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촉진할 수 있는 주체사상으로의 전환

봄길님

 

봄길과 짝이 되는 건 ‘한 바다’가 아니라 ‘늦봄’이지요. 아버님의 호가 승아(勝啞)로 바뀐 것은 해방 전후에 네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시면서 벙어리가 차라리 낫다는 심정에서 하셨을 거라고 짐작이 되는군요, 아버님께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해방 직전까지 一海였지요. 돌아가신 삼촌은 光海였구요. ‘빛바다’도 좋은 호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늦봄’을 그대로 쓰는 게 역시 좋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동안 당신의 편지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들어와서 토요일 95신과 함께 소요산 가을을 만져 볼 수 있었군요. 소요산 가을 정취에 묻어온 당신의 그리움도 안아 볼 수 있었구요.

이향자의 시집 당신이 읽어 보고 들여보낸 것 아니지요? 어쩌면 향자가 이리로 직접 보낸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정말 마음에 드는 시집이군요. 멋지고 훌륭한 시를 쓴다는 마음 없이 담담히 써 내려간 시들. 목에 힘이 들어있지 않는 목소리, 정말 마음에 드네요. 나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쓴 시들이 여러 편 있다고 해서 마음에 든다고 하는 건 아니요. 향자의 시 앞에서 나의 시들은 폼을 잡느라고 애쓴 흔적들이 너무나 역력해서 낯이 붉어지는군요. 그런 시들을 앞으로도 많이 써 달라는 나의 마음을 전해 주시오.

그렇게 담담하게, 시인입네 하는 객기 없이 시를 쓰면서도 오기 또한 대단하군요, 출판사도 없이 가격도 없이 찍어냈으니. 나의 시집은 값이 매겨진 시집들과 함께 책방에 내놓는 게 아니라구, 이런 오기 대단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향자가 지어주는 밥 한 그릇 못 얻어먹고 들어왔군요. 다시 나가는 날 내가 아무리 바쁘고, 제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정성이 담긴 밥 한 그릇 그 손에서 받아먹고 싶다고도 전해 주시오.

요새 세상 돌아가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정말 내일을 예측할 수 없군요. 북쪽 김영남 외교부장이 북쪽은 마르크시즘을 포기했다고 말했다니. 일본은 그것이 북한의 공식 입장일지는 두고 보아야 하겠다고 유보적인 입장인가 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영남 외교부장이 그런 중대한 일에 사견을 말할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자명한 일 아니겠어요?

그런 새로운 입장 정리는 김 주석의 권위 아니고는 아무도 해 낼 수 없는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검찰은 내가 김 주석이 민족주의자라고 말한 걸 가지고 추가 기소를 하려고 한 모양인데, 그가 민족주의자라는 게 이번 김 외교부장의 말로 또 한 번 확인된 셈이죠. 김 주석이 사회주의자라기보다 민족주의자라면, 이 정부는 기뻐해야 하고 환영해야 할 텐데, 그 말을 한 것이 국가보안법에 걸린다고 추가 기소를 하려고 했으니.

“가슴으로 만남 평양”에 이런 이야기를 썼지만, 주체사상도 사실은 마르크스의 역사 철학을 극복하려고 한 자취가 뚜렷이 보이거든요. 마르크스는 역사란 유물 변증법이라는 법칙으로 움직여 나간다는 건데, 주체사상은 사람이 역사를 결정하고 만들어 가는 주체라는 거니까요. 그러면서도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의 기초 위에 서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내 눈에는 억지로 보였는데, 이제 그걸 털어 버림으로써 그런 모순을 제거했군요. 논리적인 일관성을 얻었다고 해야겠지요.

내가 충고했던 대로, 김일성•김정일 주체사상에서 인민 주체사상으로 탈바꿈해야 하는 건데, 나는 그것도 시간 문제라고 생각해요. 인간이 역사의 주인일 수 있는 까닭은 인간에게는 독창성, 자주성, 의식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건데, 거기에 비탄성까지 가미되면 그 주체사상은 우리가 주장하는 주체 의식과 별다른 것이 없어지죠.

북의 주체사상이 인간의 비탄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인민의 명실상부한 주체가 되는 것이 된다면, 아니 북이 그렇게 주체사상을 변화 발전시킨다면, 내가 지적했던 북이 제거해 주어야 할 통일 저해 요인의 가장 큰 것을 제거해 주는 셈이 되죠. 김영남 외교부장의 저 발언은 북이 주체사상에 대한 입장을 근본적으로 재정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이 아닐까 싶군요. 통일의 저해 요인이었던 주체사상을 통일을 촉진할 수 있는 주체사상으로 재정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면, 주체사상의 지도자론의 수정도 기대해 볼 만하지 않을까 싶군요. 

사람의 몸이 70을 넘겨서도 이렇게 변할 수 있는데, 무언들 기대하지 못하랴 싶군요. 북이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했다고 말할 정도이니까. 지금 밤이면 꽤 싸늘한데, 아직도 여름 누비이불을 덮고 자도 하나도 춥지 않으니, 내 몸이 어떻게 된 거죠? 며칠 전 콧물이 나오기 때문에 양말을 신었다가 발이 너무 화끈거려서 벗어 버리고, 아직도 양말이라고는 운동하러 나갈 때 신는 정도. 겨울이면 발이 찬 게 문제였는데, 이번 겨울에는 그 걱정을 안 해도 되지 않나 싶군요. 며칠 콧물 때문에 좀 귀찮았는데, 어젯밤에 소금물로 코를 씻었더니 말끔히 가셨군요. 감기 기운이 아니라 순전히 콧속에 염증이 있었나 봐요.

어머니 일주기 준비 잘 되어 가겠지요? 경순이 내외 보고 싶었는데. 등과 목에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햇볕의 고마움에 젖어서.

당신의 늦봄

1991.09.16

 

 북한이 마르크시즘을 포기했다는 북한 외교부장의 발언을 접하고 북의 주체사상이 통일을 저해하는 것이 아니라 촉진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