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문영미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이사(2) (202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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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기억, 기록하며 살았던 시간  

 

초등학교 시절 『새벽의 집』 공동체 경험

▶ 기록, 아카이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저의 이런 관심을 처음 의식하게 된 거는 『새벽의 집』에 관한 책을 쓰면서부터예요. 저는 어린시절 새벽의 집 공동체에서 살면서 초등학교 시절을 거의 거기서 보냈고 저한테 그곳은 너무 소중했는데 어느 날 그냥 없어져 버리더라고요. 어른들은 그냥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 살아가고요. 그곳 사람들과 가족보다 더 가까이 살았었는데 다 흩어지고 연락도 안 했어요. 그때 저는 ‘왜 그럴까. 이게 되게 소중한 건데.. 이걸 남기고 싶다’ 생각을 했어요.  

보리출판사 윤구병 선생님이 책 쓰는 걸 제안해 주셨는데 자료가 거의 없어서 직접 살았던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수소문해 만나서 인터뷰해서 썼어요. 일이 저에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후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를 담은 책(『기린갑이와 고만녜』)을 영금이 언니와 함께 정리해 낸 것도 100년 전 북간도의 잊혀질 역사 이야기를 남겨야 된다는 책임감으로 하게 된 거지요. 
(*새벽의 집은 문동환 목사와 수도교회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다섯 가정 열두 명으로 시작해 8년정도 지속되었던 공동체이다.)

 

젊은 세대에게 역사 알려주고 싶었다

▶이한열기념관에서도 일했는데…
이한열기념관에서 같이 일하자는 친구의 요청을 들은 건 젋은 세대들에게 스토리와 인물을 통해서 역사를 알려주는 일을 해야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박물관에 들어갔을 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곳을 찾아다니면서 배웠지요. 다들 열악하니깐 진짜 제대로 하고 있는 데가 많이 없었어요. 

통일의 집은 진짜 엄두가 안 나는 상황이었는데 곰팡이가 나오고 비 새고, 워낙 습기가 많은 집이어서 큰엄마 살아계셨을 때부터 여기 오면 곰팡이 냄새가 되게 심했어요. 그런 상태에 물건은 꽉꽉 차 있으니 이걸 어떻게 접근해야 될지 엄두가 안 났던건데 이한열에서의 경험이 생기니 어떻게 하면 되겠다는 감이 오더라구요. 도움이 될 사람들과 네트워킹도 많이 되구요. 제일 큰 숙제는 이 집을 복원하는 거였죠.
 
 
◇봄이 오는 통일의 집 뒷동산에서 문익환 목사의 벽화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문영미 이사
 
 

기적 같았던 통일의 집 복원 프로젝트

▶통일의 집 박물관을 시작하면서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그때는 이걸 지켜야 된다는 생각도 가치의 소중함에 대한 공감대도 별로 없었던 거 같아요. 물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중요한 자료 일부를 가져가서 그쪽에서 정리하고 보존해주는 큰 역할을 해주셨지만 집은 진짜 방치되어 있었죠. 그러니까 내가 안 하면 진짜 이거는 그냥 없어지고 묻혀지겠다는 절박한 생각에 제가 총대를 메고 하게 된 것 같아요. 

사단법인 세우고 본격적으로 모금 시작한 거는 17년도였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네요. 복원할 때 수소문을 많이 해서 건축가 류현수 대표님을 만났는데 20년 전 97년 장로님 생전에 ‘우리건설’에서 통일의 집을 보수해 줄 때 청년 건축가로 참여했었다는 거예요. 희한한 인연에 너무 놀랐어요. 그 팀은 정말 세심하게 하나하나 다 의논하고 존중해주면서 복원을 진행해 주셨죠. 집 복원을 하며 집 안에 있던 자료들을 한신대 수장고로 이사시켰는데 그것도 진짜 대단한 일이었죠. 여기저기서 많이들 도와주셨어요 진짜.
 
