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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대학 ‘디지털인문센터’ 개소식 열려
디지털 전환시대, 디지털과 인문학 협력과 상생의 길 모색한다 전임 인력 육성해 융합연구 지원, 확장된 인문학 교육 시스템 구축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은 8월 10일(수) 오후 4시부터 고려대 문과대학(서관)에서 디지털인문센터 개소식을 가졌다. 문과대학 디지털인문센터는 4차산업혁명과 학생들의 높은 디지털 교육 수요를 반영하여 디지털 교과와 비교과 과정을 강화하고자 설립됐다. 디지털 전환 시대를 맞이하여 디지털 인문학 전담 교강사를 배양하고 융합연구를 지원하여 더욱 확장된 인문학 교육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방침이다. 디지털인문센터는 학과별 1인 이상의 디지털 인문학 전담 교강사를 배양하고 교양필수로 개설한 <디지털 인문학 입문> Ⅰ, Ⅱ 교과가 내실 있게 진행되도록 지원한다. 또한 전문가 특강과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 비교과 과정도 충실하게 운영할 계획이다.   ▲ 앞줄 왼쪽 다섯 번째부터 고려대 이희경 국제처장, 윤봉준 연구처장, 정진택 총장, 김종훈 문과대학 기획부학장 겸 인문융합연구원장, 김준연 디지털인문센터장 등이 개소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진택 총장은 축사를 통해 “과학기술과 인문학은 서로 분절된 관계가 아니라 공동의 미래가치를 창출해야 할 협력의 대상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것”이라며 “디지털인문센터의 출범은 인문학과 첨단과학 기술의 협업과 융합을 실천하기 위한 소중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디지털인문센터가 디지털과 인문학의 협력과 상생의 길을 마련하고 나아가 세계적인 허브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디지털 분야를 능동적으로 재해석하고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리터러시 역량을 가진 혁신 인재 육성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김종훈 문과대학 기획부학장 겸 인문융합연구원장은 “이번 개소에 많은 분들이 힘이 되어 주셨다. 센터설립을 위한 기초가 되는 설문조사에 성실히 응해준 학생들을 비롯해 센터 자문위원들과 직간접적으로 응원해주신 문과대학 교수님들,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주신 총장님까지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앞으로 센터가 많은 발전을 하는 것이 이 분들의 성원에 보답하는 길일 것”이라며 이번 센터 설립을 통해 학생들이 인문학적 관점에서 디지털 분야를 능동적으로 재해석하고 활용하는 역량을 쌓도록 하여, 협업과 융합을 겸비한 인재로 성장하길 기대했다. 개소식 부대행사로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전봉관 교수가 ‘디지털 전환시대의 학문융합’을 주제로 기념강연을 가졌다.   전 교수는 “인간-사회-예술 분야에 대한 디지털 분석역량을 갖춘 인문융합 공학자를 양성해야 한다. 디지털 인문센터가 이런 인재를 육성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도록 노력하길 바란다.”며 센터의 역할을 주문했다. 기사작성 : 커뮤니케이션팀 서민경(smk920@korea.ac.kr) 사진촬영 : 커뮤니케이션팀 김나윤(nayoonkim@korea.ac.kr)
  • 고대인의 마음 속에 영원히 간직해야 할 기당 현상윤의 삶
    고대인의 마음 속에 영원히 간직해야 할 기당 현상윤의 삶 -흔들림 없이 민족 교육에 매진했던 초대 총장-   지금 고려대 학생 중에서 고려대 초대 총장을 지낸 기당(幾堂) 현상윤(1893-1950?)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는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격동의 19세기 말, 즉 1893년 평안도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당대의 민족 교육과 근대 교육을 두루 받은 최고의 엘리트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살지 않고 민족 교육에 몸을 던졌다. 그의 대쪽같은 성품과 선공후사(先公後私) 하는 삶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는 교육자로서의 자질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나는 사람을 좀처럼 칭찬하지 않는데도 기당선생만큼은 정말 흠이 없는 분입니다. 내가 모신 여러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기당입니다. 그 분은 인품과 덕으로써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그러니 아래 사람이 저절로 따를 수밖에 없었지요.”  김성식 사학과 교수 회고, 1985 “내가 만난 선생님들 중에서 가장 점잖은 분이 기당선생이었어요. 기당선생께서는 완고한 일면이 있었지만 그 완고함이 대부분 강직과 청렴이었지요. 