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문화이음길
[산이음] 문학산길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3.12.20  | 최종수정일 2024.01.30

 

 

| 소개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은 건국 설화를 품고 있으며 비류백제의 도읍지로 역사를 깊이 가지고 있다. 또한, 교육기관인 인천향교와 행정기관인 인천도호부가 있다는 것은 이 지역이 인천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옛 인천의 중심지인 문학산 일대를 걸어보며 바다로 진출하던 선인들의 기상을 느껴보기 좋은 코스이다.


| 특징
• 문학산 정상부에 도달할 수 있는 길 중 많은 유적을 볼 수 있는 가장 걷기에 좋은 코스이다. 사계절 모두 원시의 숲길을 걷는 느낌이다. 특히 9, 10월에는 고마리 군락지를 볼 수 있다.
• 산길을 걸어야 하기에 물을 준비하는 게 좋으며, 등산화나 운동화를 착용해야한다.


| 찾아가는길
• 버스 : 간선 46, 82, 111-2 / 지선 515
• 지하철 : 인천1호선 문학경기장역 2번 출구 나와 도보로 20분 (1.3km)


| 주변 먹거리
• 가마솥순두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소성로326번길 4)


| 포토존
코스마다 역사 유적지가 많아 사진들을 찍으면 역사 사료가 될 수 있다. 다만 배바위는 뒤에서 찍으면 배바위 모양이 보이지 않으니 아래로 내려가 찍어야 한다.

 



► 인천향교

 
향교 전경 (1990년대 초) / 촬영 천영기


 📍 위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89
✍ 내용 인천향교 창건연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인천향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최항의 「인천향교기」(1464)에 제10대 인주(仁州) 지주사(知州事)였던 신개가 1406년(태종 6) 대성전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오늘날 국·공립 중·고등학교와 비슷한 역할을 한 인천향교는 구전에 의하면 고려 인종 때 설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1466년(세조 12)과 1501년(연산군 7) 또는 1502년에 중수됐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향교 건물이 불에 타 1701년(숙종 27)에 다시 중건됐다. 그 뒤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1914년에 지금의 문학동 일대가 경기도 부천군으로 편제되면서 인천향교의 명칭은 부천향교로 바뀌었다가 1941년에 문을 닫았다. 1946년 3월 인천향교 복구기성회가 조직됐고 1948년에 부평향교로부터 분리돼 인천향교로 복원됐다. 1990년에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1호로 등록됐다.
✅ 참고
• 인천향교는 매주 월요일 휴무이며, 하절기 10:00~19:00 동절기 10:00~18:00 이용 가능하다.
• 향교 앞 비석군, 홍전문과 하마비, 외삼문,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 배향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로 구성되어 있다.


▸향교 앞 비석군
 향교 앞에 인천부사 선정비 18기가 있다. 선정비(善政碑)란 지방 수령이나 관리가 백성을 아끼고 지역 발전에 공이 지대해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나 떠난 후, 이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공적과 인품을 새겨 기린 비석을 일컫는다.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송덕비(頌德碑),청덕비(淸德碑),공덕비(功德碑),애민비(愛民碑) 등으로도 불린다.
 그래서 선정비는 보통 사람이 많이 다니는 관아 근처 길목이나 고개에 설치했다. 1930년대 인천도호부 자리인 문학초교 앞에 선정비 5기가 있었다. 선정비 훼손을 걱정해 1949년 부내에 흩어져있던 10기를 문학초교 앞으로 옮겨놓았으며, 1970년에는 선정비 3기를 더해 향교 앞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선정비는 모두 18기이나 인천부사 황운조의 비가 2기라 어 실제 인물은 17인이다.
 민속놀이 비석치기의 정확한 연원을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이후 귀족들의 공적비나 송덕비 등에 불만을 품은 서민들이 그 비석을 돌로 치거나 훼손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더욱이 탐관오리들은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백성을 위협하거나 자신이 직접 재물을 들여 억지로 선정비를 세우기도 했다. 이에 분개한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는 등, 화풀이를 했다.
 이곳에도 역시 을사오적의 한 명인 박제순 비도 있다. 박제순은 1888년 5월 인천부사와 겸직으로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로 부임해 1890년 9월까지 2년 5개월간 복무했다. 그리고 1년 뒤인 1891년 8월 ‘행부사박공제순영세불망비(行府使朴公齊純永世不忘碑)’가 세워졌다.
 박제순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할 당시 외부대신으로 고종의 비준도 없이 일본 특명전권공사 하야시와 ‘한일협상조약‘을 강제 체결해 ‘을사오적’에 올랐다. 또, 1910년에는 내부대신으로 경술국치인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했다. 그 후 박제순은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이 돼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비는 뽑혀 재현된 인천도호부 담장 아래 방치되었다가 현재 다시 비석군 옆에 눕혀 역사 교육의 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향교 앞 비석군 (2020.10.6.) / 촬영 천영기



