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제시한 민주구국선언

당신께!

 

어제 오후에 운동을 하고 들어오는데 내 방 위 지붕에 까치 한 마리가 앉아 “깍” “깍” 울더군요. 오늘 무슨 좋은 소식이 있을까 싶었는데, 저녁때 당신의 편지 288~297신이 뭉텅이로 들어왔군요. 호근의 편지도. 열흘 편지가 한꺼번에 들어왔다는 거야 그리 반가운 일일 수 없지만, 내용에 반가운 일들이 있어서 기뻤군요. 유가협에 모인 뜨거운 마음들. 또 시춘이 어깨 아픈 게 그렇게 금방 나았다니, 그것도 좋은 일. 어깨가 나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아픔의 근원을 치료하게 되었다는 게 더 중요한 거죠. 대장이 나빠도 여간 나쁜 게 아니던데. 사실 몸의 어떤 부분이 아프다는 건 이거 참 고마운 일이거든요. 그건 어느 내장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리는 신호이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원인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그 아픔만 없애려고 하거든요. 때로는 진정제까지 써가면서. 진정제라는 것은 병과 싸우는 몸의 기운을 죽이는 일인데.

76년의 상황도 그와 같았어요. 우리는 사실 그 시대의 여러 가지 아픔의 근원이 여기 있다, 그 근원을 치료하라는 것이었죠. 사회의 병폐를 이겨 낼 수 있는 속 힘은 양심인데, 그걸 일깨우려고 했죠. 그런데 그걸 긴급조치 9호로 봉쇄하려고 했으니. 마구 억지 우격다짐이었다는 것은 재판 과정에서 잘 드러나지요.

선언문의 내용을 제대로 아는 것은 나니까 나에게 그 문맥을 설명할 시간을 5분만 달라고 했는데,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를 맨 나중에 신문했거든요. 그런데 신문한다는 게 엉터리였어요.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선언문의 내용에 있을 텐데, 선언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고 신문이 끝났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외쳤지요. “그러면 우리는 무죄입니다. 내가 함 선생님을 만나고, 윤보선 전 대통령을 만나고, 또 누구누구를 만난 것이 죄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죄가 있다면 선언문의 내용에 있을 텐데, 선언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고 무엇을 근거로 우리에게 벌을 줄 겁니까?” 이에 대해서 재판장은 “그것은 피고인들에게 유리한 것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까지 말했던 것이 기억나는군요.

검찰은 우리의 선언문을 그대로 발표하지도 않고 우리의 선언문이 전 국민의 규탄을 받고 있다고 했어요. 저희가 멋대로 작문한 것이야 발표했지요. 그걸 보고는 나쁘다고 할 사람들이 없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내가 주장했지요. “전문을 그대로 발표하라. 그러면 정부가 우리에게 벌을 주기 전에 국민이 규탄할 게 아니냐? 그걸 못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묵묵부답이었죠. 그냥 억지로 뒤집어씌우자는 속셈이었죠.

전직 대통령이 피고석에 앉아 있는 이 재판, 그리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이 재판에 이런 억지를 부린다면 다른 재판이야 말해서 뭣하랴는 생각에 씁쓸하기만 했었죠. 우리가 요청한 증인·증거가 전부 기각되는 것을 보면서 사법부도 똑 같다는 걸 알았죠. 행정부의 시녀로 전락한 사법부를 우리가 직접 몸으로 부딪쳐 확인한 셈이었죠. 그것은 공소장에 있듯이 허위 사실이 아니고 명명백백한 사실이었어요.

1992. 4. 2.

 

 자신이 성명서를
기초한 주범임에도 불구하고 검사가 성명서 내용에 관하여 아무 질문도 안 하고
, 신청한 증인, 증거가 모두 기각당한 것은 사법부가 행정부의 시녀임을 드러낸 것이었다는 기억을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