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문익환_1월 <늦봄의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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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 문익환_1월 <늦봄의 별세>

    🈷️ 나의 아버지 문익환 목사는 이렇게 가셨습니다

    [특별기고] 문영금(늦봄의 딸, 통일의 집 관장) 안방 누우신 아버지 “이런 아픔 처음이야” 체한 것 같다기에 별일 아닌 줄 알았는데… 1994년 1월 18일 저녁 8시 35분. 청천벽력 같은 일 벌어져      ◇통일의 집 거실에 걸려있는 문익환 목사의 판화와 이를 바라보는 문 목사의 딸 문영금 통일의 집 관장.      가슴통증에도 신음 한마디 내지 않으셔 1994년 1월 18일은 청천벽력 같은 날이었다. 그날은 몹시 추웠다. 그날 오후, 아버지가 아프셔서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어머니를 모시고 차를 운전하여 병원에 갔는데, 아버지는 진료를 받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집에 와 보니 아버지는 안방에 누워 계셨다. 어떻게 아프냐고 여쭤보았더니 가슴에서 위쪽으로 쭉 뻗어 아프다며 이런 아픔은 처음이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신음 한마디 내지 않으셨다.     병원 갔다가 진료안받고 그냥 돌아와 상황은 이랬다. 아버지는 그날 아침 평소대로 새로 문을 연 통일맞이 사무실이 있는 종로 3가에 출근해 친지들과 점심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돌아오셨다. 그런데 가슴에 통증이 느껴져 혼자 방에서 요가와 심호흡, 지압 등으로 통증을 가라앉혀 보려고 하셨다. 하지만 여의치 않자 수행비서 임윤호에게 영동 세브란스로 가자고 하였다. 수행비서 생각에는 신촌 세브란스가 더 가까우니까 그리로 가서 먼저 내려드렸는데, 차를 주차하고 가보니 아버지가 집에 가자며 벌써 나와 기다리고 계셨다고 한다. 병원 안은 너무 혼잡하고 위급한 사람이 많아 보였다고 한다. 아마 그곳에서 기다리기도 힘들었던 것 같았다. 가족이었으면 그래도 진료 한번 받아보자고 우기기라도 해 보았겠지만 젊은 직원은 어른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응급실 갔지만 이미 심장마비 사망 판정 막내아들 성근이도 소식을 듣고 집으로 달려왔다. 둘째 아들 의근이와 여러분들이 의사들에게 연락을 하여 의사 한 분이 집으로 왕진을 왔다. 가슴이 답답하고 아프다고 하니 체한 것 같다고 죽을 드시라고 하면서 돌아갔다. 별일이 아닌 거라 생각하고 직원들도 돌아가고 성근이도 약속이 있다고 자리를 떴다. 사위와 외손녀 문숙이가 죽거리로 좁쌀을 사서 아버지 집에 갔다. 문숙이가 방에 가보니 아버지는 어머니 박용길 장로와 손님들에게 둘러싸여 토하시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고 한다. 손님들은 “목사님, 목사님 정신 차려보세요” 하며 등을 두드리고 흔들고 했는데 결국 아버지는 쓰러지고 말았단다. 사위는 119에 연락하고 집에 돌아와 있던 나에게도 빨리 오라고 전화를 했다. 나는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차를 가지고 아버지 집으로 가 보니 벌써 돌아가신 것 같았다. 구급차가 오자 사위가 가까운 한일병원으로 모시고, 나와 첫째며느리 정은숙은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어머니와 손녀 문숙이는 집에 남아 있었다. 병원 응급실로 가니 의사는 이미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했다. 그때가 오후 8시 35분 경이었다. 우리는 가족들과 유원규 목사님께 연락을 드리고 한일병원 영안실을 잡았다. TV에 자막으로 속보가 나오고 9시 뉴스에서 보도되면서 놀란 가족, 친지들의 황망한 발길이 집으로, 병원 영안실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알리지 않았어도 많은 분들이 언론보도를 보고 달려왔다.     망연자실한 박용길의 모습 잊지 못해 집에 있던 외손녀 문숙은 전화를 받고 망연자실한 할머니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임수경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집으로 찾아왔다가 황급히 병원으로 달려가던 모습을 기억한다고도 했다. 가까운 수유리 한신대 교수들이 오셔서 집에서는 장례를 치를 수 없으니 빈소를 한신대로 옮기자고 제안해 주셨다. 그날 밤으로 빈소를 한신대 강의실로 옮기고 조문객을 받기 시작했다.     ◇ 한신대에 마련된 문익환 목사의 빈소. 동생 문동환 목사가 조문객과 인사하고 있다.   겨레장으로 5일 동안 장례 치르기로 급히 장례위원회가 꾸려졌다. 국장도 국민장도 할 수가 없으니 남북 겨레의 뜻을 모아 겨레장으로 5일 동안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장례일정 등은 장례위원회에서 결정하고, 예배와 손님 접대 등은 여러 단체들이 순번을 정해 담당했다. 예배는 학교 안 예배실에서 보고, 학생 기숙사 식당을 식사장소로 정했다. 옛 식당 자리에서는 걸개그림을 그리고 운동장은 주차장으로 썼다. 마침 겨울방학이어서 학교 전체를 장례식장으로 쓴 셈이다. 학교 측과 소소한 시비도 있었다. 신학교에서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였고 장례 담당 측에서는 조문객에게 그 정도 대접은 해야 한다고 맞섰다. 조문객들이 끝도 없이 모여들었다. 친지와 동지들뿐만 아니라 학생, 노동자들이 단체로 왔다. 조문객들이 줄을 지어 여러 명씩 한꺼번에 절을 하고 조화를 바쳤다. 모든 일정을 장례위원회에서 주관하여 가족들은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 문익환 목사 장례식에서 박형규 목사      장례식은 1월 22일 한신대 마당에서 치르고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노제를 지냈다. 노제 장소까지는 운구차를 앞세우고 만장을 휘날리며 행진을 하였다. 성근이는 영정을 들고 지하철로 종로 3가 통일맞이 사무실에 갔다가 노제 장소로 갔다. 알려진 배우가 영정을 들고 가니 몇몇 사람들은 그렇게 가야 하는 줄 알고 따라가기도 했다고 한다.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했다. 