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빙 노트
발견
정혜지
게시일 2021.12.17  | 최종수정일 2022.03.15

우정동 59-7번지
평생의 터전을 함께 해 온 우정동을 뒤로 하고, 홍영선 할머니는 아파트로 이사 왔습니다. 이사 짐 정리에만 며칠이 걸렸더랍니다. 주택가에 빽빽이 들어선 건물 중 하나였던 우정동 이층집에 60여 년의 삶이 녹아 있었던 만큼, 이삿날 벽두부턴 "이런 게 아직도 남아 있었나" 싶은 잡동사니들이 쏟아져 나왔죠. 쌀 한 톨도 허투루 버리지 않던 할머니의 습관이 고스란이 드러난, 노란 고무줄로 꽉꽉 찬 커다란 백자 항아리(아버지가 식겁을 했습니다), 아버지들이 어린 시절 쓰던 옷가지 하며, 이빠진 제기 등등... 

우정동 59-7번지에 위치했던 이층집은 지금은 재개발로 다 헐렸지만, 재작년까지만 해도 빨간 벽돌로 만들어진 건물에 제 나이만큼이나 여러 겹 페인트 칠을 한 철문이 달린, 골목 중간에 위치한 주택이었습니다. 홍영선 할머니는 아들들과 딸이 결혼을 한 후에는 아랫집에 세를 주고 살았지만, 그 이전엔 일곱 식구가 우당탕탕 모여 살던 곳이었어요. 메리라는 골든 리트리버와 제니, 미니라는 미니핀 두 마리도 살았었고요.

이층집 2층의 현관을 들어서면 왼편에 작은 방 두 개가 나란히 있습니다.
바로 이 창문. RGRG?
 현관과 가까운 방은 옷가지를 두거나 명절에 아이들이 모여 잠을 자던 곳이었고, 반대편 작은 방은 할아버지의 서재였죠. 전국민 누구나 알 만한, 불빛이 나팔꽃 문양으로 비치던 창문도 있었고요. 그 방엔 햇빛이 잘 들지 않아서 구석진 곳엔 늘 뭔가 무서운 것이 있을 것만 같았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전 이사하는 날 곁에 없었습니다. 멀리 객지에서 일하는 손녀딸 버프를 받았달까요. 안부인사만 전해드리고 그럭저럭 일상을 지냈죠. 그런데 몇 달 뒤 추석에 울산엘 찾아갔을 때, 아버지께서 은근슬쩍 이것 좀 봐라 하시며 웬 낡은 책같은 것을 짊어지고 오시더니 거실 바닥에 펼치셨습니다. 아버지는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네가 이런 거 갖고 일하지 않냐"고 하시더군요. 그렇긴 한데... 아버지께서 가져 오신 건 낡은 앨범들이었습니다. 한 눈에 봐도 60~70년은 되어 보이는, 구석구석 삭아서 만지는 순간에도 바스러지는 오래된 것들이었습니다. 우정동 이층집의 작은 방 구석, 뭔가 무서운 것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았던 바로 그곳에서 발견하셨답니다.

펼쳐 보니, 내 사촌 혜원이랑 닮은 어린 여자아이의 사진이 나오더군요. 하얀 저고리와 까만 치마를 입고 2대8 가르마에 곱게 하나로 머리를 묶은 아이였습니다. 이제 귀도 어둑어둑하고, 허리도 꼬부라진 우리 할머니 옆에 가져가 여쭈었어요. "할머니! 이 사람 누구예요~?"(주의: 엄청 큰 목소리로, 거의 소리지르듯이 말해야 함. 안그러면 할머니가 못 알아듣고 미소만 지으심) 누군지 말 안해도 아시겠죠.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할머니께 여러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버지께서 발견하신 사진의 장 수가 꽤나 많고, 이것을 그저 집에 묵혀 두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고향 울산의 옛 모습, 저희 부모님의 부모님의 옛 모습, 그리고 역사 속에 녹아 있는 그 분들의 삶이 가치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스스로를 평범하게 살았다 규정짓는 어르신들은 그저 이끌리는 대로 살아온 흔적들이 무어가 대단한 것이냐고 말씀하십니다만, 공부하다보니 그런 범인들이 모여 사회를 만들고 역사를 만들었더랍니다. 

저희 가족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어쨌든 나의 현재를 거슬러 올라가 뿌리를 찾다보면 나와 내 가족과 내 지역의 정체성도 같이 만나볼 수 있고, 이것이 더 나은 나와 가족과 지역을 만들겠지요. 사실은 거창한 이유보다는 강박적으로 아카이브에 대해 생각하는 내가 내 주변의 것부터 먼저 아카이빙 할 수 있을지 시험해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자잘한 파편들을 모아 붙이는 일이 되겠습니다. 나름 최신 기술을 잘 활용하는 세대이니 이왕에 정리하는 거 디지털 아카이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3개의 앨범을 받아다 왔고 몇 가지 책들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왔습니다. 먼저 3개의 앨범을 스캐닝해 아카이브에 올려 보기로 했습니다. 근데, 잘 되려나 모르겠네요. 

© 정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