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경식 이야기

1. 성실만이 거룩하게 한다.

  선우경식, 1945년 평양에서 태어나다.

  선우경식(요셉)은 1945년 7월 31일 평양 선교리에서 부친 선우영원(베드로)과 모친 손정복(비르짓다)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25 전쟁이 발발한 다음 해인 1951년 1.4 후퇴 때 평양에서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다. 대구 피난민 수용소에서 5년 동안 지낸 후 서울로 올라왔다.
  

  1963년 의과대학에 진학하다.

  서울금양국민학교(현 서울금양초등학교, 1957.3), 서울중학교(1960.3.3), 서울고등학교(1963.2.2)를 졸업하고 1963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전쟁으로 피난생활을 경험한 그는 어린시절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6.25 때 선우경식의 외삼촌이 전사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군인이 되기보다는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중학생이 된 선우경식과 부친 선우영원 선생
      
 
서울고등학교 시절의 선우경식

 
서울고등학교 학생증과 배지




  진로를 고민하다.

  선우경식은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지닌 부모 아래서 어릴 때부터 깊은 신심을 길러왔다. 의대 본과 진학을 앞두고 고교 시절부터 뜻을 두었던 사제나 수도자의 길로 방향을 바꿀까 고민했지만 부친의 설득으로 의학공부를 계속했다. 의대 본과를 다니면서도 그는 의사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꼈고 도중에 포기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

 
"생명을 다루는 일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귀찮다고 미룰 수도 없고, 실패도 실수도 용납이 안되죠." 
   
 
1964년 가톨릭의과대학학생회 피정 기념 (앞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선우경식)
 
 
대한가톨릭학생 서울대교구 연합회에서 주최한 지도자 강습회 과정 수료증


 
의대 시절의 선우경식

 
1969년 2월 28일 가톨릭의과대학 졸업식에서 부모님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1969~1970년 인턴 과정을 하다.
  
  대학 졸업 후 1969년 4월부터 1970년 3월까지 1년 동안 인턴 생활을 하면서 선우경식은 돈이 없어서 돌려보내지는 응급환자들과 치료비가 없어 발길을 돌리는 가난한 환자들을 보며 냉혹한 현실을 마주했다. 

 
"병원이라는 곳이 돈 없고 아픈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더군요."



  1970~1973년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다.

  인턴 과정을 마치고 1970년 5월 해군 장교로 임관한 그는 87함 군의관으로 발령받았다. 병원선을 타고 낙도의 주민들을 진료했고, 사병이든 장교든 몸이 아픈 이들은 돈이 있든 없든 치료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사로서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병원이나 사회나 군대나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했고, 그의 근원적 회의는 계속되었다.  

  복무 중인 선우경식은 수첩에 이렇게 썼다.

 
  "... 오늘 하루의 일과는 내 몸을 피곤하게 만들었고 번잡했다. 앞으로 나의 해상 생활이 조금이라도 천주님의 영광에 도움이 된다면 보람찰 것이다. 성실만이 거룩하게 한다. "
 
 
해군 중위 임명장


 
1971년 5월. 해군 복무 중인 선우경식
 
 
선우경식이 군의관으로 발령받은 87함

 
함정 위에서

 
선우경식의 해군 견장과 계급장



  1975년 미국으로 떠나다.

  1973년 제대 후 선우경식은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시작했지만, 인턴 때와 같은 갈등과 회의를 다시 겪게 되었다. 그는 선배들로부터 미국에서는 응급환자에 대한 의무 치료제도가 있어 수술비가 없다는 이유로 환자를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국으로 유학을 갈 결심을 했다.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킹스브룩 주이시 메디컬센터(Kingsbrook Jewish Medical Center)에 레지던트 과정을 신청한 선우경식은 1975년 뉴욕으로 떠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