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신기촌 사람들
“사미리가 주안3동, 주안2동은 몬머리라고…” _이태승
양지원
게시일 2021.11.02  | 최종수정일 2022.08.25

사미리가 주안3동,
주안2동은 몬머리라고…
 



구술자 : 이태승 (사미연구소, 학산학연구소, 주안3동 토박이)
 
- 채록일 : 2018년 11월 11일
- 채록장소 : 영광교회 인근 카페
- 채록자 : 이경희, 조영숙

선생님 연령대가 어떻게 되시나요?
62년생이니까 우리나이로 57이고 만으로 56세입니다.


하시는 일은 학산학 연구를 하시는데..
지금 개인적으로는 개인브랜드는 이거고 (사미 연구소) 공식적으로는 학산학연구회라고 향토사 하는 게 있고 그 다음에 미추홀구 시민리포터 1기.


일 하시면서 채집한 이야기들이 많으시겠어요.
제가 원주민입니다.


고향도 여기세요?
원주민이고 동으로는 주안동입니다.


주안동에서 태어나셔서 지금까지 거주하고 계신가요? 부모님도 주안이 고향이세요?
원주민이에요. 부모님이 서울에서 저희 아버님이 막내라 서울 가셨을 때 서울에서 태어나서 다시 고향으로 왔습니다.


대대로 여기서 사셨네요.
제가 부평 이씨거든요.


흔치 않은 본관인 거 같은데?
여기가 부평이었잖아요. 그래서 부평 이씨고 원인재(인천이씨 시조의 묘소)는 인천 이씨고 그러다가 다시 합쳐진 거잖아요. 저희가 계양산 밑에가 본산이고 임진왜란 이후에 조상님이 고향으로 낙향안하고 이쪽 선학동으로 온 거죠. 1600년대부터 지금 미추홀구에 정착한 거죠. 1600년대부터 미추홀구에 전반적인 집성촌 세력이 생긴 거죠.


그럼 이번에 남구가 미추홀구로 명칭을 바꿨는데 여기에 대해서 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어차피 방향성은 가는 거니까…….


미추홀구로 가는 게 맞다는 말씀이신거죠?
일단은 남구라는 게 명칭자체를 변경한 이유를 보면 울산도 남구가 있고 여러 구가 있어서 일제시대 때 나눈 행정구역이에요. 인천의 정체성 문제도 있고 미추홀구 그쪽에 그것도 주민의견에 따라서 했던 거예요. 저는 원래 미추홀구보다 사미로 썼지만 소수의견이라….


사미연구소는 어떤 일을 하는 덴가요?
사미가 원래 옛날 주안동 하기 전에 지역명이 ‘사미리’예요. 주안3동에 사미어린이놀이터가 있잖아요. 명보주유소 옆에 보면…….


명보주유소도 많이 거론을 하시더라구요.
그 지역이 80년대 재개발되면서 재개발이 아니라 신개발이 된 거죠. 여기 주유소가 별로 없었을 때 랜드마크였죠.


사미의 뜻을 아세요?
선비 사(士)자, 아름다울 미(美)자. 1600년대 이후 문헌에도 사미리(1)가 나오는데 한자가 변동은 됐는데 구한말에 저희 조상 중에 이헌경이라는 분이 있는데 강직해요. 아름다운 선비가 나온 마을이라는 의미로 문헌상에는 그렇게 나와요. 


주안에 신비마을도 있어요.
신비마을도 저희랑 같은 패밀리예요. 같은 집성촌이라. 친족이에요. 1600년대 이후 집성촌 개념이고 400년 된 종씨죠. 학익동에 제운사거리 있잖아요. 제운선생이라고 그 양반이 원래는 백학초등학교 앞 신동아아파트 3차 있는 쪽이 원래 집성촌이었어요. 근데 제운사거리를 엄한데다가 갖다놓은 거죠. 그건 마음에 안 들지만. 


