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문익환_5월 <문익환의 가족>

    📰 5월호 인쇄본(PDF)으로 읽기

    [🔗pdf 다운받기]  

  • 월간 문익환_5월 <문익환의 가족>

    🈷️ 늦봄의 옥중편지로 본 부친 문재린의 삶

    “부모님은 제게 높은 ‘삶’을 물려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 끌어들여 민족 구원 신념 민족주의 과제 안고 몸부림 친 수난사   아버님, 어머님은 저에게 큰 재산을 물려주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돈으로는 도저히 계산되지 않는 엄청난 유산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것은 맑고 뜨거운 마음이요, 만인이 우러러ㄷ볼 수 있는 높은 ‘삶’이었습니다. 저는 이 유산을 손상을 입히지 않고 후손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무언가 자그마한 것이라도 보태어 전하고 싶습니다(문익환 1981). 만인이 우러러볼 수 있는 높은 삶! 결혼 70년을 맞는 부모님에게 올리는 옥중편지에서 늦봄은 부모님의 삶을 그렇게 표현했다. 늦봄의 부모님은 진실로 그런 삶을 살았다.     명동촌 위험에 처하자 자진해 구속수감 늦봄의 부친 문재린은 1910년대 북간도 민족운동의 중심이었던 명동촌에서 자라고 배웠다. 3.1운동 때에는 민족운동단체인 서기와 기자로 일하며 민족운동에 기여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이 기세가 높아지면서 일제의 대토벌작전이 시작되었고 명동촌 전체도 위험에 처하게 되자, 문재린과 4명의 지도자들은 주민 전체를 대신해 자수하기로 결정하고 자진하여 구속되었다. 죽음을 각오한 희생정신과 동족에 대한 책임의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재린 목사 회고 기록- 명동학교. 북간도 이주 목적이 조국광복을 위한 인재양성이었음과 학교설립 경과와 정재면 초빙에 이르는 과정을 적었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일본어는 배우려 하지 않아 월남하기 이전 북간도에서의 삶 전 과정에서 문재린은 민족주의 정신으로 초지일관했다. 캐나다 유학 시절의 일이다. 제네바에서의 일본대사 연설내용이 전세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 대사가 “일본은 작은 섬이나 인구가 7천만이나 되는데 만주는 광대하나 개척이 안되었고 맹수로 인해 불안하니, 일본이 만주를 개척하면 일본과 만주인에게 모두 이익이다”라는 억지 주장을 폈기 때문이었다. 캐나다 빅토리아대 교수 학생 60여명이 모여 이 문제를 논의한 간담회에서 거의 모두가 수긍하는 반응을 보이자, 문재린이 서툰 영어로 반박했다. “내가 30년을 만주에서 살았고, 맹수가 민가에 내려온 적도 없다 ... 내게 더 좋은 제안이 있다. 만주보다 더 넓고 인구도 아주 작은 캐나다로 일본인들을 이주시키는 것이 어떤가?” 참석자들의 말문을 닫게 한 통쾌한 반박이었다.     ◇캐나다 유학 때 졸업가운을 입은 문재린 목사. 토론토 대학교에 포함된 빅토리아 대학교의 엠마누엘 신학교 석사과정을 마쳤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유학 후 귀국 도중 제네바에서 일본 대사가 불렀다. 여행을 즐기고 있느냐는 질문에 문재린은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나는 한국인이라서 별로 흥미를 못 느낀다”라고 응수했다. 일본대사는 곧 자리를 뜨고 말았다. 문재린은 독일어는 물론 나중에 러시아어까지도 조금 배웠지만 일본어는 결코 배우려 하지 않았다.   교회운동이 곧 민족운동이라 생각 문재린이 교회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것도 민족운동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기 위한 선택의 결과였다. 교사나 사업가가 자신에겐 잘 맞지 않음을 알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청년이 부족한 교회에 새로운 길이 있다고 확신했다. 명동촌은 이미 교회와 교육이 한 몸처럼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왔던 바, 문재린은 교회운동이 곧 민족운동이라 생각했다. ‘옳다. 내 한 몸을 교회에 바치는 수 밖에 없다’고 다짐했다. 그의 생각은 명동촌 유학자들이 처음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때의 정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북간도 명동 땅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김약연 목사님이나 우리 할아버님은 한국을 그리스도에게 접붙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한국에 접붙이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뿌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국인 것입니다(문익환 1981). 