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적인 초월

동환에게

 

지금 내 앞마당은 참새들의 세계가 되어버렸어. 비둘기는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에 간 거인처럼 보이고.  어제 나는 초월 이야기를 하다가 민주주의에 이르는 길도 집단적인 초월이라고 썼었는데, 이건 좀 논리의 비약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생각하다가 깨달은 점이 이런 것이었어. 민족통일이라고 할 때는 7.4 공동성명에도 있듯이 우리는 정말 초월의 노력이 불가피하겠지만, 민주주의라는 건 그게 아니잖아? 민주주의는 타협과 협상과 조절의 과정을 거쳐서 다양한 생각과 이해관계가 서로 용인되고 각기 제자리를 찾는 것이거든. 그런데 나는 그 과정도 초월(집단적인)의 과정이라고 느끼고 있었던 거야. 거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 첫째는, 민주주의를 이루려는 이 땅의 젊은 몸부림이 그대로 죽음을 뛰어넘는 십자가의 길, 자기 부정의 길이 되어 있다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그 이유가 되었던 것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민주주의를 이룩하려는 노력은 곧 하느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과정일 터인데, 그것은 타협, 협상, 절충이라는 정치적인 과정을 넘어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싶어.

안(병무) 박사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주 사회가 곧 마가복음 저자가 생각한 하늘 나라를 성취하는 일이라고 단언하는 것 같은데, 과연 그것으로 우리는 할 말을 다 한 것일까? 그리스도인이 밥 짓는 법이 다를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의 민주화 노력이 별다를 것일 수 없는 것이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겠지.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친다는 건 자기를 희생하고 십자가를 지는 일일 텐데, 그건 과연 무엇일까? 그것이 곧 정치의 인간화인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천부의 인간 권리를 유린당함이 없이 인간다운 생을 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요새 젊은 세대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그들이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뿐, 인간적인 삶의 내용은 그들과 우리와 별로 다른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들거든.  성서가 복음에 담아 인류에게 준 인간다운 삶이라는 보화는 이미 비신학화되어서 인류 공동의 언어로 보편화된 것일까? 그래서 그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만 지는 십자가를 서슴없이 몸으로 지게 되는 것일까?

안 박사는 성서의 언어는 그대로 민중 언어라고 하지. 그래서 성서의 민중 언어로 서구 신학을 거부하는 반신학을 선언했더군. 시원해. 그런데, 나는 구약을 읽으면서, 구약의 민중 언어가 상당히 궁중 언어에 깔려서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느낌이야. Gottwald의 새 학설은 성서적인 근거가 박약하다는 것이 대부분 학자들의 반응이 아니야? 농민 반란군의 해방 전쟁이 예루살렘 궁정 사가들의 손에서 침략 전쟁으로 둔갑하여 버린 거지. 그것이 2,50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상당한 추측을 가미시켜가면서 아찔하게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거든. 도대체 고대 사회에서는 글을 쓴다는 게 특권층에게나 허락되는 일이었으니까. 예레미야 같은 사람도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지.

저번에 보내준 편지에 회답을 쓰려고 했는데, 그건 다음으로 미루어야 하게 되었군. 내일 쓰기로 하지.  형 씀

 

민족통일과 민주주의에 있어서 집단적인 초월에 관한 생각. 안병무 박사의 민중 언어에 대한 생각등을 동생에게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