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문익환

    📰 2023년 9월호 인쇄본(PDF)으로 읽기

    월간 문익환(eISSN 2951-2123) 2023년 9월호 [🔗pdf 다운받기]  

  • 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정도상 작가(1) 전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위원회 상임이사 (2023년 9월호)

    나만 보면 “저기 ‘국어사전’ 온다”  만날때마다 ‘겨레말큰사전’ 사업 강조…별명 처럼 불러   “조성만 열사 어머니의 양말을 벗기고 발가락 사이를 주물러주셨어요. 강단 위에선 불같은 목사님이지만 내려오시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죠.” ‘청년’ 정도상에게 늦봄은 흠모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하자 던 늦봄은 어느 날 기약 없이 훌쩍 먼 길을 떠났고, ‘청년’은 그 상실감을 못 이겨 7년이란 긴 시간을 방황했습니다.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 어느 뜨거운 여름, 정도상 작가는 『걸어서라도 갈 테야』라는 늦봄의 책을 넘기다 ‘남북공동국어사전’이란 한 문장에 제대로 꽂힙니다. 그리고 늦봄의 꿈을 꼭 이루어 내리라 다짐합니다. 바로 이 시작되던 순간입니다. 『월간 문익환』은 전북 익산에서 정도상 작가를 만났습니다. 과 그 뒤안에 담긴 늦봄의 뜻을 생각해 봅니다.       ◇전라북도 익산시의 자택에서 반려견 ‘새봄’이와 함께 밝게 웃고 있는 정도상 작가.     지난 6월 28일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에서 을 출간했다. 산파역을 맡은 주역은 바로 정도상 작가. 태어난 곳은 경남 함양이지만 서울에서 고교를 마친 후에는 호남 지역에 관심을 두고 작품 활동을 시작한 9월호의 주인공이다. 5년 전 정착한 삶터도 전북 익산이다. 꽃나무와 잔디를 잘 가꾼, 한옥 같은 집에서 그를 닮은 반려견 ‘새봄’이와 함께 우리를 맞았다. 그는 겨레말큰사전에 얽힌 이야기와,  현장에서  발 벗고 뛰어왔던 소중한 경험들을 풀어놓았다.      ◇지난 6월 28일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에서 출간한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문익환 목사님과의 인연  서울 가서 통일의 집 방문해 인사드려 ▶목사님과 통일맞이를 알게 된 것은?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했어요. 매년 5월이 되면 문 목사님을 초대해서 이야기 듣고 하잖아요. 저는 서울로 가서 통일의 집을 방문하여 인사드리고 목사님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과 가까워졌고, 특별히 범민족대회 같은 행사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목사님의 연설문 작성도 했어요. 목사님은 절대로 써 드린 대로 하시지 않았지만, 자료는 만들어 드려야 했죠. 당시에는 한글2.5 시대라서 컴퓨터가 꺼지고 글을 날려버리는 등 글쓰기가 불편했던 시절이어서 고생도 좀 했었죠.     조성만 열사 장례식 준비하며 가까워져 조성만 열사가 전주 사람이었죠. 장례식 때 전주에 와서 노제를 지냈어요. 그 준비를 제가 했는데 이때 목사님과 더 가까워졌습니다. 전주 시내 도로 전체를 학생들이 메워주고 시민들이 합세하여 노제를 잘 치렀어요. 그 후 목사님이 강연 등으로 전주 오시면 반드시 조성만 부모님을 찾아뵈었는데 제가 항상 목사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조성만 어머니 발가락 주물러주시는 모습 감동 목사님은 조성만 어머니의 양말을 벗겨 발가락 사이사이를 주물러 주셨어요. 파스 요법으로 아픈 곳을 치료해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파스가 어느 부위에 어떻게 좋은지 일일이 설명하시는 모습이나 장례식에서 조사하시는 모습 등을 보고 많이 감동했어요. 강단에서는 포효하는 모습이지만 내려오면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시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함께 일하자 하시던 늦봄, 몇 달 후 별세 목사님의 방북과 석방 이후 통일맞이를 만들 때 어느 날 저를 불러서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 같이 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몇 달 안 돼서 별세하셨어요. (정 작가는 이 무렵부터 약 7년간, 과거를 돌아보며 방황과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도법 스님을 만나 실상사에서 1년을 지내기도 했다. 생명 평화 순례를 제안해서 시작했다고 한다.)      통일맞이와 겨레말큰사전 편찬 사업  돈 없어 사무실을 연립주택 옥탑방에 ▶통일맞이에서 하신 일은? 그 방황 끝에 40살이 되는 날 아침, 문득 생각했어요. 이제 내가 다시 대중운동에 복귀해도 각박해지지 않겠다고. 2000년 6.15공동선언이 있던 해에 선배로부터 소개받아 통일맞이 사무처장이 되었습니다. 통일맞이는 재정이 어려웠고 일이 잘 되어가는 편이 아니었어요. 강원도 고성에서 강화도까지 평화통일대행진을 두 번 진행했고요. 