문재린은 유학에서 돌아온 1932년부터 월남하는 1946년까지 용정중앙교회를 목회 일을 맡으며 북간도의 지도자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그 중 만주지역 5개 교파를 하나로 통합하여 만주 조선기독교회를 설립한 일은 문재린이 가장 뿌듯해한 일 중의 하나다. 뿐만 아니라 15년간 은진중학과 명신여학교의 이사와 학부형회 간부를 맡았고, 제창병원 이사장, 용정중앙유치원 원장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며 동포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헌병대장에게 “날 죽여보라”며 대응 용정중앙교회 시무 시절, 일본인 헌병대장실에 호출되어 신사참배에 대한 생각을 질문받은 문재린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고 단언하며 헌병대장이 “너는 죽여야 할 반역자”라고 몰아치자 “죽여보라”며 목소리를 높여 대응했다. 이런 문재린을 일제는 늘 불온한 배일주의자로 감시하고 회유하면서 제거해야 할 지도자의 리스트에 올려놓고 있었다. 문재린의 삶은 살아있는 북간도의 역사였다. 민족의 구원이라는 과제를 안고 살아온 수난사였다.    아버님, 어머님이 선대에서 물려받은 과제는 실학이나 동학으로 실패한 민족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실학과 동학으로 실패한 민족사 속에 기독교 신앙을 끌어들여서 민족의 구원이라는 과제를 이룩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아버님, 어머님의 수난사는 이 과제를 안고 몸부림쳐 온 역사였습니다(문익환 1981).  늦봄은 부모님이 겪은 만주지역 한인들의 역사가 완성되어 남겨져야 함을 힘주어 말했다. 단순히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적-문화적으로 ‘민족의 구원사를 고구려 옛 강토인 만주로 확대’하기 위함’이고 ‘만주에 남아있는 동족들이 민족사의 계승을 분명히 자각’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으로 그가 안고 산 민족구원이란 과제는, 이후 세대가 분단극복과 통일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계속 안고 가야 할 과제라고, 늦봄은 생각하고 있었다.   역사란 결코 지난 날의 일들을 찾아내는 지적인 작업에 멎는 것이 아니죠. 역사란 지난날에서 우리 자신을 확인하고 거기서 이루려다가 채 못 이룬 일을 이어 그 과제를 이룩해 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문익환 1981)   ◇스코틀랜드 복장의 문재린 목사. 캐나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6개월 머무르며 유럽문물을 배웠고 미국인 스코빌을 사귀었다. 스코빌은 후에 익환과 동환과 선희의 미국 유학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워싱턴에서 시위 중인 문재린 목사. 문익환 목사의 이름과 수인번호를 가슴에 붙힌 죄수복을 입었다.. 문 목사는 백악관 앞에서 할복자살로 미국 정치인들의 생각을 바꾸겠다며 칼 한자루를 품고 갔다. ‘네가 나를 믿지 못하느냐’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서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문재린 목사 회고 기록- 캐나다 유학. 1922년 평양신학교 나무 아래서 혼자 유학을 기도했었는데 6년 후 캐나다선교부의 제안을 받고는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는 내용과, 유학 떠나기 전날 개천가에 지갑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사실을 적었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문재린 목사 회고 기록- 38선 탈출기. 소련군사령부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월남을 결심하고, 공산당 감시를 피해 문중 어른들께 인사도 못하고 용정을 떠났다는 내용이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1981. 4. 6-8) 문영금 문영미 엮음 (2006).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서울:삼인  