마석까지는 당국에서 교통통제를 해주어 신호에 걸리지 않고 갈 수 있었다. 몹시도 추운 날 눈발이 날렸다. 우리는 군중 속에서 떠밀려 다녔다. 재야에서 여러 논의의 중심을 잡아주던 분이 갑자기 가시니 모두들 황망해 하였고, 몇 분은 앞으로 재야의 전열이 흔들릴 거라며 걱정하였다.     ◇ 문익환 목사 장례식을 마치고 한신대에서 나가는 운구행렬과 만장을 들고 그 뒤를 좇는 사람들   아버지 묻으며 “너무 아깝다”는 생각 꼭 필요할 때 안 계시는구나! 이 죽음은 무슨 뜻이 있을까? 마석 모란공원 언 땅속에 관을 묻으며 나는 참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하관예배 때 배야섭 목사님 말씀이 “여기 문익환을 묻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심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큰 위로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뜻을 이어갈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에 여러 가지 소문이 많았다. 어떤 이는 독살 당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북과 범민련 회원들에게 배신당해 화병으로 가셨다고도 하고…. 격앙된 분위기 속에 어떤 이는 정말 문 목사답게 멋있게 가셨다고도 하였다. 같은 때 돌아가신 정일권과 비교하며 문 목사의 삶을 되새기기도 하였다. 가족들은 왕진 온 의사가 있었단 사실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그 의사에게 쏟아질 비난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한참 후 의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뉴스를 보고 너무 놀라고 그때처럼 의사 된 것이 후회스러운 적이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 마석 모란공원 묘소에서 상을 차리고 추도예배를 하고 있다.     병원진료 모시지 못해 죄인 된 심정 일흔이 넘은 나이에 감옥에서 10년 넘게 산 분을 병원 검진도 안 받고 쉼 없이 뛰어다니게 하고… 또 그런 심한 통증을 듣고도 병원으로 모시지 못한 자식들은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사실 아버지는 허혈성 심장질환이라는 병을 갖고 있었다. 방북 후 1989년 감옥에서 몸이 붓고 심한 통증으로 고생하자 많은 분들이 투쟁하여 1990년 1월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때 검진결과 나온 병명이었다. 여러 번 감옥생활하는 동안 힘든 내색 없이 보람 있게 잘 지낸다는 말만 했었는데 방북 후 투옥은 굉장히 힘들어하였다. 북의 통일방안을 유연하게 바꿔 남과 접점을 만들었고 남북정상회담 가능성까지 열었으니 정부가 이를 받아 나서면 될 텐데 당사자를 투옥하면 북과의 관계가 어렵게 된다는 염려였다. 그래서 북에는 자신의 투옥여부와 상관없이 관계개선에 힘써 달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남에는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간절히 자신의 뜻과 방북성과를 알리려 하였다. 가족들은 그때 생긴 마음의 병, 즉 감옥병이라고 생각했다. 되돌아보니 돌아가시기 몇 주 전부터 피곤해하고 힘들어 하셨다. 그때 왜 깨닫지 못했을까. 워낙 건강을 챙기고 관리하였기에 알아서 하시겠거니 너무 믿은 것이 아닐까. 그런 분이 병원에 가자고 할 때는 심각한 상태인데…. 죽을 만큼 아픈데도 신음 한마디 안 내고 참으시는 분은 또 뭔가? 우리는 허둥대기만 하다가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그런 자식들이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겠는가! 우리가 무심했고 안이하였다. 그래서 자식들은 죄인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우리를 나무라지 않을 것을 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 갈등이 있었던 범민련 동지들도 탓하지 않으실 줄 안다. 아마도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서로 이해하고 등 두드리며 함께 하셨을 것이다. 사실 돌아가시던 날 마지막 쓰신 편지가 그분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함께 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때 그분들이 받은 비난이 안타깝다. 우리는 그런 심정으로 조문객들께 절을 올렸다. 아버지의 남겨진 수첩에는 1월 18일 결혼식 주례가 적혀 있었다. 그 결혼식은 어찌 되었는지. 그 뒤 며칠까지 일정이 있고 그다음 수첩은 깨끗하였다. 너무 황망하게 가신 것이 다시 느껴졌다. 아버지는 가실 것을 미리 느끼셨을까? 어찌 보면 죽음을 넘어서 계셨던 것 같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촛불처럼 마지막까지 모두 태우고 가셨다고 느꼈다.     평생의 동지들 한꺼번에 다 보실 수 있으니… 처음 아버지 산소자리가 너무 좁고 높고, 해도 잘 안 든다고 속상해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때는 너무 급히 구하느라 어쩔 수 없었는데 ‘그래도 평생의 동지들을 한꺼번에 다 보실 수 있는 높은 곳에 계시니 좋지 않으세요?’하며 위안을 삼았다. 사실 처음에 가족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묻히신 소요산 가족묘역에 모시려 하였으나 장례위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배할 수 있게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모시자고 하여 그 뜻을 따랐고 2011년 어머니 돌아가신 후 합장을 해 드렸다.  그런데 1989년 함께 방북했던 정경모 선생이 끝내 귀국하지 못하고 2021년에 일본에서 돌아가시자 민주통일운동의 동지들이 문익환, 정경모, 유원호 세 분을 함께 모셔 통일동산을 만들자고 제안하셔서 이제 마석 모란공원 양지바른 곳에 모시게 되었다.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있는 늦봄의 묘역. 평생 동지인 유원호, 정경모 선생과 함께 나란히 모셔졌다.