돈이 없으니 사무실도 자주 옮겨 다녔는데 신길동의 연립주택 옥탑방까지 갔습니다.    눈에 띈 한 문장 ‘남북공동국어사전’   ▶겨레말큰사전을 시작한 계기는? 뜨거운 여름이었는데 목사님의 책을 봤어요. ‘걸어서라도 갈 테야’였습니다. 책을 쭉 넘겨보는데 눈에 띄는 한 문장을 발견했죠. 김일성 주석에게 남북 공동 국어사전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김 주석이 수락했다고. 자세한 내용은 없고 이 한 문장이 딱 끝이었어요. 내가 이 사업을 받아야 하겠다고 생각했죠. 통일맞이 사무처장으로 활동에 복귀한 후, 그곳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목사님 관련 사업은 남북 공동 국어사전을 만드는 일이라 자각하고 뛰어들었습니다.   ◇ 김 주석에게 『우리말 갈래사전』을 선물하며 설명하는 문익환 목사(좌)와 책 『우리말 갈래사전』(박용수, 1989)(우)   남북 공동 행사를 할 때마다 공동 보도문이나 성명서를 쓰는 등 실무진으로 참여를 계속했지만, 통일맞이 이름으로 사업 신청을 하면 통일부나 국정원에서 방북 승인을 해주지 않았어요. 2003년에야 문익환 평전을 쓰기 위해 취재하러 간다는 점을 설득해서 마침내 승인받았죠.         마주할 때마다 북측인사들 설득 북한 측에는 2000년 이후 접촉 때마다 사전 편찬이 문 목사와 김 주석이 약속한 사업이라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오죽하면 북한 측이 저만 보면 “저기 국어사전 온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이야기를 꺼낸 지 2년이 지나서 2003년에야 통일맞이 이름으로 방북하게 되자, 북한의 6.15공동선언실천북측위원회 상임대표에게도 남북공동 사전을 편찬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이후 박용길 장로님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내시도록 장로님께 초안을 드렸죠. 친필로 쓰셨어요.      북측의 목사님 신뢰 위에 개인적 신뢰 쌓아 성사 ▶편찬사업이 성사되기까지 편찬 사업이 성사된 것은 문 목사님에 대한 북한의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진실성을 그들이 아는 거예요. 제가 금강산을 방문했을 때도 통일맞이 이름을 보고 “문 목사님 단체입니까”라고 물으면서, 낙지와 술을 제공하는 등 호의적 대우를 해주었죠. 문 목사님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이해나 신뢰가 어마어마했던 것 같아요. 피부로 느꼈습니다. 저에 대한 조사도 미리 했는지 인민학습당에 가니까 제 책이 세 권이나 나와 있었어요. 저 사람은 뭔 일을 해도 사기를 치지 않을 거라고 신뢰하게 된 것 같았어요. 이런 것들이 사업 진행에 도움이 되었겠죠. 2004년 3월, 문 목사님 방북 15주기 추모 세미나를 연길에서 했는데, 북한 민화협과 남쪽 통일맞이, 한신대학교가 만나서 마침내 남북 공동 국어사전으로서 ‘겨레말큰사전’에 대한 최초의 합의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표준어와 문화어를 넘어 ‘겨레말’ ▶큰사전 편찬이 갖는 의의는? 우리는 국어를 말할 때 표준어라는 용어를 쓰는데 북한은 문화어라고 합니다. 공동사전을 만들려면 이 명칭이 문제가 되죠. 그래서 중국과 타 국가에서 사용하는 보통어의 개념을 생각해 봤는데 남북 보통 국어사전이라고 부를 수 없겠더라고요. 작가로서 고민해 본 끝에 겨레말이라는 게 떠올랐습니다. 남북 학자들 간 많은 협의 끝에, ‘우리 민족이 사용하는 보통의 입말’이라는 의미를 담아 겨레말이라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 우리 민족이 가진 사전은 모두 분단 사전이에요. 표준국어대사전은 대한민국 정부가 만든 사전이고 조선말대사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만든 사전이죠. 한글 창제 후 이 영토 안에서 한반도 전체 언어 영토를 반영하는 사전은 없었어요. 겨레말큰사전은 최초로 남북과 해외 지역의 어휘까지 다 조사해서 올라가는 우리 민족 최초의 국어사전이 되는 겁니다. 언어사적으로, 최초의 보통어 사전이라는 것, 전 민족 언어 영토의 최초 사전이라는 것, 2가지 의의가 있는 거죠.     ◇임시 제본된 10권의 겨레말큰사전. 남북한 사전의 공통 단어 20만 개와 지역어(사투리) 8만 개, 해외 지역 언어 2만 개 등 약 30만 개의 어휘가 수록되어 있다.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목사님의 뜻은 남북이 “함께” ▶남북합의로 발간해야 하는 이유? 남쪽만 책을 내는 건 목사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고요. 남북 합의로 책을 내고 공동으로 기념행사를 해야 문 목사님의 뜻에 맞지요. 남북이 "함께" 해야죠. (여기에서 정 작가는 목사님에 대한 부채 의식을 언급했다. 정부 차원의 특별법으로 만들어졌기에 겨레말큰사전에서 목사님과 통일맞이의 노력을 전혀 표시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 작가는 도라산역 문익환 시비의 설치와 다큐 영화 ’늦봄 2020’ 제작에 힘을 쏟았고 완성되는 것을 보았으니 이제 다소나마 부채 의식을 벗어났다고 고백했다. 목사님을 향한 변치 않는 존경과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정도상 작가는 은 남북의 합의로 발간돼야 그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2)에서 계속]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정도상 작가(2) 전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상임이사 (2023년 9월호)