그 분은 언제나 외모에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점잖으셨으며 신의가 돈독하신 진짜 선비였습니다”  당시 학생이던 김진웅 선생 회고, 1985 평생의 화두가 된 ‘민족’ 그는 1893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현석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전통 한문 교육을 받았지만 17세에는 윤치호가 교장을 맡고 있던 평양의 대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자주독립 사상과 항일정신을 배웠다. 기당이 2학년이 되던 1910년 ‘한일병합’을 목도하고, 2년 뒤 소위 ‘105인 사건’으로 대성중학교가 강제 폐교되면서 고려대학교의 모체인 서울의 보성중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중학교 졸업 후 기당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사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1918년 다시 귀국하는데 이때는 바로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에 해당한다.  일본에서 유학할 때 기당은 인촌 김성수와 고하 송진우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귀국해서도 당시 인촌이 경영하고 있던 중앙학교에서 숙식하면서 민족의 앞날을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들려온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 원칙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서 거국적인 독립운동에 대해 구상하기 시작했다. 현재 서울 계동 중앙고등학교에는 “3.1운동책원지(策源地)”라는 기념비가 서 있다.  3.1운동과 관련하여 이들의 막후 활동과 거사 과정은 기당이 생전에 노트에 기록을 남겨두었는데, 그것이 1963년 <사상계(思想界)> 3월호에 발표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기당과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는 천도교의 최린, 기독교의 이승훈, 그리고 당대 최고의 문필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최남선을 연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기당은 이 3.1운동으로 인해 2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게 되고 당시로서는 불치의 병이었던 결핵에 걸려 8년이나 낙향하여 요양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불굴의 정신으로 이겨내고 다시 상경할 수 있었다.      1950년 1월 20일 기당(뒷줄 가운데)이 3.1운동 민족대표들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 민족대학의 총장으로서 고려대학의 기풍을 세운 장본인 1945년 해방 후 기당은 미군정청의 요청으로 경성대학 예과부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정계진출을 하게 된 인촌의 요청에 의해 보성전문대학으로 옮겨 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보성전문학교는 1946년 8월 15일 고려대학교로 승격되면서 기당이 초대 총장이 되었다.  기당은 늘 공과 사의 구분을 명확히 하고 항상 공(公)을 앞세웠다. 예를 들어 총장에게는 차량이 제공되고 있었지만 휴일이나 개인적인 용무에는 절대로 총장 차량을 이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출퇴근도 총장 차량이 아닌 교수들이 이용하는 출퇴근용 미군트럭을 같이 타고 다니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연말연시나 명절이 되어 선물이 들어오면 곧바로 돌려보내고 두고 간 선물의 경우에는 가족들을 시켜 그 주인을 찾아주게끔 하여 가족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또한 기당은 권위의식과는 거리가 먼 총장이었다. 기당은 인촌을 비롯한 재단이사들에게 늘 교수들의 월급 인상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같은 비율로 인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받는 사람은 조금 인상하고 적게 받는 사람은 많이 인상하도록 주장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총장의 월급과 일반 평교수의 월급이 거의 비슷할 정도였다. 그리고 늘 배움을 포기하지 않고 공부에 의심스러운 것이 생기면 한문학의 김춘동 교수나 영미철학의 박희성 교수같은 젊은 교수들에게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입을 모아 기당의 배움의 자세가 진지하고 겸손했다고 증언한다.  “그 분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자요 학자이시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고려대학을 반석 위에 올려 놓으신 분입니다. 그 분은 또 아랫사람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 하시지 않았습니다.” 