제운사거리가 그 자리가 아니라는 말씀 이신 거죠.
제운 자체는 백학초등학교 있는 데가 그 양반 집성촌이니까. 굳이 따지자면 학익동하고 겹쳐지는 부분인데 그쪽에 제운을 붙이는게 낫지 않나 어쨌거나 전체적인 부분 안에서는 그쪽에다 붙여놓긴 했는데……(2)


제운 선생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세요? 이 분도 같은 성씨신지...
네, 저희랑 파는 다른데 후학을 많이 길러내고 임금님(숙종)한테 칭송을 받은 분이에요. 역사적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많죠.


이 작업이 일반인들이 모르는 역사를 찾자는 의미도 있거든요.
제가 그런 의미에서 인터뷰에 응한 거죠. 용현동에 강씨 정려도있고.


여기는 어떤 곳이에요?
말 그대로 병자호란 때 낙섬에서 청나라하고 (싸울 때) 의병으로 활동하다 순직하셔서 남편 따라 바다에 투신하신 강씨 부인을 기념하는 정각이죠.


열녀문 같은 건가요?
네, 지금 남아 있는 거는 부평 쪽에 하나 있고 계산 쪽에도 하나 있고 이쪽에 하나 있고 그렇죠.


정려는 문으로 세워진 기념비 같은 거예요?
홍살문 개념이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건물 조그맣게 돼있죠. 사당같이.


사진 볼 수 있나요?
네, 여기 있어요. 지금 자료 정리하는 중이에요.


그런 사진자료들 보내주실 수 있으세요?
이메일로 보내드릴 수 있어요. 이메일로 받아야 제대로 파일로 받을 수 있어요.


제가 이메일 적어 드릴게요.
네, 역사 얘기하면 시간 다 가는데… 제 고향이고 지금 말씀 드린대로 부평까지 하면 천년패밀리이기 때문에 인천하면 원주민이 잊혀진 도시고 그래서…….


가족사가 기록으로 남겨진 게 있나요?
가족사로 남아 있는 건 없어요. 80년대 이후로 다 도시개발 되면서 기와집도 초가집도 다 부수고 주민들도 다 아파트나 외부로 나가고 사촌형하고 저하고만 남아 있어요. 굳이 따지자면… 주안 3동에서 매년 사미축제 하잖아요. 사미놀이터에서…….


사미축제는 어디서 주관하나요?
동사무소에서 해요. 자기 동마다 축제하잖아요. 용현동은 낙섬축제 하잖아요.


사미축제는 어떤 식으로 진행 돼요?
동네 어르신들 모시고 노래자랑하고 음식대접하고 그런 식으로해요. 올해가 7회 째예요.


몇 월에 해요?
10월 경 해요. 다시 확인해보시면 될 거예요.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해주신 것 같아요.
지금 미추홀구 평생학습관 강사로 돼 있는데 옛날 남구청 있을 때 학산학에서 100여명을 강사로 교육시켜서 20명으로 추려졌다가 다시 지금 현재는 14명이 활동하고 있어요. 그래서 학산콜 강좌라고 말하자면 1강 필강으로 들어가고 개인적으로 자료 수집하고 다니고 그랬었는데 어차피 거기 선생님들이니까 제가 알고 있는 부분, 모르고 있는 부분이 많잖아요. 그래서 같이 도움을 주고 해보고자 지금도 학산학연구회 홍보 쪽 맡고 있고… 향토사 연구하고 사진을 22살 때부터 했으니까 카메라 만지니까 사진자료하고…….


사진 자료를 많이 갖고 계시겠네요.
아시안게임하고 장애인아시안게임 때 구 소속 자원봉사 했는데 아시안게임 때는 경기장 돌면서 촬영했고 장애인아시안게임 때는 보직이 바뀌어서 선수촌, 입촌식, 퇴촌식 기록담당을 했어요. 매 년 2~3회 사진전 그룹전을 하고 있고 한중문화관에서도 두 번 전시 했어요.


오래된 사진도 있는지…….
오래된 사진은 별로 없어요.