▸하마비와 홍전문
 하마비(下馬碑)는 조선시대 종묘와 문묘, 궐문 앞에 세워놓은 석비를 지칭하는 용어다. 인천향교에 세워진 하마비에는 ‘大小人員皆下馬(대소인원개하마 :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그만큼 향교를 신성한 공간으로 여겼다.
 홍전문(紅箭門)은 능ㆍ원ㆍ묘ㆍ궁전ㆍ관아 따위의 정면 앞에 세운 붉은 칠을 한 문으로 홍살문이라고 한다. 그 형태를 보면 나무로 만든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 없이 붉은 살(紅箭)을 박아놓았는데, 그 가운데에 태극무늬를 새겼다. 태극무늬를 지나는 홍살들은 서로 꼬여있어 삼지창 모습을 하고 있다. 붉은 문은 귀신과 액운을 물리친다는 풍속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마비와 홍전문 (2022.9.9.) / 촬영 천영기



▸외삼문
 외삼문은 신삼문(神三門)이라고도 하는데 문을 세 칸으로 나눠 출입구를 셋으로 만든 데서 비롯한 말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는 신의 출입과 사람의 출입을 구분하기 위함이며, 엄격히 따진다면 중앙 솟을대문은 신문이고 양쪽 문은 인문(人門)이다. 신문은 항상 닫아 두는 것이 상례이며, 인문은 열어둬 일반 참배객의 내왕을 허용하고 있다. 중앙의 신문은 춘추 제향이나 삭망(朔望) 때 열어서 헌관(獻官)만 출입하게 하고, 일반 제관은 동입서출(東入西出) 즉 동문으로 들어가 서문으로 나온다.

 
외삼문 (2019.7.6.) / 촬영 천영기



▸명륜당과 동재·서재
 명륜당은 강학하는 공간으로 교육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맹자」 등문공편(滕文公篇)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이곳에서 입학한 학생들이 글을 배우고 익힌다.
 명륜당 마당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동재(東齋), 왼쪽으로는 서재(西齋)가 대칭으로 위치해있는데 동재에는 양반의 자제가, 서재에는 양민의 자제가 기숙하며 공부했다.

 
명륜당과 동재 서재 (2019.7.6.) / 촬영 천영기




▸대성전과 동무·서무
 대성전은 문묘의 정전으로서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 원래 대성전은 공자와 4성(四聖, 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 중국의 공문십철(孔門十哲, 공자의 뛰어난 제자 10인), 송조육현의 위패를 모셨는데, 1949년 전국유림대표회의에서 모화사상을 축소하자며 공문십철과 송조육현의 위패를 땅에 묻자고 결의했다. 인천향교에서는 1975년에 이를 묻고 동ㆍ서무에 봉안하고 있던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대성전으로 모셨다.
 대성전에서 향교의 가장 큰 행사인 석전대제(釋奠大祭)가 열린다. 석전대제는 문묘에서 매해 두 차례 공자를 비롯해 위패가 봉안된 유현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사를 올리는 의식이다. 원래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올렸으나 2007년부터 양력으로 환산해 공자가 돌아가신 날인 5월 11일에 춘기석전(春期釋奠)을, 탄신일인 9월 28일에 추기석전(秋期釋奠)을 봉행한다.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는 대성전 앞에 있는 건물로 공문72현과 한당22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셨다. 인천향교는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만 모셨는데 1975년 대성전으로 옮겼고 제기들을 가져다 놓았었다. 그러나 현재는 향교를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설명판을 부착해 관람하는 이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 (2019.7.6.) / 촬영 천영기