  • 월간 문익환_5월 <문익환의 가족>

    🈷️ 네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문재린

    일제에 공산당에 소련군에…죽음의 문턱 넘나든 일생 민족주의자 기독교인이었던 문재린은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고 공산당원들의 적이었다. 그로 인해 북간도 지역 지도자로서 피할 수 없었던 죽음의 고비를 네 번이나 맞닥뜨렸다.   ◇1941년 선교사 송별사진. 뒷줄 오른쪽 두번째가 문익환 목사. 그 옆이 문재린 목사.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무자비한 탄압…주민들 살리려 자수 첫 번째 죽음의 고비는 북만주 독립운동의 여파에 따른 것이었다. 1910년대 북간도에서는 민족운동 흐름이 거세어졌는데 명동촌은 그 중심이었다. 문재린은 명동중학교 졸업 즈음에 중국으로 유학, 3년 반의 중국생활을 마치고 1916년 명동촌으로 돌아와 교사를 거쳐 소비조합을 맡아 일했다. 독립운동이 거세어지자 문재린도 조합 일을 내던지고 간도 최대독립운동체인 의 지회 서기를 맡음과 동시에 의 기자가 되어 민족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용정 3.13만세운동, 봉오동과 청산리에서의 독립군의 승리, 15만원 탈취 사건 등으로 북만주의 독립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자 일본군은 1920년 8월부터 북만주 지역에서 무자비한 탄압을 시작했다. 10월에는 명동촌 인근에서도 청장년 33명이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명동촌도 무사하지 못할 것을 염려한 명동교회 간부들은 회의를 열고 주민 전체의 참변을 피하기 위해 문재린을 포함한 5명이 자수하기로 했다. 11월 10일 자수한 이들 간부 중 1명은 결국 처형되었고 4명은 1921년 2월 10일에 석방되었다.    헌병대 방공호에 갇혀…학살 모면 두 번째 죽음의 고비는 해방 직전에 찾아왔다. 1945년 7월 20일 용정에서 이권찬 목사와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함경도 성진헌병대로 끌려갔다. 헌병대 방공호에 갇혀있는 동안 두 번이나 서울, 함흥으로 이송될 뻔했으나 미군의 폭격이 심해 이송은 실현되지 못했고, 8월 11일 석방되어 12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전쟁에 패할 것이 분명해지자 경성의 일본군 조선헌병대는 조선의 유지들을 한꺼번에 학살할 것을 지시했고 이 때문에 두 사람이 끌려가게 된 것이라고 문재린은 나중에 듣게 되었다.     공산당원에 끌려가…은진중 동창이 풀어줘 세 번째와 네 번째 죽음의 고비는 해방 전후 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것이었다. 성진헌병대에서 풀려난 며칠 후 해방이 되었다. 중앙교회에 현수막을 붙여 해방을 축하했고 용정에서 한인회를 만들고 회장이 되어 새날을 꿈꿨다. 10월 1일 서울에서 열리는 기독교대회에 참석차 2주간 서울을 방문했다. 이승만 박사도 만났다. 용정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권유들을 뿌리치고 돌아온 며칠 후인 10월 18일 밤 공산당원들에게 붙들려갔다. 이승만 박사로부터 어떤 지령을 받았는지를 추궁받았지만 강력히 부인했고, 때마침 은진중학교 출신의 팔로군 3명이 용정에 와 있었기에 이들의 도움에 힘입어 1946년 1월 6일 풀려났다.   소련군 연길 감옥에 수감…무죄 석방 석방 3주 만에 다시 소련군 사령부 연길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반감을 품은 공산당원들의 고발 때문이었다. 미국의 스파이 아니냐는 취조를 부인한 끝에, 잡혀 온 30여 명 중 절반이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위험을 피하고 무죄로 풀려났다. 4월 26일까지 110일간의 고난이었다. 늦봄은 자신이 부친의 낙천적 태도를 이어받았다고 했는데, 문재린이 네 번의 사선을 넘을 수 있었던 원동력의 하나가 바로 낙천적 태도 아닐까? 하느님에 대한 믿음, 이로부터 나오는 자신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낙천적 태도! 늦봄은 그런 부친을 굳건하고 거대한 ‘흰 뫼’(백두산을 지칭)로 여겼다.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1981. 9. 8, 1982. 12. 24) 문영금 문영미 (2019).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삼인  

