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된 문익환의 자서전

어머님께

 

오늘 접견실에서 들려주신 그 쩌렁쩌렁하는 목소리에서 울려오던 어머님의 정신이 어머님의 몸을 앞으로 5년은 넉넉히 지탱해 주리라는 걸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5년 동안에 통일을 이루어 내는 거구요.

72년 전 저를 낳으시고, 코 흘리며 자라다가 소학교, 중학교를 거쳐 신학교에 갔다가 목사가 되고, 신학교 교수도 하고 성서 번역도 하다가 마침내 지난 14년 동안 10번 생일을 감옥에서 보내는 아들을 보시면서 감회도 깊으실 텐데, 어머님은 오늘 저의 생일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으신 것 같았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아버님도 그러셨지요. 그 정신, 그 마음으로 저도 여생을 유한 없이 살렵니다.

어제오늘 지난 72년 생애를 회고해 보면서, 눈만 감으면 저의 어두움 속에서 환히 빛나는 분이 계십니다. 그 빛나는 맑은 얼굴, 목화꽃처럼 청순한 웃음으로 저의 마음을 밝게 해주시던 분, 제 가슴에서 아름다움으로 빛나 오는 모습, 그분은 저의 외할머님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은은한 미소를 풍기시던 외할머님의 환한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제가 화가라면 외할머님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으리만큼 외할머님의 얼굴이 뚜렷합니다.

어머님은 늘 저더러 “너는 어쩌면 그리도 외할아버지를 닮았느냐”고 하셨지요. 수틀리는 일, 눈꼴사나운 일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벼락이 떨어지는 게 그리도 외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하셨지만, 저는 외할아버님의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외할아버님의 그런 성품이 제게 왔다면 어머님을 통해서 왔지요. 어머님도 아름다웠지만, 어머님은 외할머님의 고요한 아름다움보다는 외할아버님의 준엄한 지성을 겸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전부를 쏟아 사랑해 주셨던 분은 증조모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증조모의 품에서 자랐으니까요. 그런데 그 증조모님의 사랑이라는 것도 그리 아기자기한, 따듯한 사랑이기보다는 냉철한 사랑이었습니다. 별로 말도 없으시고, 별로 웃으시는 일도 없이 지그시 굽어보시면서 보살펴 주시던 그 냉철함 속에서 번져오는 사랑을 저는 한순간도 의심해 본 일이 없습니다. 불평스럽게 느껴 본 일도 없습니다. 저는 그 할머님에게서 잔소리라는 걸 들어 본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무슨 의견을 말씀하시는 걸 들은 기억도 없습니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제가 자라는 걸 주시하고 계실 뿐이었는데, 저는 그 깊은 관심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사랑 속에서 저는 비교적 안정감을 갖고 자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화끈화끈한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부으신 이는 할머니셨습니다. 그 할머니의 건강하고 고지식한 인정 같은 구수한 인정을 저는 지금까지 아무에게서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좋았는데, 저에게는 그런 고지식한 인정 같은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 고지식하고 후덕한 인간성은 선희에게 와 있습니다. 동환이마저도, 영환이, 은희에게도 그것은 와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할머님의 고지식한 성품은 사실 아버님을 거쳐서 선희에게까지 내려온 거죠. 그런데 아버님에게는 할머님에게서 내려온 고지식함 말고도 모든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는 능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건축 공학 공부라고는 문 곁에 가보지 않으시고도 큰 건축들을 해내실 수 있었다는 것이 그걸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온몸으로 살아가는 일이라는 걸 보여주는 표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아버님과 저의 관계는 최근에 와서 비로소 정이 통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제가 감옥에 들락거리면서부터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님의 사랑을 받으며 같이 살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저에게 남아 있는 아버님의 기억은 (다음 편지로 계속) 

 

(전 편지에서 계속) 아버님이 캐나다로 유학 가실 때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소학교 4, 5학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버지와 한집에서 살게 되었다는 기억은 용정 중앙교회에 부임하신 다음부터였다고 생각됩니다. 어렸을 때 삼촌 기억은 꽤 있습니다. 숭실전문 다니시다가 방학이면 돌아오셔서 바이올린을 켜면서 노래도 가르쳐 주시고 이야기도 들려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삼촌은 우리 집안에서는 거의 예외적인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예술적인, 문학적인 감정이 풍부한 분이었거든요.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고 따랐는지 모릅니다. 고모들의 기억도 나고 러시아로 가신 고모부의 모습까지 환히 나는데, 그 당시의 아버님 기억이 전연 없습니다. 아버님 성격이 무뚝뚝하신 데다가 거의 집에 붙어 계시지 않고 타지방으로 돌아다니셨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사건건 앞세대에 반항하는 사춘기에 이르러서야 아버님이 저의 생활권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니 아버님과 저의 인간관계가 원만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별 탈이 없었습니다. 아버님은 자식들에게 야단치시거나 매를 드는 일이 없었습니다. 저 또한 아버님께 엇먹는 문제아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뿐이었습니다. 제가 아버님 얼굴을 뵙는 것은 다른 교인들처럼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서 만나 뵙는 정도였으니까요. 제가 일어나기 전에 나가셨다가 제가 잠든 다음에야 들어오시는 아버님과 언제 정이 통할 수 있었겠습니까?

