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꽃동네에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먹고살기 바쁜데, 정치적인 민주화와 통일에 관심이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죠. 그런데 그들은 그게 아니었어요. 그러고 보면 “먹고살기 바쁜데…” 하면서 정치 문제, 사회 문제 나 몰라라 하는 정치에 관한 무관심·냉소주의는 꽃동네 사람들보다는 먹고사는 문제가 덜 절박한 사람들, 조금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거든요.
팔레스타인의 꽃동네 갈릴리에 살던 민중도 예수가 펼쳐 보여주는 하늘나라의 새 정치에 열광했죠. 먹고 살기 바쁜데 하며 외면하거나 냉소적이 되지 않았어요. 그가 설파하는 새 정치의 기둥은 사회 정의였죠 (마 6장). 그것은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이 필요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었죠. 바로 하늘나라의 새 정치가 먹고 입고 사는 문제의 근본적이요, 본질적인 해결이라는 걸 정말 먹을 것, 입을 것 없는 민중은 직감으로 알고 있었구요.
그 하늘나라의 새 정치가 오늘 여기서 구체적으로 민주화 운동이요, 민족 통일 운동이죠. 이렇게 해서 서대문구치소 9사 상의 나이 어린 재소자들의 얼굴빛이 나의 눈을 활짝 열어 예수의 세계를 보게 하였어요. 그 얼굴들이 오늘 여기 우리의 현실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세계를 오늘의 시각에서 다시 새로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죠.
2천 년 전의 예수를 오늘 우리의 현실에 갖다 놓으면, 그가 선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는 분명히 NL이 아니고 PD 쪽일 거예요. NL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문제를 분단이라는 민족 모순으로 보지요. 그래서‘National Liberation’, 곧 통일로 민족을 분단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데 운동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 NL이거든요. 예수 당시의 민족 해방 운동은 무력으로 로마의 지배를 물리치고 민족 자주를 쟁취하는 일이었죠. 예수가 십자가를 지신 과월절에 특사로 풀려난 바라바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죠. 그러니까 예루살렘 시민들은 NL 쪽을 택했지요.
오늘 PD(People’s Democracy) 운동의 관심은 이 사회 내부의 계급 모순의 극복으로 민중 해방을 성취하는 데 있지 않아요? 예수의 운동은 예루살렘 특권층과 갈릴리 농민 사이의 내부 모순의 타파에 집중되고 있었으니까, 그는 오늘 이 땅의 PD 계열과 통한다고 해야겠지요.
그런데 예수는 계급 혁명을 주장하고 이를 조직하는 일은 하지 않거든요. 무력 항쟁, 폭력 혁명이 무엇이냐는 것을 그는 막카비 일가의 역사에서 분명히 보았을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막카비 일가가 이끈 독립 운동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자랑스러운 한 장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형제끼리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끌어들인 로마의 철퇴로 무너지고 말았거든요.
예수가 택한 길은 우선 민중을 일깨우는 평화 운동이었죠. 굶주리고 헐벗고 고생하는 사람들 속에라야 남의 고생을 제 고생처럼 알아주는 마음이 있다는 데 착안하셨죠. 그게 바로 메시아 의식이죠. 그는 민중 속에서 잠자고 있는 이 메시아 의식을 일깨우는 일을 하셨죠. 하늘나라 새 정치의 주인은 너희들이라는 것이었으니까요. 민중이 새 역사의 주체로서 눈을 뜨지 않은 가운데 이룩된 혁명은 독재의 악순환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그의 눈은 간파하셨죠.
그는 민중을 투사로 만들지 않고 누룩으로 만들어 갔군요. 그리고 그것은 우선 예루살렘 특권층 속으로도 강하게 퍼져 들어갔죠. 바리새인들의 최고 지도자의 하나인 가말리엘이 예수 운동의 동정자가 되었고 그의 제자 사울은 예수의 사도가 되거든요.
1992. 3.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