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경식 이야기
2. 돈 안 받는 의사가 되면 되겠구나
1975~1987년 레지던트 수련 과정을 하다. 선우경식이 내과 전문의 과정을 신청한 킹스브룩 주이시 메디컬센터(Kingsbrook Jewish Medical Center)는 환자 병상이 700여 개, 의료진을 포함한 직원 수가 2,000여 명에 달하는 대형병원이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많은 임상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선배들에게 들은 대로 미국에는 응급환자에 대한 의무 치료제도가 있어서 가난한 응급환자에 대한 진료 거부가 없었다. 그는 3년 간의 레지던트 수련 과정을 마치고 병원 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같은 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Kingsbrook Jewish Memorial Hospital)의 내과 의사로 근무했다. ECFMG(해외 의대 졸업자의 미국 의사면허 취득 시험) 합격 인증서 킹스브룩 주이시 메디컬센터 레지던트(1975. 7. 1~1978. 6. 30) 수료증 뉴욕주 내과 전문의 자격증 1980년 한국으로 돌아오다.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던 선우경식은 새로운 갈등에 빠졌다. 월급을 받을 때마다 자신이 의사라는 직업으로 큰돈을 벌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귀국 직전 그는 '왜 나는 의사가 되기를 이토록 싫어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그 답을 얻기 위해 일주일 동안 한 수도원에서 기도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의술이 싫은 게 아니라 기존 병원의 진료행태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 돈 안 받는 의사가 되면 되겠구나, 그렇게 결심하고 귀국했지요." (2006년 5월 인터뷰에서) 1980년 9월 한국으로 돌아온 선우경식은 무료 자선진료를 할 곳을 물색했지만 병원들은 경영상의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귀국한 지 거의 일 년이 되도록 그는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1년 가을, 친구의 제안으로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강남성심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1983년 정선 성프란치스코의원에서 일하다. 1983년 봄, 선우경식은 근무하고 있던 강남성심병원에 휴직계를 내고 강원도 정선 탄광촌에 있는 성프란치스코의원으로 향했다. 정선 성프란치스코의원은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지역 주민들을 위해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에서 1976년에 개원한 병원이었다. 그곳 원장 수녀가 자리를 비우는 3개월 동안 진료를 맡아줄 의사를 구하고 있었는데 선우경식이 그 자리에 자원한 것이었다. 성프란치스코의원에서 그는 주중에는 의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2주에 한 번씩 주말에는 팀을 이루어 이동진료를 나갔다. 선우경식은 이 일에서 보람을 느꼈다. 아직 의사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정선에서의 일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강원도 정선의 성프란치스코의원 1983년 여름, 성프란치스코의원 입구에서 직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1983년 신림동 '사랑의 집' 주말 무료 진료에 참여하다. 정부의 무허가 주택 강제 철거 정책으로 밀려난 철거민들이 이주해 살던 신림10동에는 성골롬반외방선교회의 두 신부가 이끄는 '사랑의 집'이 있었다. 그곳에서 당시 가톨릭의대 학생회 주말 의료봉사팀이 무료 진료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선우경식의 의대 2년 선배이자 주말진료팀의 지도교수를 맡고 있던 이경식 교수가 선우경식에게 진료팀 합류를 권유했다. 선우경식은 즉각 승낙했다. 그는 주말 진료에 그치지 않고 주중에도 찾아가 환자들을 살폈다. 입원이나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아는 병원이나 의사에게 도움을 청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이렇게 그는 빈민층을 위한 무료 진료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신림10동에 자리한 사랑의 집 신림10동에 자리한 사랑의 집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의 집' 앞에 줄을 서는 환자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선우경식은 주말 진료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의료장비가 갖춰지지 않은 좁은 방에서는 진찰하고 투약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늦게까지 일하고 온 주민들을 위해서는 저녁 진료도 필요했지만 직장이 있는 의료진들과 학업의 부담이 있는 의대생들에게 저녁시간까지 진료 봉사를 부탁하는 것은 무리였다. 선우경식이 주말 진료의 어려움을 절감하고 있을 때 난곡, 성남 등지에서 빈민운동을 하던 지역 활동가들이 그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