지금 말씀하신 내용과 관련 있는 사진 갖고 계신지…….
지금 개항장부터 130년 된 사진은 카페에서 많이 돌고 있는데 최근 들어서 조금씩 사진을 활용하는 분들이 있긴 한데 현재 말하자면 옛날 소래포구라든가 수인선 철길 지난 거 원인재 옆에 보면 철길이 남아 있거든요. 그런 거 찾아다니면서 자료로 남기고 있죠.
지금은 신기촌, 주안동 중심으로 채집을 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주안3동이 원 사미리니까 섹터(sector)가 성덕교회부터 남부초등학교 초입까지가 원 동네예요. 거기가 원래 동산이었어요. 구릉지에서 마을이 형성 됐죠.


옛날에 화장터였다고…….
화장터는 현재 쌍용아파트 앞쪽으로 화장터 굴뚝이 있었구요. 쌍용아파트하고 진흥아파트 있는 데가 중앙도자기였다가 진흥요업으로 바뀌어가지고 있다가 나갔죠. 옛날에 신기촌에 유입된 분들이 저희 어머니 세대들이 진흥요업에 다니면서 생활터전을 찾아 입주했던 사람들이 부흥해서 나가고 들어오고 하면서 신기촌 자체도 3,4번 바뀌었죠.


세대가 교체가 된 거네요.
네, 저희 또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들 보면 엄마 따라 어려서 와갖고 자란 세대도 있고 1세대도 있고 2세대 3세대도 있고 그래서 처음에는 동인천 쪽 에서 사동에서 왔잖아요.


동인천이 사동이에요?
네, 답동사거리 있죠. 그 앞쪽이 사동이잖아요. 그 동네가 작잖아요. 여러 동네서 이쪽으로 개발하면서 여러 소스로 와갖고 말하자면 신기시장 올라가는데 있죠. 그 중심으로 좌우가 메인도로가 생긴 거죠. 맨 처음에 판잣집 개념이었다가 슬레이트였다가 현대식 기와였다가 시멘트, 말하자면 빌라 일반주택으로 바뀌었다가 빌라로 바뀌고…….


슬레이트 전에는 주택이 어떤 형태였죠?
판자. 판자촌에서 한국전쟁 때보다는 조금 업그레이드 된 부분이죠.


선생님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는 어떤 거예요? 전쟁이후 6,70년대 기억나시나요?
그렇죠. 여기는 동네가 말 그대로 사미리가 주안3동 개념이고 주안2동은 몬머리(못머리)라고 있었고, 지금 주안초등학교를 새로 지었잖아요. 이전해갖고. 그쪽에 몬머리 공원이라고 만들어 놨는데 그 섹터가 주안초등학교로 바뀌었죠. 지금 인주대로가 용현동 4거리부터 인고까지 가는 데가 논이었잖아요.


몬머리가 어떤 뜻인지?
물이 많다는 뜻이에요. 이쪽으로 논들이 꽤 많았어요. 인천은 원래 평지가 없는 동네에요. 인천은 바다의 도시면서 매립의 도시에요. 평지로 따지면 문학동 있는 데가 평지 개념이고 그것도 평지라고 보긴 좀 그렇고… 인주대로가 복개한 거잖아요. 국민학교 다닐 때 거기서 미꾸라지도 잡고 그랬어요. 수봉산 팔부능선 쯤에 원천이 있어요. 거기서 나오는 물이에요. 승학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랑… 그전에 수봉산에 물이 많았어요. 천이라기에는 뭐한데 수로개념에다 천하고 복합된 개념이죠. 그래서 남부초등학교 자리도 보면 물자리에요 물자리. 물 담아놓는 저수지 조그맣게…….


지역이 변하는 모습을 다 목격을 하셨겠어요.
그렇죠. 주안2동 자체도 원래 구릉이에요. 높은 산은 아니어도 힐(hill, 언덕)에다가 건물들 진 거니까… 60년대 초반부터 말하자면 슬레이트라고 일반 시멘트 집들이 형성됐죠.