  • 월간 문익환_1월 <늦봄의 별세>

    🈷️ 늦봄의 마지막 기록들

    자서전은 없지만… ‘삶이 위대한 기록’   [편집자주] 기록은 기억을 이끌어 낸다. 추모란 고인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이기에, ‘죽음이라는 사건’과 ‘기록’은 아주 가까이 닿아있다. 김초엽의 SF 소설 『관내분실』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 딸의 이야기를 다룬다. 글 속의 도서관은 묘소와 봉안당을 대체하는 추모의 공간이며, 고인의 거의 모든 데이터를 담아 영상으로 재현하는 ‘마인드’를 열람하는 공간이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구현된 공상과학의 세계이지만 죽은 이를 떠올리며 기록을 찾아간다는 현상은 현실 세계에서도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의 소장 기록은 거의가 유물이다. 고인이 남긴 기록으로 가득 차 있다. 『월간 문익환』 1월호에서는 문익환 목사 29주기를 맞아 그의 마지막 순간의 기록과 장례 및 추모 기록을 소개한다.       아픔이 아닙니다 결코 아픔이 아닙니다 아픔 딛고 넘어가는 절망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죽음도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 이상입니다 그것은 겨레입니다 겨레의 부활입니다 겨레의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 문익환의 시 「당신의 청춘은」 중에서        통일의 집 대문 앞 손님들 배웅 사진 ▲마지막 모습 문익환 목사가 남긴 마지막 사진은 1994년 1월 17일, 그러니까 유명을 달리하기 바로 전날 밤 박용수 기자가 찍은 것이다. 통일의 집 대문에서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손님들을 향해 왼손을 번쩍 들어 배웅하는 모습이다. 빨간 마고자와 감색 바지의 한복 차림이었다. 정경모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문 목사는 17일 밤늦게까지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쪽 의장에게 편지를 썼다고 하는데 그날 통일의 집에서 새로운 통일 운동체 관련한 모임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 자택(통일의 집) 대문에서 손님을 배웅하는 문익환 목사. 별세 전날 밤 모습이다(1994. 1. 17.). ⓒ 박용수       범민련 대표자들에게 “답신을 기다립니다” ▲마지막 메시지 범민련의 남쪽·북쪽·해외 본부 각 대표자에게 썼다는 편지가 그가 남긴 마지막 기록이 되었다. 문 목사가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이라는 새로운 통일 운동체를 조직하며 범민련 남쪽 본부 의장직을 사퇴하자 범민련 측의 반대가 있었다. 그에 대해 통일을 바라는 운동 자체가 하나가 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호소의 내용이 담긴 답신이었다. 날짜는 1월 18일로 쓰여 있다. 이 답장이 팩스로 보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익환 목사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편지가 공개되면서 메시지는 전달되었을 것이다.         “ … 이 중대한 시기에 저는 범민련 남쪽본부 준비위원장으로서 제 직책을 다 못하고 도중하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감천만입니다.  제가 남쪽본부 준비위원장에서 물러난 것은 통일운동을 그만두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남쪽의 통일운동을 더 크게 묶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이 중대한 시점에서 우리는 둘로 갈라져가고 있습니다. … 통일운동 자체를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면서 반세기에 걸친 민족분단의 역사를 청산하고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묶는 일을 하겠다고 어찌 감히 말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 7천만 겨레의 통일의지를 담아낼 틀을 다시 짜고, 세 지역의 통일운동이 한 흐름이 될 수 있는 길 또한 진지하게 모색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 분의 답신을 기다립니다.  94. 1. 18 서울에서 문익환 올림”      ◇ 문익환 목사가 남긴 마지막 기록. 범민련 남쪽·북쪽·해외 본부 각 대표자에게 쓴 편지(1994. 1. 18)     방명록만 20여 권…봄길이 나중에 필사 ▲장례 기록 문익환 목사의 타계와 장례 관련 기록은 당시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었기 때문에 뉴스나 신문 검색으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아카이브에서 소장 중인 장례 관련 기록은 장례 관련 안내문, 방명록, 조의금 내역, 장례식 사진, 기사 스크랩 등이 있다. 빈소를 찾은 이가 남긴 방명록은 20여 권에 달하는데 방명록에 적힌 추모 문구를 아내 박용길 장로가 따로 필사한 노트가 인상적이다. 문익환 목사가 시작하였으나 실행하지는 못한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이라는 과업을 앞두고, 장례 후에 홀로 방명록을 한 장씩 넘겨보며 문장을 정서했을 박용길 장로를 떠올리게 된다.    “날씨도 몹시도 추웠던 1994년 1월 18일 문 목사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우리 민족이 준비 없이 해방을 맞아 분단이 되었으니 통일은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며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을 시작해놓고 열흘 만에 돌아가시니 나는 그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부모님과 같이 네 식구가 살던 집에 나 혼자 남아 그 집을 ‘통일의 집’이라고 붙여놓고 유품들과 사진, 자료들을 보관하고 전시하여 놓았다.” (박용길 2011 「나의 이야기」)       ◇ 조문객이 남긴 방명록을 박용길 장로가 정서한 추모글 노트     별세 이후 전보-서신-행사기록 등 다양 ▲추모 기록 문익환 목사를 추모하는 기록은 1994년 1월 18일부터 지금까지도 만들어지고 있다. 