박희성 교수 회고, 1985 한편, 기당은 바쁜 총장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강의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 강의는 ‘조선사상사’라는 과목이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사상을 통시적으로 정리한 방대한 작업으로 한문학적 소양과 근대학문에 대한 조예가 없으면 연구가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기당은 이 과목을 문과대에는 필수과목으로 법정대학과 경상대학에는 선택과목으로 지정하여 자신이 직접 강의를 맡았다.    2010년 이형성의 역주로 다시 발간된 <조선사상사>와 <조선유학사>                 납북으로 소식 끊겼으나 ‘고려대 제1호 박사’로 남은 영원한 고대인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사상의 대립으로 기어이 전쟁이 터지고 사흘만에 서울은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쟁의 포성이 가까워지는 가운데서도 학교에 출근하여 3개월치 월급을 교수들에게 나누어주고 학교 일을 처리하느라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다. 한 달 여 간을 지인의 집에 숨어 인민군의 눈을 피했으나 결국 붙잡힌 신세가 되었다. 같이 잡혀 간 사람들 중에는 뇌물을 주고 몰래 빠져나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올곧은 성품이었던 기당은 그런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비굴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결국 기당은 그렇게 북으로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53년 3월 25일, 대구 원대동에 있는 고려대 임시 교사에서는 제46회 졸업식을 거행하면서 기당에게 문학박사 학위가 수여되었다. 기당이 1949년 11월에 민중서관에서 출간한 <조선유학사>가 우리나라의 유구한 유학을 학문적으로 잘 정리했다는 것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는 고려대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식이었지만 당사자가 참석하지 못한 채 기당의 아들인 현인섭 씨가 대리 참석했다. 이날 졸업식의 사회를 맡은 변우창 교수가 ‘문학박사 현상윤’을 부르자 장내는 돌연 숙연해지고 많은 참석자들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2005년 공개된 평양 재북인사릉에 현상윤 선생의 묘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1950년 9월 15일 황해북도 서흥군에서 전쟁 중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박사학위 수여식이 이루어지던 1953년 당시에 이미 기당은 고인이 되었던 셈이다.    현재 대학원도서관 앞에 있는 기당의 흉상 평생을 민족 교육에 헌신한 기당 현상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도 민족에 대한 그의 열정과 집념을 꺾을 수 없었건만 그를 앗아간 것은 같은 민족간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초대 총장으로서 그가 보여준 강직함과 청렴함은 여전히 고대에 남겨야 할 향기로운 유산임에 틀림없다.  * 본 기사는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고려대학의 사람들 4: 현상윤>(1986)을 크게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 사학60 김정배 학교법인 휘문의숙 이사장(전 고려대 총장)
    사학60 김정배 이사장의 인생은 크게 두 가지 궤적을 그려 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하나는 고려대의 발전에 힘쏟은 교무행정가가 그것이다.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등 대표적인 한국사 연구기관의 기관장을 역임하는 한편, 모교에서는 교무처장을 거쳐 세종캠퍼스와 본교 부총장, 본교 총장과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을 맡아 학교 발전에 부단히 헌신해왔다. 지금은 휘문의숙 이사장을 맡아 모교인 휘문고에서 미래의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힘쓰고 있는 그를 만났다.  고려대 사학과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고 어떤 계기로 사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는지요. 학생 활동 중에 혹시 기억 남는 활동이 있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아주 훌륭했지요. 한국사 쪽에 김정학 교수, 신석호 교수, 동양사에는 정재각 교수, 김준엽 교수, 서양사 쪽에는 김성식 교수 등 좋은 분들이 있었는데 학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른으로서 귀감을 보여주는 분들이 많았지요.  김정학 교수님의 지도로 한강 유역을 답사하던 시절의 사진 (가운데 선글라스를 낀 이가 김정학 교수고 맨 오른쪽 하단에 안경을 쓰고 앉아있는 이가 김정배 이사장이다) 당시 저는 대학에 진학할 때부터 고고학을 포함해서 한국 고대사 연구를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학과에 고고학을 전공하신 김정학 선생이 계셨어요. 