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1) (2024년 3월호)

“늦봄, 양심수를 늘 가족처럼”

 
💌 편집장의 커버스토리
통일의 집 뒷동산을 걸어서 넘어가면 수유동 언덕위에 작은 빌라촌을 만납니다. 걸어서 10분거리 아주 가까운 곳에 그의 둥지가 있습니다.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의 자택입니다. 우연히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익환 목사와 좀 더 가까운 곳에 있고 싶어서 일부러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이지요. 
평생을 홀로 지내며 ‘양심수의 벗’으로 헌신해온 그에게, 늦봄은 동지이자 가족이었습니다. 오직 양심수들을 위해 열정 가득한 삶을 살아온 권 회장. 병마와 싸우면서도 여전히 ‘분단없는 통일국가’를 꿈꾸며 글쓰기를 쉬지 않는 그를 『월간 문익환』이 만나봤습니다. 
  
 
3월 인터뷰 인물 권오헌 (사)정의·평화 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을 만나기 위해 통일의 집 뒷동산을 넘어 바로 보이는 빌라로 향했다. 권 회장은 문익환 목사와 가까이 지내면서 함께 북한산에 오르기를 기대하며 수유리로 이사 왔다고 한다. 아담한 집안을 가득 채운 책들과 자료들은 수장고에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미리 받은 질문에 손글씨로 빼곡히 답을 써서 준비한 정성에 감동했고 그 꼼꼼함에 놀랐다. 그의 열정을 대변하듯 절절 끓는 안방에 둘러앉아 권 회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수유동 자택에서 만난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문익환 목사에 대한 기억  

목사님 옥중시 낭송 현장서 들어

▶문익환 목사와의 첫 만남은?
만남이라는 것은 대면하고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는 않았어도 감동적인 첫인상이 있어요. 76년에 3.1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되고 77년 12월 31일에 출옥하셨는데 그때 항일 문학의 밤(민족 문학의 밤)이라는 게 있었어요. 그때 목사님이 옥중에서 쓴 시를 낭송하셨거든요. 근데 그게 정말 그렇게 살아있는 글이었어요. 그냥 책상에서 그냥 상상해서 쓰는 시들은 그냥 뜬구름 잡는 거라면 목사님은 아주 절실한 현장감을 그대로 표현한 시를 낭송하셨어요. 그 자리에 계셨던 부친 문재린 목사님은 “아, 감옥이 참 좋은 곳이구나. 내 아들이 시인이 돼서”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저는 그 당시 비공개 단체(남민전)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라서 나서서 인사는 못했지요. 
 
◇백범사상연구소,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주최한 ‘제1회 민족문학의 밤’에서 수인복을 입고 문인들 앞에서 옥중시를 낭송한 문익환 목사(1978. 4. 24) ⓒ박용수
  
 

양심수 가족처럼 돌봐 감동

▶그렇다면 첫 대면은?
그때 목사라는 기독교 성직자가 이렇게 나선 것에 대해서 정말 충격이었고 많은 사람들도 목사에 대해서 존경심을 갖고 있었죠. 그러다 저는 남민전 사건으로 1979년 체포돼서 대구교도소에 있었고 목사님은 공주, 안양에 계시다가 82년 12월 24일에 나오셨지요. 그리고 1월부터 한빛교회 장소를 빌려 ‘고난받는 이들을 위한 갈릴리 교회’를 열고 담임을 하셨죠. 여러 목사님들이 계셨지만 특히 문 목사님하고 박용길 장로님이 양심수 가족들을 돌보고 내 일처럼 하나하나 해주셨어요.

저는 83년 2월에 나왔는데 남민전 사건 구속자들이 아직 감옥에 있고, 또 그 가족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 가족들하고 매주 갈릴리 교회를 다녔어요. 남민전 가족뿐만 아니라 재일교포간첩단 사건 이철 씨 가족 민향숙 씨, 조만조 어머니(월간 문익환 2024년 1월호 참고)도 계셨고, 학림 사건(전국민주노동자연맹사건) 이태복 씨 어머니도 계셨고요. 거기에서 목사님, 장로님을 처음으로 직접 뵙고 제가 첫인상의 충격적인 감상도 말씀드리고 해서 곧바로 아주 친해졌어요. 주로 양심수 석방과 후원에 관한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1993년 6월 12일, 서울 미아동 성가병원에서 고 이내선 선생의 장례식에 참석한 권오헌 회장과 늦봄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권오헌
 
 

진짜로 정이 많으신 분

▶가까이서 본 문익환은 어떤 사람인가요? 
정이 많은 체하는 게 아니라 정말 정이 많아요. 목사님 자체가 정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죠. 감성적이면서도 합리적이지만 감성이 앞서요. 그게 현장 활동으로 이어지는데 열사가 나오면 금방 달려가셨죠. 지식인으로 『공동번역 성서』(1977)도 번역하신 분이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에 나서고 결정적으로 평양에서 1989년 4.2 공동성명을 하신 거예요. 항상 고난받는 편에 서서 가장 헌신적으로 온몸으로 실천하셨어요. 그러니까 세 가지로 정리하면 행동하는 종교인, 반민주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가, 또 외세와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자주통일 운동가, 이렇게 분류돼요. 제가 양심수 후원회보(94년 2월호)에 쓴 추도사를 한번 읽어보세요(🔗archives.kdemo.or.kr에서 36890 검색). 
 
“누군가 꼭 해야 하지만, 선뜻 나서기 어려운 일을 부탁드렸을 때, 곧바로 당신에게 수난이 뒤따른다 하더라도 주저하지 않으셨던 분이셨습니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함으로써 그 악법의 철폐를 실천하시려 했고, 스스로가 '고무, 찬양'죄로 재판을 받고 있으면서 '서로 고무 찬양해야 통일하지 않겠느냐'고 법정에서 주장하셨으며 족쇄와 철창이 입을 벌이고 있었으나 당당하게 그 누구의 허가도 필요 없이 평양을 가셨고 또 거침없이 오셨습니다.” (권오헌의 문익환 목사 추도사 중) 
 
 

부탁말씀 하시더니 다음날 평양행

▶기억에 남는 일화는? 
89년 1월 1일에 그 전날 밤에 쓰신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거의 처음으로 갈릴리교회 사람들한테 읽어주셨어요. 그리고 89년 3월 19일에 ‘민가협 양심수후원회(현 사)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가 발족합니다. 그때는 굉장히 유명한 사람들이 자문위원으로 계셨는데 양심수나 비전향장기수 문제에 대해서 문 목사님이 가장 헌신적으로 일하셨기 때문에 목사님이 초대 후원회장이 되신 거예요. 그날 저녁 일꾼들하고 종로성당 아래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석방과 후원사업에 헌신해 달라고 부탁의 말씀을 하세요. 저는 그게 그냥 잘해달라는 뜻이 아니라 ‘나는 어디 가니까 잘 부탁한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죠.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라는 시하고 연결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다음 날 바로 도쿄에 가셨죠. 
 
 
◇ 문익환 목사 석방 환영 모임(1990. 12. 28) ⓒ권오헌
 
 
◇1991년 12월 제3회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행사장에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는 권오헌 명예회장. ⓒ권오헌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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