타계 소식이 전해진 직후 각지로부터 도착한 전보와 서신, 미국과 일본에서의 추도식 기록, 묘비제막식 및 공연 추모 행사 기록 등은 별세 당시에 주로 생산되었다. 그리고 모란공원 묘소에 비치된 방명록의 글과 매해 1월에 치러지는 추도식 기록은 계속해서 축적되는 기록이다. 그 외 여러 정기간행물에서 문익환 목사 추모 특집호를 내기도 했다. 『월간 문익환』도 늦봄 문익환을 기리는 하나의 기록으로 아카이브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 각지에서 발송된 추모 전보(좌)와 3주기 추모 행사 팸플릿(우)    ◇ 여러 정기간행물에서 발간한 문익환 목사 추모 특집호     추모 관련 기록을 찾다 보니 주기별 정리가 되어있지 않고 사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추모 행사는 했지만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연도도 있을 것이다. 2024년이면 어느덧 30주기를 맞는데 누락된 기록의 보완이 절실한 때이다. 추모 행사 기록 소장자들의 기증을 기다린다. (문의: ✉️ tongilhouse@daum.net / 02-902-1623)           자서전 한 권 남기지 못하고… 문익환 목사의 죽음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사건이어서 죽음을 준비하는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못하였다. 문익환 목사의 부모 문재린 목사, 김신묵 권사가 말년에 자녀들과 함께 구술 기록, 회고록, 병상일지 등을 남긴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문 목사의 장녀 문영금 통일의 집 박물관장은 아버지가 자서전 한 권 남기지 못하고 떠난 것을 아쉬워했다. 그의 입으로, 손으로 직접 정리한 자서전은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가 남긴 방대한 기록이 있다. 이제 기록을 읽고, 정리하고, 그의 발자취를 통해 가르침을 받는 것은 남겨진 우리의 몫이다.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쓰는 것 보다는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수동적 내향인, ISTP.     [참고문헌] 박용길 (2011). 「나의 이야기」 『씨알의 소리』 2011년 11·12월 통권 219호 정경모 (2009. 12. 08). 🔗「길을찾아서: 뜬소문 고초겪다 눈 감은 문 목사」. 한겨레

  • 월간 문익환_1월 <늦봄의 별세>

    🈷️ 장례위원장 문익환, 젊은 열사들의 마지막 길 배웅

    “꽃 같은 인생을 바치는데, 살아 있다는 게 부끄럽다”     ◇석방 후 바로 찾아간 이한열 열사 빈소에 절하는 문익환 목사(1987. 7. 8.)     장례위원장 맡고 여섯 번째 감옥행 늦봄은 1991년 6월 6일 현충일 아침, 집을 나서면서 연행되어 여섯 번째 수감생활을 시작했다. 시위 도중 토끼몰이식 진압으로 사망한 김귀정 열사 장례위원장으로서, 김 열사의 빈소로 가려던 길이었다. 사망 사건을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지며 또 다른 대학생 희생자가 나올 수 있다고 우려하는 전화를 받고 나선 길이었다. 소위 ‘분신 정국’에서 그가 열사들의 장례위원장을 연속으로 맡아 활동하며 학생과 시민들의 투쟁 중심에 서게 되자 형집행정지가 취소되어 재수감된 것이었다. 수감 직후 편지에서 늦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난 이번 다시 감옥에 들어오기까지 한 마흔 날 동안 행복과는 거리가 먼 슬픈 나날을 보냈다는 거 너 잘 알지? 어쩌면 한 달 동안에 열한 사람이나 맞아 죽고 몸에 불질러 죽고 할 수 있니? 그 장례식을 치러 주느라고 난 정신이 없었다. 그 슬픈 아버지,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붙들어 주느라고 난 제정신이 아니었단다.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손녀 문숙에게 쓴 답장 옥중편지 1991. 6. 14.) 한 달 동안 무려 열 한 사람! 4월26일 명지대 강경대 군이 백골단의 구타로 숨진 이후 5월 말까지 학생과 노동자 열 한 명이 분신이나 경찰 진압으로 사망한 것이었다(이 중 분신 1명은 생존). 강경대 열사 장례위원장을 맡은 늦봄은 이어서 5월 3일 분신한 천세용 열사, 5월 8일 분신한 김기설 열사, 5월 25일 사망한 김귀정 열사의 장례위원장을 맡아 6월 초까지 한 달여 동안 쉴 틈 없는 날을 보냈다. 강경대 열사는 사망 22일 만에, 김귀정 열사는 사망 18일 만에 장례식을 치렀는데, 그동안 재야는 여러 차례 규탄대회는 물론 책임자 처벌과 백골단 해체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 등을 전개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늦봄의 편지글을 짐작할 만하다.     1980년대부터 장례와 추도 맡고 추모시도 지어 늦봄은 분신 정국 시기뿐 아니라 이미 1980년대에도 민주화운동 열사들의 장례나 추도식을 이끈 대표적 재야인사였다. 1984년 박종만 노동 열사의 추도위원회 고문, 1985년 송광영 학생 열사의 영결식 추도 예배, 1986년 박영진 노동 열사의 장례식 설교, 1988년 조성만 학생 열사의 장례식 참석 등으로 열사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늦봄은 또한 시를 통해서도 열사들을 추모했다. 1986년~1987년에 쓴 김세진, 이동수, 박종만, 박선영, 김성애 열사의 추모시에서, 열사의 뜻과 함께 부모의 피맺힌 외침과 다짐을 그들 대신 토해 냈다.     “죄인 된 심정, 일흔 넘어 살아 있는 게 부끄러워”  늦봄은 열사들의 분신과 희생을 막지 못한 책임에 괴로워하고 자책하는 심정을 드러냈다. 1991년 강경대 아버지에게 쓴 편지, 1986년 5월 20일 서울대 강연 도중 이동수 군이 투신한 다음 날 수감된 후 집으로 보낸 편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저는 꼭 죄인 된 심정으로 꽃 같은 젊은이들의 장례식을 치러주고 있었습니다. 