김정학 선생이 이끄는 사학과 내의 ‘인류고고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한강 주변을 다녔는데요, 미사리부터 강화도까지 안 간 데가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북한산을 답사하면서 거기서 ‘금위영이건기(禁衛營移建記)’ 비석을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북한산에서 발견한 '금위영이건기' 관련 고대신문 기사(1962.9.22자) 또 대학 3학년 때 고려대 박물관에 있는 ‘수선전도(首善全圖)’가 김정호의 작품이라는 논문도 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이미 고등학교에서 운영위원장 활동을 해서 대학에 가면 공부만 하겠다는 마음가짐이어서 1학년 때부터 교수 연구실에서 학문 연마에 전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입생으로 입학하셨던 1960년은 고려대 4.18 의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당시 직접 느꼈던 교내 분위기와 4.18에 대한 기억이 있으시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입학하고 나서 선후배가 만나면 우선 정부의 부정 선거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았죠. 특히 부통령 선거 이기봉 씨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어요. 그런데 신입생 환영회를 한다고 해서 나갔는데 환영회 분위기가 아니더라구요. 당시에 경제적으로 그렇게 좋은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수건을 하나 주는 게 아주 큰 선물이었는데, 그걸 머리에 쓰고서 데모를 하게 되었죠. 그때 그 학생들의 열기가 아주 순수하고 정의감에 불타서 국회의사당까지 가게 되죠. 국회의사당까지 가니까 유진오 총장 등이 나와서 “이제 뜻을 펼쳤으니까 서로 불상사가 생기기 전에 돌아가라”라고 해서 그걸 믿고 돌아가다가 종로 청계천에서 깡패의 습격을 받았어요. 그때 천일 이발관이라는 곳에 뛰어 들어 갔는데 우리 서너명을 숨겨주셨어요. 밖에서는 아우성 소리, 신음 소리가 들려왔어요. 이제 나가겠다고 하니까 조금 더 있으라고 해서 조용해진 다음에 나왔더니, 길바닥에 돌덩이, 벽돌 별 게 다 떨어져 있었어요. 그 분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갔죠. 그 경험은 제가 사회 초년생이 사회와 국가의 여러 모습을 한 눈에 보는 큰 경험이 되었죠.  고려대에 이사장으로 계시던 2012년에 고려대 출판부에서 <고려대학교 4.18의거 실록(이하 ‘실록’)>이 출간되는데요, 4.18을 겪었던 실제 주인공으로서 큰 감회가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사실 <실록>의 필요성은 제가 고려대에서 교무처장을 시작으로 해서 부총장, 총장을 맡으면서 계속 느껴왔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학교에서 수유리까지 마라톤도 하고 기념식을 하고 있지만 관련 자료가 없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 차에 제가 총장 재임 시절에 독고중훈(철학 57) 선배가 찾아와서 관련 자료들을 주었는데 그 때에 정리 못 하고 이사장이 돼서야 ‘실록 편찬위원회’를 통해서 근 1년 동안 자료 모으고 글 쓰고 해서 이 책이 완성되었습니다. 그 때 저의 마음은 만약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구도 나서려고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왜냐하면 그때까지 ‘누군가 하겠지’ 하면서 많은 세월이 그냥 흘러버린 거예요. 이렇게 해서 제가 대학 1학년 때 겪었던 1960년의 4.18 의거가 52년만에 정리가 된 것입니다.  당시에 문과대학 건물은 어떤 모습이었고 학생들은 어떻게 이용했는지요 서관에서도 강의를 듣긴 했지만, 문과대 1학년 때는 강의를 본관에서 많이 들었어요. 제가 학교를 다닐 때는 도서관과 서관 이렇게 중심적인 건물이었던 거지요. 당시에도 학생들이 문과대학 건물을 서관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좋은 이름은 아니죠. 총장이었을 때 서관을 교수연구실로 하고 강의실은 새로 신축하는 SK관으로 옮기고 싶었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문과대 교수 연구실이 서관 밖의 여러 건물에 나눠져 있어서 아쉬운 점이죠.    지도교수였던 이홍직 교수(우)와 교정에서 혹시 문과대의 대표적인 스승 김준엽, 조지훈 교수님과의 인연도 있으신지요.  저를 학문적으로 이끌어 준 것은 사학과의 여러 교수님들이셨지만, 그 외적인 것은 김준엽 선생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분이 중국에서 쭉 독립운동을 했고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운영하면서 폭넓은 연구를 하시니까 제가 생각하는 교수상과 비슷해서 제가 자주 찾아뵈었더니 저를 참 아껴주셨어요. 우리나라는 그 때 북한 자료 하나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어요. 