길도 많이 바뀌었죠.
길도 원래 여기 시민회관부터 죽 내려오는 길이 신기사거리 옛날 우리은행 있던 자리 거기까지만 길이 있었던 거예요 원 구도로는…….


만나 뵙는 분들이 시장 있는데 까지만 길이 있어서 마을버스가 들어왔다고…….
신기시장은 아니고 원 구도로는 주안사거리부터 해갖고 이것도 말하자면 논 한가운데 길이었는데 불도저로 밭 한가운데다 닦고 나가서 길을 만든 거예요. 그러고 나서 잡석들 돌을 깔아서 도로 만들고… 신기촌 형성되면서 5번 버스가 주안4거리 쪽으로 해갖고 금성연마라고 있었는데 그리로 해서 의료보험 공단인가 그 앞쪽으로가 구 도로에요. 거기서 넘어가는 게 저 쪽 신기촌까지 가는 길이었거든요. 이렇게 S자 형태로 갔던 부분인데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거기 논 한가운데를 매립하면서 거기까지 연장한 거예요. 신도로 개념이지. 그래서 신기시장 입구가 5번 버스 종점이 됐잖아요. 저희 아버님이 막내라 부모님이 저 태어나고 얼마 있다가 인천으로 귀향해갖고 본가 건너편에 살다가……. 


본가가 어디신지?
주안3동이요.


부모님이 본가 건넌방에서 사셨단 말씀이신거죠?
그렇죠. 제가 3살 때 왔으니까 한 2년 살다가 6살 때 주안2동 쪽으로 가요.


주안3동에서 주안2동으로 이사하신 거네요.
네, 셋방살이. 그랬다가 다시 몬머리 쪽으로 금성연마 있는 데 그 쪽으로 왔으니까 주안에서 계속 산거죠. 동네만 왔다갔다 한거고…….


그러네요. 본가에서 몬머리 쪽으로 이전한 시기가 언제쯤인지 기억나세요?
5살부터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주안2동쪽에 살다가 몬머리 쪽으로 와서 그 일대까지 그때 다시 고1 때 본가로 오죠.


다시 주안으로, 그럼 그 때부터 주안에서 계속 사신 거네요. 자녀분들도 다 주안 거주하나요?
저는 싱글이에요. 어머니 모시고 살아요.


어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85세요. 제가 직장생활을 3년을 외부에서 했다가 제가 KT 나왔는데 신규사원들은 대개 기본적으로 3년 외부에 나갔다가 연고지로 해서 인천 쪽에서 근무하고 남인천 인천지사인데 만수전화국 개국멤버예요. 송도하고 남인천하고 세 군데 최종적으로 인천지사로 와서 시스템담당 과장하다가 영업담당 과장하다가 끝나고 명퇴한지 9년차 됐죠. 그러면서 제 고향이잖아요. 관변단체 장이라던가 동사무소 일곱, 여덟 개 단체 있는데 그것보다 맨 처음에 시작한게 자원봉사해보자해서 자원봉사하면서 문학산보존회라고 있는데 거기 홍보국장 해달라고 해서 했었고 그 다음에 자원봉사센터 시기자하고 구기자했었고 그러면서 다니면서 학습강좌 있으면 듣고 그런 상황이었는데 옛날 남구청에서 학산학이라는 자체를 받고서 강사를 육성한다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구에서 합병해서 시스템으로 들어간 거죠.


어머니에 대해서 기억나는 게 많으실 거 같아요.
고생 많이 하셨죠. 제주도 분이라…….


어머니는 아버님하고 만나셔서 올라오신 거예요.
섬이니까 나이 들어서 육지로 올라오다가 중매로 저희 아버님이 막내니까 서울로 갔다가…….


어머니도 계속 주안에서 사셨어요?
아뇨, 70살까지 직장생활 하셨어요.


어떤 일 하셨어요?
최종적으로 로얄아파트 청소하다가 나이 많다고 잘렸어요.