  • 월간 문익환_5월 <문익환의 가족>

    🈷️ 어머니 김신묵의 삶

    “아들아, 너는 겨레를 위해 감옥에 들어갈 몸이다” “고난을 정면으로 뚫고 보니 그것이 행복이었다” ‘민족의 어머니’ ‘조선의 어머니’ ‘통일의 어머니’이신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 늦봄의 어머니 김신묵 권사는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그리고 삼엄한 독재 치하를 거치는 민족적 수난 속에서 오직 기독교 정신과 나라 사랑 정신으로 약한 자, 억눌린 자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적으로 살았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조국의 통일을 소원하며 아름답게 생을 마감했다. 기억력이 비상하여 간도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간도 시절 경험을 들려주며 북간도 이민사 역사 이해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한 가족의 평안을 넘어 고난받는 이들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하늘나라의 행복과 기쁨이 민중의 아픔과 서러움 속에 있음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고난을 한 걸음도 비켜서지 않고 정면으로 대결하고 뚫고 90여 성상 살고 보니 그것이 더없는 행복이었다”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어머니에게 늦봄은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중심에서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밝은 새날을 위해 온몸으로 밀어 붙이며 전진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한다. 내 자식, 내 가정만을 위해 무도한 일들을 스스럼없이 행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이 많은 요즈음을 돌이켜보면 큰 울림을 주는 삶에 절로 숙연해진다. 아울러 진정한 기독교 정신과 교회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32살 젊은 시절 김신묵 권사. 배신여자성경학원 졸업사진   딸 그만 낳으라고 붙인 이름이 고만녜 ▲고만녜에서 김신묵으로, 이름을 가지다 1895년 4월 5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실학자 김하규와 김윤하 부부의 3남 6녀 가운데 넷째 딸로 태어난 김신묵 권사는 ‘고만녜’라는 아명으로 불렸다. 딸을 고만 낳으라는 뜻이었다. 그 시절 여자는 호적에 아무개의 몇째 딸 정도로만 올리고 정식 이름이 없었다. 그러다 결혼 후 학교를 가면서 이름이 필요하였다. 당시 북간도 명동촌에서는 기독교와 신문명과 신교육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민족의 앞날을 기대할 수 없다는 시대정신의 발로로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이에 따라 여성 생활에도 변화가 일었다. 이동휘 선생의 “새가 어떻게 날개를 하나만 가지고 날 수 있으며 수레바퀴가 하나로 굴러갈 수 있는가? 민족의 절반인 여성을 집안에 가둬 놓고 어떻게 일본을 이길 수 있겠는가”라는 설교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명동여학교 정재면 선생은 여학생들에게 이름을 짓자고 제안한다.  주님 안에서 모두 한 가족, 한 자녀라는 의미에서 믿을 신(信)자를 넣어 같은 항렬을 사용하기로 했다. 믿을 신(信)자에 오빠 진묵의 이름에 있는 묵자를 붙여 ‘김신묵’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정신태(정재면 여동생), 주신덕, 김신정, 김신훈, 김신국, 김신우, 문신천 등 몇 주 만에 신자 돌림의 젊은 여성들이 50여 명이나 생겼으며, 나이 드신 분들도 신자 돌림은 아니더라도 각각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명동 마을에 뿌리 내린 기독교는 여성에게는 해방의 복음이었다. 