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 이야기
역사를 기억하는 법 I
우리는 후세에 잊히지 않을 위대한 일을 해내거나, 족적을 남긴 이를 존경하고 기억한다. 또한 기억해야 할 사건을 기념하고 싶어 한다. 그런 사람들의 염원이 ‘기념물(Monument)’를 만들어낸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서울 종로의 광화문 광장만 보아도 그렇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광장이자 도시의 중심부인 그곳에는, 우리 역사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 2명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다. 성웅 이순신의 동상과, 찬란한 문화 발전의 상징인 세종대왕의 동상이 그것이다. 각각 나라를 구한, 나라를 세운 대표적인 위인이다. 이들이 생전 나라에 바친 헌신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대우는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영국인들은 오래전부터 그들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를 전 국토에 설치했다. 용맹한 국왕부터, 구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무명의 병사들을 위해서. 혹은 잊지 말아야 할 아픈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나는 런던에 있을 때, 버스나 지하철과 같은 이동 수단보다 도보로 이동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다른 나라의 도시는 어떤 느낌일지 몸소 체험하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길 곳곳에 있는 이 나라의 상징과 기념물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런던은 거리마다 기념물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념비는 대체로 정치인과 군인을 위해 많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대화재같은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우도 있었다. 역사적인 인물들의 경우 생소하고 낯선 인물도 있었지만,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들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발견하고 촬영했던 기념비 중 몇 개만 선별하여, 역사 속 인물들의 소개를 해보고자 한다.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고대에서 19세기의 기간으로 한정하였다. 1. 부디카 여왕의 동상(Boadicea and Her Daughters) 소재지: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웨스트민스터 다리 앞 건립 연도: 1902년. 다만 형상을 주조한 시기는 1856년~1883년 부디카 여왕(Queen Boudica, ?∼61)은 고대 브리튼 시기에 존재했던 전설적인 켈트족 여왕이다. 로마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이케니(Iceni) 부족의 지도자였으며 네로 황제의 로마제국에 맞서 군대를 일으켰다. 자신의 가족과 부족들이 로마의 폭압으로 인해 약탈·겁탈당하자, 로마에 맞서는 대규모 봉기를 계획했다. 그녀는 자신의 겁탈당한 두 딸을 내세워 이웃 부족들에게 자유를 위한 투쟁이 필요함을 호소했다. 그때의 모습이 현재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 앞에 기념비로 재현되어 있다. 자신의 두 딸과 함께 전차를 타고 있는 부디카의 모습은, 외세의 침략에 대해 맞선 비장함과 자유로운 삶에 대한 추구를 상징하고 있다. 역사 속의 부디카는 로마의 군세에 결국 패배하였지만, 그 정신만은 기념비로 남아 영국인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2. 리처드 1세의 기마상(Richard Coeur de Lion) 소재지: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웨스트민스터 궁전 야외 건립 연도: 1867년. 설계 디자인은 1851년부터 시작 중세 잉글랜드의 왕 리처드 1세(Richard I of England, The Lionheart, 1157~1199)는 훌륭한 국왕도, 좋은 가장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용맹한 모습만큼은 후세에 전해질 만큼 위대한 전사였다. 그는 전략·전술의 식견이 뛰어났고 병사들을 통제하는 뛰어난 카리스마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불멸로 만든 것은 초인적인 무용 때문이었다. 제3차 십자군 전쟁에서 그의 숙적인 살라딘을 상대로 무패 전승을 기록할 만큼, 전쟁에 관해서는 견줄 자가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영국인들에게 ‘사자심왕(The Lionheart)’으로 기억되고 있다. 3. 찰스 1세의 기마상(Equestrian statue of Charles I) & 올리버 크롬웰의 동상(Statue of Oliver Cromwell) 찰스 1세 석상의 소재지 및 건립 연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채링 크로스, 트라팔가 광장 앞. 1633년 건립 올리버 크롬웰 동상의 소재지 및 건립 연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웨스트민스터 궁전 야외. 1899년 건립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은 영국 내전(British Civil War, 1639~1651)의 주인공들이다. 각각 왕당파와 의회파의 지도자였고, 종교적 신념, 정치 사상 등 모든 것이 상극인 인물들이었다. 이 내전으로 인해,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국왕이 그 힘을 잃고 좌초해버렸으며, 의회 세력이 파워게임에서 승리했다. 