어머니는 건강하세요?
아니죠. 아시다시피 병원장도 다 알고 80세 넘으시면 병원 다니시는 게 일이지 뭐.


2000년대 이후엔 큰 변화가 없었죠.
2000년대는 80년대에 도시가 개발이 되면서 집들이 단지를 형성하면서 집장사들이 많았잖아요. 2000년대 들어서면서 빌라를 많이 지었죠. 50평짜리 집하나 부수면 4층 빌라 한 동을 지으니까 문학동이나 만수동쪽은 처음부터 빌라촌이었는데 여기도 최근에 보면 주택을 부수면서 빌라를 지었죠. 최근 들어서는 두 동 이 상을 합쳐서 나홀로 주택 큰 거를 짓죠.


그런 게 아쉬워요. 기존에 예쁜 집들이 많은데 헐고 빌라를 짓더라고요.
토건족들이 많으니까 옛날에 안상수 시장 때 인천을 170개 권역으로 나눠 갖고 결국엔 정치적인 거긴한데…….


정책도 한 몫을 했다는 말씀이신 거죠.
그렇죠. 지금 보면 60년대, 70년대 개발된 거면 50년도 안 된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 다 부수잖아요. 외국 가면 100년, 200년 돼도 리모델링해서 하는 부분인데…….


수봉산 밑에도 단독주택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사라졌어요.
잠식해 갖고 수봉산도 밑에는 형태가 많이 변했어요. 중간에 산도 잘린 거고 고가 있는 데가 깎아서 뚫은 거잖아요. 모양새가 없는 부분이고… 아쉬운 거는 개발하면서 저는 원주민이니까 헐이지 헐


저는 원주민이 아닌데도 그렇게 변하니까 아쉬움이 컸어요.
저희 집안들이야 졸부 돼서 나갔지만 저는 저희아버지가 막내라 답이 없었고 저는 그 터에서 빌라에서 살고 있는 거고요. 아파트 나가 삽시다했는데 어머니는 노인이라 그냥 살게 된 것도 있고…….


다른 형제분들은 어디 사세요?
여동생 서울서 살고… 저야 말단공무원이라 그렇고…….


어린 시절은 어떠셨어요?
주안 2동쪽 살 때는 여기 논길 따라 걸어오면 20분쯤 됐으니까 학교 끝나고 집에 있다가 거기가 본가라 할머니 계시니까 점심. 저녁먹고 큰집도 계속 있었으니까 옛날엔 아무 집 가서 밥 먹고 그랬지.


지금은 친인척분들도 다 떠나신 거네요.
지금 사촌형만 백모하고… 사촌누이도 다른 양반이 있는데 다른데 가계시니까 지금 현재 가족관계는 그렇죠.


집성촌이면 명절 때면 많이 모이셨겠어요.
아침에 제사(차례) 지내면 저희 아버지가 고등학교 때 돌아가시긴 했는데 어쨌거나 집집마다 제사 지내면 점심 때 지나가는 거죠.
한집 지내고 그 다음 집 그 다음 집. 원래 옛날엔 동네 한바퀴 도는 부분이고 사촌 육촌 말하자면 작은할아버지들이 있으니까 오촌 당숙들이 제사 지내고 그러니까 거기까지 왔다 갔다 하면 하루 반나절 걸리는 부분이었는데 80년대 이후로 다 나가니까 거기까지 가지는 못 하는 거지.


최근에는 전체 다 모이신 적은 없으세요?
최근에는 사촌들 보기도 힘들어요. 생일 때나 그래봐야 사촌형네 사촌들하고나 만나지 5촌쪽 하고는…….


4촌 5촌 넘어가면 얼굴도 잘 모르죠.
6촌까지는 기억하는데 7촌까지는… 6촌 동생들이 애 낳고 그랬는데 어려서 보고는 만날 기회가 없으니까 결혼식이나 장례 이럴 때 보는 건데 여기도 도시화 돼서…….