교육과 새로운 이름으로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를 넘어서 독립된 한 인간으로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창조적 삶의 토양이 되었다.   생후 9개월 문익환 업은 채 경찰 연행돼  ▲명동의 잔 다르크, 여성 지도자로 결혼 후 북간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명동여학교에 3학년으로 입학하여 1914년 1회로 졸업했다. 이후 3년간 배신여자성경학원을 다니면서 성경을 공부하였다. 유학 간 남편을 대신해 홀로되신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오랜 세월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기회만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열심이었다. 배운 내용을 머릿속 지식으로만 두지 않고 몸소 실천하고 모범을 보여 명동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앞장서서 도움을 주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섬김의 삶을 살았다. 학교를 가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야학을 개설하여 가르쳤으며, 기독교 복음 전도와 애국 운동을 하나의 독립운동 차원에서 이끌면서 각종 단체를 조직하고 주도하여 야학과 교회에서 여성 지도자로 존경을 받았다. YWCA 회장, 명동학교 여동창회 회장, 부인전도회 회장, 주일학교 선생, 명동 여자 기독청년회 회장 등을 맡아 기독교 전도와 민족교육 사업에 힘쓰는 한편 여자비밀결사대 대원으로 항일 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의 만세운동으로 경찰에 연행될 당시에는 생후 9개월인 장남 익환을 등에 업은 채였다.   “그리하여 나는 주일학교 선생과 여전도회 회장 일을 하면서 겨울에는 야학 선생까지 한 셈이다. 처음에는 사람이 없어서 일을 맡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내가 없으면 명동이 유지 안될 정도로 모든 일에 관여하게 되었다. 학교 이사도 했다. 나중에 용정에 가서도 평생신도회 회장과 여전도회 회장을 해서 간도에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아예 없다고 할 정도였다.” (문영금 문영미 2006, 453) 두 아들에게는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애국정신을 넣어 주려고 태극기를 수놓아 베갯잇을 만들어 주었으며 말을 배우자마자 애국가부터 가르쳤다. 후일 아들들이 민주회복과 민족통일을 위해 수차례 투옥의 수난을 겪으면서도 뜻을 꺽지 않고 신념을 지키며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삶에서 신념을 실천으로 보여 주신 부모님의 모습 덕분이었으리라.    ◇ 용정에서의 만세운동 모습(1919.  3. 13)    ◇명동여학교 동창회 사진-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 김신묵(1929년)    “예언자처럼 외치다 감옥에 갔으니 장한 일이다” ▲자랑스러운 민주투사 아들과 당당하고 올곧은 강인한 어머니 해방과 전쟁, 그리고 분단의 격동기를 헤치며 온 남한에서는 남편 문재린 목사와 함께 교회를 개척하고 진정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약한 자들의 편에서 헌신하였다. 1961년 이후 민주화 운동이 그리고 1980년대에 와서 통일 운동이 가열하게 일어나자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집회에 동참하고 때로는 시위 현장에도 참석하였다. 1976년 3.1 민주구국사건으로 장남 문익환 목사와 차남 문동환 목사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 멀리 토론토에서 참으로 가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장한 일을 한 가족이라 생각하고는 묵묵히 기도에 전념하며 올곧고 강인한 모습으로 아래와 같이 이야기 하였다.   “두 아들이 3.1 운동과 4.19 정신을 이어 받아서 조국의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 예언자처럼 외치다 감옥에 들어갔으니 장한 일이다. 익환이가 선언문을 쓰고 호근이(손자)가 타자를 치고 용길(며느리)이 이것을 낭독할 수 있도록 붓글씨를 썼으니 할 일을 다한 것이다” 문익환 목사가 방북 후 재판을 받을 때에는 92살의 어머니가 통일 운동을 하는 72살의 아들에게 통일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아들아, 너는 7000만 겨레를 위해 일하고 감옥에 들어갈 몸이다. 너는 민족의 통일을 위해 일하다가 민족의 혼이 되어라" 90이 넘어서도 신문의 정치, 경제, 사회면을 정독하며 우리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말하고 염려하며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려 노력했다.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분신하거나 투옥된 학생, 노동자, 민주 인사들을 위해 마음 아파하며 그들과 함께했다.    “전태일, 김상진, 장준하 등등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을 친자식처럼 소중히 여기셨지요. 자식들을 감옥에 넣고 통곡하는 어머니들을 병아리 껴안는 엄마 닭처럼 품에 품으셨지요. 눈을 감고 기도할 때마다 수없이 많은 고생하는 젊은이들의 이름을 줄줄이 열거하면서 그들의 고난이 거름이 되어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지요.”  (문영금 문영미 2009, 613, ‘아름다운 죽음, 그리고 부활-문동환’)   ◇양심수 석방하라는 머리띠를 두른 김신묵 권사    “나 죽거든 박수치며 보내달라” ▲내가 가면 울지 말고 기쁘게 손뼉치며 보내줘라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조국통일을 마지막 소원으로 기도했다.   “나 죽거든 박수 치면 보내달라”는 말씀을 남기고 하늘 나라로 갔다 “통일도 되어 가고 내 아들도 석방되고 온 식구가 하나같이 민족의 재단에 바쳐졌으니 감사합니다…..  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하루 속히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주소서”  “앞으로 어머니를 보고 싶으면 고난의 현장으로 달려 가겠습니다.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밝은 새 날을 향해 온몸으로 밀어 붙이며 전진하는 이땅의 모든 여성들 얼굴에서 저는 어머니의 얼굴을 볼겁니다. 그들을 어머니로 알고 부둥켜 안고 같이 몸부림치며 살아갈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어머니와 함께 천국의 복락을 누릴 겁니다.” 전주에서 아들 익환 올림(1990. 9. 22) (문영금 문영미 2006, 578, ‘이 땅 모든 여성의 얼굴에서-문익환’)   한 여성으로서 이 겨레의 슬픔과 한과 바람을 오직 아름다운 실천을 통해 구현하신 분 아,조선의 어머니 칠천만의 가슴에 어여쁜 별빛 남기시고 이제 가시니  흰 옷 입으시고 남에서 북에서 하나의 조국 향한  불타는 마음 바쳐 작별의 인사를 올립니다 어머니시여 조국의 어머니시여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빛나는 예지와 넉넉한 아량으로 온 가솔을 통일 가족으로 만들었습니다/ 한 길 통일로 가르쳤습니다…. 온 생애를 통털어 나라와 겨레와 통일에 바친 김신묵 여사야말로 진정 "통일의 어머니"입니다. 이기형   ◇김신묵 권사 입관할 때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    ◇맏아들 문익환 목사가 어머니에게 쓴 시를 박용길 장로가 작성한 붓글씨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여행과 사색을 위한 숲길 산책을 무척 좋아합니다. [참고문헌] 문익환 외 (1992) 『그리운 어머니-김신묵 권사 추모 문집』  문영금 문영미 엮음 (2006).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서울: 삼인 김형수 (2018). 『문익환 평전』. 파주: 다산책방.

