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풀어쓰기 시 원고(미간행)

문익환 목사가 풀어쓰기를 익히며 한글의 아름다움을 헤쳐서는 안된다는 점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한다는 내용의 시 '한글 풀어쓰기'를 적어 놓은 (미간행) 원고
 
한글 풀어쓰기

아버지
오늘은 삼월 초하룬데
아들은 연금이라고
집에 홀로 앉아
한글 풀어쓰기를 익히고 있읍니다
외솔(*최현배) 선생님이 함흥 감옥에서
골똘히 구상하고 다듬던 걸 생각하매
우리 말 아름다운 말
눈물겨웁게 고마운 말
눈부시게 가슴 울리는 우리 말로
총각 처녀 사랑의 편지를 그누구나
물 흐르듯 곱게 뜨겁게 쓸 수 있으라고
창안된 우리 글
아뿔사 네모꼴 한문글자 틀에 갇혀 버렸네요
이건 숫제 감옥이얘요
감옥에 갇힌 우리 말 풀어 놓아야 해요
살려 내야 해요 살려 내어
흐르게 해야 해요 흐르며
꿈틀꿈틀 용솟음치게 해야 해요
당신의 크고 깊은 마음
이 아들의 콧 속으로
숨소리도 고르게 빨려 들다가
핏줄을 타고 온 몸으로 흐르듯
흘러 이 아들의 체온이 되듯
뜨거운 피 통하는 붉은 마음이 되듯
우리의 고운 말
사슬에서 풀어 내야 해요
<아 름 다 운>
이거 안 됩니다
네 소리가 담장 쌓고 앵토라져
서로 눈을 흘기며 따로따로가 아닙니까
이건 자주도 독립도 아닙니다
이건 분렬입니다
사분오열입니다
<ㅏㄹㅡㅁㄷㅏㅜㄴ>
이렇게 하나가 되어야 해요
아버지
전 오늘 하루 종일
풀어쓰기를 익혔읍니다
이건 그냥 화풀이가 아닙니다
생각하면 화가 안 나는 건 아니지만
오늘 일천이백 명이 감옥에서 풀려 나왔는데
그 가운데 양심수는 하나도 없읍니다
담장을 헐어 버리고 모두들 이웃사촌이 돼야 해요
그래야 아름답지요
잠결에 들려 오는 우리 손주놈 어지나의 노래는
마디마디 끊기지 않아서 좋아요
아름다와요 그 아름다움
넷으로 찢어 발개선 안 돼요
찢어 발기면 노래가 죽어요
죽은 노래
흐르듯 펄덕펄덕 살려 내야 해요

이 아들도 세 번 징역을 살면서
더 쉽게 더 쉽게
물 흐르듯 바람 흐르듯 봄바람에
살구꽃 향기 익어가듯
정성다해 마련한 풀어쓰기 시안
시간 흐르는 줄도 모르고 익힙니다
<하룬데>라고 써 놓고 보니
이거 어디 되겠읍니까
마땅히 <ㅎㅏㄹㅜㄴㄷㅔ>가 되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