    [(1)에서 이어짐]   문익환은 ‘평화를 사랑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일을 한 사람’ 사랑, 생명, 평화, 여성 위에서 통일 추구        ◇  서로 다른 것이 하나로 되는 '통이(通異, 統二)'를 강조하는 정도상 작가       문익환의 행동과 사상  남측이나 북측을 절대 비난하지 않아 문 목사님은 평양에 가서 단 한 번도 남쪽을 비난한 적이 없어요. 남쪽의 현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어요. 김일성 주석에게 끊임없이 노태우 대통령과 대화하라고 얘기했고, 서울에 와서는 평양에 대한 욕을 안 했어요. 통일맞이 사람들도 목사님의 그 원칙을 저절로 알고 따랐죠. 목사님은 남북 당국 간에 대화하는 다리를 놓으려고 간 것이었어요. 서로를 비난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북한과 합의서 등을 작성할 때 반드시 지켰어요. 북측에서 ‘반미 투쟁, 반통일 분자’ 같은 용어를 써 오면 남측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죠. 북측의 안을 수정하는 것이 무지 어려웠지만 합의서가 지연되더라도 절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생각 달라도 함께 하는 것이 통일맞이 정신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함께 한다는 것이 통일맞이의 정신입니다. 통일맞이에서는 진보가 아닌 보수 교단에 계신 분을 모셔와서 이사직을 주었어요. 그런 것이 문 목사님의 태도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사전 편찬 특별법 추진 단계에서 당시 야당 국회의원들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후원회나 이사진에 참여하게 했는데, 이 덕분에 법을 신속하게 통과시킬 수 있었죠.   겨레말큰사전이 ‘언어차별’ 극복에 기여할 것 통일되면 매우 심각한 언어 차별이 발생할 겁니다. 독일 통일 이후에 동독 지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서독 지역어를 사용하는 사람보다 급여가 30% 낮았어요. 언어로 인해 이런 차별이 생기고 심해지게 됩니다. 겨레말큰사전을 만드는 것은 언어 차별이 있어선 안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부산 사람은 사투리를 듣고서 부산 사람임을 알게 되는 것처럼, 사투리를 쓰는 행위에 대해선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다음으로 우리 민족이 식민지로 떨어져 좌우 이념이 들어온 후부터 우리 안에 강력하게 자리 잡은 이분법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문 목사님은 명동촌에서 어린 학생들이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과 공산주의 추종 세력이 기독교와 민족주의를 죽이는 것을 눈으로 본 분이죠. 광복 이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전면적 투쟁과 분단체제는 우리 역사와 삶을 옭아매 온 이분법주의입니다. 서로 다른 것이 하나로 되는 통이(通異, 統二)가 매우 중요합니다. 문 목사님이 “통일은 다 됐어”라고 하셨지만 통일은 ‘통이’를 얘기한 것 같아요. 방북은 서로 통하게 하려는 몸부림이지 목사님이 영웅이 되려는 것이 아니었어요.    ◇ 통일맞이 토론회에서 발언 중인 문익환 목사(1993)      목사님은 여성주의와 생명 평화 추구 ▶문익환의 시와 편지에 나타난 사상은? 문 목사님의 편지들을 잘 보면 생명 평화 사상을 누구보다 먼저 말씀하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편지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여성주의, 즉 여성이 어떻게 삶의 주역이 돼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말하고 있고요. 또 하나가 바로 생명 평화 이야기입니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모든 생명이 서로 어우러져 잘 살게 하자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많은 죽음을 보셨죠. 북간도의 삶 자체가 그렇고 전쟁과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끊임없이 죽음과 맞닥뜨리고 대면해 온 삶이었어요. 목사님은 감옥에서도 ‘반독재투쟁을 해야 한다’ 같은 말, 없었습니다. 사랑, 생명, 평화, 여성 이런 얘기만 주로 하고 계셨어요. 문익환 사상의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목사님이 추구한 기독교 사상이기도 한 거죠. 예수님 믿고 회개하면 된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구체적인 행위가 사랑, 평화, 생명, 여성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상이죠.   