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이 존대받는 세상

당신께

 

안양도 아닌데 전주가 이웃 동네인 양 왔다 가는 당신, 불볕더위에 그러지 않아도 잘 흘리는 땀 흘리면서도 여름 지나는 줄 모르게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이군요. 누가 젊다고 하지 않을까 봐서. 물론 당신만이 아니지요.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동지들도 이 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여름인 줄도 모르고 지냈을 테지요. 전주 교도소 병사의 불볕더위도 이제 그 기세가 완전히 껶였군요. “지글지글 지지고 볶아라. 그래야 곡식이 익을 테지” 하며 더위를 반가워하며(?) 여름을 났었는데, 이번 더위가 농사에 도움보다는 손해가 컸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는 좀 억울한 심정이군요.

저녁을 먹고 누워 좀 쉬다가 잠에 떨어졌던가 꿈에 아버님을 만나 뵈었군요. 아버님이 북간도 독립군 지휘관들 이름을 들려주시기에 붓을 찾아 적으려고 벌떡 일어났더니 꿈이었군요. 머리를 쥐어뜯어도, 가슴을 두들겨도, 시원치 않고 풀리지 않는 심정이군요.

어머님 잠을 못 주무시는 게 지금 상태로서 심각한 문제인데, 옥파를 두 쪽으로 잘라서 머리맡에 놓고 주무시도록 해 드리시오. 옥파를 음식에 많이 쓰는 것이 제일 좋지만, 어머님이 잡수시기 어려우시면, 옥파 냄새를 코로 맡는 것만으로도 주무시는 데 많이 도움이 될 테니까요.

내일 교회에서 만납시다. 

 

당신의 사랑

 

윤정희 어린이

 

네 편지는 나를 정말 기쁘게 해주었구나. 세상에 이렇게도 훌륭한 가정이 있나 싶구나. 분단 동이 아버지가 무얼 하시는지는 쓰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농사를 짓는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해 본다. 오빠는 공고에 다니고, 언니는 농촌일 한다고 농고에 다니고, 너도 농고에 간다고!

농촌으로 시집갈 처녀들이 없어서 농촌에는 마흔이 다 된 총각들이 수두룩한데, 딸들을 농고에 보내는 아버지가 있다니, 내 귀가 번쩍할밖에. 앞으로 3, 40년 하면 석유, 석탄이 다 없어질 텐데, 그리되면 세상의 공장들은 하나씩 둘씩 문 닫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다시 모두 농사꾼이 될 수밖에 없단다. 너희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그런 세상이 될 거다. 너희 아빠, 엄마, 언니, 그리고 너는 정말 앞으로 올 세상을 미리 내다본 셈이구나. 정말 훌륭하다. 지금은 농촌이 천대를 받지만 오래지 않아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존대받는 세상이 올 거다. 아니, 그런 세상이 되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지.

네 아빠도 화를 내셨고 너도 걱정한 대로, 내 방이 몹시 더웠지만, 어제부터 더위가 기세가 꺾여서 괜찮구나. 내가 보고 싶으면 눈을 꼭 감아 보아라. 보일 테니까. 나는 훌륭한 너희 식구들이 보고 싶구나. 사진 한 장 보내 줄래?

 

백두 오르기 46년 8월 11일  문익환 씀

 

 

아내에게는 잠을 못 주무시는 어머니를 위해 옥파를 사용하라는 얘기를, 윤정희 어린이에게는 앞으로 농촌이 존대받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얘기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