내전에서 승리한 크롬웰은 의회를 제압하고 청교도 군사정권을 수립했으며, 국왕 찰스 1세를 참수한다. 군주정은 폐지되어 영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공화정(Commonwealth of England)이 수립되었고, 크롬웰 본인은 종신 호국경(Lord Protector)이 되어 금욕주의를 동반한 군사독재를 실행한다. 공화국은 대외적으로 경쟁자들을 물리쳐 국익을 증진시켰으나, 지나친 금욕주의와 독재로 인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크롬웰 사후 다시 군주정이 수립되면서 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이 시기 금욕주의가 훗날 악명높은 영국 요리의 배경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4. 런던 대화재 기념탑(Monument to the Great Fire of London) 소재지: 런던, 시티 오브 런던 건립 연도: 1677년 런던 대화재(Great Fire of London)는 1666년 런던의 한 빵공장에서 번진 불길이 도시 전체를 삼켜버린 사건으로, 도시 역사의 큰 분수령으로 기억된다. 이 화재로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 태반이 전소했으며, 도시의 상징 중 하나인 세인트 폴 대성당(Cathedral Church of St. Paul)이 붕괴했다. 자연스럽게 도시 재건에 대한 논의들이 시작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 1632~1723)이다. 렌은 재건 계획을 세움과 동시에 세인트 폴 대성당의 재건축을 진행하여, 근대 런던의 랜드마크를 완성하였다. 렌은 또 다른 건축가인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과 함께 화재가 일어난 시티 오브 런던에 대화재 기념비를 1677년 설치했다. 이 기념탑은 시티 오브 런던의 관광지가 되어 사람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5.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 & 웰링턴 기마상(Equestrian statue of the Duke of Wellington) 트라팔가 광장 소재지 및 건립 연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채링 크로스. 1844년 웰링턴 기마상 소재지 및 건립 연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하이드 파크 남동쪽 입구. 1888년 넬슨 제독(Horatio Nelson, 1758~1805)과 웰링턴 공작(Arthur Wellesley, 1st Duke of Wellington, 1769~1852)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1803–1815)에 활약한 군인으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몰락하게 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넬슨 제독은 트라팔가 해전(Battle of Trafalgar, 1805)에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를 궤멸시킨 구국의 영웅이고, 웰링턴 공작은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1815)에서 나폴레옹을 꺾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영국인들은 전쟁영웅에 대한 예우로, 런던 중심부에 그들을 상징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런던 채링 크로스(Charing Cross)는 중세부터 런던의 중심부 역할을 한 공간이었는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은 이 자리에 트라팔가 해전을 기념하는 광장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광장은 거대한 분수와 넬슨 기념탑, 탑을 지키고 있는 4마리의 사자상으로 구성되었으며, 1844년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넬슨 기념탑은 그의 기함이었던 HMS Victory의 마스트 높이와 같은 55m의 높이로 설치되었다. 광장의 정면에는 국립 미술관(The National Gallery, 1824), 국립 초상화 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 1856)이 있다. 여러모로 런던을 대표하는 광장이자 문화 중심지이고, 그 외관도 수려하다. 웰링턴 공작은 나폴레옹을 격파했다는 명성으로 인해, 런던을 비롯한 각지에 동상이 제작된 바 있다. 그 중 내가 방문한 곳은 하이드 파크에 위치한 웰링턴 기마상이었다. 기마상은 웰링턴의 런던 주택인 앱슬리 하우스(Apsley House)를 바라보고 있고, 동상의 측면에는 그와 전장을 함께한 육군 병사들이 묘사되어 있다. 동상의 뒤쪽에는 (역시 그를 위한 기념물인) 웰링턴 아치(Wellington Arch)가 공원의 입구 역할을 하고 있다. 6. 빅토리아 여왕 기념상(Victoria Memorial) & 앨버트 공 기념탑(Albert Memorial) 빅토리아 여왕 기념상 소재지 및 건립 연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더 몰. 1901년부터 1924년에 걸쳐 건립 앨버트 공 기념탑 소재지 및 건립 연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켄싱턴 가든. 1872년 공개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은 영국의 황금기 19세기를 대표하는 군주다. 역사적으로 그녀의 제위 시기인 1836년부터 1901년까지의 기간을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라고 칭하는데, 이 시기 영국은 전 세계에 막강한 패권을 행사하며 ‘영국에 의한 평화(Pax Britannica)’를 수립했다. 빅토리아 시대는 사회·정치·경제 면에서 급변하던 시기였고, 자유주의에 대한 광적인 신념과 엄숙한 도덕주의가 공존하던 때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또 다른 볼거리는 여왕과 그녀의 부군인 앨버트 공(Albert, Prince Consort, 1819~1861)과의 사랑 이야기다. 