민주화 운동가 아닌 생명주의자 문익환 ‘문익환은 어떤 사람이다’를 말한다면, ‘평화를 사랑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일을 한 사람이다’가 맞죠. 사람들이 민주화 투쟁 운동가로 보고 있는데, 사실은 통일이라고 하는 것에 문 목사가 있지 않아요. 평화, 생명, 사랑, 여성, 이걸 통해서 통일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이 측면에서 문익환 새로 읽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민족의 진정한 생명주의자로서의 문익환을 찾아내야 합니다. 부자들의 생명이 아니라 히브리 민중의 생명이잖아요.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이고 같이 사는 생명입니다. 이걸 잘 봐야 하는 거예요.   목사님과 장로님은 대중교통 사랑 목사님은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세요. 택시는 안 타셨죠. 늘 지하철, 버스를 타고 다니셔서 그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언론에 기사도 났었죠. 박용길 장로님과 함께 대중교통 많이 사랑하셨어요. (정 작가는 겨레말큰사전이 종이 사전의 모습에만 그치지 않는 발전된 형태들을 보여줄 것이라며 기대를 보였다. 작품 활동으로는 윤동주를 소재로 한 작품이 완성 단계에 있다며, 향후 문익환, 윤동주, 송몽규가 함께 한 어린 시절을 소재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밝혔다.)     ※ 정도상 작가는 - 정 작가는 고2 때부터 문학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전라도 작가들이 신춘문예를 휩쓰는 것을 보고, 저 지역으로 가면 문학이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삼수 끝에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호남의 국립대 진학을 선택했다. 1987년 등단한 이래 수십 편의 소설과 동화를 창작해 왔다. 17회 단재상, 25회 요산문학상을 받았고, 2020년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꽃잎처럼』(부제:1980.5.27 그 새벽의 이야기)을 펴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통일위원장을 역임했다.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과거에서 온 편지>

    “자꾸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2023년 9월호) 

    1981년 9월 7일에 쓴 박용길의 편지 “물을 마시거나 입을 축이셔야죠… 당신과 같이 금식기도 못해 죄송”   얼마 정도 금식을 해보셨나요?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해 간헐적 단식을 권장하는 요즘이라지만 여기엔 ‘24일간 금식’을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금식이 시작된 지 14일이나 지나서 알게 되었죠. 1981년 9월 7일에 쓴 박용길의 편지는 아내가 본 남편 이야기입니다.    단식을 만류하기 위해 간 면회 9월 7일에 박용길과 아들 한 명은 문익환 목사 면회를 갔습니다. 닷새 전인 2일에 이미 그달 치 면회를 했지만 남편이 감옥에서 단식을 하고 있어서 또 가야만 했습니다. 9월 7일에 쓴 편지는 바로, 그 면회를 다녀온 날의 것입니다.   ◇박용길, 1981년 9월 7일 면회를 다녀와서 쓴 편지.    ▲편지 본문 어린 양                김경수 있는 듯이 없고 없는 듯이 있는 님의 얼굴에 어둡고 슬픈 것이 흐른다 감기고 끝내 열리지 않던 얼굴에 싱그러운 아침이 맺혔노니 님의 가슴에 황홀한 슬픔의 하늘이 구비돈다. 살아있는 모양은 있으나  실상은 죽어있는 이목구비들 어디를 향하나 해골의 골짝 뿐인 언덕에 기적같은 새벽이 밝아오고 없는 듯이 있고, 있는 듯이 없는 님의 목소리에 파도가 인다. 제215신 1981년 9월 7일(월요일) 바우가 이 그림을 보더니 얼른 방에 들어가 고모가 만든 곰을 안고 와서 “똑같지” 해서 웃었읍니다. 당신께서 입맛을 작구 다시시는 모습이 보여 안스럽습니다. 물을 마시거나 입을 축이셔야죠. 저도 같이 금식기도 드리지못해 미안합니다. 캄캄한 턴넬을 빨리 빠져나오시고 황홀한 체험을 쌓으시기 두손모아 빕니다. 하느님께서 힘주시기 다시 빌며 ㄱㅣㄹ      단식이 아닌 “금식기도” 그녀가 단식 사실을 알게 된 것은 9월 2일에 있었던 정기면회 때였습니다. 부모님과 아들, 손자 바우까지 대동하고 갔던 면회에서 남편이 “지난(달) 20일부터 금식기도를 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던 것이지요. 특히 면회 때 문익환은 자기가 하려는 것이 단식투쟁이 아니라 “금식기도”라는 것을 계속 강조했습니다.   “당신의 여윈 모습과 비장한 마음으로 단식기도를 하시는 뜻을 보고 듣고 하면서 너머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당신의 크신 뜻이, 간절한 기도가 하느님께 상달될 것을 믿으며 기도하겠읍니다(박용길 1981. 9.2).” 