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의 문화를 청산하고 돼의 새 문화를 창조하는 새해

나의 봄길님께

 

1995년까지 3년밖에 남지 않은 1992년 원숭이해 첫 새벽 동이 틀 무렵, 나의 귀엔 증조모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나를 끔찍이도 사랑해 주시던 어른이셨죠. 아! 그 목소리. 만고의 어둠을 뚫고 날아와 벼락 치는 새파란 번개라고나 할까? 아니면 부벽루에서 굽어보던 신록의 환히 밝아오는 빛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로 엄마 품에 안겨 와서 웃어제끼던 난지 반년밖에 안 된 바우의 목련꽃 웃음소리라고나 할까?

 

“될 일도 안 된다 안 된다 하면 안 되는 거고,

  안 될 일도 된다 된다 하면 되는 거니라.”

 

입을 우물우물하며 웅얼거리듯 하시던 그 말씀이 내게는 천지개벽하는 소리였다오.

이걸 먹어도 돼? 안 돼. 개천에 미역 감으러 가도 돼? 안 돼. 산으로 나물 캐러 가도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웃어도 안 돼. 울어도 안 돼. 노래를 불러도, 춤을 추어도 안 돼. 사랑해선 더욱 안 돼. 산등성이에 올라 푸른 하늘을 쳐다보고 시 한 수 읊조려도 안 돼. 큰 숨 들여 마시다니, 그건 역적질이야. 날고 기다니, 그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 우리는 안 돼에 익숙해져 버렸어.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었던 거야. 사람 가운데서도 해 뜨는 쪽으로 오다 오다 끝 간 데까지 오고야 만 사람들의 피가 우리의 몸속을 뜨겁게 돌고 있는 사람들인 거야. 드디어 우리는 안 돼의 사슬을 끊어 버렸군요.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던 일이 이제 되게 된 거야. 그것만은 되게 된 거야. 안 된다며 기세등등하던 사람들이 그것만은 된다고 열을 내고 있지 않어?

글쎄 그것만 되면 다 되는 건데, 안 될 일이 없는 건데, 그것만은 된다는 거야. 평양에 가도 된대. 평양에 가서 친지들을 만나도 된대. 옥류관에 가서 평양냉면을 사서 먹어도 된대. 목이 메어 데미사니 소리밖에 안 나오는 평양 시민들과 얼싸안고 춤을 추어도 된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이 터지게 불러도 된대. 울어도 되고, 웃어도 된대. 사랑해도 된대. 북쪽 총각과 남쪽 처녀가 사랑해도 된대. 남쪽 총각과 북쪽 처녀가 한 살림을 차려도 된대. 북녘에 가서 죽어 묻혀도 된대. 인제 서로 미워하지 않아도 된대. 괴뢰니, 주구니 하고 서로 욕지거리를 하지 않아도 된대. 이제 서로 믿어도 된대. 서로 서로를 제 몸처럼 사랑해도 된대.

드디어 우리는 하나가 되게 된 거야. 죽어 지내던 우리가 한 겨레로 다시 살아나는 거야. 부활하는 거야. 마른 잎만 다시 살아난 줄 알아? 잘 생기고 못생긴 크고 작은 돌이란 돌들도 다 다시 살아나 살맛 나는 세상이 되었다고 수선을 떨고 있지 않아? 샘물은 졸졸 새 노래를 지어 부르고, 태백산 줄기 그 굵은 뼈마디들 우두둑 소리 내며 우뚝 일어서 싱긋이 웃고 있지 않어? 우리의 하늘도 그 넓은 가슴을 열고 푸른 마음 자랑스럽고, 우리의 바다도 그 깊은 마음 맑게 출렁이지 않아?

이제 우리는 늠름하게 당당하게 커지는 거야. 이효재도, 려연구도, 이우정도, 박순경, 수경이처럼, 승희처럼 예뻐지고 젊어지는 거야.

안 돼에 젖어 있는 우리의 살가죽을 벗겨내고 새 몸을 입어야 해. 더러워진 피를 다 씻어내고 백두산 천지의 맑은 물로 갈아 넣어야 해. 모든 걸 새로 시작하는 거야. 안 돼의 문화를 청산하고 돼 돼 돼의 새 문화를 창조해 내는 거야.

모든 일을 된다 된다 하며 새 역사를 꾸려나가는 거지. 1995년까지 기다릴 거 없지. 당장 시작해야지.

천지가 개벽하는 1992년 새해 벽두에 몽상가 문익환의 새해 꿈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난다.

1992.01.03

 

 1992년 새해를 맞이하여
증조모님의 가르침을 회상하며 그동안 안 돼라고 했던 것들이
로 바뀌는 세상을 내다보는 꿈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