제가 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저는 돼먹지 않은 학문적인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제 눈에 한국 교회는 신학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보수적이요 유치한 원시적인 신학밖에 없는 한국 교회를 멸시하다 보니, 제 눈에 아버님의 신학이나 목회가 대단하게 보일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신앙적으로도 아버님과 별 공감대를 갖지 못한 채 살아온 셈입니다.

그러는 중에도 아버님의 세계가 언뜻 보인 일이 있었습니다. 첫 번은 제가 조양천에서 소학교 선생을 할 때였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버님이 제 나이 스물이 되기까지 제가 목사가 되기를 바라셔서 하느님께 기도해 오셨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제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를 말없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20년 동안 저는 아버님의 기도 속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기도만 하실 뿐 그 말을 한마디도 제게 내비치지 않으셨다는 사실에서 그 사랑과 생각의 깊이 같은 걸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아버님은 그날로 유학 떠날 준비를 서둘러 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아버님이 성진 헌병대에 붙잡혀 가신 때였습니다. 아버님의 행방을 찾아 헤매다가 간도 성장(省長) 윤봉동(尹奉東)을 만났더니 그가 하는 소리가 “자네 아버지는 왜 일본 말 공부를 하지 않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친일파들의 눈에 비친 아버님의 모습이었습니다.

한국 교회 신학에 대해서 저의 눈을 뜨게 해준 것은 김익두 목사님이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후에 따로 쓰기로 하겠습니다. 아버님의 신학이 얼마나 첨단을 가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해 준 것은 아버님이 평신도 운동에 온 심혈을 쏟으실 때였습니다. “교역자가 중심이 되어 교역자가 이끌어 가는 목회는 전적으로 잘못됐다. 지금까지의 나의 목회는 근본적으로 틀렸어”라면서 ‘평신도가 주인이 되는 교회’가 올바른 교회라는 생각으로 아버님의 마지막 정열을 쏟으신 것 아닙니까? 여기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아버님이 이해하신 하늘나라는 모든 권위주의가 제거된 사회라는 점, 둘째 그것은 민중이 주인 되는 민주적인 사회라는 점. 아버님이 이해한 복음의 핵심 내용은 누가복음 4장 18~19절, 6장 20~26절, 7장 22절이었거든요. 셋째, 신앙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점. 평신도는 현장에서 몸으로 신앙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아버님은 민중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민중 신학을 살아가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과 의기투합한 사이가 된 것은 제가 감옥에 들락거리면서부터입니다. 그야말로 통일꾼 동지로서 혼연일체가 되었습니다. 저는 아버님이 얼마나 큰 무게로 제 속에 자리 잡고 있었는지를 아버님이 운명하시기까지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님의 운명과 함께 저는 체중을 몽땅 잃은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날이 갈수록 아버님의 체중이 다시 제게 실려 오면서 저에게서 엄청난 체중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통일이라는 민족 문제의 해결이 저의 존재의 전부가 되었다면, 그것은 저의 신앙의 전부인 셈인데, 이것은 아버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은 (다음 편지로 계속) 

 

(전 편지에서 계속) 북간도 명동에서 온 것입니다. 명동의 개척자들은 아무도 천당 가자고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민족 해방, 조국 독립의 길로서 예수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종교를 민족에 예속시킨 것도 아니었습니다. 둘은 혼연일체였습니다. 누구나 문제의식 없이 종교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아니지만, 명동의 개척자들이 의식한 최대 문제는 민족 해방이었습니다. 그 문을 거쳐서 인류와 세계와 역사의 종교적인 해결을 찾았고, 거기서 찾은 신앙의 구체적인 실천을 민족 해방으로 보고 살았습니다. 민족 해방 운동으로 전개되던 독립군 운동이 지금은 통일꾼 운동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버님, 어머님의 생각 아닙니까? 그것을 신앙의 실천 행위로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아버님, 어머님을 거쳐서 저에게 전수된 신앙이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라는 형식과 내용으로 저에게서 표현되었습니다.