  • 월간 문익환_5월 <문익환의 가족>

    🈷️ 가족들의 흔적 하나하나가 우리 역사-문화의 발자취

    [늦봄 아카이브에 있는 가족들의 기록]   문재린-김신묵-문동환 등 관련기록 풍성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는 늦봄 문익환(1918-1994)과 봄길 박용길(1919-2011)의 기록이 가장 많지만 늦봄 가족들의 행적을 담은 기록들도 일부 소장하고 있다. 늦봄 가족이 생산한 기록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늦봄의 부모, 문재린 목사(1896-1985)와 김신묵 권사(1895-1990)의 것이고 또한 문익환 목사의 아우인 문동환 목사(1921-2019)와 그의 아내인 문혜림 여사(1936-2022)의 기록들도 일부 보유하고 있다. 이번 5월에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이들 늦봄 가족의 기록을 소개하고자 한다.   ◇ 소장기록 현황   2018년 소장기록 대부분 수장고로 모여 ▲'통일의 집’의 기록들 먼저 ‘문익환 통일의 집(서울 미래유산 2013-098)’의 역사를 살펴보면 가족들의 기록이 남겨지게 된 경위를 알 수 있다. ‘늦봄문익환아카이브’의 모기관은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로, 사업회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은 ‘통일의 집’에서 보존하고 있던 것이 모태이다. ‘통일의 집’은 1970년대 문익환 가족이 매입해 입주한 후 문익환 목사가 작고하기 전까지 거주했던 공간으로 민주화운동의 현장이자 한 가족을 위한 공간이었다. 1994년 문익환 목사 별세 후 박용길 장로는 살던 집이 ‘통일을 위한 토론과 교육의 장’이 되길 바라며 ‘통일의 집’ 현판을 써 붙이고 일반에 공개하였고, 2011년 박용길 장로 별세 이후 딸인 문영금(현재 통일의 집 관장)이 중심이 되어 그 뜻을 이어 나갔다.  2018년 ‘통일의 집’은 박물관으로 재탄생하였는데, 이 시점에 가옥에 있던 사료들은 전시할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신대에 마련한 임시 수장고로 옮겨졌다. 여유롭진 않지만 수장공간이 확보되면서 가족들이 개인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기록들은 속속 수장고로 모여졌고, 이후 외부 인사들의 기증도 이어졌다. 문익환 목사가 감옥으로 반입했던 도서 열독 허가증이 부착되어 있는 다양한 책들, 문재린 목사와 관련된 유품과 개인 노트 및 원고류, 문동환 박사 부부의 개인 기록과 수도교회 설교집 등을 비롯해 다양한 이유로 흩어져 있었던 기록들이 이 과정에서 한신대 수장고로 모였다.   ◇박물관 재탄생 전 통일의 집에 간직되어 있던 수많은 민주와 통일의 유물들(문익환 통일의 집 박물관 프로젝트 2018,  50)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 문동환, 문혜림 부부 관련 문서와 사진, 의류, 복용하던 약 등 박물들.   1885년 자료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기록들 ▲소장 기록 전체 개요조사 해보니 한편, 2020년 늦봄 아카이브는 소장 기록에 전체에 대한 개요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문익환과 박용길 기록 외에 문재린과 김신묵, 그리고 문동환과 문혜림의 기록이 주요한 아카이브 콜렉션으로 구성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늦봄문익환아카이브 분류기준표, 2022).  또한 늦봄과 봄길이 속한 가계도에 등장하는 형제와 자녀 등 다양한 가족 관계에 등장하는 인물과 연관된 기록들도 다수 확인하였다   ◇ 늦봄문익환아카이브의 가계도. 늦봄이 쓴 옥중편지를 받은 가족들을 중심으로 구현해 놓았다.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가계도) 보기] 늦봄 아카이브에는 늦봄 문익환을 비롯 다양한 가족 구성원들의 특색 있는 행적과 관련된 기록들이 모여 있다. 이는 시간적으로 1885년경부터 현재까지 걸쳐 있고 공간으로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시작해 북한과 남한 그리고 해외에 이르기까지의 넓은 범위를 아우르고 있다. 또한 가족의 기록들은 내용적으로 문익환 목사와의 관계를 담고 있는 것들도 있지만 가족 개인의 독자적인 활동, 즉 개인의 사회적 활동과 성취를 담은 기록들도 포함하고 있다. 일제하 북간도 한인 기독교 사회의 중심인물이었던 문재린과 김신묵, 근현대를 살았던 여성으로서 기독교 활동과 민주화 가족운동 및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박용길, 종교인이자 정당인으로 민중 신학자이자 5.18 광주 청문회 위원장으로 알려져 있는 문동환과 해외 선교사 월요모임의 일원으로 활약했던 문혜림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 수유리 한신대 캠퍼스 사택에서 문익환 목사 가족. (앞줄 왼쪽에 문동환, 문혜림, 뒷줄 가운데 김신묵, 문재린, 오른쪽 박용길, 문익환 부부)  역사는 기록에 비례한다. 역사를 구성할 풍부한 기초 데이터가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늦봄문익환아카이브’에 남겨져 있는 가족들의 기록은 아직 충분히 모아지지 못했고 정리도 미흡한 상태다. 하지만 이 기록들은 개인들의 기록이자 다양한 관계와 활동의 기록, 우리 사회, 공공 영역과도  연결되어 있어 이면을 살펴보고 폭넓게 심화시킬 수 있는 역사, 문화적 가치를 가진 사료이다. 미래 세대를 위해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함께 나누고 되새기는 일이 절실하다. 이것이야 말로 지금 ‘늦봄문익환아카이브’와 ‘콘텐츠 플러스’가 함께 하는 이유가 아닐까.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의 삼 년 묵은 아키비스트로 늦봄과 봄길의 기록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하는 아카이브하는 사람이다.  