학창시절 추억 있으세요?
학교 다니고 집에 오고 그런 것 밖에 없었어요.


모범생이셨네요.
그렇죠. 나름대로는.


어디 놀러 가시거나 뭐…….
그런 건 없었고 인천지하철 생겨서 한 달에 한번 정도 교보문고가는 게 다였죠.


진짜 모범적으로 사셨네요.
그 당시에는 특별히 할 게 없는 상황이고 어려서는 건강하지가 않아서 뛰어 놀고 그런 건 없었으니까...


음악이나 책으로 취미를 삼으셨나봐요.
중학교 때 동산중학교 나왔는데 동산중고가 재단이 야구를 하니까 야구공 만지고 그런 건 있었지만 체육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도서관도 있어서 시험 때 잠깐 왔다 갔다 하는 정도…….


그 당시 도서관은 어디로 다니셨어요?
그 때는 인천에 율목도서관 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학교도서관 있었는데, 율목도서관은 지금 약간 리모델링해서 있는데 최근에 가보진 못했어요. 그리고 중학교 때 친구들은 부평고등학교로 많이 갔어요. 저도 원래 꿈은 행정가였는데 옛날 집들 다 그러니까 저는 인문계를 못가고 정석항공고 갔어요. 장학금 준다고 해서 갔는데 장학금 못타고 대한항공 (취업)간다고 했는데 대한항공도 많이 못가고 저희 때는 저희가 하이레벨이라 졸업하면서 전문대 많이 갔어요. 대한항공 일부 가고 저도 나름대로 주안공장 헤매고 다녔는데 답이 없더라구. 그래서 제가 중앙도서관 주안도서관 화도진도서관 창설멤버잖아요.


그 도서관이 언제 생겼어요?
다 80년대 초중반. 그 때부터 중앙도서관이 대표도서관이 된 거죠. 지금은 미추홀도서관이 생겨서 1호 도서관이 된 건데 저도 새로 생긴다는 도서관은 한 번씩 다 가봤죠. 최근에는 화도진도서관 많이 가고 있죠.


도서관 가시면 책을 주로 읽으시나요?
두 가지죠. 도서관 가면 프로그램을 많이 하잖아요. 화도진도서관은 인천사 관련해서 프로그램이 많이 진행돼요. 프로그램 참여하고 책이 다섯 권까지 대출이 가능하니까 책도 빌리고…….


네 맞아요. 그럼 남기고 싶은 추억이 있으세요?
제가 20대 초에 이모부 되시는 분이 경인상가에서 학습지를 했어요. 오래하진 못했는데 땜빵이라고 하죠. 집집마다 돌리는 일일공부 장학교실.


알바처럼 하신 거네요.
그렇죠. 말하자면 놀고 있으니까 몇 개월 했었어요. 문제는 거기서부터 논현동까지…….


엄청 머네요.
젊은 나이에 놀면 뭐해요. 그 때 말하자면 남구지역을 걸어서 눈으로 보고 그런 거죠.


속속들이 다니실 수밖에 없었던 거네요.
네, 그래서 지금의 (활동)근간이 되는 거죠. 지금 주안 남구뿐만 아니라 남동구가 됐지만 연수구도 마찬가지로…….


연수구도 예전에 남구였다더라구요.
네네, 나눠 주고 나눠 주고 그렇게 해서 그러니깐 남구자체가 인천인 거예요. 다.


남구가 미추홀이라는 명칭이 맞는 거네요.
그렇죠. 원래가 문학산에 올라가서 보시면 북쪽으로 주안역 뒤가 염전이잖아요. 동쪽으로는 남동공단 있는 데가 염전이었고 남쪽 연수구 쪽 보면 연수구 넘어가면 바닷가잖아요. 서쪽은 용현동도 보면 지금 토지금고 자체도 염전이고 매립지잖아요. 그러면 볼록한 문학산 해서 따지면 땅이 별로 없는 거죠. 중‧동구 자체도 저긴데 중‧동구도 개항이 되면서 인천부가 됐고 여기도 인천이었는데 농촌지역이니까 부평하고 합쳐서 부천군을 만들었다가 다시 전체로 흡수되면서 인천이 됐고 부천이 떨어져나갔고 그런 식으로 된 거 죠. 지금은 카메라를 갖고 다니면서 건물 부수거나 새로 짓거나하면 촬영을 하죠. 그 다음에 도로 중심으로 촬영하고…….


