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신기촌 사람들
“지금도 10평짜리 주택을 가진 사람들이 많거든요” _박옥균
양지원
게시일 2021.11.02  | 최종수정일 2022.08.25

지금도 10평짜리 주택을
가진 사람들이 많거든요



구술자 : 박옥균 (참피온체육사 운영, 신기촌 일대 50년 거주)
 
- 채록일 : 2018년 8월 14일
- 채록장소 : 참피온 체육사
- 채록자 : 조영숙, 이경희, 유인숙
 
안녕하세요. 김종린 회장님에게 소개받고 왔습니다. 미추홀학산문화원에서 신기촌과 신기시장의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자료집을 제작하고자 합니다.
문화원에서 오셨는데 특별한 문화적인 말씀은 없고 여기가 68년도 철거민 정착지예요. 주로 만석동, 도화동쪽에서 철거민들이 유입된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많이 발전되어 보이지만 지금도 문제가 되는 게 주거환경개선사업이에요. 왜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했냐면 1968년도 그 전만해도 철거민들이 10평씩만 배정을 받아 화장실도 없이 살다 보니 불편했어요. 철거민들이 집값이 싸니까 세입자가 자연히 늘어난 거예요. 
91년도인가 구의원을 하면서 이곳에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것이 화장실도 짓고… 건물은 당시 공식적으로 인정해준 것이 대지 27평이 되어야 허가가 났는데 여기는 전부다 10평씩 받고 왔잖아요. 그러니 새 건물을 못 짓죠. 그래서 그걸 집 평수대로 올릴 수 있는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진행해서 96년도에 완성했어요.
지금은 그게 후회스러운 거예요. 차라리 그 당시에 싹 헐고 재개발을 했으면 오히려 좋았을 걸……. 지금도 10평짜리 주택을 가진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늘려갈 수 있는 여건이 안 되고 이곳 일부에는 빈민촌이 많거든요. 1968년도에 여기 올 적에는 전기가 없었어요. 우리들이 들어오고 난 1969년도부터 전기 들어오고…
당시는 수도도 없었고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고 그랬으니까…….  
여기 정착민들은 우리나라 팔도민들이 다 모인 곳이에요. 여기가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 사는 곳으로 초창기만 해도 나이 좀 든 사람들은 신기촌 하면 이미지가 상당히 안 좋았어요. 술 먹고 싸움하는 동네고 그랬는데 그렇다 보니 신기촌 하면 인천 시내에서 다 알아 줄 만큼 험악한 곳으로 인식되어… 점점 더 세월이 가면서 개선된 거고 그래서 지금까지 오는데 여기 학산문화원 하면 인천의 문화적인 일을 많이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여기는 문화적인 행사는 없었어요. 김종린 회장 말씀 다 들었겠지만 지금까지 온 거고 저 같은 경우는 이 자리에서 자리를 옮기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이 자리에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 특별히 변화된 게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화된 거고 신기시장도 원래 시장이 아니었어요. 
 없는 사람들이 살다보니 도로가 소방도로입니다. 여기가 소방도로에 건물을 가지고 있다보니까 점차적으로 시장이 형성되었는데 지금은 엄청나죠. 집값도 많이 올라가고 정부에서 융자도 받고 지금은 재래시장 중에서 손꼽히는 시장이 되었지만 원래 시장으로 된 건 없는 사람들이 조금조금 가져다 놓고 장사하다 보니까 조성이 된 거예요. 지금은 활성화가 됐고 저 같은 경우는……. 여기 버스 종점이었어요. 원래 버스 종점이 어디 였나면 화장터자리 모르죠? 지금의 주안 8동까지 밖에 안 들어왔어요. 그때는 마이크로버스라고 조그만 미니버스가 있었어요. 화장장 옆에 조그만 터가 있는 데 거기가 종점이었고 그 당시 여기가 유일하게 진흥요업이라는 도자기 공장이 있었어요.
그 당시 도자기 공장에서(일해서) 생활을 하고… 신기촌은 말하자면 소비도시죠. 낮에는 전부 외지에 나가서 돈 벌어다가 소비하는 곳이 여기니까 여기서는 생산하는 게 없고 전부다 밖에 나가서 돈 벌어서 여기서 소비하다보니까 신기촌이 장사가 잘 된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돈 벌어서 먹고 싸고 버리는 데가 여기니까 신기촌이 장사가 잘되고 빈촌이다 보니까 집값도 싸다고 소문도 많이 났고 처음에 중앙도자기가 아니고 진흥도자기였어요. 전부 다 공동묘지고 그 쪽에서 지금 진흥아파트 저쪽이 산이고 묘지 쪽이었어요. 화장장도 여기 있었고 우리 집 여기가 제일끝이었고 이쪽으로는 전부 논이고 밭이었어요. 그때 우리가 여기서 살았으니까 내용은 알죠.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주거환경을 하고 나서부터는 점차 개발이 되다 보니까 이렇게 됐는데 그래도 이 안에는 손을 못 대고 방법이 없어요.