참고자료
인천투데이
http://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834
http://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087



 



► 산신우물

 
향교 뒤 수채골 돌미륵과 산신우물 (1990년대 초) / 촬영 천영기



 
산신우물 (2022.10.4.) / 촬영 천영기



 📍 위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길 136 뒤쪽에 위치
✍ 내용
• 이강로의 「인천시 남구 지역 땅 이름의 조사 연구: 남촌·선학·연수·청학·동춘·문학·관교동」(1974)에 의하면, 산신우물은 학산 마을 뒤 배 바위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유희강의 『향토 인천의 안내-고적, 명승, 천연기념물』(1956)에는 산신우물이 향교 뒷산 수챗골에 있었으며 물이 잘 나고 물맛이 좋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학동 경로당의 김무웅에 의하면, 산신우물은 삼신과 관련된 우물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 『옛날 옛적에 인천은』(2004, 인천광역시 역사 자료관) 「헛수고로 돌아간 산신 우물가의 백일기도」
옛 인천 문학 초등학교 교장 사택 뒷산 작은 골짜기를 수채골이라고 한다. 수채골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이 우물을 사람들은 ‘산신(産神) 우물’이라고 부르며 이 우물가에서 치성을 다해 백일기도를 드리면 아기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산신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어느 마을에 아이를 갖지 못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 부부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한 가지 근심이 있다면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는 이 수채골 산신 우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부부는 당장 그 다음날 밤 자정부터 목욕재계를 하고 우물가에서 삼신할머니께 치성을 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일 밤 지극 정성으로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새벽이 되어 부부는 기도를 마치고 골짜기를 내려와 부지런히 집으로 향했다. 부부는 이제 산신의 영험을 받아 아기를 낳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부정을 타지 않기 위해 서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때 어느 아낙이 아침밥을 짓기 위해 우물물을 길러 왔다. 아낙이 말을 걸어왔지만 부부는 산신의 영험이 사라질까 싶어 대답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런 영문을 모르는 아낙은 상대가 인사를 받지 않는 것이 몹시 민망스러워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열 달이 지나 참으로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백일 동안이나 온갖 정성을 드려 치성을 한 부부에게는 끝내 태기가 없었고, 그날 물을 길러 가다가 새벽에 만나 인사를 건넸던 아낙에게서는 떡두꺼비 같은 옥동자가 태어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백일기도의 치성이 그 아낙에게 옮아갔다고 말했다.

 설화가 기록된 내용을 볼 때 현재 산신우물에 적혀진 안내판의 내용은 수채골과 관련이 있으며, 수채골은 이곳이 아니라 향교 뒷산으로 추정된다. 또한, 현재는 우물물이 아닌 약수터 물로 보존되고 있다.


참고자료
디지털미추홀구문화대전
http://www.grandculture.net/michuhol/toc/GC04701762
http://www.grandculture.net/michuhol/toc/GC04700215
미추홀시민아카이브
https://www.archivecenter.net/MichuholCA/archive/srch/ArchiveNewSrchView.do?i_id=69700



 




► 배바위

 
배바위 (2022.9.9.) / 촬영 천영기


 📍 위치 문학산 북쪽 고마리길에 위치
✍ 내용 태초의 홍수 설화와 연결할 수 있고, 노아의 방주를 떠올리게 한다. 건국 신화소로 어울리는 유적물이다.
✅ 참고 고마리길 쪽에서 찍으면 배바위 모양이 보이지 않으니 아래로 내려가 찍어야 한다.