 
◇통일의 집 복원 공사를 앞두고 수장고로 이사하는 날, 짐을 정리하는 문영미 이사(2017. 12. 28)
 
◇통일의 집 복원 공사를 앞두고 수장고로 이사하는 날(2017. 12. 28)
  
 

우리의 테마 컬러는 보라색인데…

▶집 복원하면서 어려운 점은?
집 복원하면서 집 안에 전시 디자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도 엄청 고민했거든요. 근데 전시컨셉을 해 줄 사람을 만나기가 되게 힘들었어요. 유능하다는 전시 기획자를 소개받아서 작업을 했었는데 우리랑 너무 안 맞더라구요. 예를 들어서 장로님이 수인번호 모아놓은 거 있잖아요. 그거 자체로 되게 중요한 건데 그걸 분해 해서 따로따로 전시를 하자 그러는 거예요. 또 우리는 테마 컬러가 보라색인데 흰색을 주장하셔서… 결국 전시 컨셉은 제가 잡고 실무적인 디자인만 담당해주실 분을 다시 섭외해서 의논해서 하는 식으로 했죠. 
◇복원 공사가 한창인 통일의 집(2018)
 
◇문영미 이사가 고민한 흔적이 남아있는 전시실(아들방) 공간 구성 스케치
 
 

가족의 이야기? 역사의 이야기?

▶문익환 가족의 사료문제와 고민들
이 일을 하면서 처음에 박용길을 얼마나 부각시킬지에 대한 고민도 초반에 좀 많았어요. 예를 들어 이사회 내부에서도 문익환 기념사업회인데 왜 박용길 거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죠. 저는 우리 가족이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를 살아온 이야기가 소중한 거라 할머니, 할아버지 얘기도 중요하고 기록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또, 저희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남겨주신 유물들도 있구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문익환 목사님을 아는 거고 또 문익환 박물관이니까 목사님을 부각시키는게 맞다고도 생각하지요. 그래서 다른 가족과 사료를 어떤 식으로 다루어야 할지 계속 고민 하고 있지만 앞으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해요. 사료들이 함께 어우러져 점점 풍성해지는 것은 느끼죠. 제 부모님 기념사업 일도 있지만 저는 엄마와 아빠 기록을 책으로 써 냈고 그래서 많은 부분은 이미 했다고 생각해요.

 
늦봄아카이브 시작은 박용길 장로의 ‘수집벽’
 
◇문영미 이사의 대학 졸업식에 함께한 박용길 장로. 
  
늦봄아카이브가 시작된 것은 바로, 수집광 박용길 장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완벽한 고부관계만 같았던 김신묵-박용길 사이도 며느리의 모으는 기질이 문제가 되기도 했고, 또 수집광 기질 속에도 신중함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카이브가 형성되는 내력 속 흥미로움을 더한다.

 
시어머니는 버리고, 며느리는 모으고…
▶아카이브의 시작
박용길 장로와 시어머니 김신묵 권사님 사이는 아주 좋으셨지만 딱 한 가지 장로님이 너무 안 버리시는 게 문제였어요. 장로님의 수집벽은 정말 대단하셔서 너무 못 버리니 집에 쌓이는게 많아져서 시어머니가 내다 버리면 큰엄마가 다시 갖고 들어오셨대요. 그것 때문에 약간의 갈등도 있었던 거지요. 하지만 그러니까 우리에게 이 훌륭한 아카이브를 주신 거잖아요. 

▶신중한 수집광
장로님은 지나칠 정도로 안 버리셨는데 화분이 오면 붙어있는 리본 같은 것도 예쁘다고 모아놓으셨어요. 목사님 돌아가시고 이 집을 전시공간으로 만들었을 때도 유물들이 빠글빠글 많았어요. 북한 대표단이 목사님 10주기 때 통일의 집 방문을 했었거든요. 그때 북한 대표단 오는데 집이 너무 지저분하다고 깔끔하게 단장을 좀 해보자 해서 영금이 언니와 제가 예쁜 천을 사다가 씌우고 지저분한 것은 좀 가려보려고 했었어요. 근데 천에 예쁘라고 영어가 쓰여 있는거 보시곤 영어라 안 된다고 그러시면서 다 걷어내셨지요. 북한은 한글쓰기 운동을 하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것까진 생각 못했던 거지요.

 

 콘텐츠는 미래세대를 위한 준비 

 

“인물 인터뷰들 인상적”

▶ 『월간 문익환』 에 대한 생각은?
저는 특히 올해 인물 인터뷰들이 좋았던게 저도 모르고 있었던 얘기들을 많이 접하게 됐어요. 당시 젊었던 분들의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발굴돼서 좋았고요. 실무하다보면 일에 쫓겨 깊이 파고들고 연구하기 어려운데 『월간 문익환』이 집중적으로 연구해 이렇게 보물처럼 끄집어내어 모르던 기록들을 많이 보여주셨고, 사진들도 못 보던 사진들이 많이 올라오더라구요. 그런게 참 좋았어요.
 
