사이에서 이중의 고초 늦봄은 네 번째 수감 중에 아우(문동환)에게 보낸 옥중 편지에는 를 읽고,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산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산사람’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고, 나중에는 토벌대의 만행까지 더해져 산사람과 토벌대와 사이에서 이중의 피해를 겪는 주민들의 애환을 담고 있다. 은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의 아버지란 사실에 망연자실하는 이야기다.  늦봄은 “현기영은 작품 속의 슬픔으로 아무도 미워할 수 없는 큰 마음을 갖게 되고, 이는 ‘가난한 마음은 맑은 마음이요. 맑은 마음은 곧 슬픈 마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해녀들 항일투쟁사 … “당신도 꼭 읽도록” 다섯 번째 수감 중에 봄길에게 보낸 옥중편지에는 『바람 타는 섬』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여성들의 항일 투쟁사이니까, 여성들의 필독서라고 해야겠지요. 당신도 꼭 읽도록”이라며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해녀는 일본 말이고 제주 말로는 잠녀”라는 말을 괄호 안에 넣어 우리 말을 알렸다. 제주도 잠녀의 항일투쟁은 1932년대 초반 3개월에 걸쳐 1만 7천여 명이 참여한 국내 최대의 항일투쟁이었으나 고립된 지리적 환경 탓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1986. 9. 15., 1990. 2. 4.  월간 문익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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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건호 회고록 ‘이 땅의 신문기자, 고행의 12년’ (2024년 2월호)

    “이성이나 지성이란, ‘양심’과 동의어”      ◇송건호의 ‘이 땅의 신문기자, 고행의 12년’이 실린  『청암 송건호선생 화갑기념논문집』(1986) 🔗전문 보기(청암언론문화재단)      4차 수감(1985. 5. 20~1987. 7. 8) 중 늦봄은 전주 교도소에서 봄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송건호의 화갑기념 논문집에 실린 ‘이 땅의 신문기자, 고행의 12년’을 읽고 ‘양심’에 대한 의견을 전한다. 늦봄은 송건호의 글에서 ‘이성’, ‘지성’이란 말이 ‘양심’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것을 보며, 양심이란 변절을 정당화하는 능력을 가진 이성과 지성이 흔들리지 않게 바른 판단들 내릴 수 있는 맑음이요, 날카로움이라고 평가한다. 이어 쫓겨난 기자들이 불안과 유혹을 뿌리치며 살아온 것을 ‘지성적인 양심’이라고 말한다. 송건호의 지성의 양심은 겨레를 위한 언론자유이며, 외골수로 그 외로운 길을 12년 한눈팔지 않고 걸어온 의지 또한 겨레를 위한 것이라고 봄길에게 전한다.    ◇1987년 8월, 교도소에서 풀려난 문익환과 나란히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송건호.    송건호(1926~2001)는 언론인의 지조를 지킨 인물로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취임한 이후 편집국에 상주하던 중정 요원을 내보내고, 기사검열을 거부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광고탄압과 100여 명의 기자를 강제해직시켰다. 결국 그 역시도 신문사를 나와 기자들과 민주화 언론자유투쟁에 나섰다. 1980년 전두환 시기에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게 된다.  늦봄과 송건호는 직업이나 생애는 달랐지만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루려는 사회적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다.   월간 문익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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