그 어린 것들이, 그 꽃 같은 인생을 민족의 제단에 팍팍 아낌없이 바치는데, 일흔 넘도록 살아 있다는 게 그냥 부끄러울 뿐이었거든요” (경대 아버지에게 보낸 옥중편지 1991. 8. 7)    “왜 요새 젊은 학생들은 그렇게 제 몸에 불을 지르고 죽지? 너 서울대학에 가거든 다시는 자결하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일러주어라.” 서울대학에 강연 간다니까, 어머님이 제게 신신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중략) 신문에 보니까 제가 과격파 두목이 되어 있는 걸 알고, 그 이야기부터 하다 보니 어머님의 부탁 말씀을 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후회막급이라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어머니께 보낸 옥중편지 1986. 6. 13.)        ◇ 강경대 열사 장례식장에서 앉아있는 문익환 목사와 백기완 선생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열사들의 부모를 위로하고 살아갈 기운을 북돋우는 것도 늦봄의 일이었다. 교도소로 늦봄을 찾아온 열사들의 어머니를 껴안고 아픈 가슴을 나누었고, 실의에 빠진 채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부모에게 편지를 보내 용기를 불어넣어 주려 애를 썼다   성만이가 보고 싶으시면, 눈을 감고 기도하세요.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합장하고 눈을 감고만 있어도 성만의 기도 소리가 들릴 겁니다. 성만이가 무엇을 빌고 있는지는 환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송광영, 조성만 어머니의 교도소 방문 후, 조성만 부모에게 보낸 옥중편지 1990. 8. 12.) 경대 어머니, 경대 어머니 가슴만 찢어지는 게 아닙니다. (전)태일의 어머니는 찢어진 가슴을 안고 20년이나 노동자들을 제 아들 태일이 같이 사랑하며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가 되어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찢어진 가슴으로 피를 토하며 살아가는 어머니들이 경대 어머니 곁에 얼마나 많습니까? (강경대 어머니에게 보낸 옥중편지 1991. 7. 11.)       ◇조성만 열사 장례식에서 하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문익환 목사와 정계 인사들     열사들의 연속된 죽음이 비난받을지라도, 선거 등 정치적 기대가 허물어져 열사들의 죽음이 헛된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늦봄은 절대 좌절하지 않았다. 스스로 새로운 희망을 품고자 마음을 가다듬었고 열사들의 부모들에게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자고 다독였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싸움은 아홉 번을 져도, 열 번째 마지막 한 번을 이기는 쪽이 이기는 겁니다. 장준하의 돌베개를 읽어 보십시오.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도 (중략)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하여 제게도 용기를 주십시오. 용기를 … (강경대 부모에게 보낸 옥중 편지 1991. 7. 1.) 장준하는 독재자보다 먼저 죽었지만 결국 역사의 승자는 장준하였음을 되새긴 늦봄은, 민족의 두 횃불 장준하와 전태일이 앞서간 자랑스러운 행렬에 열사들이 당당히 서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열사들의 죽음 멈추려 방북 결심  열사들의 죽음은 늦봄 자신에게 큰 채찍이 되었다. 1986년 김세진, 이재호에 이어 이동수 군이 불덩어리가 되어 떨어지는 걸 본 다음부터 줄곧,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자나 깨나 그걸 생각한 그는, 1988년 6월 10일 연세대 집회가 끝나고 남북 학생 예비회담이 열리는 판문점으로 가려는 학생들의 비장한 모습이 곤봉과 최루탄으로 좌절되는 걸 보면서, 죽음의 행렬을 막는 길이 여기에 있다며 방북을 결심했다(옥중편지. 1989. 6월~7월). 분단 상황을 핑계로 민주주의를 짓밟는 독재정권 아래에서, 통일 운동으로 민주화를 견인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통일이 민주이며 민주가 통일이라는 그의 굳은 신념을 실행에 옮기는 일이었다.  늦봄은 전태일과 장준하와 젊은 열사들로부터 새로운 길을 얻었다. 그들은 늦봄을 일으켜 세우고 이끄는 힘이기도 했다. 1991년 분신 정국으로 여섯 번째 수감되었다가 1993년 3월 석방된 늦봄은 ‘민족민주열사범국민추모사업회’ 위원장을 맡았고, 추모사업회는 6월 10일~13일을 ‘6월항쟁 기념 및 민족민주열사 추모 기간’으로 선포하고 각종 기념-추모 행사를 열었다. 다음 해 1월 늦봄은 타계했고, 이후 매년 여러 형식의 추모행사들이 이어지고 있다.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 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 월간 문익환_1월 <늦봄의 별세>

    🈷️ 늦봄이 맞이한 죽음의 순간들

    “눈을 번쩍 뜨시죠. 새 세상이 보일 겁니다.    저승과 이승이 하나인 더 큰 세상 말입니다” 늦봄의 인생은 함께 살아간 동시대인들의 죽음에서 특별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친했던 벗으로 알려진 윤동주와 장준하를 비롯해 수많은 학생과 동지들의 죽음은 그에게 새로운 삶을 선택하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에도 죽음을 마주했던 여러 고비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없었으면 난 저승 사람” ▲폐병 걸린 청년   ◇금강산으로 휴양을 가서 설산을 뒤로 하고 서 있는 문익환, 1941년     박용길과 결혼하기 전인 1941년, 문익환은 생애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훗날 그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지요.    “명주실처럼 예민한 신경을 가지고 폐병, 늑막염, 위산 과다로 죽어가던 몸과 마음을 소리 없이 감싸주고 떠받들어준 그 사람이 없었다면 저는 벌써 저승 사람이었을 겁니다(문익환 1990. 6. 1).” 문익환은 폐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금강산으로 들어가 6개월간 치료에 전념했고 드디어 1944년 6월 결혼반대를 극복하고 코스모스같았던 박용길과 평생가약을 맺었습니다. 그의 나이 54세 때 펴낸 첫 시집 『새삼스런 하루』에 실린 시 ‘덤’에는 결혼을 성사시킨 비결이 무엇이었는지가 담겨있습니다.     덤 (중략) 여섯 달 살고 혼자되어도 좋다며 시집 온 아내- 그 나팔꽃 같은 마음에 내 목청을 다 쏟고 펄럭이는 가슴 옷자락에 아내의 체온을 묻히며 살기 벌써 28년, 이제사 나는 덤으로 사랑을 알 듯하다.     한약 먹고 저승문턱에…왼쪽 청각 마비 ▲나약한 신체, 한쪽 귀가 멀다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보낸 편지, 1965년 10월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후 구약학 교수, 교회 목사로 활동했던 문익환은 마흔다섯 살이던 해 병약했던 그를 위해 제자가 구해온 한약을 먹고 ‘저승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오면서 한쪽 귀를 잃었다고 합니다. 그 후 1965년 9월 안식년 삼아 방문했던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그는 미국의 병원을 다니며 난청이 된 한쪽 귀를 다시 찾게 되기를 소망하기도 했었지요.   “제 귀는 아직 한 번 더 test를 받아야 알겠지만 어떡하면 수술받고 다시 듣게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듭니다. 의사는 무어라고 말은 않지만, 전일 test를 받을 때 왼쪽 중간에 기계를 대고 보내는 소리가 들렸었거든요. 그렇게만 되면 미국 온 보람이 있고도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좋아하다가 실망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마는(문익환, 1965. 10).”      “아직 2주일은 버틸 수 있어” ▲죽을 결심으로 했던 21일간의 단식   ◇큰아들 호근이 쓴 단식기, 1977. 6. 1-7.1   문익환 목사는 감옥 안에서 여러 차례 단식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전주교도소에서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21일간의 단식을 하며 그는 죽을 결심을 했고 마지막 시를 쓰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큰아들 호근이 쓰고 정리한 ‘아버님, 문익환 목사의 단식’으로 이름 붙여진 단식기는  총 26페이지짜리 기록인데 단식 중인 아버지를 6월 1일부터 8일 이후까지 날짜별로 면회한 이야기와 당시 늦봄이 쓴 옥중편지를 모아 정리한 것입니다.    “1977년 6월 1일 … 단식하신다면서요? 응, 이 나라가 민주화의 방향으로 전환할 때까지 무기한으로 하는 거야. 사람은 죽을 자리를 잘 찾아야 하는 건데, 필생의 사업인 성경번역이 일단락이 되었고, 또 지금 내가 민주화 운동의 핵심적인 위치에 노이게 되었으니, 이처럼 좋은 죽을 자리가 어디 있어?…  이건 투쟁이 아냐. 저 사람들이 나같은 거 단식한다는데 눈이나 깜짝 하겠어? 그래도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 나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해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지. 아직 두 주일은 더 버틸 수 있어….”     어머니도, 함석헌 선생도 단식 동참 ▲우리로 하여금 하나 됨을    ◇함석헌 선생이 보낸 편지, 1977. 9. 7   고령의 나이로 감옥에 있으면서도 그의 ‘불식(不食)’은 매우 잦았습니다. 오죽하면 그를 담당했던 당직 교도관들이 동정 보고 시 취식 상황에 대한 보고를 함께 올리기도 했을까요. 1977년 9월에도 늦봄은 민주회복을 위해 30일간 금식기도를 하겠다고 했는데 이를 전해들은 가족, 특히 고령인 모친 김신묵은 아들이 중단 할때까지 본인도 함께 금식 하겠노라 해서 많은 이들이 걱정했었지요. 함석헌 선생도 늦봄의 단식을 만류하기 위해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혼자서 하지 말고 함께 해 나가자고요. 함 선생께서는 편지 속에서 감옥 안과 밖이 차례로 100일간 단식을 하며 하나됨을 얻자고 간곡하게 청하고 있습니다.    “....한 번에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씨ᄋᆞᆯ 앞에 다시죽고 다시 죽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이 아닌가 합니다…쾌히 승낙하시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 됨을 얻는데서 오는 기쁨으로 속에서 힘이 솟음침을 경험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1977년 9월 7일  늙은 바보새”     별세 나흘 전 “저승과 이승이 하나된 세상” ▲더 큰 세상이 보일 겁니다    ◇박남길, 박용애에게 보낸 편지, 1994. 1. 14   1994년 1월 18일 별세한 늦봄은 그로부터 불과 나흘 전, 남편을 잃은 처형에게 위로 편지를 썼습니다.    “박남길 장로님, 박용애 님. 어느 아침 눈을 번쩍 뜨시죠. 새 세상이 보일 겁니다. 저승과 이승이 하나인 더 큰 세상 말입니다(문익환, 94. 1. 14).”    평소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다” 라고 했던 늦봄 문익환, 그에게는 삶과 죽음조차 하나이고 더 큰 세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늦봄문익환아카이브가 늦봄의 뜻을 널리 알리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열어가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의 삼 년 묵은 아키비스트로 늦봄과 봄길의 기록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하는 아카이브하는 사람이다.  