 
여기 오신 계기가 뭐예요?
여기 온 계기는 없는 사람들이 살다보니까 집세도 싸고 시내에서 월세 살 돈이면 여기서는 전세로 살 수 있었어요. 처음 인천에 단신으로 왔어요. 송림동에 정착을 했는데 그러다보니 가족이 있는데 가족이 같이 와서 할 게 없고 해서 내가 여기 역사를 얘기하면 말도 못해요.
내가 목재를 몰랐던 사람이에요. 그 당시 누가 대성목재를 알선을 해줬는데 목재라는 말만 들었지 나무 자르는 기술도 없지만 거기 가서 노동을 했어요. 그 당시 송림동에서 삯월세(사글세)가 보증금 3만원이었어요.
다니다 보니 동료들이 신기촌 가면 그 보증금이면 여기서 전세를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오게 된 건데 여기 옛날부터 속어가 있어요. ‘신기촌에서 살려면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산다.’ 아까 얘기한대로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다 보면 여기가 전부 논두렁이고 비가 오고 개울물 늘어나면 진짜 장화없이 못 다녀요.
그래서 그런 말이 나온 건데… 그래서 그 후 발전이되고 개발이 됐죠. 결론은 제가 여기서 일은 많이 했어요. 통장을 보면서 민원이 접수 되고 해야 될 일도 많고 –기초풀뿌리 민주주의 된 때가 1991년도인가 돼요- 그래서 구의원으로 출마를 해야겠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이 주민들만 믿고 출마를 했는데 다행히 주민들이 선택을 해주다보니까 구에서 공무원들하고 이 동네 애로사항, 제일 애로사항이 10평짜리를 어떻게든 개선을 해서 집을 짓게끔 해야겠다고 해서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이 했어요. 지정을 해놓고 주거 환경개선사업을 시작을 했는데 그게 어느 지역에서 그대로 주민자력으로 할 수 있게끔 92, 93년도 없는 사람들이니까 붐이 조성돼서 10평짜리에다가 살게끔 화장실도 놓고 부엌도 늘리고 지금도 그때 한 집들이 그냥 있어요.
단층으로 있다가 2층으로 올리고 지금 끝에만 번듯하게 가게가 있지만 이 앞으로 내려가면 그런 집들이 많이 있어요. 그 당시 돈 번 사람들은 늘려서 나가고 그대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문이 신기촌 가면 집도 싸다고 10평짜리 집에 들어오기도 해서 지금까지 온 건데요. 저 같은 경우는 여기서 성공한 사람이에요. 가게도 하고 생활안정도 되고 여기서 특별히 자랑하고 내세울만한 게 없습니다. 옛날에 살았던 얘기를 한다면 그 정도로 살았고…….