두 사람은 천생연분으로, 많은 자식을 아래에 두었다. 앨버트 공은 영국 학문과 예술의 가장 영향력 있는 후원자이기도 했는데, 1851년 세계 최초의 세계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것에 큰 역할을 했다. 앨버트 공이 1861년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여왕은 부군을 기리기 위해 켄싱턴 가든에 기념탑을 세운다. 기념탑 내부에서는 의자에 앉은 앨버트 공이 로열 앨버트 홀(Royal Albert Hall)을 바라보고 있다. 여왕은 앨버트 공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죽기 전까지 상복을 입고 일상을 보냈다고 한다. 7. 크림 전쟁 기념비(Guards Crimean War Memorial) 소재지: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세인트 제임스 건립 연도: 1861년 건립. 1915년 위치 이동 크림 전쟁(Crimean War, 1853~1856)은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 벌어진 분쟁에 영국-프랑스-사르데냐가 개입하여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처음으로 유럽 대륙에 군사적인 개입을 시도했고, 러시아를 패배시켜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자원을 소모하고, 대규모 인적 피해를 입었다. 이 전쟁은 그 과정과 결과보다 ‘등불를 든 여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1910)의 간호 행위가 더 유명하다. 나이팅게일은 우리에게 헌신적인 간호 에피소드들로 익숙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업적은 의료·간호 행위에 위생적인 환경을 도입한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전투로 인한 사망자보다 부상으로 인해 사망하는 인력 손실에 주목했고, 야전 병원에 위생 개념을 도입하여 부상자의 사망자 비율을 줄이고자 했다. 이는 큰 성공을 거두어, 다수의 병사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나이팅게일은 이러한 업적으로 근대 간호학의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크림 전쟁 기념비는 전쟁에서 희생된 인원의 추모와 나이팅게일의 헌신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전쟁에서 획득한 러시아의 대포를 녹여 제작하였다. 8. 글래드스턴 동상(Gladstone Memorial) & 고든 동상(Statue of General Gordon) 글래드스턴 동상 소재지 및 건립 연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스트랜드. 1905년 고든 동상 소재지 및 건립 연도: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빅토리아 임뱅크먼트 가든. 1888년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1809~1898)과 찰스 고든(Charles George Gordon, 1833~1885)은 빅토리아 시대를 살아갔다는 것 외에는 서로 접점이 없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둘은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과 금욕주의, 양심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글래드스턴은 자유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자, 19세기를 대표하는 수상 중 하나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자국의 제국주의 개입을 자제하는가 하면, 인간의 양심에 기초한 도덕 정치를 추구했다. 1833년 하원 의원이 된 것을 시작으로, 주요 자유당 정권의 내각 참여, 1868년부터 수상이 되어 국정을 운영했다. 그는 총 4번의 수상직을 역임한 역대 최고의 수상 중 하나이지만, 평생 작위를 받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존경을 담아 ‘가장 위대한 평민 (The great Commoner)’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찰스 조지 고든(Charles George Gordon, 1833~1885)은 영국의 공병 장교로, 크림 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에서 활약한 명예로운 군인이었다. 불합리함과 부당함에 분노하고, 부하를 배려할 줄 알고, 사람들을 이끄는 카리스마를 가졌으며, 용감하고 유능하기까지 한 고든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에게 이상적인 인물로 인식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1885년 수단의 수도 카르툼(Khartoum)에서 마흐디 운동 세력에 맞서 싸웠으나, 수적 열세로 인해 패배하고 전사했다. 당시 글래드스턴 수상은 수단에 군사적 개입을 주저했고, 뒤늦게 고든 수비대를 위한 구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고든을 비롯한 모든 수비대는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 전멸했다.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고든이 전사한 것에 대한 여파로 글래드스턴 내각은 붕괴하고, 글래드스턴 본인은 ‘명예로운 노인(G.O.M, Grand Old Man)’에서 ‘고든의 살인자(M.O.G, Murderer of Gordon)’가 되어 의회와 사회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영국이 수단에서 고든의 복수를 완수한 것은 1898년에 이르러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