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 대한 생각

성수, 영금에게





오늘이 7월 8일(금)이다. 이제 너희 결혼 날까지 스무하루가 남았구나. 내가 이렇게 부자유한 몸으로 있는데 무슨 경황에 결혼이냐고 조금도 마음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울 까닭이 없다. 그동안 소식을 들어 알겠지만, 나의 60 평생에 지금처럼 흐뭇하고 보람찬 삶을 산 때는 일찍이 없었다. 요즘 나는 기도하려고 눈만 감으면 기도가 되지 않는다. 나의 기도는 그대로 찬양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그것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겠다. 언젠가 말할 때가 오겠지. 내가 날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르는 찬송이 203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이라면 알 것 아니냐? 물론 무거운 마음이 되는 때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밖에 있는 분들이 나보다 더할지도 모르지.



바다 같은 아버지의 축복과 모든 친지의 하늘 같은 축복을 받으며 활짝 닻을 올려라. 불행의 검은 그림자는 너희 앞에선 설 자리가 없다. 나는 지금 정말 순조로이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미음이고 죽이고 다 그만두고 할아버님 충고를 따라 밥을 입안에서 미음이 될 정도로 씹어 먹으니까 얼마나 맛있고 몸에도 좋은지 모르겠다. 밥 한 숟가락의 1/5 정도씩 잘 씹어 먹어 보아라. 밥맛이 어떤지 알 것이다. 인생의 맛도 그런 것.



결혼식 준비는 두 이모님이 얼마나 자상스레 잘해 주실라고. 엄마와 나는 걱정 탁 놓는다. 외동딸이라지만 나는 네게 너무 못 해주었고 언짢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나는 네게 용서받을 것밖에 없는 심정이다



「사랑의 노래」에 아빠, 엄마의 마음을 담아 보낸다. 엄마가 정성껏 써서 네 폭짜리 병풍을 만들어 보내도록 하겠다. 이제부터 서둘러도 선물은 추송(追送)이 될 가능성이 크겠지. 늦더라도 섭섭히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다오. 내가 7월 들어서 오늘에야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어서 그런 것이니까…….





나의 하나밖에 없는 사위, 성수야





영금이를 많이 사랑해다오. 내가 너무 개성을 강하게 길러서 때로는 좀 거슬리는 일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품어 주기 바란다. 부디부디 행복하여라. 너희가 정말 행복해야 남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는 법이니까.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기도 하고. 행복이란 상대편이 행복한 것을 보면서 받는 인생의 ‘덤’ 이라는 것,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놀라게 되는 것, ‘wonder’도 명심해 두는 것이 좋을 게다. 아빠는 마냥 기쁘기만 하다. 너희 생각만 하면 쓰고 쓰고 또 쓰고 싶지만,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이만…….





아빠 씀





당신에게





이 편지 받는 길로 벼루, 묵, 붓, 화선지를 구해서 ‘사랑의 노래’ 를 작품으로 만드시오. 전주에는 좋은 골동품 상품이 있으니까, 의외로 유서 깊은 좋은 벼루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고종황제 따님한테 가면 빌릴 수 있을지도 모르죠. 표구상도 있을 테니까, 결혼식 전에 당도하도록 필사적인 분발을 해 보시오. 호랑인 줄 알고 쏜 화살이 바위에 박혔다는 전설이 있는 대로 혼신의 힘을 다하면, 단시일 만에 좋은 작품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Fighting.  



당신의 당신 





사랑의 노래



 



까치가 해바라기 씨를 물어다 주거든,



두 손으로 고이 받아



너희 마음같이 정갈한 뜨락에 심어라.



젖빛 오른 애기 손가락 같은



움이 돋거든, 아침마다



물기 젖은 미소로 먼지를 씻어주며



희망처럼 자라는 모습 지켜보아라.



 



어느새 꺼끌꺼끌



너희 서툰 인생처럼 줄기가 뻗거든,



허리를 지나 어깨를 넘어 너희 머리 위로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거든, 너희도



동터오는 아침 해를 쳐다보며



찬란한 황금꽃을 미리 피워보아라.



하늘같이 푸른 너희 가슴에…



 



아침마다 떠오르는 해를 활짝 반기고,



저녁마다 지는 해를 아쉬운 듯 보내며 내일을 믿고…



그리면서 피어나던 영원히 숫된 그 둥근 얼굴,



갑자기 너무 무거워 푹 수그린 채, 이젠



제 속에서 빛나는 해만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는 새 알알이 영그는 열매들



아아, 너무나 곱게 줄줄이 박힌 태양의 씨앗들,



 



이젠 너희가 맛있게 까먹으면서



날마다 해바라기 웃음을 흩날릴 차례다.