 
이 체육사 내신 이유가 있으신지? 처음에 품목 정할 때…….
그 얘기를 하려면 역사가 길어지는데 그래서 이제 마을금고 있죠. 마을금고 창업이라고 하면 과도한 거고 우리 동료들이 협심해서 마을금고를 만들었어요.
그 당시 마을금고를 동사무소에 적을 두고 가가호호 다니면서 출자금을 받아서 마을금고를 결성했는데 마을금고를 지금 이 건너편에 빌딩이 하나 있어요. 그 건물주가 현득수씨 라고 그 당시 이 동네 재벌가였어요. 그 분을 이사장으로 모셔놓고 거기다가 사무실을 임시로 만들서 우리가 동네를 다니면서 홍보를 하고…
그 당시는 제가 구의원이 아니고 통장이었기 때문에 통장들 자율로 해서 각 통마다 마을금고 구좌를 만들어 설립을 했어요. 그 양반이 초대 이사장으로 앉고 우리는 이사로 있으면서 육성을 하는데 연도는 잘 모르겠는데 한때 대형마트가 들어왔잖아요. 대형마트를 할 적에 우리는 그 신기 마을금고에서 그 분이 금고를 이용해서 구판장을 만들었어요.
주민들한테 싸게 공급하고 그래서 그걸 했는데 내가 그 당시에 하기 전에 뭘 했냐하면 구판장을 하게 된 동기가 그 전에 연세점이란 얘기 들어봤어요? 구멍가게보다 좀 단위가 높은 연세점이 있었어요. 거기서 대의원을 할 수 있는 기초적인 걸 하다가 경험 있고 하니까 구판장 소장을 맡았어요. 대형마트죠. 어마어마하게 큰 마트죠.
근데 이걸 하면서 한다고 하면 이목 상으로 안좋고 구판장 소장을 하다가 마을금고에 분열이 생겨 가지고 소위 말하면 회원끼리 충돌이 생겼어요. 우리가 다 물러나 앉고 그러니까 나도 장사를 해야 될 거 아닙니까? 당분간 쉬었다가 제가 운동에 취미가 있는 사람이에요. 축구에 취미가 있는 사람이에요. 여기에 체육사가 없었어요.
이 동네에… 그래서 내가 체육사를 해봐야겠다고 그래서 체육사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그 때가 81년인가, 우리가 바덴바덴에서 올림픽 유치할 때가 82년도인가 그래요. 그래서 88년도에 우리가 올림픽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체육사가 잘 됐어요. 옆에 가게를 터서 장사가 잘 되다 보니까 돈도 좀 벌고 생활에 안정도 되고 그렇게 됐는데 그래서 장사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동네에서 인심 안 잃고 사니까 구의원도 두 번이나 당선시켜주고 구의원도 내가 하기 싫어서 넘겨줬어요. 김종린 회장보고 하라니까 안한다 해서 다른 사람 넘겨주고 남들은 한 번도 하기 힘든데 두 번씩이나 하면 됐지 뭐 그래서 시의원 하라하는데... 구의원이나 시의원이나 오십보백보인데 다른 후보들한테 넘겨주고 나는 장사에만 몰두했죠. 그러다보니까 세월이 40년이 더 되었나 (50년 됨) 한 자리에서 오래 하다보니……. 
여기 남광로얄아파트가 인천에서 제일 좋은 맨션이었어요. 인천시내 부시장, 연예인들 다 살던 곳이에요. 거기에 아파트들 하나 가지고 돈을 벌었으니까 아파트를 가지고 지금까지 여기서 그냥… 우리 때 살던 분들이 거의 다 돌아가시고 없어요. 우리 (나이)대 되는 사람은 동네에서 일을 보고 대외활동을 했던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저 하나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아요. 다 돌아가시고…….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저요 37년생이에요. 올해 82예요. 내 나이를 잘 안 밝히는데 기자분들이니까…….
 
그렇게 안 보이세요.
남들이 흔히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저도 운동을 좋아하고 여기서 산악회도 만들고 조기축구회도 만들고…….
 
저희가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남구에서 이런 얘기들이 기록되지 않으면 후세대는 모르잖아요. 남겨서 기록을 만들고 보존하려는 취지에서 시작했어요.
우리가 여기 특별히 동네 발전이야 어디든지 옛날에 비하면 다 똑같이 발전했는데 아직까지 신기촌이라는 때가 안 벗겨졌어요.
그 이유가 돈 좀 벌면 밖으로 다 나가고 아파트 사갖고 나가고 없는 사람만 찾아오고 있던 사람은 못 벗어나고 그러다보니까 뭐라 그럴까 생활 인식이 좀 낮다고 할까.
사실 한마디로 유능한 사람은 안 오려 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입지는 여건도 안 되잖아요. 그래서 지금 내가 여기 살지만 그 당시에 차라리 재개발해서 고생한 김에 했으면 그 당시 사정은 그렇게 안 돼. 지금 이렇게 상가니까 겉만 번지르르하지 안에 안 들어가 봤죠? 상가 안쪽으로 이 도로 안쪽으로… 건물 안쪽으로 골목길에… 들어가 보면 그렇구나 하지. 신기촌 말만 신기촌이지 지금은 우리가 신기촌이라 안 그러고 주안7동이라 불러달라고 하지.

 
옛날에 어렵게 지내왔던 생활 때문에 인식이 남아 있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밖에서 볼 때는 정이 많은 곳이고 모든 생활의 원천을 주는 곳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노력하시고 지역을 위해 애쓰셨잖아요. 도로변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집들이 있잖아요. 그 자그만 집들을 보수해서 2층으로 올리고 보수해서 간혹 두세 집 합쳐서 빌라도 짓고 그랬잖아요. 근데 이제 전체적으로 보기에 그렇게 느꼈어요. 아파트 빌딩이 있는 데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는 않잖아요. 전통시장을 살리는 것도 우리나라에 남구에 핵심 도시를 만드는곳이었기에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생활사가 우리 역사하고 맞물려져서 미래를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되지않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본작업을 시작하게 된 거고 신기시장 신기촌 이런 부분이 불편하실 수 있지만 저희가 보기에 나쁜 의미로 보지는 않거든요.

