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보복은 민주뿐, 광주의 보상은 자주와 통일뿐

봄길님

 

앞으로 두 주일 동안은 편지 쓰는 것도, 바둑 두는 것도 일단 중단하고 상고 이유서 쓰는데 전력을 다해야겠군요. 상고 이유서라고는 하지만 사실 내가 쓰려는 것은 정확한 역사를 남기는 일이 될 거예요. 오늘 한승헌 변호사님이 오셔서 요새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할 수 있어서 속이 좀 후련하다고 할는지. 신 장로님, 한 목사님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구요. 주룩주룩 밤빗소리를 들어면서도 별로 마음이 울적해지지 않으니 웬일일까요? 정말 나는 징역살이를 즐기는 걸까요? 이래서는 안 되지 싶으면서도. 나의 하루하루는 무언가 뜻있는 일로 차곡차곡 채워지기 때문에 그런 걸까요? 

 

당신의 늦봄

 

조아라 장로님

 

얼마나 보고 싶었던 애인인데, 안아 보지도 못하고 접견실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으니, 그 서운한 심정 무어라고 다 할 말이 없습니다. 장로님의 심정은 더 서운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장로님을 광주의 어머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장로님 희수 기념 글 모음을 읽고는 장로님은 광주의 딸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청상 홀어미로서 외로움 같은 거 느낄 겨를도 없이 어머니 광주의 수발을 드느라고 정신없이 사셨군요. 정말 정말 효녀 상을 타셔야 하겠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사시다 보니 이젠 늙은 딸이 되셨군요. 어머니 광주의 사랑을 온몸에 받은 늙은 딸이시군요.

80년 5월,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군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55일간 조사를 받을 때였습니다. 저의 조사가 조 장로님의 증언으로 끝났다는 걸 모르시죠? 제가 김대중 씨의 사주를 받아 광주에 가서 내란을 음모하고 선동했는가 하는 사실을 광주로 조회를 했는데,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 조 장로님의 진술로 밝혀졌습니다.

저는 지금도 광주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지난번 청문회를 TV로 보고 들으면서 느낀 분노나 아픔이 광주에서 직접 겪으셨던 여러분의 분노나 아픔의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나 되겠습니까? 저는 법정에서 김 선생 옆에 앉아 재판을 받으면서 사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조금 느낌으로 알기는 했습니다. 사형 옆에서 20년 징역은 있으나 마나 한 것으로 생각되더군요.

김 선생의 사형이 걸린 재판도, 그게 아무리 심각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건 장난이었지요. 머리 빡이 터지고, 젖이 잘려 나가고, 조금 전까지 살아서 펄펄 뛰던 사람들 몸에서 흐르는 피가 도랑을 이루어 흐르고… 그 현장에 비긴다면 한낱 우스꽝스러운 놀이였지요.

그러나 장로님, 역사의 템포는 아주 빨라졌습니다. 동학난이 갑오 농민 혁명으로 명예 회복되기까지 100년이 걸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광주 빨갱이 폭도들의 난동이 민주화 운동으로 명예 회복되기까지는 채 10년도 걸리지 않았거든요. 정의의 힘이, 민중의 힘이 한 세기 동안에 열 배나 커진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으로 광주는 승리했습니다. 장로님의 어머니 광주는 면류관을 쓰신 겁니다. 정의와 민주의 면류관을 쓰신 광주는 조 장로님의 어머니만이 아닙니다. 우리 온 겨레의 어머니입니다.

광주는 이제 위대한 승리자로서 정의와 민주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흩어진 민주 세력들을 하나로 모으는 민주의 얼로 되살아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광주의 보복은 민주뿐입니다. 광주가 받아야 할 보상은 자주요, 통일뿐입니다. 장로님, 홍(남순) 변호사님과 같이 유가족들, 부상자들, 광주의 아들딸들을 거느리고 민주의 깃발을 드높여 주세요. 전 국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애국 열사들이 울부짖고 있습니다. 공주의 오월 민주 열사들이 부르고 있습니다. 

한국 민주의 메카 광주에 영광 있기를 빌면서.

 

문익환 올림

 

아내에게는 상고 이유서에 집중하겠다는 얘기를, 광주의 어머니로 불리는 조아라 장로에게는 민주의 깃발을 높이 올려달라는 당부와 함께 격려의 얘기를 보냄