그 명동의 주봉(主峰)은 누가 뭐래도 동방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김약연 목사님이셨습니다. 사춘기 이전 나의 어린 시절, 그 민감한 감수성에 찍힌 김 목사님의 모습은 쳐다보고만 있는 것으로도 흐뭇하고 마음 든든하고 마음에 평화를 주었습니다. 만인이 존경심을 갖고 믿고 우러를 수 있는 지도자상으로 그는 제 마음에 환한 모습으로 찍혀 있습니다. 아버님이 집을 비우시고 나가 다니시는 동안 아버님이 차지하셨어야 할 제 마음의 전당에는 목사님이 자리 잡고 계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주봉과 짝해서 서 있는 또 하나 거봉은 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 장로님이셨습니다. 제가 어디엔가 그분을 천병만마(千兵萬馬)를 휘동(麾動)하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장군의 기상을 가지고 있다고 쓴 일이 있지만, 다른 한편 그분은 위대한 민중의 대표가 되고도 남을 인물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동주는 이 두 거봉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습니다. 동주에게 부러운 게 이것저것 있었지만, 동주의 할아버지가 정말 부러웠습니다. 전 할아버지가 없었으니까요. 김 목사님이 동주의 외삼촌이라는 건 동주가 죽은 다음 가계 이야기가 나오면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동주는 민족정기의 두 거봉의 예술적인 후예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 두 어른의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이 혼연일체가 된 예술적인 표현이 바로 윤동주라고 하겠습니다.

동주가 없는 문익환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스물아홉 살 젊음으로 동주는 지금도 제 옆에, 아니 제 속에 살아 있습니다.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이 혼연일체가 된 그의 시정신이 그가 자리를 비운 이 역사를 살아가도록 늘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빌면서 지난 46년을 살아온 셈입니다. 동주와 함께, 동주의 몸이 되어, 동주의 마음으로.

동주는 문학 공부하러 서울로, 저는 신학 공부하러 동경으로 갑니다. 그게 1938년입니다. 동경에 가서 터득한 신학의 틀을 깨는 데 4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절대자, 초월자로서 하느님을 인식하는 바르트의 신학의 틀은 지배자의 지배 이념이 되기 꼭 알맞은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그 신학에 흠뻑 빠져들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동경 유학은 저를 보수에서 보수로 걸어가게 한 길이었지만, 그 길에서 저는 저의 생의 최대의 보화를 얻어서 돌아옵니다. 그게 어머님의 맏며느리입니다. 그 사람 없이 오늘의 저는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명주실처럼 예민한 신경을 가지고 폐병, 늑막염, 위산과다로 죽어 가던 몸과 마음을 소리 없이 감싸 주고 떠받들어 준 그 사람 아니었다면 저는 벌써 저승 사람이었을 겁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아직도 10대의 신선함을 풍김으로 저의 젊음을 계속 유지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투지라니, 어머니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거든요. 저는 너무너무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배운 권위주의적인 독일 신학의 틀을 깨는 데 결정적인 몽치를 휘둘러 주신 분이, 반권위주의적이라기보다는 무권위주의적인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십니다. 일본 청산학원(靑山學院) 신학부를 다니실 때 신학 서적보다 문학 서적을 더 많이 읽으셨으니 알 만한 일이지요. 사면받아 간 죄수들, 면천(免賤)의 혜택을 안고 찾아간 천민들이 새살림 터전을 마련한 빈방이 바로 김 목사님이 자라난 곳이거든요. 민중 신학이 그의 뿌리에서 움텄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죠.

그러나 제가 진정 민중을 만난 것은 1976년 서대문 구치소에서였습니다. 거기서 처음으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아니 호흡으로 하느님을 숨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 속에, 그것도 민중의 역사 속에, 민중의 숨결 속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을 저도 숨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한국의 민중만이 아니라 성서의 민중도 만납니다. 성서의 민중에 나의 눈을 열어 준 것은 고트발트(Gottwald)라는 미국의 구약 학자입니다. 그의 「야훼의 부족들」이라는 연구가 구약을 아주 새롭게 보게 해주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출판될 『히브리 민중사』가 감옥에서 제가 처음 만난 히브리 민중들의 (다음 편지로 계속) 

 