문익환 목사에게 이번 단식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2일 면회를 마치고 쓴 편지를 보면 이번 단식은 신앙인으로서 겨레의 문제를 온몸으로 성찰하고자 하는 목적이 엿보입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온 마음으로 이해하고 응원해 주고자 했다고 생각됩니다. 문익환은 면회 다음 날인 9월 3일부터 나흘에 걸쳐 9월 서신을 써서 면회 때 못다 한 금식기도를 둘러싼 심경을 소상하게 설명했습니다.   “다시 차근차근 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저는 이번에 앞이 캄캄해 오는 절망적인 심정에서 금식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아버님의 분신, 이 낙천가 익환이도 이번에는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주변 정세를 보나 국내 정세를 보나 서광이 비쳐 들어올 데라곤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4강이 한 발씩 내밀어 이 조국을 눌러 짚고 있어서 꼼짝도 못할 판인데, 우리는 남북으로 갈려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동서로 찢어진 채 언제 아물지 모를 형편입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이 금은 음성적으로 점점 더 깊어지고 벌어져 갈 뿐입니다. 그래도 저는 정부를 원망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정부까지 포함해서 이 겨레가 송두리째 휩싸여 있는 절망, 그것 자체가 깜깜하게 느껴져서 금식 기도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문익환, 1981. 9. 3).”     86세 노모 김신묵 아들 금식기도에 동참 하지만 금식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가족이 이 사실을 알게 된 시점은 문익환이 음식을 끊은 지 이미 이 주나 지난 시점으로 그의 나이는 64세였습니다. “뵈옵고 도라오니 당신의 뜻은 이해하면서도 괴로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고(박용길 1981. 9. 3)” 설상가상 당시 만 86세였던 문익환의 노모가 아들의 금식기도에 동참하고자 해서 가족과 주위의 시름은 더했습니다.(*이때 문익환의 모친 김신묵 권사는 실제로 아들과 함께 열흘이나 금식기도를 하였음)    “당신의 9월 서신 깨알보다도 더 작은 글씨로 메워진 친필. 정말 반가웠어요. 15일 이상 굶으신 분이 어떻게 그렇게 쓰실 수 있었는지 정말 기적이군요. … 밖에서는 어머니들이 애태우고. 울고. 걱정하고 계신데 당신은 유유히 황홀경을 헤매시다니.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탓일까요. 안절부절하다가도 믿음으로 평온함을 얻는 것은 당신을 믿는 믿음 때문일까요.” ….”많은 분들이 같이 기도하고 … 이제 고만. 음식 잡수시면서 같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박용길, 1981. 9. 10) 고령의 정치범인 수감자가 단식하고 있으니 교정 당국은 어땠을까요? 건강상의 문제도 큰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여파인지 보통 한 달에 한 번 면회를 하였던 상황에서 그달에는 특별한 면회가 추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귀여운 판다곰이지만.. 안쓰러운 남편의 모습이 귀여운 판다곰 그림으로 바우가 할아버지를 웃게 해 드렸을 겁니다. 이날 편지는 짧고 내용도 많지 않지만, 그 짧은 면회의 와중에 번쩍하고 아내에게 꽂힌 순간이 들어 있습니다. 단식으로 입이 말라도 물을 마시거나 입을 축이지 못하는 남편, 그래서 자꾸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그것이지요. 그날의 남편도 언제나처럼 그 뜻과 말은 무엇보다도 강건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내의 눈에는 그날따라 안쓰러운 남편 모습이 더 깊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아내이기 때문에 가능한 예리한 관찰이었다고 할까요? 아내는 이날 편지 속에서 함께 금식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남편의 뜻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함께 빌어주었습니다.    “일생일대의 편지” 이후 박용길과 아들, 손자, 며느리, 아버지까지 온 가족들은 닷새 뒤인 중추절 날 백설기를 해 가지고 감옥으로 출동했습니다. 원래 전날 가려고 했는데 추석 귀향객 때문에 차표를 살 수 없어서 결국은 추석 당일에 가게 되었던 것이지요(박용길, 9.11, 12). 이날 문익환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고집을 부리고 계속 단식을 하면 나도 오늘부터 안 먹겠다고 선언했는데 당시 문익환의 몸무게는 56.5kg으로 평소보다 훨씬 적었으니 얼마나 걱정하셨을까 싶습니다. 얼마 후 문익환은 감옥에서 특별한 내적인 경험을 하게 되고 9월 14일에 24일간의 금식기도를 중단하게 됩니다. 