빛나는 아침 멧새들이 흰 눈위를 사뿐사뿐 걸어와



그 작은 부리로 너희 집 부엌문을 똑똑 두드리거든,



그 고소한 해바라기 씨를 뿌려주며



즐거운 무도회를 열어 주어라.





어머님께



보내 주신 사랑의 글월을 읽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전주로 해서 청주를 거쳐 서울로 가셨다가 다음 날은 한빛 교회, 갈릴리 교회, 또 다음 날은 강 집사 방문 등, 그렇게 강행을 하셔도 되나 싶지만, 어머님의 정신력에 새삼 감탄합니다. 그래도 너무 무리 마시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저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님 충고대로 밥을 잘 씹어 먹었더니, 그렇게 좋은걸요. 단식 요법에 새 방법을 개척한 셈입니다. 오늘 점심에도 밥 한 공기 반에 죽 한 공기를 먹었으니까요.



이번에 쓴 시 ‘빚’에 나타나 있는 대로, 저는 요새 용서하는 일보다는 용서받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냐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3천여 죄수들에게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건가? 생각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실상 그들은 이미 저를 다 용서해 주고 있거나, 용서해 줄 마음이 다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는 어떻게 “나를 용서해 주시오” 하는 말을 ‘삶’으로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쓰고 싶은 말은 태산 같은데 지면이 다했군요. 그러나 어머님,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겠지요?





아들







 



모처럼 장마가 걷히고



햇살 따가운 오후 두 시,



나는 팬티만 입고



햇빛 받으며 마당을 거닐다.



허락된 운동 시간 30분이다 –



 



문득 많은 눈길이



나의 야윈 몸을 따르는 것 같아



둘러보았더니,



제 이름들을 맡기고 번호표들을 받아 가슴에 붙인,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빛바랜 靑衣同胞들의 서러운 눈, 눈, 눈.



그 눈들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 꼴 정말 못 보겠소.



제발 와락와락 먹고



빨리 좀 건강해지라구요.”



 



나는 아찔 현기증을 일으키며



허리가 앞으로 꺾여 쓰러지려는 몸을



가까스로 버틴다.



 



“기어코, 여기서도 나는



섬으로 빚을 지고 말았구나.



열 번, 스무 번 환생해서



갚고 갚고, 또 갚아도 다 못 갚을



사랑의 빚을”



 



“저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용서해 주고 있구나.”



 



따갑게 내리쬐는 햇빛을 등에 받으며



나는 물 한 방울로 풀렸다가



아침 안개 속으로라도 사라질 듯하면서



새벽마다 꿈결을 찾아들어 고요히 깨워주는



뻐꾸기의 목관악기 소리 부드러운 가락이



깊은 산골에서 들려올 것만 같다.







영환, 예학,



    아빠, 엄마 대신 영금의 결혼 준비에 바쁘겠구나. 무엇이라고 고마운 말 다 할 수 없다.  성수, 영금의 출항이 멋지게 되도록 최선을 다할 줄 알고, 우리의 고마운 마음을 보내니, 받아다오.  







달현, 선희



     선희의 격려 편지는 나에게 늘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힘이다. 문규, 영규는 정말 나도 자랑스럽고 자랑스럽고 또 자랑스럽구나.



큰아버지





두 이모님께



      저희는 두 이모님께 영금의 결혼식을 맡기고 모든 근심을 놓습니다. 작은 이모님께서 나오시면, 자세한 소식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고마운 말씀 무어라고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귀한 외동딸 결혼식이 두 이모님으로 인하여, 만족, 만족, 만족 이상의 것이 되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늦봄, 길





아버님



저 대신 영금이를 데리고 들어가 주십시오. 아버님, 영금이와 같이 발맞추고 들어가실 때, 그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기쁨이요, 축복이 될 것입니다.





1977. 7. 8. 



영금의 아빠






딸 영금이 카나다에서 결혼 (3주후)



딸의 결혼을 돕는 카나다의 고모, 삼촌, 이모, 할아버지에게 감사와 당부의 말을 하다.



딸의 결혼을 위해 “사랑의 노래”라는 시를 쓰고, 아내에게 붓글씨로 써서 액자를 만들 것을 당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