고맙습니다. 맞습니다. 그게 인정은 많았어요. 다닥다닥 이웃이 붙어살다 보니까 인정도 많고 행사 때 나가면 단합도 잘되고 그런 건 맞습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끼리 합쳐서 건물을 올릴 수 있지 않았냐는 말씀처럼 건물을 올리자는 말씀도 그런 얘기도 있었고요. 근데 그렇게 주선을 해보려고 했는데 마음 맞는 사람끼리라도 10평짜리 세 사람이면 30평이 되지 않습니까?
3층으로 올린다고 가정하면 10평이 아닌 30평에 사는 꼴이 안 됩니까 그런 얘기들이 있었는데 막상 자기 욕심에 나는 1층에 살기 싫다는 등의 이유로 합의가 안 된 거예요. 합의가 안 되는 대신 차등을 두면 되지 않냐, 이런식으로 해봤는데 생각대로 안 되더라고요.
한 집이라도 모델로 해보면 되지 않겠나 했는데 잘 안됐고요. 지금은 더 힘들지만 환경개선지구 사업을 평수대로 다 올릴 수 있으니까(지금은 공지비율 빼고 하면 안되고) 잘 안 이루어지고… 지금은 다세대 주택보다 편하고 좋지요. 문제가 무엇이 뒤따르냐 하면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요즘은 차 없이는 못 살잖아요.
10평집에 사는 사람도 차 한두 대는 다 가지고 있어요. 지금도 제일 어려운 게 주차공간이거든요. 이쪽엔 주차할 데가 없잖습니까. 그래서 이쪽에 옮겨도 봤는데 여러 가지고 어려운 점이 있어요.

 
그러면 이쪽 주변에는 비어있는 공간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없지요. 없는데 이제 공간을 만들려고 했는데 주차공간보다 녹지휴게소 이런 거… 7동 같은 경우에는 주차공간이 없어요. 주차장보다는 쉼터를 만들려고 한 거예요. 쉼터는 몇 군데가 있어요. 몇 군데가 있는데 주차장은 지금 현재 주안 3동 같은 경우는 주차장을 만들었어요. 7동도 한 군데가 있는 데 이웃 사람 몇 대 밖에 못 대요. 
 
인구밀도가 높아서 그런 부분이 있는데 인구밀도가 낮고 비어 있는 공가들이 많이 있으면 저층주거지 사업이나 뉴딜사업 쪽으로 개선 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는데 여기는 워낙 밀집지역이다 보니까 그런 부분은 어려운 거 같아요.
공간도 없고 공간이 있다면 국유지 같은데 몇 개 있는 것들은 개인이 점유해서 쓰고…….
 
다 분할했잖아요.
국유지 같은 경우에는 있으면 우리가 쓰면 되죠.
 
7-80년 대에 분할해서 각자 등기했었죠.
지금 동사무소도 굉장히 좁잖아요. 동사무소 부지 때문에 엄청나게 애를 썼어요. 결국 개인이 돈을 더 주겠다는 사람한테 넘어갔어요. 동사무소 뒤에 있는 높은 건물이에요. 그 후로도 통일상가를 매입하려고 그거 안 되면 자수정 목욕탕 그거해서라도 동사무소를 확장하려고 했는데 안됐어요. 그 당시 정치적으로 노력을 많이 했는데 안됐어요. 고민만 하고 말았는데 지금 여기는 어렵겠어요. 장승덕 의원이 의논하기를 동 인구가 줄어가니까 통폐합을 하자. 동사무소를 중간지점에 짓자는 제안도 세웠는데 그것도 동끼리 안 하겠다 그런저런 일로 부드럽지 않더라고요.
지금 저 같은 경우에는 의욕도 없어지고 나이도 있고 특별히 해야 한다는 직함도 없는 사람이고 나섰다 하면 주민들한테 욕만 먹을 판이고 가능하다면 지금 구의원들에게 재촉도 하겠는데 가능하지가 않아요. 더군다나 올해부터는 선거구역이 넓어 가지고 2, 3, 4, 7, 8동이 한 구역이 돼서 구의원이 3명이에요. 그분들이 동네 구석구석까지 살필 수도 없고 그런 문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잘 되기를 바랄 뿐이지 선봉에 서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능력은 안 되고 그렇습니다. 지금 어디가나 마찬가지겠지만 저희들은 특별한 걸 알려드리면 좋겠는데 안 떠오르거든요.

 
나중에 다른 분들 인터뷰하면서 합일점을 가지고 저희가 이것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고 어떤 과정이었는지 있어요. 그때 도움을 청하러 한 번 더 올 수 있을 것 같아요.
합일점이라고 하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주안 3, 7동 합동해서 동사무소 청사를 하나 번듯하게 지으면 좋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어려울 것 같아요. 다 자기 마음 같지 않으니까 저는 접촉이 없으니까 잘 모르겠고 특별한 사건이 생기면 연락드릴게요. 협조할 게 있으면 협조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