  • 월간 문익환_1월 <늦봄의 별세>

    [시 속의 인물] 11. 송광영 학생열사

    [늦봄과 ‘이 사람’]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제 똥 구린 줄이라도 아는 세상이 되기만 한다문사 광영인 백 번이라도 제 몸에 불 싸지를 거구만’   ◇송광영 열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성남 경원대 교정에서 분신  1985년 8월 15일 광주광역시 금남로에서 노동자 홍기일(당시 25세)이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불길에 휩싸인 몸으로 ‘8.15를 맞이하는 뜨거운 무등산이여!’라는 제목의 유서를 뿌리며 “광주 시민이여 침묵에서 깨어나라”고 외쳤는데, 일주일 만인 22일에 운명했다. 한달 후 9월 17일에는 성남시 경원대학 교정에서 법학과 2학년 송광영(당시 27세)이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분신한 그는 ‘광주 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학원 악법 철폐하고 독재정권 물러가라’고 외치다 쓰러졌고, 1달 뒤인 10월 21일 운명했다. 홍기일 열사가 운명하자, 경찰은 1,000여 명을 동원,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연행하고 가족들의 절규 속에 시신을 탈취하여 미리 준비한 관에 입관, 열사의 부친만 동행한 채 화순군 야산의 매장지에 관을 매장하는 폭거를 자행하였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의장이던 늦봄과 민통련 간부들은 8월 24일 열사의 영결 예배에 참석하러 광주 한빛교회로 내려가고자 했지만, 경찰이 이들을 모두 자택에 차단하는 바람에 참석은 불발되고 말았다.   경찰 방해로 영결식 없이 매장 송광영 열사의 장례도 홍기일 열사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가 운명하자 경원대 학생들이 교내에 분향소를 설치했으나 학교와 경찰이 이를 철거하였고, 장례식 준비를 위해 서울 면목동 기독병원에 모인 재야인사 17명은 경찰에 연행되어 열사의 소식을 「민중의 소리」 호외로 알린 사실 등을 조사받았다. 송 열사도 경찰의 방해로 영결식 없이 매장되었다.   청계 노조 활동하다 경원대 입학 광주 태생의 송 열사는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청계 노조에서 활동하다가 방위병 제대 후 고졸검정고시를 거쳐 경원대에 입학했다. 실존주의 철학연구회와 경제문제연구회를 창설한 그는 군부 독재정권이 학생 시위 탄압을 위한 학원안정법 제정을 획책하자 악법 철폐와 광주 학살 책임을 요구하며 분신한 것이었다. 그는 병상을 찾아온 민주인사와 학생들에게 “왜 오셨습니까. 오시지 말고 밖에서 싸워 주십시오”라며 투쟁을 독려하였다. 늦봄은 송 열사가 화마와 싸우던 1달 동안 자주 병원을 찾아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11월 28일에 가진 별도의 영결 예배에서 계훈제 선생과 함께 추도사를 했다.   늦봄 ‘나의 조국 나의 사랑’ 추도시 늦봄의 시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은 송 열사 추도시다. 11월 28일 추도 예배를 위해 준비했거나 아니면 이후 85년 말~86년 초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시 속에서 늦봄은 운명한 열사와 그의 어머니(이오순 씨)에게 빙의된 듯한 모습으로, 열사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장면과 속삭이는 말, 어머니의 애끓는 외침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늦봄은 열사의 차가운 이마를 만지며 오싹한 떨림을 느꼈다. 그 떨림은 ‘광주’이며 또한 앞서 운명한 ‘홍기일 열사’라고 말했다. 화순 태생의 홍 열사는 5.18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하여 총상을 입었던 노동자로, 송 열사와 똑같은 뜻을 갖고 분신했기 때문이었다.  시 속에서 송 열사의 어머니는, 자신은 민주주의가 뭔지 몰라도, 그러나 자식새끼의 마음, 광영의 마음이 민주주의라면 ‘민주주의 만세’라고 외친다. 광영의 몸은 식었어도 에미의 가슴이 불붙고 있으니 광영의 마음도 어찌 식겠냐고, 그 마음이 식으면 조국이고 민주주의고 다 거짓말이라고 절규한다. 대학 졸업장도 못 받고 장가도 못 가고 땅에 묻히는 아들이지만, ‘제 똥 구린 줄이라도 아는 세상이 되기만 한다문사 광영인 백 번이라도 제 몸에 불 싸지를 거구만’이라 말하는 것이 어머니의 굳은 의지이고 광영에 대한 믿음이다.  송 열사 사후 어머니가 쓴 글을 보면, 광영이는 교통사고를 당한 친구를 위해 10일 동안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다녔고, 학원 다닐 때 장학금을 타서 신문팔이 소년을 주고 왔다고 말하는 아들이었다고 한다. 없는 자를 보면 돕고 싶어 하고, 어머니의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면 꼭 효도할게요”라고 말하는 착하고 정이 많은 청년이었다. 어머니는 경찰과 싸우며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아들이 왜 죽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고, 진정한 민주주의 나라를 만들고 싶은 뜻을 아들의 영혼에 빌었다.   송광영 열사 추모사업회 회장 맡아 송 열사의 영결식 이후 늦봄은 송광영 추모사업회 회장을 맡아 열사를 기렸다. 그러나 1986년~1987년, 1989년~1990년 중 수감되었던 늦봄은 회장 구실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며 편지로 미안함을 표했다. 