 
참고자료
인천투데이 https://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661


 




► 고마리길

 
고마리꽃 (2016.9.24.) / 촬영 천영기



 📍 위치 문학산 고마리길 자연학습장에서 문학산성 동문 쪽으로 올라가는 길 주변
✍ 내용 고마리는 여뀌속 마디풀과 마디풀목에 속하는 속씨식물. 학명은 ‘Persicaria thunbergii’이다. ‘고만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고마운 이’가 줄어들어 ‘고만이’가 되었다는 유래도 있고, 꽃의 크기가 작아 고만고만하다는 뜻의 ‘고만이’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마리는 잎은 삼각꼴로 잎자루가 달리는 쪽의 양 끝이 옆으로 길게 퍼진다. 꽃은 분홍색이며 8~9월에 피는데, 하얀색 또는 약간 진한 분홍색을 띠기도 한다. 가지 끝에 달리는 꽃은 꽃잎은 없으나 꽃받침이 5장 있다.
 주로 물가에서 자라며, 특히 하수구 근처와 같은 더러운 물이 있는 곳에서도 잘 견디어 많이 자란다. 지역적으로는 한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극동부 등지에 분포하며, 한국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
✅ 참고 9월 중순 이후에서 10월 사이에 꽃이 핀 것을 볼 수 있다.


참고자료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1g3862a



 



► 문학산성

 
문학산성 (2019.5.31.) / 촬영 천영기


 📍 위치 문학산 정상 부위 (문학산 동문 쪽에서 남쪽으로 나무다리 길)
✍ 내용 인천시 기념물 제1호로 산의 정상을 테로 둘러싼 듯한 테뫼식 산성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인천에 성이 있어 이곳을 미추홀고성 또는 남산고성이라고 하는데 둘레가 160보이고 성안에 봉수대와 작은 샘이 있다’라고 기록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남산고성의 둘레가 403척이다’라고 기록했다. 1997년 인하대박물관의 지표조사 보고서를 보면, 본래 토성이었던 것을 삼국시대 말이나 통일신라시대에 석성으로 개축했고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문학산성 복원은 2011년부터 이뤄졌다. 성벽을 일부 복원한 결과 문학산성 총길이는 577m이고 동쪽과 남동쪽에 남아있는 성벽 길이는 330m이나 육안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은 220m다. 성벽 높이는 1.5~4m로 추정된다.
✅ 참고 나무다리를 걸으며 문학산성을 복원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연수동과 송도신도시 방향으로 바라보는 풍광 또한 매우 좋다.



참고자료
인천투데이 http://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888


 



► 문학산 정상

 
문학산 정상 (2022.9.9.)  / 촬영 천영기


 📍 위치 문학산 정상
✍ 내용 문학산은 남산이나 배꼽산이라는 이름으로 인천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설명한 것을 보니, 조선시대 이래 성산, 학산, 봉화산, 봉화둑산 등으로도 불렸다. 「여지도서」‘인천도호부 고적조’에는 ‘문학산 정상은 미추왕(비류)의 옛 도읍지’라고 했으며,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속전하는 바로 문학산 정상에는 비류성터가 있고 성문 비판이 아직도 남아있으며, 성내에는 비류정이 있어 맛이 시원하고 산뜻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지름 360cm의 만두형 봉수대가 남아 있고 이를 미추왕릉으로 보는 전승이 있다’라고 했으며,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의 조사에 의하면 ‘봉수 동쪽에 석축 유구가 남아있는데, 사방에 초석(주춧돌)이 놓여있어 건물터로 추정’했는데, 이곳이 바로 임진왜란 때 성을 수리해 왜병을 물리친 김민선 부사의 혼령을 모신 사당 ‘안관당’ 터다. 문학산 정상은 본래 해발 233m이었는데 군부대 조성으로 16m나 깎여 현재 217m다. 1959년 문학산 미군기지 건설 발의되어 1965년 미군 방공부대가 주둔하다, 1977년 한국공군 방공포병부대가 주둔했다.
✅ 특징 문학산 정상이 2015년에 시민 품으로 돌아왔다. 현재 정상에 접근하는 문은 모두 네 군데 있다. 옛 도로인 소성로에서 사모지고개로 오르는 길에 있는 군부대 철문, 사모지고개에 있는 문, 나무다리가 끝나는 산성 서문 추정지 옆에 있는 서쪽문, 고마리길 위 능선에서 군부대로 들어갈 수 있는 동쪽 문이 열려있다. 문학산 동쪽, 북쪽, 남쪽 전망대에서 인천 시내를 바라보면 왜 이곳에 비류백제가 터전을 잡았는지 알 수 있다. 

