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우선 구할 것은 하느님의 나라, 곧 그의 의로우신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라

봄길님께

 

벌써 7월로 접어들었네요. 새벽에 눈을 뜨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좍좍 쏟아져서 마음이 흐뭇해지더군요. 가뭄이 계속되어 몹시 걱정이 되었는데, 뭐니 뭐니 해도 농사부터 잘되어 식량 문제가 해결돼야 하거든요. 이번 노 대통령이 미국 가서 농산물 시장의 전면 개방에 합의하고 돌아오면 어쩌나, 이 또한 몹시 걱정되는군요.

이런 일 저런 일 생각하다가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주기도의 한가운데 있는 대목을 다시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것이 그냥 양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구하는 기도라는 것이 “일용”이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요. 모두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라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저번 날 그 대목을 읽다가 바로 주기도문 앞에 “너희는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도 전에 이미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다”(마태복음 6:8)는 말이 서론 격으로 있는 걸 보고는, 나의 해석이 틀림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구요. 그러고 보니 하늘을 나는 새를 보아라, 새들은 뻘뻘 땀 흘리며 농사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먹여 주시고, 들풀은 길쌈을 하지 않아도 예쁘게 입혀 주시지 않느냐면서 예수가 하신 말씀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먹고 입는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다”(마 6:32)고 하시며 “너희가 우선 구할 것은 하느님의 나라, 곧 그의 의로우신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마 6:33)고 하신 말씀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오. 마태복음 6:25~34까지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기도의 주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기까지 썼는데, 접견 왔다고 해서 나가서 반가이 만나고 들어와서 계속하는 거예요. 호근이가 와주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르겠군요. 남은 제 목숨을 끊는데, 담배쯤 못 끊으랴며 담배를 끊었다는 건 듣던 중 희소식이군요. 채소를 기르는 일이 그렇게 기쁨이 되었다는 것도 희소식 중의 하나구요. 하늘과 땅과 자연을 사랑한다는 건 자연을 향해서 마음을 여는 일인데, 마음을 여는 건 몸을 여는 일, 10조를 넘는 몸의 세포들을 여는 일이 되거든요. 그리될 때 이 커다란, 아니 무한대한 누리가 뿜어내는 힘(energy), 곧 氣가 그 세포들 속으로 들어오거든요.  이건 氣論으로 써야지요. 무엇보다도 바우가 채소를 많이 먹게 되었다는 거, 어지나가 푸성귀에 대한 호기심이 부쩍 늘게 되었다는 거, 이 또한 수득치고는 너무 큰 소득이네요.

끼니를 호근이네 집에서 하게 한 것은 썩 잘한 일, 이래서 며느리 손에 끼니 공대(恭待)를 받는 거죠. 72년이나 남을 공대하는 일만 해 왔으니까, 이제 며느리의 공대 좀 받아 봐야지요. 그동안도 며느리들 공대를 안 받은 건 아니지만. 오늘 당신의 모습은 너무 초췌해 보이더군요. 나는 여유작작한데. 당신도 나의 여유를 좀 가지도록 하시오. 지난 금요일로 당신의 편지 18신까지 들어와서 시시콜콜한 소식들을 알 수 있어서 고마웠어요. 나의 편지는 몇 신까지 들어갔는지? 『히브리 민중사』 수정판이 나온 지가 언젠데, 그 수정판을 구경 못 했군요. 댓 부 보내 달라고 해서 한 부 보내 주면 좋겠군요.

실의에 빠진 건 경대 군 아버지, 어머니뿐이 아니지요. 그런 걸 생각하면서 밥이 그냥 목구멍으로 안 넘어가는 것뿐이에요. 78년12월28일 밖에서 (김)지하, (서)광태, (김)봉우 어머니가 몸부림치는 모습이 보여 밥을 끊을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나의 심정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라오. 최후 승리를 믿으면서.  사랑

 

경대 아버지, 어머니께

 

두 분이 실의에 빠져 살 의욕을 잃고 집에 들어가서는 울기만 한다는 소식을 오늘 아내에게서 들었습니다. 그 심정 어찌 경대 아버지 어머니만이 겪는 것이겠습니까? 21일 뉴스로 참패의 소식을 듣고 경대 아버지 어머니를 위시한 유가족 전체의 처절한 모습이 보여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아 밥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싸움은 아홉 번을 져도, 열 번째 마지막 한 번을 이기는 쪽이 이기는 겁니다. 장준하 씨의 돌베개를 내보낼 테니까 읽어 보십시오. 수 없는 좌절을 겪으면서도, 그는 다시 일어서곤 한 모습에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책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라던 통일 조국을 보지 못하고 맞아 죽었습니다. 비극이었지요. 그러나 누가 승자입니까? 장준하입니까? 그를 죽인 사람입니까? 그가 죽은 75년에 비해서 민민 세력이 얼마나 커지고 확장되고 강해졌습니까? 민족 해방 운동의 선구자가 장준하였다면, 민중 해방 운동의 선구자는 전태일입니다. 민족의 두 횃불입니다. 경대도 자랑스러운 그 행렬에 당당히 섰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하여 제게도 용기를 주십시오. 저는 이 편지를 경대 장례식 사진 (『말』 표지) 위에 놓고 씁니다. 다시 부탁드립니다. 용기를….문익환 드림

1991.07.01

 

 아내에게는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에 대해 깨달은 생각을 전하고, 실의에 빠진 강경대의 부모님에게 힘을 내라고 격려를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