이때의 심경은 9월 17일에 문익환이 쓴 편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편지 상단에는 빨간색으로 “특발”이라 적혀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쓸 수 있었던 때이니 특별 발송의 줄임말일까요? 이 편지는 서신표에도 등기로 발송되었다고 메모가 남겨져 있습니다. 문익환은 이 편지를 두고 스스로 일생일대의 편지라고 적고 있어요. 어떤 내적 경험이 그를 긴 터널에서 빠져나오게 했던 것일지는 그 편지 속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에게.. 일생일대의 편지를 어머님께 올렸지만 이건 모두모두에게 올리는 편지요. 10월 접견 때까지 어찌 기다리나!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늦봄(1981. 9. 17)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와 함께 걷고 있는 아키비스트. 늦봄과 봄길의 기록을 아끼고 그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 [관련 기록] 박용길, 당신께, 1981. 9. 2 박용길, 당신께, 1981. 9. 7 박용길, 당신께, 1981. 9. 10 박용길, 당신께, 1981. 9. 11 박용길, 당신께, 1981. 9. 12 문익환, 옥중편지, 1981. 9. 3~7 문익환, 옥중편지, 1981. 9. 17 [키워드] 세번째 수감 공주교도소 24일간 단식 전주교도소 21일간 단식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

    통일의 어머니 김신묵 권사 (2023년 9월호)

    [늦봄과 이 사람]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통일 보고 가셔야죠” 물음에 “통일은 다 됐어!”   ◇‘내아들 문목사를 석방하라’는 글을 목에 걸고 시위하고 있는 김신묵 권사    1990년 9월 18일에 소천 1991년 1월 1일 한겨레신문 17면에 늦봄이 쓴 신년 축시가 실렸다. 시의 제목은 ‘통일은 다 됐어’.  이 제목은 늦봄의 어머니 김신묵 권사가 별세 3일 전에 한 말이었다. 김신묵 권사는 1990년 9월 18일에 소천했고, 수감 중 일시 귀가하여 어머니 장례식을 치른 늦봄은 1달 만인 10월 20일 가석방되었다. 어머니를 기리는 시를 이미 4편 쓴 늦봄은 신년 축시에서 통일을 자신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담아내었다. 1991년 새해 아침은 대다수 국민들이 평화와 통일에 대한 기대를 안고 출발하는 분위기였다. 직전 1년 동안, 남북 총리 회담이 3차까지 진행되었고 남북 정상회담의 빠른 성사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등 화해의 발걸음이 크게 진전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체육 부문에서 남북한 축구대표팀의 평양-서울 순회 경기가 열려 한 번씩 승패를 주고받으며 형제애와 같은 감동을 보여줬고, 베이징아시안게임과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 등 국제 무대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상호 배려와 존중의 모습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겨레의 마음속 문은 이미 활짝 열렸다” 어머니 김신묵은 90 중반의 나이였지만 매일 신문을 정독하며 세상의 흐름을 똑똑히 파악하고 있었다. 문병 온 박형규 목사의 “통일은 보고 가셔야죠”라는 말에 “통일은 다 됐어”라고 또렷하게 반응하신 어머니.  그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한 이유는 ‘겨레의 마음속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린 것’을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이었다. 남과 북의 권투 선수가 대결이 끝난 후 서로에게 축하와 미안함을 전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분단 장벽이 무너지는 것이었고, 임수경을 ‘껴안고 뒹구는 북쪽 겨레의 몸부림’하는 모습에서 서로에 대한 미움이 녹아내리고 있음을 어머니는 온몸으로 느꼈다. (시 ‘통일은 다 됐어’) 더 근본적으로, 우리 겨레는 끊어지거나 갈라져 있지 않았다는 것이 어머니의 신념이었다.   ‘한겨레라는 것이 그렇게도 소중했던 거야 / 백두산이 언제 한라산을 미워한 일이 있었니 / 한라산이 언제 백두산을 향해 총을 겨눈 적이 있었니 / …. / 태백산 줄기 억센 허리 언제 끊어진 일이 있었니’ (시 ‘통일은 다 됐어’)    “온 식구가 민족의 제단에 바쳐진 것 감사” 어머니의 마음은 광복 이후 45년을 겨레의 분단이라 인정할 수 없었다. 잠시 멀어졌던 겨레는 한마음으로 회복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또 하나 되기 위해 사랑으로 서로를 감싸 안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행동했다. 늦봄이 방북으로 구속되어 재판정에 섰을 때 ‘염통에 불이 나서’ 소리쳤던 어머니의 기개가 그것을 증명해 준다.   익환아! 목사인 네가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공산주의자 김일성 주석을 껴안아 녹이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 너는 네 십자가를 지고 흔들림 없이 네 길을 가야 한다” (이우정, 1991) 어머니는 임종에 앞서 이렇게 기도하셨다고 한다.   “통일도 되어가고 내 아들도 석방되고 온 식구가 하나같이 민족의 제단에 바쳐졌으니 감사합니다. …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소서. 자주적인 민족으로 제 힘을 기르지 못하고 단결하지 못한, 이 민족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하루속히 이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 주소서” (박영숙, 1991)   숭고한 마음이 아닐 수 없다. 장례식에서 모두가 호칭한 그대로 어머니는 분명 ‘통일의 어머니’ ‘민족의 어머니’였다. 다섯 번 투옥된 큰아들과 두 번 투옥된 작은아들의 옥바라지를 꿋꿋하고 의연하게 해내시면서 민주 통일 진영의 사람들 모두에게 의지가 되고 희망이 된 분이었다. (이기형, 1991)     교회 통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실천  어머니의 교회 활동은 민주화 운동이기도 했다. “고난받는 이들이 모이는 갈릴리 교회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셨고, 1983년부터 양심수 가족들을 위한 교회가 되었을 때 언제나 오셔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고 때로는 설교를 해 주셨어요”라는 며느리 박용길 장로의 회고를 통해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혹여 다쳐서 출옥한 청년 학생들의 상처에는 깊이 간직해 두었던 웅담을 발라 주며 격려를 해 주는 사랑과 따뜻함도 실천했다. (이기형, 1991) 민주화와 통일 운동 과정에서 보인 어머니의 자세와 활동은 이미 광복 이전의 삶에서 체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명동여학교 졸업 후에 7인으로 된 명동의 여자비밀결사대에 들었고, 1919년 용정 3.13만세시위에 참여했다. 학교 졸업 후 명동촌에서 여전도회장을 맡은 데 이어 용정에서 만주 기독교 평생여전도회장을 광복 전까지 재임하면서, 기독교운동을 통해 만주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높이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다했다.   위대한 어머니, 마지막 소원은 통일 어머니는 손님도 많고 가족 대소사도 많았던 문 씨 집안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이었다. 광복 전후에는 남편 문재린이 세 번에 걸쳐 약 7개월 동안 일본군과 러시아군에 구금되었는데, 어머니는 남편을 찾아 북간도를 뒤지고 함경도 성진까지 가는 등 백척간두와 같은 고난의 시기를 이겨냈다. 한국전쟁 와중에서 가족의 안위를 지켜냈고 이후 창립한 한빛교회를 굳건하게 만드는 등 안주인으로서 막중한 역할을 다했으니, 그의 삶을 알면 알수록 여성의 위대함이 어머니 김신묵에게서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90년 9월 18일 운명하기까지 100년 가까이 사신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은 통일이었다. 한겨레가 원래대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고 “통일은 다 됐어”라고 외치셨건만, 30년 지난 아직도 그 희망을 실현해 보이지 못하고 있는 우리는 너무나 죄송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이기형, 박영숙, 이우정, 박용길 외 (1991), 『그리운 어머니, 김신묵 권사 추모 문집』 문영금, 문영미 엮음 (2006)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서울:삼인    ◇ 3.1민주구국선언으로 수감된 늦봄과 민주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미국 백악관 앞에서 시위 중인 김신묵과 문재린 일행      ◇ 양심수를 석방하라는 머리띠를 두른 김신묵.      통일은 다 됐어 문익환 어머니 운명하시기 사흘 전이었습니다 박형규 목사가 문병 와서 통일 보고 가셔야죠 하니까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통일은 다 됐어   3차 고위급 회담이 별 성과 없이 끝났는데도 어머니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암 말할 수 있구말구 기득권자들의 눈에는 보일 리 없지 겨레의 마음속 닫혔던 문 활짝 열린 것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치고 맞는 권투 경기가 끝나고 남과 북 두 선수의 눈물겨운 광경 못 봤어 이긴 남쪽 선수 진 북쪽 선수를 껴안으며 미안해 진 북쪽 선수 이긴 남쪽 선수에게 형 축하해 백림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이미 거기서 분단의 장벽이 무너졌던 거 아니겠니   어머니 그렇군요 분단의 장벽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었군요 불신 반목 질시 적개심은 마음에 있는 거니까요 제가 김일성 주석을 껴안았다고 해서 욕을 얻어먹은 걸 보시면서 어머니 염통에 불이 났엇지요 그것이 결국 어머니 수명을 단축시켰던 거구요 그 때문에 내가 며칠 일찍 숨을 거두었단들 