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런던에 갔을 시절, 런던 자연사박물관 로비에는 '디피(Dippy)'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거대한 디플로도쿠스의 레플리카 골격이 있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박물관의 로비는 대왕고래의 골격이 전시되고 있으나, 디피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박물관의 로비를 지켰었다.
본디 디플로도쿠스는 북미에서 발견된 용각류(Sauropod) 공룡이었기에, 대서양 건너 영국과 연관은 없었다. 그러나 이 공룡은 한 미국의 사업가에 의해 영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평화와 협력의 메시지가 되었다.
1899년 미국 와이오밍 주의 쥐라기 모리슨 지층에서 새로운 디플로도쿠스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 화석은 미국의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의 후원에 의해 발굴이 진행되었다. 디플로도쿠스는 이미 1877년 발견되어 이름까지 있었던 공룡이었지만, 이번 발굴은 조금 특별했다. 거의 대부분의 신체가 발견되어, 가장 완전한 골격 형태를 가지고 있는 표본이었던 것이다. 이 화석은 기존 디플로도쿠스의 모식종인 '디플로도쿠스 롱구스(Diplodocus longus)'와 다른 종으로 인정되어, 발굴후원자 카네기의 이름을 따 '디플로도쿠스 카네기이(Diplodocus carnegii)'로 명명되었다. 이 골격은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의 카네기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카네기는 발굴의 후원에 그치지 않고, 영국을 포함한 7개 국가의 국가원수들에게 화석의 레플리카를 선물하였다. 1902년 카네기는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에게 화석 레플리카를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카네기는 뼈를 주조하여 292개의 골격 레플리카를 제작하고, 36개의 상자에 분할하여 런던 자연사박물관으로 보냈다. 골격 레플리카는 1905년 5월 12일 런던의 대중에게 공개되었으며, 박물관의 파충류관(Reptile Gallery)에서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이 디플로도쿠스의 레플리카 골격은 미국에서 부르는 애칭인 '디피'라 불렸다. 디피는 세계대전과 같은 역경을 견뎌냈고, 1979년 박물관의 중앙 홀에 전시되었다. 이후 박물관의 상징으로 2017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공룡에 대한 연구결과가 축적됨에 따라 디피의 자세 역시 변동이 있었다. 과거 공룡은 꼬리를 끌고 다니는 거대한 파충류라는 인식이 있어, 디피 역시 꼬리를 땅에 끌고 다니는 형태로 전시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러한 인식은 바뀌어, 목과 꼬리가 수평이 되는 형태로 조정되었다. 디피는 21.3m(70피트)의 길이를 가지고 있는데, 골격이 완전히 발견된 공룡 중 가장 긴 공룡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2012년에 디피는 그 자리에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어린 시절 책과 영상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스무 해를 살면서 가장 기다려왔던 순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영국을 떠나기 하루 전, 나는 다시 디피를 보러 박물관을 찾았다. 다시 방문할 그 날을 위해,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2017년, 런던 자연사박물관 측은 디피를 메인 홀에서 철거하고, 그 자리에 거대한 대왕고래의 골격을 설치할 것을 결정했다. 현재의 환경위기로 인해 사라질 수도 있는 동물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자는 의미로 현생동물의 골격을 전시하자는 의미였다. 디피는 메인 홀에서 철거되지만, 영국 전국의 박물관을 순회하며 전시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에 많은 영국인들은 마지막으로 런던에서 디피를 보기 위해 박물관을 찾았다고 한다. 런던의 터줏대감은 다시 전국을 투어하는 여행자가 된 것이다. 만약 다시 영국으로 떠나게 된다면, 디피가 가장 먼저 보고 싶다. (이 글을 쓰는 도중 디피가 2022년 5월부터 12월까지 런던 자연사박물관에 재전시 된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12월 이후의 일정은 박물관 측 발표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 https://www.nhm.ac.uk/press-office/press-releases/dippy-returns-to-the-natural-history-museum.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