(전 편지에서 계속)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제가 감옥에서 만난 중요한 것은 요가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건강법으로 요가를 시작했는데, 하다가 보니 요가는 저의 세계관 정립에 기초가 되었습니다. 요가의 알파와 오메가는 호흡인데 그 호흡이라는 게 우주를 숨 쉬는 것입니다. 저의 호흡이 그대로 우주의 숨결이 됩니다. 그 우주의 숨결에서 저는 하느님의 숨결을 호흡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2장에 하느님이 아담을 흙으로 빚으시고 코에 김을 불어넣으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고마움, 존엄만이 아니라 생명의 힘을 하느님의 힘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생명은 몸이자 마음이요, 마음이자 몸입니다. 삼라만상에서 생명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주 만상을 꿰뚫는 큰마음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 큰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의 몸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 큰마음의 한 파장(波長)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 큰마음의 눈뜸입니다. 때로는 흐릿하게, 때로는 쨋쨋하게.

이렇게 해서 저는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독선과 독단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큰마음의 눈뜸을 계시라고도 부르고 깨달음, 즉, 각(覺)이라고 부르지만, 그 어느 것이나 큰 눈뜸이라는 데는 다름이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런 눈으로 보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원시 종교, 즉 다신교도 다 소중하게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기독교인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눈뜸만큼 맑은 눈뜸이 없다고 저는 믿으니까요. 예수의 눈으로 다른 종교들을 보면 세계와 역사와 인간이 더없이 쨋쨋이 보입니다. 시각을 바꿔서 다른 종교들의 시각에서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볼 수는 있습니다. 그 시각도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시각이기도 합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는 일 없이 기독교 신앙의 특이성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쩌다가 이렇게 저의 세계관, 저의 신앙에 혁명을 일으키는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나요? 감옥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제가 믿는 하느님은 몸으로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 머리로 믿는 하느님이었을 뻔했습니다. 저는 예수를 영영 모르고 말 뻔했습니다.

저를 이 자리에 차넣으신 하느님의 발길은 장준하였습니다. 장준하의 의로운 죽음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어머님이 잘 아시니까 더 쓰지 않겠습니다. 저는 장준하를 통해서 백범(白凡) 김구 선생을 만났고, 그의 발자국을 따라 평양에까지 갔다 왔습니다. 김구 선생이 어떤 분인지는 어머님이 잘 아시니까 그 이야기도 하지 않겠습니다.

장준하의 죽음 앞에서 또 하나 백(白)가 이야기를 어머님께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그의 이름, 기완입니다. 어머님도 그를 잘 아시지만 왜 제가 백기완이라는 사람에게 빠졌는지는 잘 모르실 겁니다. 저는 지금까지 조국을, 나의 겨레를 글쟁이들이 남겨 준 글을 읽어서 조금 알았다고 하겠습니다. 길고 긴 우리의 역사에서 글이란 지배자들의 전유물이었고 지배자들의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글을 읽어 아는 조국이나 겨레는 극히 왜곡된 것이었습니다. 백기완이란 친구는 글을 모르는, 글 아는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무지렁이들의 몸부림과 아우성으로 뒤범벅이 된 조국과 겨레를 우리에게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를 키워준 명동의 선배들은 다 유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저는 이 나라의 무지렁이들의 세계를 너무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저에게 없던 이 겨레의 민중적인 세계를 그 친구에게서 얻어듣고 있습니다.

장준하에게 끌려든 이 운동권에서 저는 백기완 말고도 너무나 많은 새 시대의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금강산 만폭동 푸른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고 느끼는가 하면, 한 줌 재도 안 남기고 타버리는 불길에 휩싸였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 모든 젊은이들이 오늘 저를 이 자리에까지 몰아온 겁니다. 그들이 가라고 해서 평양에 갔고, 그들이 징역을 살라고 해서 징역을 살고 있습니다.

민족사의 이 거대한 물줄기에 뛰어들어 살아온 14년 (76년 이후) 동안 감옥에서 10번째 생일을 맞았다면 저도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우가 제 할아비 이야기를 쓰고 싶어 역사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기까지 되었다면, 저는 불평할 일 하나도 없습니다. 민족의 제단에 생때같은 목숨들을 캑캑 바친 젊은이들과 그 가족들 생각에 목메일 따름입니다.

72년 저의 생애를 이끌고 밀어주어 오늘 저를 이 자리에 서게 해준 고마운 이들이 어찌 위에 이름을 열거한 이들뿐이겠습니까? 백두산을 향해 한꺼번에 큰절 올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어머니!

아들은 엎드려.

 

72번째 생일을 맞으며 그동안 삶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 사건들을 열거하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기술한 편지. (봉함 엽서 넉 장 분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