고대사 하려면 더군다나 영역이 넓은데 해외에 나가서 자료를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1969년에 미국 하와이 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부모님께서 결혼을 하고 보내겠다 하셔서 부랴부랴 선을 보고 결혼을 하고 한 달만에 미국에 혼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혼한 아내 얼굴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김준엽 선생이 미국에 오시면서 제 결혼 사진을 가져오셔서 “내 아내가 이렇게 생겼구나”하고 했던 일화가 떠오릅니다.  김준엽 선생께서도 생전에 국무총리 등 숱한 정치계의 호출을 거절하고 학자로 또 교무행정가로 사셨습니다. 저 역시 민주당의 당대표직 등을 제안 받은 적 있지만 제가 수락하지 않았던 것도 역시 선생의 영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넓은 학문과 행정 등 평생의 훌륭한 지침을 선생님께 배운 것이지요. 그리고 조지훈 선생님과 인연은, 선생께서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으로 계실 때 역사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제가 선발되어 1년 이상을 곁에서 도와드렸던 적도 있었습니다. 연말의 어느 날, 저녁을 같이 하자고 하셔서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저는 원래 술을 입에 대지 않지만, 선생께서는 그때 이미 건강이 안 좋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럼에도 대학원생인 저를 위해 술 한 잔 하시면서 갖고 계신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말씀해주셨던 그 날이 떠오릅니다.  1970년에 교수로 부임하시게 되고 교무처장, 서창(세종)캠퍼스 부총장, 본교 부총장을 거쳐 IMF 직후인 1998년 제14대 총장에 선출되셨습니다. 취임사에서 “20세기 마지막 총장이자 21세기 첫 총장”이라고 강조하셨는데 재임기간 동안 어떤 것에 주력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총장 시절에 가장 전력한 것이 ‘국제화’와 ‘정보화’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총장이 되기 전, 교무처장, 부총장을 하면서부터 간절하게 그 필요성을 느낀 것이었습니다.  우선 국제화를 위해서는 위생과 청결이 먼저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당시까지 고대는 모든 길이 흙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청소를 하면 흙먼지가 날려 계단마다 쌓이고, 비가 오기라도 하면 흙탕물이 되어 아주 지저분하고 불편했지요. 제가 외국의 유수 대학을 다니며 느낀 것은 나무가 우거지고 깨끗한 것이 학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내에 아스팔트를 깔았고, 또 고질적인 문제인 화장실도 개선했습니다. 특히 ROTC 건물에 당시로서는 필요 없었던 여자 화장실을 미리 만들어 둔 덕분에 다른 학군단으로부터 부러움을 많이 받았지요.  또 ‘정보화’를 위해서 원스톱 서비스 센터 개설, 지식기반 포털 사이트 구축 등을 시행했습니다. 사실 정보화는 국제화를 위해서이기도 했지요. 해외 학계와 교류를 하려면 온라인이 뒷받침 되어야 했거든요.  그때 하셨던 일들은 결국 다 선견지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운동장 대신 지하 주차장을 만들고 중앙광장을 녹지화한 것, 온라인 시스템 구축 등은 재정이 꽤나 많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예산을 확보하셨는지요?  이런 개혁을 위해서는 학생들의 등록금만으로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구조 조정, 절약을 목표 삼아 우선은 교직원의 2차 문화를 없애 예산 낭비를 막았습니다. 불만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학교 전체적으로 보면 큰 돈을 아낄 수 있었어요. 그리고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손을 벌린다고 해서 기업들이 선뜻 큰 금액을 내놓지 않죠. 그래서 우리의 비전과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구조조정을 실시했습니다. 당시에 인건비 비율이 너무 높았거든요. 물론 불만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지만 누군가는 욕을 먹어야 일이 된다는 신념으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모금 활동이 재계와 교우 등의 협조로 성공적인 결과를 맺게 되었고, 중앙광장은 총장인 제가 추진하며 완성하였지만 그 비용은 재단에서 지출하는 형태로 훌륭하게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고 김병관 이사장의 협조가 돋보이는 장면이고 재단과 학교의 협조가 성공을 거둔 일대의 쾌거였다고 생각합니다.  * 본 인터뷰는 고려대 박물관 ‘역대 총장 회고 구술 사업’의 도움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전용호 고려대 박물관 대학기록실 특임교수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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