그게 뭐 대수냐 수경이를 껴안고 뒹구는 북쪽 겨레의 몸부림 속에서 나는 눈물로 온몸 녹아 내리는 걸 느꼈단다 그렇군요 어머니 북쪽의 겨레는 남쪽에 사는 우리를 원수라고 생각하지 않고 미워하지도 않게 되었군요 미워하지 않게 된 것만이 아니라 뜨겁게 뜨겁게 사랑하고 한겨레가 된 거지 한겨레가 된 것이 죽고 싶도록 행복한 거지 평양 소년궁에서 어린이 셋이 목에 매달려 엉 엉 울 때 저도 그걸 아프게 아프게 느꼈습니다 남쪽의 4천3백만 겨레도 같은 심정이라는 거 알지 않어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분단의 장벽 흔적도 없이 폭발시켜 버리기 직전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남북 두 축구팀이 국제 경기에서 만나면 그것은 살벌한 전쟁이었습니다 일본팀에게는 져도 북쪽팀에게는 질 수 없다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것이 남쪽 선수들이었습니다 미국팀에게는 져도 남쪽팀에게는 질 수 없다며 북쪽 선수들은 살기등등했었습니다 그런데 금년 여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세계축구사상 일찍이 없었 고 앞으로도 없을 경기가 벌어졌습니다 잘 알고 있다 나도 거기 가서 울고 있었으니까 남쪽 선수들은 북쪽 선수들이 발목을 삘세라 북쪽 선수들은 남쪽 선수들의 다리에 생채기라도 날세라 연장전까지 1백20분 경기를 반칙 한 번 없는 경기를 해냈거든 한겨레라는 것이 그렇게도 소중했던 거야 백두산이 언제 한라산을 미워한 일이 있었니 한라산이 언제 백두산을 향해 총을 겨눈 적이 있었니 압록강 금강 대동강 한강 물이 서해 바다에 가서 어울려 신나기만 한 거 아니겠니 두만강 낙동강 물도 동해 바다와 남해에서 어울려 출렁이다가 하늘로 구름이 되어 떠돌다가 남쪽 북쪽 가리지 않고 단비로 쏟아지는 거 아니겠니   태백산 줄기 억센 허리 언제 끊어진 일이 있었니   그렇군요 어머니 그렇군요 어머니 통일된 민족, 통일 대장정 만세 -「한겨레 신문」, 1991. 1. 1.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그때 그곳>

    한빛교회(2) 한빛에서 만난 사람: 유원규 원로목사 (2023년 9월호)

    유원규 목사가 말하는 '늦봄과 호경이' “감옥에서도 병상의 호경이 문병을 부탁했지요”   ◇한빛교회에서 주일예배 후 바리스타로 변신해 커피를 내려주고 있는 유원규 목사.     커피를 내려주는 백발의 바리스타 한빛교회에는 바리스타가 있다. 주일예배가 끝나면 제일 위층의 교육관으로 달려 올라가 교인들의 커피를 책임지는 백발의 바리스타. 바로 담임목사로 32년간(1984~2016) 한빛교회를 이끈 유원규 원로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늦봄의 부모-부부-아들 3대의 장례식 맡아 문익환, 이해동 목사에 이어 한빛을 이끌었던 유 목사. 늦봄의 부모, 늦봄 부부, 그리고 그 아들 문호근까지, 한 교회에서 3대의 장례를 맡았다고 했다. 삼엄했던 그 시절, 한빛의 산증인으로 늦봄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늦봄은 아픔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달려가 함께한 겨레의 목회자였어요”.    그가 들려준 호경이와의 인연은 애틋하기만 하다.    “문재린 목사가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갔을 때였어요. 옆 병상에 당시 여대생이었던 호경이가 있었는데  젊은이의 고통을 목격하고는 병원을 찾을 때마다 따로 문병을 했어요. 이후 늦봄이 5.3 사건으로 감옥에 가게되자, 저에게 호경이 문병을 대신 부탁했어요.”      중환자실의 호경이에게 늦봄의 편지 읽어줘 유 목사는 박용길 장로와 함께 문익환 목사가 호경이에게 쓴 편지를 가지고 서울대병원에 갔으나 인천으로 옮긴 후였다고 한다.  “다시 인천에 있는 시립병원으로 찾아갔는데 호경이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요. 제가 목사님의  편지를 읽어 주었더니 호경이가 감사의 눈물을 흘렸어요”     당시 옥중에서는 가족에게만 편지를 보낼 수 있었기에 원래 이름이 양호경이었지만 박호경이라고 해서 박용길 장로님의 조카에게 보내는 것처럼 편지를 썼다고 했다.  (박용길 장로의 1986년 7월 16일 편지에서는 문익환 목사가 호경에게 쓴 편지를 받았다는 내용, 7월 18일 편지에는 유 목사님과 함께 인천으로 갔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호경의 부모가 박용길 장로에게 보내온 감사 편지도 찾을 수 있었다.)     ◇유 목사와 호경이 문병을 갔다는 내용으로 박용길 장로가 문익환 목사에게 쓴 편지(1986. 7. 18)      "목사님의 글(땅의 양심)은 온 가족이 몇 번이고 읽고 익히며 큰 감명을 받았읍니다. 오래도록 소중이 보존하겠읍니다. 호경이 병상에서 신음하고 절망의 경지에서 헤메일 때 그 바쁘신 중에도 여식(호경)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시고 위로해 주시며 은총을 하나님께 진원하여 주신 은혜 영원히 영원히 잊을 수 없읍니다." (호경의 부모가 문익환 목사에게 보낸 감사 편지)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여행과 사색을 위한 숲길 산책을 무척 좋아합니다. 월간 문익환_

    12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