 

젊은 세대에게 어필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 필요

▶앞으로의 과제는?
고민되는 부분은 구독층과 관심층이 50대 이상으로 연령이 좀 높잖아요. 그래서 젊은 세대들한테 어떻게 이 콘텐츠를 알리고 다가가서 만나고 소통할 수 있을까 그 부분이 고민이 되는 것 같아요. 우리 아카이브가 가지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어떻게 만나게 할 수 있을까. 내용이나 매체 이런걸 어떻게 해야 미래 세대와 나눌 수 있을까. 저는 그런 생각도 많이 해요. 

그래서 젊은 멤버를 영입해 감각과 관심을 반영시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고요. 약간 아쉬운게 하나하나 꼭지가 되게 좋잖아요. 근데 그냥 종이 신문으로 봤을 땐 이렇게 쭉 읽을 수 있는데 온라인으로는 찾아 들어가서 읽기가 힘든 것 같아요. 그래서 온라인 유통 부분도 신경 써주시면 독자들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6.15로 가는 길목에 짚어 볼 4.2공동성명의 의미

▶젊은 세대들은 문익환 목사님을 잘 모를텐데…
지금 젊은 세대들은 문익환 목사님을 영화 ‘1987’의 마지막 장면에 나왔던 분으로만 알죠. 저는 영화나 만화같은 것도 필요하고 또, 한열이는 교과서 6월 항쟁 부분에 실려 있거든요. 교과에 있으니 학생들이 그걸 공부해야 되고 현장학습으로 많이 찾아오더라구요. 현실적으로 굉장히 힘들겠지만 교과서에 들어가야 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6.15를 다룰 때 인물로 다루어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배경 설명에 “문익환 목사의 방북이 있었고 4.2공동성명이 있었다”는 정도만 들어가는 것도 저는 필요할 것 같아요.  

문익환 목사님과 통일의 집은 남쪽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중에 북쪽 사람들도 아우를 수 있는 그런 콘텐츠이자 공간이 될 수 있고 또 세계적으로도 많이 알려지면 만델라나 마틴 루터 킹, 간디 처럼 외국인들도 좀 찾아오는 그런 곳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해요.

 

“벗어나고 싶었던 시기를 지나, 나에게 맡겨진 일이라 생각”

▶문익환 조카가 아닌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제가 한때 그런 시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어른들의 그늘이 커 그걸 좀 벗어나 살고 싶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게 어느 순간 다시 이렇게 끌려들어오는 계기가 좀 있었어요. 펜들힐이라고 퀘이커 공동체에서 제가 한 2년 있었거든요. 퀘이커는 전쟁 반대 평화운동도 하는 진보적인 개신교인데 문익환 목사님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도 한 곳이에요. 거기서 이런 부분에 관해 영적 상담을 받았는데 제가 엄마 아빠랑 닮은 그 자체의 모습이 너라고 하더군요.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그런 관심과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것 자체가 나니까 피하지 말아야 되겠다는 어떤 깨달음이 좀 왔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내가 뭘 막 나가서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나한테 오는 일을 이게 하나님이 주시는 일이다라고 생각하며 해야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나에게 맡겨진 일이다’ 라는 생각으로 다시 이 동네에 들어온 거지요.
 
 

때때로 오병이어 기적 같다는 느낌

근데 일이 너무 나한테 부담이 심했던 것 같아 좀 병도 나고 힘들었어요. 아픈 이후로는 사람들에게 많이 맡기고 하니까 또 기적처럼 다른 분들이 열심히 해주시는게 보여서 감사하죠. 직원들,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진짜 오병이어 기적처럼 이렇게 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제일 보람있고 감사한 것 같아요. 후원자들의 후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요. 우리나라는 정권에 따라 부침이 많아서 가난하더라도 독립적으로 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시민의 후원과 참여가 너무 중요한 거죠. 
 
<글: 아키비스트 지노> 
 
※문영미 이사는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이사,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문익환 목사의 아우이자 민중신학자였던 문동환 목사와 해외 선교사 월요모임의 일원으로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던 페이문(문혜림)의 딸이다. 이한열기념관의 학예실장을 역임했고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을 되살려 내는 일에 관심이 많다. 펴낸 책으로 『아름다운 공동체 새벽의 집』,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세상을 품은 작은 교회』가 있다. 또 동화 작가로서 『우리 마당으로 놀러와』, 『고만녜: 백년 전 북간도 이야기』, 『우리 집에 온 길고양이 카니』 등의 어린이책을 썼다.
   
◇ 문영미 이사가 쓴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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