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실천과 자기 초월

봄길에게

 

장마 때문에 몸이 꽤 끈적끈적한데 봄길이라고 써놓으니까 괜히 기분이 좋아지네요. 어머님의 수척한 모습에 가슴이 아팠어요. 아들을 믿어 주셔도 될 텐데. 너무 극성으로 중국어를 공부하다가 신경성 몸살을 앓은 것이 나의 생을 살아가는 데 퍽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 같습니다. 유연하고 여유 있는 요가의 자세를 갖추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될 것 같소.

조금 전에 홍남순 변호사님이 오셔서 만나 뵈올 수 있어 정말 기뻤구요. 담당이 당신의 23일 편지를 주면서 편지를 쓰라고 해서 이렇게 복도에 있는 책상에 앉아서 붓을 달리고 있소. 윤제술 선생님이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나에게 그렇게 훌륭한 휘호를 써주셨는데, 벼르기만 하다가 한 번도 찾아가 문병도 못 올린 생각을 하니 꼭 죄인이 된 느낌이군요. 명복을 빌 뿐이오.

모기와 초월에 관한 편지가 그렇게 빨리 들어갔다니 놀랍네요. 어제 그 계속을 썼는데 오늘 그 여진이라도 적어 볼까 싶군요. 오늘 아침에도 다시 요한1서를 읽으면서 바울 서간과는 너무나 다른 걸 느꼈소. 바울은 영과 육의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 마냥 힘겨운 일이었지 않았소? 그것이 신앙이었고 그것이 곧 인간 갈등의 고뇌를 초월하는 길이었구요. 그런데 요한1서 저자는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은, 다시 말하면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악을 범할 수 없고, 하는 일이 선일 수밖에 없다고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결론을 내리는데, 그게 옳은 거거든요. ‘하느님 안에’라는 그의 초월은 곧 죽음을 초월하는 일이요, 악을 초월하는 일인 것인데 그 길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오심으로 가능해졌다는 것 아니겠소?

그런데 요새 젊은이들은 하느님 없는 초월로 뛰어넘는군요. 그러나 중요한 건 사랑이에요. 하느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곳엔 하느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은 곧 사랑이시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건 정말 위대한 선언이었어요. 기독교인들의 종교적인, 현세적인 이기주의 속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아요. 거기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지요. 머리로는 하느님을 부인하면서도 사랑으로 자기를 내던지는 사람 속에는 하느님이 계시는 것 아니겠소? 요한1서 저자는 그렇게 믿고 있었군요.

예수의 십자가는 교회의 장식물이거나 독점물일 수 없어요. 예수가 성 밖에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거지요. 예수는 인류 역사에 뿌리를 내린 십자가로 사랑을 역사 속에 퍼뜨리고 있어요. 이 땅의 젊은이들의 죽음을 넘어서고 악을 극복하고 넘어가는 사랑에서 예수의 사랑을 만난다고 해서 무슨 잘못이 있을까요?

사랑의 초월이라는 게 얼마나 위선이 될 수 있느냐는 걸 나는 최근에 읽은 이문열 씨의 『영웅시대』에서 너무나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소. 주인공(벌써 이름을 잊었군요)은 봉건적인 대부호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면서도 그걸 털털 털어 버리고 무산대중의 해방을 위한 공산주의에 투신하지요. 그가 6·25 동란을 겪으면서 발견한 것은, 자기가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호신술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소. 봉건시대가 간다는 건 역사적인 필연이야, 그러나 봉건시대를 청산하고 들어설 자본주의 시대도 어차피 갈 테니까, 변신할 바에는 봉건시대의 적의 적으로 변신해 버림으로써 역사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었거든요. 무산대중을 사랑해서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목숨을 내던져 투쟁한다는 일이 얼마나 비열한 위선이요 속임수였느냐는 거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사랑과 함께 진실, 진실로 안이 받쳐진 사랑이라고 할는지요? 요한복음 저자는 그래서 “나는 곧 진리(실)”라고 한 것 아니겠소. 하느님은 사랑인 동시에 ‘참’이신 거죠. 이 둘의 합일이기도 하구요.

사람이 어떻게 순수한, 거짓 없는 사랑의 실천으로 자기 초월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인가요? 이건 또다시 사도 바울적인 지성적인 갈등인데 나는 요한1서 저자의 순진한 자세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자세인 것만 같이 느껴지는군요. 부족한 건 하느님이 용서해 주시고 채워 주실 걸 순진하게 믿고 소박하게 살면 되는 게 아닐까 싶군요. 그렇다고 현실을 보는 비판적인 눈이 흐려진다는 건 물론 아니죠. 순수한 사랑과 차가운 과학성의 합일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 사랑을 참사랑 되게 하는 진실이 바로 과학 정신 아니겠소.

비둘기, 참새, 쥐, 모기를 관찰하다가 얻은 통찰은 일단 이것으로 다 정리된 것 같군요. 내일 아픈 가슴들에게 하느님의 위로가 있기를 빌면서.

 

1986. 7. 26. 늦봄

 

사랑과 초월에 대한 종교적 관점을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