  • 월간 문익환_5월 <문익환의 가족>

    🈷️ 옥중의 아버지와 딸의 결혼식

    하나밖에 없는 딸…아빠 없는 결혼식… “그래도 아빠는 마냥 기쁘기만 하다” 문익환, 박용길 부부의 네 자녀 중에 유독 문익환 목사의 눈매를 쏙 뺀 한 명이 있다. 문재린 목사의 황금동 교회 목회시절 ‘김천에서 얻은 구슬’ 둘째 영금(瑛金)이다. 현재 통일의 집 박물관 관장을 지내며 늦봄과 봄길의 뜻을 전하고 있다. 1977년, 수감 중인 늦봄은 하나밖에 없는 딸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신부의 할아버지인 문재린 목사에게 대신 손잡고 신부입장을 부탁하는 편지에서 아빠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아버지 문재린 목사에게는 신부 입장에 동행해줄 것을 부탁했다(옥중편지 1977. 7. 8. 중에서)     “언제까지나 나를 ‘아빠’라고 불러다오”   영금에게 호근, 은숙, 의근, 성근이는 ‘아버님’ 이라고 편지하는데, 네 글은 ‘아빠’라고 시작되어서 내 나이 스물은 젊어진 것 같았다. 초등학교 다니는 네가 부르는 소리 같아서 말이다. 언제까지나 ‘아빠’ 라고 불러다오. 부쩍 성숙한 네 모습을 사진에서 보고 내가 정말 아버지 노릇을 못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라도 잘 먹고 잘 커서 행복한 소녀이기를 비는 아빠의 마음을 알 것 같으냐? (1977. 5. 14)   영금아 「꿈길」이라는 시에 ‘영금아, 성수야’라고 쓰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아직 하느님 앞에서 서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비워 두었다. 결혼식을 올리면 물론 그 자리는 ‘성수야’로 채워지는 거 아니겠니? 다른 혼처들을 물리치고 성수와 결혼하기로 한 네 결단은 역시 내 딸다운, 아니 너다운 결단이다. 썩 잘한 결단이다. (1977. 6. 10) 딸의 결혼식이 있던 1977년, 문익환 목사는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첫 번째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다. 신부의 부모가 참석할 수 없는 결혼식이라 더 마음이 쓰였던 것일까. 문익환 목사는 캐나다에서 열리는 결혼식이 잘 치러지도록 그곳의 친지들에게 세세한 부탁을 한다. 편지에서 안타까움과 분주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옥중에서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을 축복하며 시를 선물하고 사위를 위해 당부의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부디 부디 행복하여라” 성수, 영금에게 오늘이 7월 8일(금)이다. 이제 너희 결혼 날까지 스무하루가 남았구나. 내가 이렇게 부자유한 몸으로 있는데 무슨 경황에 결혼이냐고 조금도 마음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울 까닭이 없다. 그동안 소식을 들어 알겠지만, 나의 60 평생에 지금처럼 흐뭇하고 보람찬 삶을 산 때는 일찍이 없었다. … 「사랑의 노래」에 아빠, 엄마의 마음을 담아 보낸다. 엄마가 정성껏 써서 네 폭짜리 병풍을 만들어 보내도록 하겠다. 이제부터 서둘러도 선물은 추송(追送)이 될 가능성이 크겠지. 늦더라도 섭섭히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다오. 내가 7월 들어서 오늘에야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어서 그런 것이니까…….   나의 하나밖에 없는 사위, 성수야 영금이를 많이 사랑해다오. 내가 너무 개성을 강하게 길러서 때로는 좀 거슬리는 일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품어 주기 바란다. 부디부디 행복하여라. 너희가 정말 행복해야 남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는 법이니까.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기도 하고. 행복이란 상대편이 행복한 것을 보면서 받는 인생의 ‘덤’ 이라는 것,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놀라게 되는 것, ‘wonder’도 명심해 두는 것이 좋을 게다. 아빠는 마냥 기쁘기만 하다. 너희 생각만 하면 쓰고 쓰고 또 쓰고 싶지만,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이만……. 아빠 씀(1977. 7. 8.)     ◇캐나다에 있는 친지와 지인을 모시고 치러진 딸 영금의 결혼식(1977.7)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문영금 관장이 아버지 문익환 목사를 추억하며 쓴 글은 「나의 아버지 문익환」 『장준하, 문익환 다시 읽기: 민주, 통일, 평화사상 탄생 100주년 기념』(2018), 「사랑의 빚, 그 위대한 유산」 『생활성서』(2021.3)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쓰는 것 보다는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수동적 내향인, ISTP.  

    12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