이 편지에 따르면, 광영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문익환 목사와 이OO 목사 때문에 막내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목사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가,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장례식을 꼭 목사들이 해주어야겠다고 버텼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는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서 활동했는데, 늦봄은 이소선 여사가 몸이 불편할 때는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는 분이라며 고맙다는 마음을 드러냈다.   이제 광영의 자리를 의젓하게 어머님이 메우며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서 싸우시는 걸 보면서 광영이도 지하에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광영의 어머니가 이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까지 되었으니, 다만 놀랄 뿐입니다. (옥중편지. 1990. 8. 22. 광영이 어머니가 5월에 안양교도소로 편지를 보내고 8월 8일 전주교도소로 면회를 다녀간 것에 대한 답신임) 1991년 유가협 부회장을 맡은 송 열사의 어머니는 강경대 치사 사건 공판 도중 부당한 재판에 항의하다가 1년 6개월의 수배 생활을 하게 된다. 1993년 송 열사의 묘를 마석모란공원으로 이장하는 일까지 마친 어머니는 1994년 1월 늦봄의 별세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일주일 동안 시름시름 앓은 어머니는 모란공원까지 가서 늦봄의 마지막을 지켜보았고, 이후 ‘목사님만 뵈면 힘이 솟았는데 이젠 살맛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결국 1월 26일 심장마비로 쓰러져 막내아들과 늦봄이 묻힌 모란공원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긴 채 운명하고 말았다.  1990년 송 열사의 5주기 되는 해에 추모비가 경원대 학생회관 앞에 세워졌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96년 9월 추모비가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학교 측이 추석 연휴 직전에 벌인 일이었다. 이에 유가협은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 추모비 탈취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밤샘 농성 등 2개월 동안 처절하게 노력한 끝에 훼손된 추모비를 되찾았다. 12월에 추모비를 다시 세웠고, 2022년 지금은 1991년 분신한 천세용 열사의 추모비와 함께 교정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열사정보 https://www.kdemo.or.kr/notification/calendar/post/3491   ◇양심수 석방 촉구대회에서 송광영 열사 어머니 이오순 여사와 인사하는 늦봄    ◇송광영 열사 어머니가 안양교도소로 보낸 엽서      나의 조국 나의 사랑 문익환 1985년 10월 21일 새벽 면목동 기독교병원 응급실에서 나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숨이 멎어 하늘이 된 당신을 죽은 듯이 아주 영 죽어 버린 듯이 당신은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눈을 감고 무엇을 보시나요 입을 다물고 무엇을 말씀하시나요 나의 이 더러운 손 당신의 거룩한 이마에 얹어 보았습니다 지금은 온기 하나 없는 싸늘한 이마 오싹하며 나는 부르르 떨었습니다 그 떨림은 광주였습니다 홍기일 열사였습니다 그것은 조국이었습니다 두 동강 나 찢어지는 아픔 몸살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결코 절망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픔 딛고 서서 살 속 뼛속으로 파고드는 절망을 불살라 가슴 가슴에 모닥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중략) 시상에 죽은 내 아들 광영이를 왜 이리도 무서워한당가 광영이는 이젠 말도 못하는디 말이여 제 몸에 불지르고 뛰지도 못하는디 어쩌자고 모두들 이 지랄이여 왜들 겹겹이 둘러싸고 문상도 못 오게끄럼 막는당가 왜 문 목사랑 계 선생이랑 이 목사랑 끌어낸당가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디 그기 정말인개비여 꼭 제 방귀에 놀라는 토끼 꼴이랑께 광영의 굽힐 줄 모르는 마음이 무서운 거 아니겠습니까 정말이지 그렁개비여 광영의 몸이사 이제 싸늘하게 식었지만 그 맴이사 어디 식겄어 어림반푼 없는 소리지 이 에미 가슴 이리 불붙는디 그 맴이 어찌 식겄어 그 맴이 식는다면 당신들이 떠들어쌌는 조국이고 민주주의고 다 거짓말이여 거짓말 자유고 진리고 정의고 다 개나발이여 개나발 맞습니다 어머니 그 마음이 식으면 모든 게 개나발이라는 말 천 번 만 번 옳은 말입니다 우리 아들은 어려서부터 거짓말이라고는 몰랐응께 이기 돌이라 하면 그기 돌인 거고 이기 나무라 하면 그기 나무인 거고 난 형들처럼 안 살 것이여 하더니만 이렇게 제 몸에 불 팍 지르고 죽지 안 히였겄어 그렇군요 어머니 죽음으로 산 그의 진실이 그리도 무서운 거군요 거짓말로 살이 피둥피둥 오른 것들이 우리 아들 광영의 그 거울 같은 마음씨가 어찌 안 무서울 것이여 그의 진실 앞에서 세상의 온갖 거짓이 숨을 쉴 수 없이 된 거지요 그렇다문사 을매나 좋을 것이여 내 아들이사 대학교 졸업장 못 받아 보고 장개도 못 가보고 땅속에 들어가 썩어 버리겠지만 제 똥 구린 줄이라도 아는 세상이 되기만 한다문사 광영인 백 번이라도 제 몸에 불 싸지를 거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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