지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시겠어요.
그렇죠. 말 그대로 오리지날 원주민이니까 1%도 안 될걸요. 인천부평 포함해서 성씨들이 있는데 인천 이씨하고 부평 이씨 말고는 그렇게 오래된 주민이 없어요. 다 조선 중기에 낙향해서 산 집안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원 토박이야’ 하는 사람들 보면 한국전쟁 이후에 만석동 학익동에 황해도에서 온 양반들이고…….


그나마 그 분들이 오래 사신 분들이죠.
네, 그래서 자리 잡은 거고 북한에서 오신 분들이 생활력이 강해서 그런 거고 강화하고 김포에서 지주들 아들들이 유학을 와서 말하자면 교육계하고 은행계는 강화 김포파가 마피아를 형성하고 있죠.


지역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신다면 어떻게 표현하실 수 있을까요?
어차피 지역이라는 건 원주민이긴 하지만 지금 도시라는 것은 여러 군데서 와서 지역을 형성하는 거기 때문에 고향이란 개념은 지금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곳이 고향인거잖아요. 아버지 때 고향 따지면 답이 안 나오는 부분이니까 지금 애들이 자기가 지금 있는 데서 형성해 나가면 좋겠어요. 그리고 도시가 300만이라고 하는데 사람 수가 중요한 게 아니고 100만명이라도 그 지역에 따라서 동이든 구든 시든 그 섹터가… 연수구 송도같이 저기하게 하는 건 좀 그렇고 원도심에서 다 털어서 거기 해준 건데 지금은 성남의 분당도시 얘기가 되니까 저기한 점이 있기도 하고 그래서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애정을 갖고 내 집 앞이라도 깨끗이 하고 마을이 깨끗해야 되거든. 또 아파트 빌라촌 나홀로 주택들 나눠지면서 선이 그어지잖아요. 계층, 계급 간 나눠지는 부분에 대해서 심화되고 있어서 그런 부분은 좀…….


아쉬우신 점이네요.
그렇죠. 결국은 이게 점점 고착화되는데 각 개인이 주민의식이 있어야 되거든요. 교육도 참석하고 본인들이 생각을 해야 되는데 일반주민들 삶이라는 게 99%는 비슷한 거니까… 주민이 바뀌어야 돼요. 시장군수가 바뀌어서 될 문제가 아니고.


개선하려는 의지들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네, 내가 변하고 내 주변이 변하고 그래서 전체가 변하는 게 트렌드가 되어야하는데 거꾸로 나만 내 주변만 생각하면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부분이고 계층 간, 계급 간 차이가 형성되면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많이 만나고 토론하고 그 다음에 요구를 해야죠. 본인들은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라고 무관심하다가 닥치면 내 일이 되는 건데 결국 계층 간, 계급 간 밥그릇 싸움만 되는 이익만 추구하게 되다보니까… 지금 사는 집도 내가 살 집이 되어야 되는데 사는 집이 되니까 그게 문제인거죠. 집값이 올라가봐야 뭐해요. 내가 편하게 살아야지.


추가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
물어보시면… 할 얘기야 무궁무진하겠죠.


차후에 궁금한 점 있을 때 연락 드려도 될지요.
네 카톡 주시면 돼요.






(1) ‘아름다운 선비’라는 뜻인데, 구한말 이조판서 이헌경의 출신 마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도시마을생활사 주안동편」
(2) 학익동 일대는 조선 숙종 대 부평 이씨 제운(霽雲)이라는 인물이 살았다 하여 제운리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미추홀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