 
참고자료
인천투데이 http://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888


 



► 문학산 제사유적

 
문학산 제사유적 (2022.9.9.) / 촬영 천영기



 
문학산 제사유적 발굴사진과 출토유물 (2022.9.9.) / 촬영 천영기


 📍 위치 문학터널 위
✍ 내용 2016년 5월~7월 한국고고인류연구소에서 발굴했다. 중부지방에서 최초로 발견된 통일신라시기의 제의 유적이다. 능선 한가운데 높이 3m 정도의 큰 바위가 가로막고 있고, 그 바위 위쪽에 사각형의 제단 시설이 설치된 건물지이다.

 
참고자료
인천투데이 http://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141



 



삼호현고개

 
미추홀구에서 삼호현으로 올라가는 길 (2019.5.31.) / 촬영 천영기



 
삼호현 안내판 (2022.10.4.) / 촬영 최지은



 📍 위치 문학산과 연경산 사잇길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정상 부근
✍ 내용 문학산 제사유적에서 계속 길을 내려가면 문학산과 연경산 사이 고갯마루에 다다르는데, 이곳이 여러 가지 전설이 얽혀 있는 사모지고개(三呼峴, 삼호현)다. 「여지도서」에는 삼해주현(三亥酒峴)이라 적혀있다. 사모지고개는 문학동과 청학동을 잇는 고개다. 청학동으로 가는 넓은 도로를 만들면서 비탈 흙을 깎아 메워 둥글 번번한 마루턱이 됐으나, 옛날에는 좁고 잘록한 고개였다.
 1600여 년 전 중국으로 가던 백제 사신들은 서울에서 부평을 거쳐 비루고개(別離峴, 별리현)를 넘었다. 그리고 경신역(현 남동구 수산동)을 지나 이 고개를 넘어 한나루에서 배를 탔다. 이때 사신을 배웅하러 온 가족들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별리현에서 이별했다.

 
참고자료
인천투데이 http://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141



 



인천도호부

 
인천도호부 동헌 (2019.7.6.) / 촬영 천영기


 
인천도호부 객사 (2019.7.6.) / 촬영 천영기



 📍 위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 
✍ 내용 인천도호부와 향교가 있는 곳을 ‘관교’동이라 하는데, 옛 인천부의 중심지다. 관청의 ‘관’자와 향교의 ‘교’자로 이뤄졌는데, 그만큼 힘의 중심지라는 뜻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인천 부내, 인천 읍내, 인주, 관청리, 향교리 등으로 불렸다. 1968년 문학동에 편입돼 동정 업무를 수행하다가 1996년부터 문학동에서 관교동이 분리됐다. 이런 관계로 지금 인천도호부는 문학동 문학초등학교 안에 위치하고 있다.
✅ 참고 군ㆍ관청은 해방 전 경찰파출소로 쓰다가 불에 타 없어졌다. 내동헌은 1955년까지 인천시 문학출장소로 쓰다가 출장소를 새로 마련함에 따라 교정을 확장하기 위해 헐어버렸다. 무지한 문화재 관리에 그저 놀랄 뿐이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교육의 일환으로 철퇴를 맞은 결과이기도 하다.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은 전국 곳곳에서 도호부를 허물고 그곳에 학교를 세워 식민교육의 장으로 전락시켰다. 새로 지은 도호부는 문학경기장 맞은편에 복원돼 많은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린다. 주말이면 문화체험과 공연이 열려 여가의 장이 펼쳐지지만, 원래 도호부 터는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 같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